미르다의 집에는 이미 위병들이 손이 닿았을지도 모른다. 그리 판단하고, 곧장 왕도 레그넘을 떠났다. 다행히 문앞에는 아직 위병이 없어서, 싱거우리만큼 간단히 탈출할 수 있었다.
루카와 이리야는 가도로 나아가, 레그넘 서부에 위치한 마을 나오스로 향했다.
날자로 치면 3일 정도의 여정이다. 도중 레그넘에 남겨둔 부모님을 생각하자 루카는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자기 자식이 이능자임을 알게 되면 부모님은 얼마나 슬퍼하실까. 어쩌면 아버님의 장사에도 뭔가 악영향이 갈지도 모른다. 루카가 하루만 늦게 돌아와도 걱정한 나머지 앓아 누운적이 있는 어머니는 이 최악의 사태를 어떻게 참고 넘기실지…….
부모님을 슬프게 했다.
기대를 배신하고 말았다. 하지만 비관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리아와 함께하는 여행은, 루카에게 있어 다소나마 가슴 들뜨는 경험이었다.
이리아는 꿈속의 이난나와는 전혀 닮지 않았으나(오히려 외모도 성격도 정반대로 보일 정도다) 그래도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아이였다.
15세.
루카와 같은 나이다.
학교에서 책상을 나란히 하는 여자애들과 달리 시원시원하고 말나누기가 쉬웠다.
루카는 여자아이를 앞에 두면 말수가 줄어든다. 뒤에서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아서. 애초에 여자이들과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도 전혀 몰랐다. 풋볼 이야기에 기뻐할 것 같지도 않았고,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도 조금 멍청했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 나를 기쁘게 해줄 거야? 그런 식으로 채점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아무래도 긴장하고 만다.
하지만 이리아와 하는 대화는 실로 즐거웠다.
할 이야기들이 산더미처럼 있었다.
"저기, 아니미 양. 레그넘엔 뭐하러 온 거야?" "그거야 당연하지. 이능자를 찾으러. 소문을 들은 게 있거든."
"그거 나야?" "너 소문이 날 만한 이능자였어?"
"그, 그건……. 아닌데……."
"그렇겠지. 능력 각성도 얼마전이었고. 레그넘에 인간을 초월한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싸우면 결코 져본적이 없다고. 맨손으로 무장한 양아치 서름명을 가볍~게 해치웠다더라."
"무… 무섭네…. 딱히 관여하고 싶은 부류는 아니야…."
"하하핫. 뭐, 너라면 그렇겠지. 정말 무해해 보이는 걸!"
그런 시시한 대화가 전부 신선하고 즐겁다.
(왠지 꿈만 같아.)
루카는 생각했다.
(전세의 인연으로 이렇게 귀여운 여자애랑 알게 되다니…. 그리고 다른 동료가 있을지도 모르다니….)
전세.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생각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동경하던 아스라의 힘이 제 안에 잠들어 있다.
그 힘을 제 것 삼아 휘두를 수 있다.
루카는 가슴을 펴고 걸었다. 공부벌레라는 비웃음을 사며, 핫도그 심부름이나 해야했던 예전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전투경험을 쌓자 전생의 힘은 찬찬히 눈을 떴다. 여행 도중, 굳이 가도 외곽의 숲으로 들어갔다. 이리아와 함께 작은 맹수들을 사냥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루카는 보다 많은 천수를 습득했다.
먼거리의 적을 향해 충격파를 쏘는 <마신검>.
정신을 집중하여 공격력을 올리는 <강초래(剛招來).
회전하여 공중의 적을 베는 <열공참(裂空斬>.
전부 꿈속에서 아수라가 썼던 기술이었다. 언젠가는 라티오의 맹장 휴프노스를 일격에 쓰러트렸던 오의, <마왕염격파>도 제것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만, 강력한 천술만 되풀이한다고 이기는 것은 아니다. 전투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위치 선정. 이리아와의 연대. 기력을 항상 높게 유지하는 요령.
배울 것은 많았다. 짐슬들의 이빨은 날카로웠으며, 기습이나 수로 밀고 들어오는 적들에겐 특히 애를 먹었다. 위험을 동반한 수련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강해지는 것이 즐거워서, 부상 따윈 괴롭지도 않았다.
