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을 덧댄 의자에 꺼질듯 몸을 파묻은 나루미 쇼헤이는 실로 눈이 부신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 등뒤, 천장에 닿을듯 높은 나무테의 내리닫이 창으로 눈부신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삼층에 위치한지라, 빛을 발하는 유리창 아래에는 카루코가와 상점가가 내려다보였다.
‘산수은좌(山水銀座)’라 불릴만큼, 포장되지 않은 노면도로와 확연히 구분된 벽돌도보는 작가 운도 쥬조가 그린 미래도시처럼 아름답다. 실제로도 근대화의 증거인 전신주가 점점히 늘어서 있다. 프루츠 팔러(Fruits Parlor)나 양식당 등의 외래 점포 간판도 많다. 도쿄 야라이구 츠쿠도쵸, 메이지 후기부터 제도의 번화가로서 번영해온 땅이다. 그러한 츠쿠도쵸 최대이며 최신 빌딩인 “은앵각(銀櫻閣)”의 최상층, 3층에 나루미 쇼헤이는 탐정사무소의 경영과 주거를 겸하고 있었다.
「아아…」
보통때부터 졸린 기색이 가실길이 없는 눈을 보다 더 가늘게하며, 나루미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런 아침부터…」
프랑스제 까르티에 손목시계를 비롯해서 나루미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어느것 하나 빠짐없는 명품, 고급품이었다. 이탈리아제 구두, 영국 캬멜의 신사복. 상의는 옆에 있는 칸막이에 걸쳐져 있어서 지금은 와이셔츠와 조끼차림이다. 셔츠는 깃을 높이 세운 것으로 스트라이프의 두꺼운 넥타이를 매고 있다.
「일하지도 않고,」
장신에 마른 몸. 파마를 한듯, 귀를 뒤덮는 구불한 장발. 입가에는 언제나 얄꿎은 미소를 띄우고 있다.
「느긋히 일광욕이라니 속편하겠군.」
나루미는 소장용 책상 옆, 타이프 라이더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검은 고양이, 고우토를 쏘아보았다.
「고양이는 좋겠어. 언제나 빈둥댈 수 있어서.」
『네녀석보다 빈둥대는 녀석은 찾아보기 힘들텐데.』
「나는 철야 조사로 밤을 샜는데….」
『그런것 치고는 보고서도 안쓰여져있는데다, 안색은 여실한 숙취상태다만.』
「아아….」
나루미는 굽은 머리칼을 손끝으로 빗었다.
「어째서 여자는 그저 헤롱거리고 있을뿐인 고양이를 상냥하게 어루만져 주는거지? 내 쪽이 고양이보다 5백배정도는 더 헤롱헤롱거릴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상냥한 대접을 받은 기억은 없다구.」
『바본가.』
검은 고양이 고우토가 울었다. 의자에 나른히 앉은 나루미는 작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말같은걸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해는 할 수 없다. 그저 울음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 검은 고양이의 목소리는 데빌 서머너만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걸 믿으라고 해도….」
나루미는 입가에 띄운 얄꿎은 미소를 짙게 했다.
악마나 요괴라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것도 상관없다, 라고하기보다는 야타가라스의 일원으로서 상식이기도하고, 실제로 몇 번이나 체험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고양이다. 단순한 검은 고양이다. 꼬리가 두 개 달린 네코마타도 아니고, 투명해질 수 있는 뵤쇼[猫梢]도 아니다. 그저 사무실에서 일광욕을 하며 식량을 축낼뿐인 평범한 고양이다.
「흐응, 그건 그렇고… 훌륭한 털인걸….」
말하는 고양이? 그 말은 데빌 서머너에게만 들린다? 터무니 없는 소리다.
동서남북, 중국대륙에 걸쳐 무수한 마작 승부에서 상대의 뒤와 뒤와 곁을 읽어온 이 나,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뭍 여성들이 색향을 뿌려오는 명탐정, 제천대성도 당해내지 못할 색남. 나루미 탐정 사무소의 대선생인 이 몸이 그런 사기에 걸릴까보냐!
『나루미,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얼굴이군.』
「정말 좋은 결이야. 털이 없어도 예쁠 것 같아.」
『당연하지.』
고우토가 울었다.
「훌륭해….」
『고양이에게 추파 던지지마, 얼간이.』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겠어. 사미센 가게에 팔면….」
『어이.』
나른히 이완되어있던 나루미의 팔이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검은 고양이를 옴싹달싹도 못하게 붙잡는다.
『이, 이럴수가. 이 나를 붙잡아? 지렁이도 꿈틀거리는 재주가 있다더니….』
「저기, 단순한 고양이가 아니라면 거죽을 벗겨도 괜찮겠지?」
『고우토 동자에게 그 무슨 흉포한 생각을.』
「돈이 필요해, 고우토. 그 가죽으로 협력 부탁해. 제도 수호에 쓰일 활동자금이 아무래도 더 필요해. 빈둥빈둥거릴바엔 조금은 도움이 될듯한… 아, 아야야야야야!!」
손톱으로 손등을 할퀐다.
「너어!!」
검은 고양이가 토카이도혼센의 ‘츠바메(燕)’처럼 비약한다. 도쿄와 코베를 8시간 55분으로 잇는, 과거와 비교해 2시간 40분의 시간을 단축시켰다고 일컬어지는 꿈의 초특급이다.
「츠바메, 가 아니라 고양이, 어디냐!」
소장용의 책상에서 몸을 내밀며, 나루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은 흑갈색의 천장, 리그노이드를 칠한 벽, 널찍한 나무 바닥의 중앙에는 손님용, 마작 테이블로도 사용되는 탁자와 등받이가 높은 사각의자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다. 측면벽에는 책장 두 개가 나란히, 책장 위에 올려진 낡은 짐짝, 책장과 나란히 놓여진 사이드 보드에는 최신 축음기가 보인다.
「젠장.」
반대편 벽에는 소파가 있고, 그 옆에는 캬멜제 양복 상의가 걸려 있는 접이식 칸막이, 칸막이는 끝에있는 작은 세면대를 가리고 있다.
「고양이, 고우토!」
「고우토가 무슨?」
소장용의 테이블 옆에,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든 검은 망토가 서있었다.
「오오, 라이도우. 봐, 봐줘. 이 손, 고우토가 할퀐어.」
실내인데도 여전히 쓰고 있던 학생모가 작게 갸우뚱한다.
「고우토의 손톱에 당했다면 손목정도는 날아갔을텐데―」
「어이, 라이도우. 시시껄렁한 협박엔 안 넘어가. 흥, 고우토를 잡았더니 느닷없이 할퀴었…」
「고우토를 잡아?」
다시 모자가 갸우뚱한다.
「뭐야 그 눈. 희극이라도 보는 듯한 그 눈.」
「고우토가 잡힐리 없습니다.」
「라이도우, 알겠나. 라이도우, 잘 들어.」
「아침 사무실 청소는 끝냈으니,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들으라고 하잖아!」
한숨을 쉬며 나루미는 세면대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틀어 상처입은 손을 씻고, 이어 컵에 물을 따른뒤에 갖고온다.
「탐정 견습으로서 매일 청소하느라 수고가 많아. 자, 이것은 그에 대한 답례다. 마셔.」
소장용 책상에 젖은 컵을 내려놓는다.
「나는 참 상냥하단 말야.」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루미는 웃었다.
「부하직원의 노고를 알아주는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충분히 서비스도 하고, 사나이답고. 하핫, 마셔 라이도우. 사양하지마. 은앵각의 물은 맛있으니까.」
「방에서 마시고 있습니다. 구리맛이 나는 물.」
「라이도우, 어이, 라이도우. 뭐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고 다 되는게 아니야. 확실히 링컨 대통령은 솔직하게 고백해서 용서를 받았지만. 벚나무를 부러트린 주제에, 하지만.」
「워싱턴 대통령이 아닌지.」
「이야기에 찬물을 끼얹지 말고 들어! 알겠나! 이런 경우엔 컵의 물을 단숨에 마신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이는거야. 그런 세상의 일반상식을 가르치는 것도 데빌 서머너의 감사역으로의 내 역할이다. 알겠으면 여러 가지로 감사해. 너같은 애송이가 집세가 터무니없는 이 은앵각에서 나랑 동급의 방을 쓸수 있었던것도 내 덕분이니까.」
「야타가라스의 덕분―」
「내 덕이지! 도대체 어째서 네가 은앵각에서 나랑 같은 급의 방을 받는거야? 학생에, 견습이니까 사무소에서 먹고 자는걸로 충분하지. 그게 아니라면 내 방 현관에 자리피고 누워도 되고! 젊으니 소환사 수행을 위해서라도 밖에서 자야지. 그러니까 네 방은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집세를 받는 편이 낫잖아. 몇 번이나 그렇게할까 생각했지만 나는―」
「슬슬 학교에…」
「내 이야기를 착실히 들어!」
한숨을 쉬고서, 나루미는 괴롭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니, 라이도우. 내 옆에 서지마. 저쪽으로 가. 소장님의 책상, 바로 앞에 서.」
그렇지 않으면 창을 등지고 있는 의미가 없잖아. 광원을 배경으로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고, 대화의 주도권을 쥔다. 그를 위한 테이블 배치다. 직사광선이 뜨겁고 눈부셔도 참고 있는데, 바로 옆에 서면 완전히 의미가 없다.
나루미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어이, 라이도우. 저쪽으로 가래도.」
「여기서도 충분합니다.」
「내가 충분하지 않아, 내가!」
「방해가 된다면, 이제 학교에 가도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말을 들으라고 하잖아!!」
「조금 전부터 무슨 이야기인지, 나루미씨.」
「선생이라고 부르라고 언제나 이야기 하고 있을텐데.」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나루미는 고개를 숙여 책상 밑에서 두꺼운 전단지 뭉치를 꺼냈다.
「이거다, 이야기할 건 이거.」
까르티에제 손목시계가 빛을 발했다. 나루미는 전단지 한 장을 학사모 앞에 처억하고 들어보인다.
「만능조사, 신속대응, 어떤 의뢰든 받습니다. 의뢰인과의 신뢰를 중시합니다/나루미탐정사무소」
전단지의 문장을 밀어내는것처럼, 새하얀 이를 빛내는 미남자의 이미지가 웃고 있다. 삐친머리의 나루미와 학생모의 라이도우가 눈과 눈을 맞추고, 얼마간 말없이 바라본다.
「좋아. 이해가 된 모양이군.」
고개를 끄덕이며 나루미가 말했다.
「무엇을?」
학생모가 갸우뚱한다.
「정말로 너는 감이 안 좋군, 라이도우. 알겠나, 이제부터는 정보전의 시대다. 즉 광고다. 돈은 가만히 입다물고 있는다고해서 들어오지 않아. 사건이 더 필요해. 가능하면 의뢰인은 여성이 좋겠군. 그래도 아줌마는 안돼.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좋아. 또한 소장인 내가 굳이 나설필요도 없이 너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 바람직하겠지. 그런 의뢰를 이 광고로 받아오는거야.」
「일은 받아오는 것은 나고, 일하는 것도 난데, 그럼 나루미씨는 무엇을?」
「선생이라고 불러.」
창밖에서 삐약삐약하고 웃음소리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흠, 알고는 있나, 라이도우. 우리들의 진짜 책무인 제도수호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돈은 얼마가 있든 부족해. 정말로, 부족해. 카페에 바에 댄스홀, 무희인 마요짱에 여급의 토시에짱, 아, 정말! 제도 수호는 큰일이다. 돈에 날개가 돋친듯이 사라져버려.」
나루미는 하아하아하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책상위에 있던 컵에 담겨진 물을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돈이라면 얼마전에, 추가 월사금을 야타가라스에게 신청했을텐데.」
「라이도우, 알겠나, 라이도우. 잘 들어. 상사에게, 연장자에게 어떤 말을 들었을 경우에는 우선 ‘네’하고 대답하는 것이 예의다. 이것이 인간의 기본이야. 알겠나. 알았으면 대답 해, 지금 당장.」
「네――.」
「좋아, 그리고 또 하나. 예산이라는 것은 반드시 신청한대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야. 너는 아직 어린애니까 모르겠지만 이것은 관공서든 어디든,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인 사실이다. 나라의 기준, 성인세계의 지식과 용기란 말이야. 추가 월사금은 내가 추진하고 있는 극비임무를 위해 주가라던가 선물거래라던가, 바(Bar)나 댄스홀에서 공작이라던가, 그래 이후의 제도 수호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비품도 구입했지. 완전 소화해버렸어.」
「그 구두, 새것이로군요.」
마주하고 있던 학생모의 챙끝이 아래로 향한다.
「훌륭하지? 내 발을 나무로 본뜨는데서부터 시작한 특수주문품이니까. 잘 봐, 이 양복역시 막 새로 만든…,」
백석같은 얼굴이 빤히 바라보자, 나루미는 짐짓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그, 그런 연유로, 광고작전이다. 네가 실행책임자니까 어서 출동해.」
「학교를, 유미츠키 고등사범학교에 가지 않으면…」
「졸업 축하해.」
「아직 졸업하지 않았,」
라이도우의 말을 가로막으며 나루미가 입을 열었다.
「알겠나, 라이도우. 이것은 실전 훈련이기도하다. 너는 탐정 견습이며, 여기의 직원이다. 나처럼 훌륭한 명탐정이 되고 싶은거겠지> 그렇다면 이 작전은 학교보다도 5백배 정도는 중대한 일이야.」
「실전훈련? 작전입니까?」
「광고 전단지를 붙여도 불평을 듣지 않는 장소를 간파해낸 뒤, 신속하게 붙인다. 눈에 띄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다만, 붙이고 났는데 바로 누가 때버리는 곳도 곤란해. 다소의 불평불만이 있다해도, 능숙하게 돌파해내는 것이다. 재치와 순발력이 요구되지. 어때, 할만한 임무지? 오늘 중으로 전부 붙이는거다. 모두 4백장이야.」
「이거, 그렇게나― 붙이는 겁니까.」
「자, 어깨끈. 광고지를 얹은 뒤에 어깨에 걸쳐. 그래, 그렇지. 신문배달부처럼 하면돼. 오오, 제법 어울리는걸. 신문배달소년으로 밖에 안 보여. 내일부터 신문배달부로서 일해도 되겠군, 급료는 사무실 앞으로 부쳐. 어차피 아침엔 한가하지?」
「이 종이를 붙일, 풀은?」
「영문 모를 수행에는 밝은 주제에 정말 물정 모르긴. 풀은 밀가루를 끓여서 만든다. 그 정도는 상식이잖아.」
나루미는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밀가루는 어디에? 게다가 풀을 바를 만한 붓도….」
「그 정돈 스스로 준비해. 이것저것 뭐든지 소장에게 시킬 생각하지마. 철야조사때문에 금방이라도 쓰러져 자고 싶을 정도로 지쳐있어. 자, 가. 나가. 내가 준 물을 마셨잖아. 그것은 이 일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공짜로 마실 셈이었던건가. 웃기지마, 물 역시 확실히 수도세를 내야 마실 수 있는 거라구.」
「물을 마신 것은―,」
「상사에게 무슨 말을 들었을때엔 우선 ‘네’라고 답하라고 좀 전에 가르쳤을텐데!」
*
발치에서 목소리와 모래먼지가 올라온다.
『이거원, 야타가라스도 어째서 나루미같은 남자를 감사역으로 고른건지.』
「그 감사역에게 ‘붙잡혔다’고 들었는데.」
광고지다발을 짊어진 라이도우는 나란히 걷는 고양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방심한게야. 설마 나루미같은것에게 붙잡힐줄이야.』
「사실이었던건가.」
야라이구라고해도, 전부가 산수은좌(山水銀座)인 것은 아니다. 카루코가와 상점가를 빠져나가면, 2층이상의 건물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보도역시 띄엄띄엄 놓여져 있다. 그런데도 점포나 주거지는 도로 양쪽 가까이에 붙어있다. 포화상태의 인구에 대처하기 위해 도쿄시가 현재의 35구(区)로 확장된 것은 다이쇼 7년, 2번의 대지진에 의해 사람들이 도쿄를 떠나간 것도 잠깐, 지금은 경지도 차례차례 주거지화 되어갈 정도로 제도의 주민은 늘어나고 있다.
『라이도우. 어이, 라이도우. 잠깐 멈춰봐.』
「?」
리어카를 끌고 가는 “구식 상인”이 옆을 스쳐지나간다. 천칭봉을 짊어진 상인은 상당히 줄고, 가판을 끄는 생상인이 많아졌다. 대로 앞에는 철판구이집의 포장마차가 서있고, 기모노 차림의 아이들이 모여있다.
『이마가 간지럽군. 조금 긁어다오.』
「이렇게?」
검은 외투차림의 소년이 쪼그려앉아, 검은 고양이의 미간위쪽을 손끝으로 긁었다.
「고우토, 어루만져주길 바래서 붙잡힌건가.」
『그녀석이 그런 짓을 할 녀석이라 생각하는거냐, 혹여 그렇다해도 고양이 역시 사람을 가리는게다. 돈다발외엔 쥐어본적도 없는 손이 어루만져준다고 기쁠리 없지. 으으음, 조금 더 위. 검지 손가락끝으로 문질러줘.』
「하지만, 그 어떤 악마한테도 잡힌적 없었을텐데.」
『나루미는 돈이 엮이면 비이상적인 힘을 발휘하지.』
「고우토와 돈은 무슨 상관이 있지?」
『사미센집에 파려고 했다.』
장바구니를 쥔 기모노차림의 중년여성이 몸을 숙여 고양이를 어루만지고 있는 학생복차림의 소년에게 미소를 던지며 스쳐지나간다. 양복이 널리 퍼졌다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회사에 근무하는 남성, 혹은 격식을 차릴 때의 이야기다. 일상 생활에서는 여전히 와복이 주류이며, 여자아이들에 이르면 더더욱 그러했다.