상처를 입으면 이리아가 이난나가 자랑했던 천술 <퍼스트 에이드>로 치료해줬다. 다만 이리아는 <트윈 바렛>이나 <아쿠아 바렛>등의 공격계 천술을 즐겨써서, 그것을 우선하려 들어서 '그 정도 상처 침 바르면 낫는다고! 퉷퉷'하면서 회복하는 걸 떫어할 때도 많았지만.
코다의 위장에는 조금 놀랐다.
가도를 걷는 상단으로부터 무기와 함께 구매한 식재료는 눈깜짝할 사이에 바닥을 보였다. 별수 없어서, 싸워 쓰러트린 맹수들의 고기를 대신 먹어야했다.
어쨌든 먹는다.
그 작은 몸에 들어가는지 기이할 정도로 잘 먹었다. 뭐든 잘 먹었다.
인간용 음식은 두말할 것도 없고, 벌레나 꽃까지 먹어치운다. 저력이 보이지 않았다.
"최근 밥맛이 떨어져서, 코다는 맛있는 것을 찾아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 태평하게 걷고 있던 걸 이리아가 주웠다. 아니 억지로 뒤를 따라왔다고 했다.
더불어 어떻게 인간의 말을 할수있냐는 물음에 코다는 이와 같이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입을 먹는 데 말고도 쓰는 것뿐이라고? 그런데 배가 고프다!"
3일째.
오나스까지 이제 곧인 지점에서, 루카와 이리아는 여섯명의 노인들과 엇갈렸다. 나란히 왕도를 향한다고 했다.
"큰일이네요. 왕도까진 아직 먼데."
이리아가 걱정스럽게 묻자, 노인은 '아냐'하며 웃었다.
"아루카에 입신할 수 있다면 이런 고생 별거 아니야."
아루카.
그 이름에 이리아의 표정이 쓱하고 흐려졌다.
다급히 루카가 대화를 이어받았다.
"아루카에…… 입신하시는 건가요?"
"그래. 왕도 너머에 아루카의 본부 <여명의 탑>으로 가던 참이었어. 아루카의 신자가 되면 앞으로 만들어질 낙원에 갈 수 있어. 신자만 되면 교주 마티어스님께선 이능자든 죄인이든 지켜주신다는군."
"이능자라니…."
루카는 전부터 의문스럽게 여겼던 질문을 던졌다.
"이능자 포획 적응법이 있지 않나요? 아루카는 어떻게 이능자를 지키는 건가요?"
"왕도의 이능자 사냥도 아루카한테는 손대지 않나봐. 이능자는 구원을 찾아 입신을 서두른다는 군. 대지는 황폐해지기만 하고 전쟁도 끝이 없는 이런 세계는 이제 지긋지긋해. 자아, 왕도까지 조금만 더 힘내볼까."
"아, 조심하세요……"
멀어져가는 노인들의 등을, 루카와 이리아는 나란히 배웅했다.
입을 다문 이리아가 신경 쓰여서, 루카는 그 옆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리아는 험악한 표정으로 지평선 너머를 쏘아보고 있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모양새다.
아루카가 습격했던 고향을 떠올리는 걸까.
"저기, 아니미 양? 괜찮아?"
루카는 그렇게 이리아에게 염려의 말을 던졌다.
그러자 이리아는 좀 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하고 신음했다.
뭐가 뭔지 몰라서, 루카는 물었다.
"왜 그래, 아니미 양?"
"그 호칭!"
이리아는 쭈욱 날카롭게 루카의 코끝을 향해 검지를 들이밀었다.
"<이리아>면 돼. 잘난 척 처음 만난 녀석이 이름으로 부르면 열받고 그렇긴 한데, 너는 예의도 바르고, 아무리 봐도 나쁜 녀석이 아니잖아? 앞으로도 오랫동안 알고 지낼 것 같으니까."
"그, 그럼… 이리아…………………… 양…" "뭘 그렇게 긴장하는 거야! 여행하면서 줄곧 그렇게 부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