불어온 한줄기 바람에 몇 장의 꽃잎이 흩날렸다.
『뭐지?』
「모란.」
경사진 곳 옆, 비탈길 울타리 틈새에 그야말로 모란색의 그림자가 보였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것 같지만은 모란나무는 관목식물이기 때문에, 확실하다곤 할 수 없다.
『그러고보니 피안(彼岸)이 가까운걸.』
「꽃――.」
라이도우는 일어서서, 울타리로 다가갔다.
『왜? 피안엔 모란병이 먹고 싶은건가?』
「응.」
울타리 틈새로 핀 모란 꽃들을 바라본다.
갑작스러운 노성이 곁에서 들려왔다.
「네놈!!」
고릴라와 닮은 경찰관의 목소리였다.
「거기의 행동불순분자. 네놈이다, 꼼짝마!」
짙은 감색에 깃을 세운 제복 차림의 남성이 어깨를 치켜세우며 큰 걸음으로 다가온다. 빳빳히 풀을 칠한 모자에, 둥근 코 밑에 적은 콧수염, 어깨에는 샤벨을 차고 있다. 샤벨은 순시를 돌때의 표준 장비지만, 최근엔 보다 실용적인 단검을 소지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눈앞의 경찰관은 구태여 길고 가는 서양도를 소지하고 있다.
「움직이지마, 어이.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라이도우를 향해 경찰관이 침을 튄다.
「돌아보았을 뿐.」
샤벨은 눈에 띈다. 곡선형의 손잡이, 술이 달린 검신, 니켈도금의 칼집.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데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코 밑의 수염도 같은 목적을 위해 기른것이라고 사료된다. 필요이상으로 큰 목소리가, 경찰관의 그러한 성격을 증명하고 있다.
「그 종이다발은 뭐지?! 신문배달치곤 기묘한 시간인데, 설마 사회주의 운동권의 찌라시를 뿌리고 있는건 아니겠지? 근로청년이라면 소속 청년단원을 말해.」
라이도우는 고개를 돌린 자세 그대로 경찰관의 견장을 훑어보았다. 별이 없는 것을 봐서, 평순경인 모양이다.
「왜 답을 못해!!」
「학생, 청년단에는 소속되어 있지 않다.」
짧게 답한다.
「학생이라고? 이런 시간에 거리를 어슬렁대다니, 학교는 어찌됐지? 하항, 군사교련과목이 싫어서 학교를 빠진 겁쟁인가.」
수년전 워싱턴 군비축소회의에 의해 일본은 부득이하게 군비를 축소하게 되었고, 줄어든 병력을 보충하기위해 학생들을 예비 병력으로 삼기 위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군사교련 과목이 의무화 된 것이다. 군대에서 각학교로 교관을 파견해, 정기적인 ‘수업으로서’ 군사 훈련을 행한다. 그런 강제적인 군사훈련을 거부하며 반대운동을 벌이는 학생도 적지 않다.
「매국노놈. 이름은 뭐지?! 학교와 보호자에게 연락하겠다!!」
라이도우는 말없이 외투를 걷었다.
「움직이지 말란 소리 못 들었나!」
칼집을 쥐고, 칼날의 가드를 경관을 향해 내보인다.
고릴라의 얼굴에 땀이 맺히고, 안색이 싹 바뀌었다.
「이, 이럴수가, 네놈….」
『하아, 이제야 안 모양이군.』
라이도우와 경관의 발치에서, 고우토가 낮게 울었다.
『경찰이라면 칼의 가드에 새겨진 ‘야타가라스의 문장’을 보고 제도를 수호하는 자임을 알 수 있을 터.』
「네놈…, 치안유지법에 의해 체포한다!!」
『뭐, 뭐랏?!』
검은 고양이가 순간 딸꾹했다.
「그 칼은 뭐지! 무기를 망토밑에 감추고 다니다니, 수상한 놈! 움직이지마! 주재소까지 따라와. 그러니까 움직이지 말라고! 」
『움직이지 않고 어찌 따라가란 말이냐, 바보놈.』
한숨을 쉬는 고우토의 머리위로, 라이도우는 ‘저항할 맘은 없다’라는 태도를 여실히 드려내듯, 두 팔을 옆으로 벌리고 있었다.
「칼뿐만 아니라 피스톨까지…!!」
펼쳐진 외투 아래를 바라본 경찰관은 말을 잃었다.
「칠생의단의 일원인가? 마을 한가운데서 완전무장을 하다니, 누굴 암살할 생각이냐!」
『어이, 암살자가 느긋이 무장을 피로하고 다닐리 없잖아.』
고우토의 울음 소리는 경찰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
메이지 7년. 도쿄 경시서가 설치됨과 동시에 ‘나졸’은 ‘순사’로 개칭되었다. 순사가 순찰거점으로 삼는 ‘교번소’가 파출소로 바뀐 것은 메이지 14년, 마찬가지로 메이지 21년에는 ‘주재소’도 설치되었다. 파출소는 경찰이 교대제로 출근하는 곳인데 비해, 주재소는 경찰관이 상시 머물면서 근무하는 주거지 겸 일터다. 다이쇼 시대인 지금에 이르러서도 남아있는 지역 경찰의 원형은 메이지 시대에 이미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브러쉬는 여기에, 그리고 밀가루는 그 페인트통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렇게 입을 여는 초로의 경찰관과 주재소의 벽돌 외벽에는 주홍색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태양은 주택가 저쪽으로 크게 기울어, 땅거미가 자색 망토처럼 퍼져나가는 하늘에 까마귀 울음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고 저멀리 사라져간다.
강제로 연행되어 해방되었을때는 이미 저녁무렵이 되어 있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는 초로의 경찰관에게 라이도우가 학생모의 끝에 한쪽손을 얹고 깍듯이 인사했다. 그 아래에서 고우토는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오랫동안 붙잡아두게 되어서 실로 죄송합니다. 배가 고프실테니 괜찮으시다면 돌아가는길에 드셔주십시오.」
초로의 경찰관이 봉투를 내밀었다.
「고구마맛탕입니다.
「고맙습니다.」
『라이도우, 그런 시시한 일에 굳이 감사의 말을 할 필욘없어, 가자.』
고우토는 기분나쁜듯이 울었다.
주재소 입구에서 고릴라 얼굴을 한 경찰관이 직립부동자세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거 참. 시대가 변했어.』
두 경찰관의 극경례를 뒤로하며 고우토가 코웃음을 쳤다.
『둔소에 머무르면서 야타가라스의 문장을 모르는 자도 늘었다니. 그 초로의 순사가 없었다면 어찌됐을지.』
「그 덕분에 풀의 재료도, 브러쉬도, ――고구마맛탕도 받았다.」
『고구마맛탕같은걸로 기뻐하지마.』
일진 강풍에 끈으로 걸쳐매고 있던 몇장의 광고지가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고우토, 적당한 어딘가에서 고구마맛탕을 먹고 싶어.」
학생복차림의 소년의 손끝이 잔상을 남기며 천수관음마냥 움직이더니 흩날리는 광고지 전부를 움켜잡은뒤 외투 주머니속에 쑤셔 넣었다.
『그런건 그냥 먹으면 되잖아.』
「먹으면서 걷는 것은 좋지 않아.」
검은 고양이가 멈춰서서, 라이도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외투에 끈을 걸쳐 광고지 뭉치를 짊어진채 한손에는 맛탕이 든 종이봉투, 다른 한손에는 밀가루가 들어있는 페인트통을 들고 있다.
『좋지 않은건 그 모양새라는 생각은 하지않는겐가.』
「뭐가?」
『움직이기 어렵지, 꼴사납지. 여차할 때 곤란할텐데.』
「곤란하지 않아. 그것보다 맛탕을 먹자.」
고우토는 낮게 한숨섞어 울며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폐가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사람이 없는 절. 본당의 본전위에는 요도바시 혼간지라는 먹으로 적은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경내는 황폐해져 지면의 요철이 두드러져보였고, 종루로 보이는 건물이 잡초와 수풀에 뒤덮여져 쇠퇴해있었다. 화강암으로 된 담벼락고 나뭇잎 스치는 소리를 연주하는 나무들에 의해 길이 막힌 공간이었다. 본당 계단에 걸터앉아 라이도우는 고구마맛탕이 든 봉투를 열었다.
『그걸 먹고 나서 광고지를 붙이는건가?』
등뒤의 복도로 뛰어올라온 고우토가 묻는다.
「우선 밀가루를 끓여서 풀을 만들고나서. 여기라면 불을 써도 좋을듯하니까.」
『그게 데빌서머너의 일인가? 너도 그 바보같은 광고지는 버려버려.』
「먹을래?」
라이도우는 막 입에 대려하던 고구마 맛탕을 내밀었다.
『필요없어.』
「짜증을 내고 있는것 같군. 허기진 상태는 좋지 않으니 먹어두는게 좋아.」
『배가 고파서 짜증을 내고 있는게 아냐.』
「안먹는건가?」
「먹을래.」
작은 목소리가 반응했다.
계단 경사면 아래에, 그늘 안에서 기모노 차림의 어린 여자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라이도우는 안색하나 바꾸지 않고 손 끝을 아래쪽으로 바꿨다. 어린 여자아이는 일단 내달려왔지만, 라이도우를 올려다보면서 머뭇머뭇 주저의 시선을 보내온다. 진짜 먹어도 되는걸까, 그렇게 묻는 듯한 표정이다.
「필요없는건가?」
계단 밑에서 조그마한 머리가 기세 좋게 좌우로 흔들린다. 6, 7세정도일까, 몸에 맞지도 않은 기모노를 잘라내 껴입고 있다. 신고 있는 조리도 상당히 크다. 머리는 단발, 부드럽게 부푼 뺨, 손과 코끝이 새카맣게 더럽혀져 있다.
「일단 손을 씻어.」
라이도우는 말했다.
「우물 못 써.」
「어째서 못 쓰지?」
「망가졌어.」
그렇게 말하는 여자아이와 눈을 맞춘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을 이었다.
「입을 벌려.」
고구마 맛탕을 단발머리 여자아이의 입에 넣어주고서 라이도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은 어디지?」
「여기.」
기분 좋은듯 입을 우물거리며 답해왔다.
「여기?」
『부랑안가?』
고우토가 낮게 울었다.
「우물은 어디지?」
계단에 둔 고구마맛탕 봉투를 향해 작은 눈동자가 발하는 뜨거운 시선이 쏟아진다. 봉투를 어린여아에게 건낸다. 눈을 반짝이는 단발머리여아에게 라이도우는 못을 박듯 말했다.
「갖고 있어.」
먹으면 안돼?하는 표정으로 아이가 바라본다. 라이도우는 이어 밀가루가 든 페인트 통도 그 작은 손에 쥐어주었다. 끈과 광고다발도 기모노 위에 걸쳐 짊어지게한다. 그 많은 짐에 아이의 작은체구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어이, 라이도우.』
「갖고 있어. 알겠지? 전부 소중한 물건이다.」
『어이, 이런 어린애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다. 완전히 고문이야.』
고우토의 울음 소리를 무시하고, 라이도우는 질문을 반복했다.
「우물은, 어디지?」
*
녹슨 수동식 펌프의 입구에서는 기이한 갈색의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본당 바로 옆에 있는 우물이었다. 과거엔 신수(神水)로서 사용되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에와선 잡초만 무성할 뿐이다. 라이도우는 펌프를 쥔채 그대로 돌아보고서 말했다.
「이 핸들과 실린더 내부의 누름쇠를 연결하는 말뚝 볼트가 망가져 있었다.」
물을 퍼내는 핸들을 아무리 위아래로 펌프질해봤자 반응이없는 상태다. 고우토가 얼굴을 찌푸리고서 한숨소리를 흘린다. 그와 대조적으로 등뒤에 선 짐을 짊어진 어린 여자아이는 만면의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볼트를 새롭게 갈아끼웠으니까 이걸로 실린더 내부 기관도 상하로 움직인다. 즉 물이 나오게 된다. 어느정도 펌프질을 해두는 편이 좋다. 땅을 파서 뚫은 옅은 우물같으니 오래된 빗물이나 녹물이 쌓여있다.」
그 말을 가로막듯이 검은 고양이가 불쾌한듯 운다.
『도대체가… 하필이면 '관'을 볼트 대용으로 쓰다니.』
「예비용 '관'이다. 어차피 사용하지 않아.」
라이도우는 발치로 고개를 돌렸다.
『예비든 뭐든, 소환사에게 있어선 귀중한 도구를 우물펌프의 볼트로서 써버리다니.』
「큰 것이 망가졌다면 크기가 맞지 않아서 곤란할뻔했다.」
『역대 라이도우중에서 이런 바보같은짓을 하는 인물은 처음이야.』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괴이한 소리가 겹쳐져 울렸다. 날카로운 고함소리였다.
잡초더미 속에서 죽봉을 든 인영이 튀어나왔다.
「너어!!」
고함을 지르며 라이도우에게 죽봉을 휘둘러 그 옆얼굴을 가차없이 내리친다. 안색조차 바뀌지 않고 미동조차않은채 그 학생모의 챙끝만이 덥쳐오는 그림자에게로 향했다.
「어, 어이?!」
산발을 한 소년이었다. 열 살이상은 되어보이는 체구다. 눈매는 날카롭다. 기모노의 소매를 잘라 웃옷으로 삼고, 아래에는 반바지를 입고 있다. 신발은 닳아빠진 게다였다.
「한대 맞았는데 아프지 않은거냐?!」
「아파.」
라이도우는 억양없이 답했다.
「그래? 비명을 지르는거, 까먹지 않았어?」
죽봉이 공기를 가로지르며 들어 올려지는가 싶더니 그 다음 순간, 소년 자신의 어깨를 후려치고 있었다.
「으악!」
무기를 빼앗은 움직임은 검은 고양이 고우토조차 뒤쫓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무기로 얼굴을 때리는 것은 옳지 않아. 실명의 위험도 있고, 코뼈가 부러질수도 있다. 장난이라면 어깨를 때리는것 정도로 해둬.」
「자, 장난 아냐.」
이를 깨무는 소년이 소매에서 돌을 꺼낸다.
「뒈져버려!!」
라이도우의 외투가 짧게 펄럭였다.
양손에 돌을 쥔채로 소년의 몸이 뒤로 튕겨나갔다. 소년이 내지르는 비명이 짐을 들고 있던 여자아이의 외침과 겹쳐졌다.
「오, 오빠!!」
*
「뭐야, 케엑. 난 또 유괴범인줄 알았지.」
본당의 계단에 걸터앉은 요시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네에가 묶여 있는 것처럼 보여서.」
두 아이는 이 폐허가 된 절에 사는 오빠 요시오와 여동생 네에라고 자기소개했다.
「당신 짐을 들고 있을 뿐이었구나.」
머리를 긁는 동생의 옆에 두다리를 벌리고 서서 네에가 정면의 라이도우를 바라보고 있다. 계단에는 어깨끈이나 광고지 다발이 놓여져 있다. 어린 시선은 빈번하게 고구마맛탕이 담긴 봉투를 향하고 있었다.
「그 뭐냐, 우물도 쓸수있게 고쳐줬다며? 그, 미안했어.」
요시오의 목소리에 호응하듯이, 본당의 창틀이 덜컹덜컹 운다. 복도에 있는 유리창은 대부분이 깨져서 곳곳에 옛날 신문지를 붙여놓았다. 하지만 바람을 막기엔 상당히 부족해보였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달빛만이 인적없는 경내를 비추고 있다.
「부모는 없는건가?」
계단밑에 우뚝하니 선 라이도우가 물었다.
「오년전에 지진으로 잃어버렸어.」
「마단진인가.」
「뭐라구? 제2차 간토 대지진이야, 알고있어?」
「그래, 다이쇼 15년 2월 3일에 일어난 대지진이지.」
검은 외투 뒤에서 고우토가 코를 벌름거렸다.
『마단진이 없었다면 혹여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군. 과연 어찌되었을까. 어쩌면 다이쇼 시대 그 자체가 끊어져 버렸을지도.』
라이도우는 스산한 경내를 돌아본뒤, 본당의 계단에서 다시 시선을 멈췄다.
「지진 이후엔 쭉 여기에 있었나?」
「설마?! 얼마전까지 남의 집에서 더부 살았는데 그 집 주인이 바보에 짠돌이라 네에랑 같이 도망쳐나왔어. 툭하면 때리지, 밥은 언제나 찬밥이지.」
「찬밥을 먹으면 식사시간이 짧아지기 때문이다.」
「잘 알잖아?! 당신도 더부살이 경험있어?」
『바보같은 주인이라는 점에서는 같군.』
검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긴 소리가 겹쳐졌다. 어린 여자아이의 배가 울리는 소리였다.
라이도우는 계단에 놓여져 있던 봉투를 짧게 턱짓했다.
「그것도 차갑지만, 먹어도 돼.」
네에가 만세하듯 두 팔을 들어 올리고서 맛탕 봉투를 향해 뛰쳐나갔다.
요시오가 혀를 차더니 바로 옆에서 봉투를 빼앗아갔다.
「공짜는 안 받아. 거지도 아니고. 이래봬도 확실하게 벌어먹고있다구.」
「뭘해서?」
「고물상. 철이나 동, 놋쇠순으로 가격이 비싸져. 철이라면 한 관(貫)에 십오전정도. 우물을 고쳐준건 고맙지만 답례는 확실하게 할셈이야. 고아취급이라면 됐어.」
「고아가 아닌가?」
「아니지. 우리 엄마는 확실히 살아있어.」
고우토의 한숨이 바닥에 닿았다.
『흔히있는 이야기다. 생이별이라면 언젠가는 만날수있을테지.』
「뭐야, 그 눈은!!」
「언제나 이런 눈이다.」
「켁, 어쨌든 이런건 못받아. 구걸할 생각은 없으니까 돌려줄께. 」
작은 시선이 계단에 놓여진 봉투를 뒤쫓던 네에의 시선이 흔들리더니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라이도우는 억양없이 말을 이었다.
「거기에 둔 것은 보수다. 당당히 받아둬.」
「잠꼬대는 됐어. 나는 아무것도 안했다구. 안 그럼 이제부터 뭔갈 시킬셈?」
「네에가 일했다.」
「하아?」
「가지고 있으라는 지시대로 거기에 있는 많은 짐을 쭉 갖고 있었다.」
요시오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다.
「그게 뭐야, 뭔가 이상하지않아? 당신 짐을 갖고 있었으니까 짐을 준다는 소리잖아?」
「거기에 둔 것?」
네에가 대화에 끼어들어왔다.
「이것도? 이 많은 종이랑 통도 주는거야?」
「그건ㅡ」
무심코 고우토와 시선을 맞춘다.
고구마맛탕이 든 봉투만을 준다는 말이었으나 광고지 다발까지 탐내리라고는 예상조차 못했다. 어떻게 답해야할까. 이 남매에게 양보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만 그것은 받은 물건을 버리는것과 마찬가지, 즉 떠맡은 일을 포기하는 행위다. 아직 한장도 제대로 붙히지 않았다. 즉 자신은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있어선 안될 일이다.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라이도우는 질문이 아니라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그런걸로 뭘 할 셈이야.」
「종이가 있으면 그림을 그릴 수 있어.」
네에의 들뜬 목소리가 울러퍼졌다.
「이만큼 있으면 유리 깨진데를 막을 수도 있지.」
「잘됐다, 오빠!」
「잠깐, 그건ㅡ」
몸을 내밀려하는 라이도우를 고양이의 목소리가 저지했다.
『저 아이들에게 줘버려.』
「하지만, 책임이ㅡ 의뢰를 던지는 행위를 취할 순 없어.」
『뭐 어때. 저런걸 붙이고 다녀봐야 마을을 어지럽힐 뿐이다. 이 아이들에게 주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써주겠지. 게다가 본당의 유리창대신 바람을 막는데 붙인다고 하니까 나루미가 말한대로 바로 누가 떼내가지 않을테고, 확실히 눈에 띄는 곳에 붙힌게 되지.』
「여기, 눈에 띄는건가?」
라이도우는 황폐해진 경내를 돌아보았다.
『사소한 것에 일일이 신경 쓸 필요 없어, 가자.』
검은 고양이가 발걸음을 돌린다.
「이대로 가는건가?」
발치의 그림자를 쫓으면서 물었다.
「안 가면 어쩔텐데?」
「그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어이, 라이도우. 부모없는 아이나 집이없는 애들을 만난 건 처음이 아니야. 데빌서머너는 나라의 구제규칙을 따라야할 필요도 없고,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복지구제소 비전원(悲田院)에서 파견된것도 아니야. 구휼이나 구제 책임도 없어. 아니 애초에 세상 모든 이들의 공복을 채워주는 일은 불가능하지. 내버려둘수밖에. 능력밖의 일이야.』
고양이를 따라 걷는 학생모가 좌우로 흔들린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줘, 고우토. 그 아이들에게 확실하게 답례하고 올께.」
『답례?』
검은 고양이가 고개를 돌렸다.
「나 대신 광고지를 붙여주는 거라면 그에 상응하는 답례를 해야하는건 당연한 일이다.」
『그럴 필욘없어. 그 남매는 광고를 갖고 싶어했고, 사양없이 받아갔어. 광고지를 준것 자체가 이미 답례인게지.』
「고우토 상대의 선의를 이용해서 자신을 편하게 하는 것은 야비한 행위다.」
『아니지아니지. 이 경우엔 적재적소, 양자양득이라고 해야할 일이지.』
「득을 얻었다면 답례하는 하는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소리라면 양득이니까, 그 아이들에게도 뭔가 답례를 받아야지.』
등뒤에서 작은 돌을 걷어차는 소리가 다가왔다. 반쯤 몸을 돌린 라이도우에게 네네의 이마가 부딪혔다.
『뭐지? 따라와봤자 해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어.』
고우토의 목소리는 평범한 인간에겐 단순한 고양이 울음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어린 여자아이는 검은 외투 안쪽으로 파고들어, 옷자락에 매달렸다.
『달라붙어도 안돼. 라이도우한테 떨어져.』
작은 속이 라이도우의 은색단추를 벗기더니 그 밑의 속옷을 걷어올린다.
『어, 어이. 무슨 짓이냐.』
「그냥 받아줘.」
어둠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요시오가 모습을 드려냈다.
『바, 받아달라니, 무슨 바보같은 소릴! 아직 어린여자애잖아, 라이도우 역시 아내를 맞아들이기엔 너무 일러.』
「네에가 아무래도 당신에게 주고싶다길래.」
『아무래도라니, 이봐, 억지로 옷을 벗겨 기정사실로 만들 셈이냐?』
「부적인가?」
라이도우의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절의 영력이 담긴 부적이야.」
요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당 안쪽에 있던 마지막 한장. 뭐시라던가 혼간에서 직접 전해진 수호부로, 삼백년꺼라고 하더라. 맨살에 바로 붙히면 만만세래.」
걷어올린 셔츠 아래에서, 네에가 범어로 그려진 부적을 라이도우의 배 위에 눌러붙였다.
「잘 알고 있군.」
「전에 골동품점에 팔았더니 그렇게 말했어.」
『하하, 와지[和紙]의 수명은 천년도 넘는다더니, 어쩌면 정말 삼백년전 것일지도 모르지만, 절이 망하는것도 막지 못해서야 무슨 효험이 있을까.』
고양이의 한숨을 옆에 두고, 네에가 고개를 들었다.
「답례.」
웃으면서 말한다.
「고마워.」
라이도우는 그렇게 답하고서 천천히 고개를 고우토에게 돌렸다.
「답례를, 받았다.」
『그런것 같군.』
「고우토가 말한 대로다. 양득이기 때문에 아이들도 답례해 주었다. 당연히 이쪽도 마찬가지로ㅡ」
『언제까지 배를 드려낼 셈이야. 제대로 셔츠를 내리고 단추를 잠궈.』
「ㅡ아아.」
옷매무새를 고치는 라이도우를 향해 요시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당신 혹시 고양이랑 이야기하는거야? 제정신?」
「제정신이다.」
「정말? 저, 그 말야.」
무언가를 중얼중얼거리며 요시오가 광고지 한장을 꺼내 내밀었다.
「당신 탐정이야?」
「견습이다만,」
「뭐야, 견습? 뭐 그래도 좋아. 그렇지만 일단은 탐정인거지?」
본당 옆에 심어진 수풀이 일제히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연주한다.
「탐정이라면 말야, 그, 의뢰하고 싶은게 있는데.」
「받아들이지.」
라이도우의 즉답에 고우토가 영 불쾌한 듯 울음소리를 흘렸다.
*
「손님, 알고계십니까?」
핸들을 쥔 고바야시 이쿠야는 백미러를 향해 밝게 웃어보였다.
「최근 붉은 벽돌 근처에서 나오는 모양입니다.」
T형 포드의 엔(円) 택시가 만세바시교차점, 히로세 중사상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유령말입니다, 유령. 밤중에 죽은 사람이 걸어다닌다네요.」
운전수 고바야시의 기분이 이렇게나 좋은 것은 규정대로 요금 ‘1엔’을 선불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하핫, 이런 문명세계에서 말이죠.」
시내 안이라면 1엔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기 때문에, 택시는 ‘엔 택시’라고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요금은 손님과의 흥정으로 낙찰된다. 보통 40전, 많아봐야 70전정도로 마무리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제법 본 사람이 있는 모양이에요.」
아무런 불평불만도 없이 1엔을 선듯 지불하는 손님은 극히 드물다.
「보자, 남쪽 입구에 차를 세워도 괜찮겠습니까?」
「그 앞 블록으로 부탁해.」
뒷좌석의 손님이 아무리 말수가 적고 무뚝뚝해도 고바야시의 기분은 좋기만했다.
T형 포드의 엔 택시에서 내려선 라이도우는 앞을 향해 턱을 들었다. 가스등보다도 밝은 호광외등에 둘러쌓인 거대한 스테이션이 어둠속에서 떠올라있었다. 전장 3백미터, 장대한 위용, 벽돌건축물로서는 일본 최대다. 준공은 다이쇼 3년, 철골벽돌 삼층건물로 붉은 벽돌에 화강암을 띠처럼 둘러넣은 화려한 외관, 양날개의 옥탑지붕에는 둥근 형태를 띈 거대한 팔각 돔이 비치되어 있다.
『이거이거. 정말로 도쿄역까지 올줄이야.』
외투에서 뛰쳐나온 고우토가 소리를 냈다.
『하찮은 의뢰를 승낙하다니.』
역 상층의 창문에 빛이 많이 들어와있는것은 도쿄 스테이션호텔이 개설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요시오의 의뢰는 너무 막연해.』
서구 일류국가와 어깨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대형근대화 시설로서 축조되어진 호텔이기에 이제까지 최대였던 제도 호텔을 뛰어넘는 객실수를 지니고 있다. 요리 또한 평이 좋아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샌드위치나 햄버그스테이크는 아직 거리의 상점에는 판매되지 않는지라 그것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사람들도 줄을 이룬다. 일본 최초로 커피숍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것도 도쿄 스테이션 호텔이다.
『생이별한 모친을 도쿄역에서 봤으니까 찾아달라니,』
이 최신최대의 호텔에 머무르며 집필하는 작가들도 많다.
『꼭 도쿄역에서 근무중이라 할 순 없지, 그저 역에서 내린 것일 뿐일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잘못 본’ 것이겠지.』
발치의 고우토의 목소리를 넘기며 라이도우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틀림없어. 5년전에 헤어졌을때와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니 턱도 없지.』
전방, 터널처럼 차려진 벽돌제 아치를 빠져나가면 마루노우치 남쪽출구에 있는 승차전용입구로 나오게 된다. 반대측의 북쪽입구가 하차전용구로 지금부터 10년전, 열차에 타려했던 하라 타카시 수상은 이 남쪽 입구에서 암살당했다.
희미한 안개가 떠돈다.
올려다본 벽돌벽면 이외엔 심해의 바닥처럼 보였다. 전기를 내릴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서 사람의 그림자도 곳곳에 보이지만, 모든 것이 뿌옇게 흐릿했다. 라이도우는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마루노우치 중앙입구― 황실입구(帝室口)로부터 시작된 은행나무를 가에 심은 6차선 도로, 미유키 대로가 밤에 완전히 녹아 어둠이 보다 깊이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차선 하나의 폭이 보통 도로보다 극단적으로 넓은 미유키 대로엔 가로수에 의해서 만들어진 두줄의 중앙 분리선이 있고, 그 중앙로는 황실승객 전용로로 사용되고 있다. 황실승객은 모두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입구나 도로도 보통 때엔 사용하지 않으며, 가로등도 놓여져 있지 않다. 그렇기에 밤에는 막대한 칠흑으로 화한다.
『모처럼 도쿄역까지 왔으니 간만에 사성수라도 보고 가지.』
고우토가 말했다.
「그, 제도의 수호문말인가?」
『음, 남쪽출구의 팔각돔 천정에 새겨진 청룡, 주작, 현무, 백호의 사성수는 본디 야타가라스가 제도수호를 위해 구축한,』
고우토의 말이 끊겼다. 나란히 걷고 있던 라이도우도 걸음을 멈췄다.
안개가 짙다. 지나치게 짙다. 몇겹이나 되는 어둠의 장막이 흐르고 있는것같다.
『어이?』
고우토가 털을 세우자, 라이도우는 반사적으로 칼을 뽑았다.
전방에 빛나고 있던 가로등이 바다 깊숙한 곳에 사는 아귀의 빛처럼 흔들리며 불규칙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주위에 보이는 통행인의 움직임이 멀다.
아니 인간이 아니다. 악마 역시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거참. 언제 이런 ‘장소’에 들어선거지?』
몸이 반투명하게 비치는 ‘죽은 자’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생전의 모습을 한 백령(魄靈)들이다.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들이 역에 모여 있었다.
「마단진이 남긴, 균열인건가?」
『으으음, 불안정한 균열은 야타가라스의 청소부가 이미 처리했을텐데.』
어둠의 피막을 사이에 두고 자동차의 라이트가 심해어처럼 곁을 스쳐 지나간다.
「바로 옆에 현계가 있어. 완전한 이계(異界)는 아닌 모양이다.」
일그러지긴하지만 자동차 바퀴의 마찰음이 확실히 들리는데다, 배기가스 냄새도 짙게 남아있다.
『자아, 여길 어떻게 나갈까.』
또 다시 자동차가 다가온다.
어둠 저쪽에서 빛나는 라이트는 동굴에 숨을 죽이고 있는 흉폭한 짐승을 연상시켰다. 타이어의 질주음은 포효로 화한다. 그야말로 맹수의 울음 소리였다.
『라이도우, 오보로구루마다. 반드시 사고를 일으킨다는 마의 차다.』
런던 택시, 블랙캡의 형태를 띈 악마가 타이어소리, 배기음 요란하게 돌진해온다. 동체는 사고가 난 차의 그것으로, 창틀은 일그러져 있으며 펜더(fender)는 크게 흠이나 있고, 범퍼는 금방이라도 벗겨져 떨어질것만 같았다. 하지만 덜컹덜컹 불안하게 진동하면서도 그 속도는 평범한 차의 그것을 아득히 웃돌고 있었다.
닥쳐드는 범퍼를 앞에 두고 검은 외투와 검은 고양이가 각기 좌우로 흩어졌다. 오보로구루마는 그대로 직진해…버리진 않았다!!
바퀴를 옆으로 비틀어, 슬립상태로 라이도우를 향해 동체를 크게 기울여왔다. 허나 라이도우의 반응 역시 신속했다. 옆구르기에서 앞구르기로 자세를 바꿔 땅을 박차 후퇴하며 외투 안쪽에서 콜트 라이트닝을 뽑아들었다. 동체측면을 밀어붙이듯 슬립이동하며 육박해오던 오보로구루마에게 프론트사이트를 맞춘뒤, 한쪽 무릎으로 땅을 짚고 서서 방아쇠를 당긴다.
그에 응해 바로 격철이 뇌관을 두드렸다. 콜트 라이트닝의 실린더가 기분좋게 매끄럽게 자동회전하며 화약폭발음이 계속된다. 카트리지에서 차례차례 발사된 탄두는 총구가 겨냥하는 곳을 향해 비약해나가는 불화살로 화한다.
라이도우는 몸을 일으켜세워 총을 연사했다.
초연속에서 불꽃이 튄다. 슬립이동하고 있던 오보로구루마의 바퀴가 마찰음과 함께 격하게 삐걱였다. 지면이 거칠게 깍여져나간다. 블랙캡형식의 차체가 연기를 피우며 옆으로 회전했다. 하지만 속도를 잃는일도 정지하는 일도 없었다. 횡회전으로 동체를 상처입혀가면서도 라이도우에게로 부닥쳐온다.
마지막 한발의 탄환이 회전하는 마차(魔車)의 측면몸체에서 튕겨져 나오자 라이도우는 몸을 돌려 내달리기 시작했다. 총격에 의한 회전이 아니다. 탄환은 효과가 없다. 의도된 움직임이다. 경운기처럼 선회하면서 짓눌러 온다. 동체로 눌러트릴 셈이다.
달리는 검은 외투가 바람에 펄럭였다.
방향을 급전환했는데도 오보로구루마는 횡회전하면서 추격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경적소리를 울리며 흩날리는 검은 외투끝자락 바로 뒤를 쫓아 대형 강철덩어리가 급히 접근해온다. 사이드 스핀이라해도 자동차의 빠르기다. 머지않아, 뒤따라 잡힌다. 이대로는 압사당한다.
총은 통용되지 않았다. 칼로 벨 수 있을까. 아니, 절단에 성공할다해도 가속도가 붙은 동체는 그대로 밀어닥칠것이다. 파편에 직격당할 가능성이 높다. 동료 악마를 소환해야 하지만― 잭랜턴의 섬광, 도아마스의 스턴하울링, 둘다 오보로구루마를 상대로 하기엔 역부족이다.
라이도우는 몸을 돌리자마자, 잭 랜턴도 도아마스도 아닌, 세 번째의 둔색 ‘관’을 뽑아냈다. ‘관’에서 비취색의 빛이 비산하며, 학생복의 손끝이 가리키는 공간의 분자밀도가 흐트러졌다.
순간, 횡회전하고 있던 자동차의 동체가 짜부라 들었다.
말그대로의 의미다.
주먹으로 내리친 모기처럼 지면에 짓눌려져 찌그러져있다.
그리고 그야말로 ‘주먹’이 철판이 된 오보로구루마의 동체로부터 떠올랐다. 마차(魔車)를 일격으로 파괴해버린 장부가 잿불같은 눈으로 라이도우를 내려다본다.
암반을 깎아낸듯한 얼굴이다. 십척은 됨직한 근육질의 몸, 하니와를 방불케하는 갑옷을 두르고 있다. 아래턱에서 아래뺨에 입가리개가 걸쳐져 있다. 분노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신음소리가 안개속을 떠돌았다.
「아테루이(阿弖流為).」
학생모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쿠즈노하 라이도우가 사역하는 세 번째 마물 아테루이는, 악로왕(悪路王), 또한 타모노키미[大墓公]라는 이명(異名)을 가지고 있다. 엔랴쿠[延暦] 시기, 십만여에 이르는 조정정동군을 물리친것뿐만 아니라, 적군 그 자체를 해체까지 몰아넣었다는 일화를 남긴 북방의 마인이다.
신음 소리가 안갯속의 뱃고동처럼 울러퍼진다.
아테루이가 외쳐대고 있는 모양이지만, 우물거리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계약은 소환 한번마다였었지, 벗겨주지.」
라이도우는 손끝으로 수인을 맺었다. 입을 가리고 있던 금쇄가 장부의 턱에서 벗겨져 나가, 목걸이처럼 목에 걸렸다.
「라, 라이도!」
명확하게 분노가 담긴 낙뢰같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오늘에야말로, 오늘에야말로 용서못해. 내 입의 이 주박을 풀지 않으면 지금, 지금 여기서 너를 죽이겠다!」
「죽이는건가?」
「오오오!!!」
아테루이의 주먹이 검은 외투를 향해 수직낙하한다. 지면이 크게 울리더니 거대한 나무망치로 두드려맞은것처럼 깊게 땅이 패였다.
「왜 그러지? 죽이려는게 아니였던가?」
안개보다도 짙은 흙연기가 자욱이 솟아오르는 그 속에서, 땅이 패여진 곳 바로 곁에 라이도우는 기립해 있었다.
「변함없이 맘에 안드는 녀석이다, 라이도. 도망치지도 않고 방어도 않지. 바보인거냐, 두려움을 모르는거냐!?」
머리위에서 내려떨어지는 목소리는 낙뢰 그 자체다.
「안 죽이는건가?」
「게다가 남이 하는 말을 안 들어.」
「듣고 있다.」
「안 들어, 안 듣고 있잖느냐!!! 너를 뭉개트리는건 간단해, 식은 죽 먹기다. 더욱이 내게 소환자에게는 거스를수 없다는 규약은 통하지 않아.」
헤이안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 일본기략(日本紀略)에는 아테루이는 ‘야성수심이라, 번복하며 제약이 없음’이라 기재하고 있다.
「자아, 라이도. 뭉개지고 싶지 않다면 내 입의 이 주박을 풀고 이제부턴 내가 내킬때마다 노래하게 하는거다.」
「노래하면 돼. 규정은 한번 소환할때마다 한소절이다.」
악로왕 아테루이는 노래를 부른다.
「에에잇! 그래선 짧아, 짧은게다!」
소환할 때마다 노래하는 것, 그것이 라이도우와의 규약이었다.
「고작 한소절 갖고는 노래를 부른다고 할 수 없어.」
「노래하지 않는건가?」
아테루이는 맹우 모레[母礼]와 함께 군관에게 처형당할때조차도 노래했다고 한다. 지금 얼마나 노래하고 싶은지, 그 곡엔 어떤 의미가 담긴건지, 목적은 무엇인지, 아테루이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기에 라이도우 역시 묻지 않았다.
「라이도, 역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잖아.」
「노래하지 않는거라면,」
라이도우의 손끝이 수인을 맺는다.
「자, 잠깐 라이도. 잠깐 기다,」
완성된 수인에 의해 다시 금쇄가 아테루이의 얼굴 반절을 덮어버린다.
「잠까아안, 노래는 내 권리다. 규정을 깨트릴 셈이냐, 가아아아아악!」
「귀환이다, 누군가가 오고 있어.」
웅얼거리는 절규를 흘리는 아테루이를 ‘관’으로 되돌리고, 라이도우는 떠도는 안개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치에 검은 고양이 고우토가 소리없이 뛰어 나왔다.
『노래하게 하지도 않은채로 악로왕을 돌려보내다니, 이거원, 소환규정을 무시해도 되는건가?』
「부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그것보다도,」
라이도우는 안개의 장막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발걸음소리가 다가온다.
빠른 걸음에서 달리기, 다시 또 빠른 걸음으로, 율동적으로 울리는 뾰족한 소리다.
『음, 죽은 자는 아닌 모양인데.』
우뚝 서서 안개를 바라보고 있던 한사람과 한 마리의 앞으로, 안개의 바다를 해치고 모던 걸이 달려들어왔다.
목에 건 카메라를 코끼리 코처럼 길게 드리운 아사쿠라 타에는 깍듯한 90도 경례 상태로 상체를 기울이며 급정지했다. 비스듬히 어둠 속에 선 외투에 부딪칠뻔한 참이었다.
「자, 잠깐,」
짙은 어둠속에서 검은 외투의 모습은 분별키 어렵다. 뭐, 옷색이란건 개인취미라고 납득해줘도, 길 한가운데에 우뚝 서있는것은 실례가 아닐까. 내 힐 소리는 충분할 정도로 울러퍼졌다. 크림색 슈트역시 눈에 띄지 않을리 없다. 즉, 여성이 종종 내달려 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텐데, 일부러 길을 막기위해 서있었다는 말밖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당신 말야, 내가 여자니까 바보취급 하는거,」
뭔가 불평이라도 쏘아줄까하고 등을 편 순간, 목언저리까지 치켜올려진 스트랩 끝에 달린 카메라가 급격한 각도로 들어올려져 타에의 안면을 강타했다.
「흐갹!」
비명을 지르면서도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는게 아니라 카메라를 잡았다. 로쿠사쿠라 사의 펄레트다. 국내 양산품이라해도 거금 15원을 털어넣어 손에 넣은 것이다. 가죽케이스에 들어있긴 하지만, 충격으로 파손되지 않았을지 걱정이었다.
「괘, 괜찮은 모양이야, 흐, 흐엣.」
머리에서 크롯슈 모자가 벗겨져 난다. 붙잡으려고하자 상반신이 반쯤 회전했다. 어깨에 끈을 걸쳐 매고 있던 큰 검은 가방이 허리에 부닥친다. 가방이 몸을 강하게 짓눌러, 타에는 탭댄스를 추는 걸음새로 게걸음을 걸었다.
『뭐지 이 여자는, 예인(芸人)인가?』
「고, 고양이?」
울음 소리에 타에는 몸을 돌려 검은 외투를 두른 남자의 발치를 바라보았다. 몸을 돌린 각도가 너무 심해서, 힐 끝이 미끄러진 탓에 댄서처럼 한쪽다리를 크게 치켜올리는 형상이 되었다.
「후에에에!!」
『직업정신이 투철한 여자로군.』
「이, 이봐, 당신 뭘 보고 있는거야.」
걷어올려진 스커트를 황급히 모아 내리며 타에는 동그란 눈으로 검은 외투의 남자를 쏘아보았다.
「당신을,」
한가운데 직구인 답이었다.
「그, 그렇지.」
입술을 깨물며, 남자를 다시 내려다본다. 학생인걸까, 자세히 뜯어보니 상당히 젊다. 키는 크지만 아직 소년이라 해도 될만한 나이다. 새하얀 얼굴, 단정한 이목구비는 은막의 스타를 연상시킨다. 옷만 바꿔입히면, 그래 중산모에 로이드 안경, 나팔바지를 입히면 훌륭한 모던 보이가 될 듯하다. 이런 동생이 있다면 기쁠지도 모르겠다.
타에는 그를 의식해 누나같은 말투로 질문하고 있었다.
「길가에 서있으면 위험하잖아, 이런 밤에 여기서 뭘하는거니?」
「어디서 왔지?」
역으로 질문받았다.
「너, 너 말야. 남에게 뭔가 묻기전에, 일단 이름부터 말해야지.」
그 말을 꺼내고나서 자기자신도 제대로 소개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사쿠라 타에야.」
「쿠즈노하 라이도우, 당신은 어디에서 왔지?」
「어디서라니, 신문사에서 왔지. 나는 제도신보의 신문기자야.」
두 손을 허리에 얹고서 가슴을 편다.
「여자라지만 심부름이나 하는 잡역이 아니야, 어엿한 편집부의 일원으로서 직접 취재하며 기사도 확실히 집필하고 있어. 필명은 아사쿠라 키쵸, 얼마전에 썼던 ‘올해안으로 자동식 공중전화기가 길거리에’라는 기사는 제법 평가가 좋았어. 혹시 읽어 봤으려나?」
학생모 밑의 두 눈동자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타에는 작게 뺨을 붉혔다.
「뭐, 뭐야. 그 눈은. 믿지 못하는거야? 거야 여자 신문기자는 드물지만. 히라츠카 라이쵸선생이 앞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신여성’들이라고 하셨듯, 여자들도 사회에 진출하는 시대야. 선거권 역시 여성들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앞에 선 백석과도 같은 얼굴이 실태를 꿰뚫어보듯이 바라보고 있다. 타에는 눈을 깜빡이고서 무심코 자신의 옷차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차림새에 어딘가 기묘한 곳이라도 있는걸까? 입고 있는 것은 원피스가 아니라 미츠코시 본점에서 구입한 여성용 슈트다. 스커트는 제대로 무릎까지, 종모양의 클로슈 모자도 슈트 색에 맞췄다. 새하얀 힐도 고급스러운 것이다. 짧은 머리는 미용실에서 정돈하고 온것이고, 코티(COPTY)의 분은 살짝 칠한것 뿐이니까 화장이 망가져있으리라 생각키도 어렵다.
화장이라고하면 입술을 칠했다. 눈썹도 굳이 가늘게 깎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외국인 여배우’같은 차림은 지금에서야 드문일도 아니다. 애초에 그 선.생.을 만나러갈 셈이었으니까 차림에 빈틈은 없을것이다.
「저 말야, 당신, 여자에 대해서,」
「어째서, 여기에 있지?」
검은 외투의 소년이 또 다시 먼저 질문해왔다.
「어, 어째서냐니. 일 때문이야. 스테이션 호텔에 투숙하면서 집필중인 에도가와 란포 선생에게 신문연재를 부탁하려고.」
말을 자르며 타에는 한숨을 쉬었다. 신문 연재 소설 의뢰는 신문사의 명령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타에 개인의 독단이었다. 그렇지만 윗사람들이 떫은 얼굴을 할리 없다. 잘나가는 작가인 에도가와 선생의 원고는 어느 출판사가 탐내고 있다. 능숙하게 연재계약을 따낸다면 사내에서의 내 입장도 틀림없이 변하겠지.
직접 취재하고, 사진을 찍고, 몇십번이나 투고하며 기사를 쓰고 있는데도 남성중심의 사회에서는 아직도 ‘잡일꾼’ 애송이 취급이다. 벌써 22살인데도…….
에도가와 선생의 원고를 받을 수 있다면 모두가 놀라겠지. 과연 아사쿠라씨, 다음 주임은 아사쿠라씨로 결정이겠네……, 역시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더 우수하구나…, 아사쿠라 주임, 이 서류에 승인 부탁드립니다…, 아사쿠라 과장의 지시에 따르게………, 모두 아사쿠라 부장을 본받아 훌륭한 신문 기자가 되도록.
「에흠.」
두 손을 허리에 얹고 등을 쭉 펴자, 바로 앞에서 쏟아지는 강한 시선을 깨닫고서, 타에는 얼굴을 붉혔다. 상상하던 것이 들통난것처럼 부끄러워서 휘파람을 불면서 고개를 돌린다. 더더욱 돌렸다. 어둡고, 짙은 안개.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줄지어 선 빛이 보이지만 그것은 호광등의 빛이라고 하기보다는 화톳불과 같았다. 어둠 끝에서 반쯤은 부연 사람들이 걷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도쿄 역은 어딨지?!
「어떻게 여기로 들어올 수 있었지.」
검은 외투로부터 질문이 날아온다.
「여기고 뭐고, 아직 도쿄역엔 들어가지 않았잖아.」
라이도우라 자신을 소개한 소년이 험학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자, 타에도 다시 주위를 훑었다.
「그, 저, 라이도우군. 살짝 묻고 싶은게 있는데, 이상하게 생각하게 말아줘?? 그, 도쿄역은 어느쪽에 있더라? 모, 모르는건 아닌데 말이야, 그, 남쪽출구를 향해 바로 걸어왔을텐데.」
『그랬었군.』
「고양이, 고양이는 네 펫?」
타에는 라이도우의 발치에서 우는 검은 고양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여자는 이계가 만들어질때 휩쓸린 모양이야.』
「만들어졌다,」
라이도우가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아무것도 없었던 길이 갑자기 변했다, 그걸 이 여자가 증명한 것이다.』
「그러면, 이 공간을 만든 사람이 있을터.」
『오보로구루마를 소환해 사역한 녀석이겠지.』
「저기, 말야.」
타에는 눈꼬리를 손끝으로 누르며, 눈앞에서 일어나는 혼잣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여성의 질문에 답은 않고 무슨 의미불명인 소릴 중얼거리는거야, 혹시 취한거야?」
「누구냐?」
「타에야, 아사쿠라 타에. 자기 소개는 확실히 했잖아.」
「이런 곳에 이계를 만들어내다니, 목적은 뭐지.」
「목적이 뭐냐니, 말했잖아. 일 때문에 왔다고. 저기 라이도우군, 아까부터 쭉 질문뿐인데 너야말로 이런 캄캄한 길 한가운데서 뭘하고 있었던거야?」
뭐지, 하는 눈동자가 타에를 바라본다.
학생모 아래의 새하얀 얼굴은 타에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듯한 얼굴이었다. 놀리는 거야 아니면, 내가 여자라고 바보취급하고 있었던거야?
「여보세요, 라이도우군. 도대체 뭐하는 사람? 정말로 학생? 난 솔직히 얘기했으니까 너도 솔직히 답해줘.」
굳이 강한 어투로 타에는 질문했다.
「나는, 학생이고, 견습이다.」
타에는 고개를 응응하고 끄덕였다. 역시 남자에게는 강한 태도를 취해야한다. 서투른 행동을 취하면 사내라는 생물은 언제나, 금방, 기세가 오른다.
「무슨 견습?」
타에의 말을 무시하고 라이도우가 바로 곁을 스쳐 걸어나간다.
「이, 이봐. 무슨 견습이냐고 묻고 있잖아.」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채, 검은 외투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낸다.
「이거 뭐니. 광고…? 탐정사무소, 뭐든지 취급…이란건,」
「내게서 떨어지지마.」
「거, 거야 내 맘이잖아, 연인도 아니고, 떨어지지 말라니 도대체 뭐야.」
「곁에 있어.」
「뭐, 뭐야 도대체! 요새 유행하는 고백대사? 나한테 한눈에 반했다면 그럴만도 하지만, 그래도 취미도 아직 이야기 안했고, 에, 라이도우군과는 10센치 정도 키 차이가 있으니까 괜찮다곤 해도 나이차가…, 나, 나는 신경 안 써! 나는 남녀평등주의니까.. 그 저기, 나는 커피와 앙미츠[餡蜜]를 좋아하는데 라이도우군은 뭘 좋아,」
어둠이 다가왔다.
머리위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닥치더니 칠흑의 베일이 타에를 치고 지나갔다. 베일은 흐늘흐늘 흔들리는 그림자 군집이었다.
「저기요, 도대체 뭔가요! 부딪히면 위엄하잖아, 흐앗?!」
타에는 무심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의 가슴께에 팔이 불쑥 튀어나와있다. 남자의 팔이다. 그것이 줄어들더니, 점점 몸속으로 들어간다. 고통은 없다, 아아아아아아, 입술을 떨면서 등 뒤의 기척에 타에는 장난감 인형처럼 돌아보았다. 슈트에서 팔이 빠져나간다. 기모노 차림의 남자의 팔이었다. 몸을 막 관통했던 그 팔이 짧게 흔들리더니, 남자가 ‘실례’하고 인사를 해준다.
타에는 동그랗게 뜬 눈을 더더욱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질풍은 거듭이어졌다. 반쯤은 투명한 윤곽의 사람들이 차례차례 크림색의 슈트를 통과해 나간다. 몇사람이나 되는 인간이 몸을 빠져나간다. 시야가 혼탁해지며 무릎에 힘이 빠졌다. 발치가 흡사 진흙탕으로 변한것마냥 타에는 볼썽사납게 쓰러졌다.
*
외투를 펼치자마자, 라이도우는 양손에 쥐고 있던 관을 휘둘렀다.
「잭 랜턴, 탐염등(探焰燈)으로 이 마기의 근원을 찾아라, 도아마스는 기절해 있는 여기자를 가능한한 안전한 장소로 옮겨줘.」
비취색의 빛에서 실체화한 개악마가 실로 내키지 않는듯 흥하고 코를 흘리며 주인을 돌아본다.
「뭐야, 또 나는 짐짝 나르기?」
「히호~」
허공에 떠있는 호박머리의 소악마가 손에 든 랜턴이 빛을 발했다.
빛줄기는 어둠을 찢으며 표류하는 죽은 자들의 등 뒤 , 강풍의 중심지를 가리켰다.
15간(間)에서 16간(間), 약 30미터 정도 되는 어둠 속이다.
검은 그림자, 아니, 둔청색의 그림자였다.
「키긱, 긱.」
대지에 기립해 서서, 양 팔이 아닌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고 있다.
「아르카드인가.」
틀림없이 어제 놓쳤던 박쥐악마다.
「이 이계는 네가 만든건가―. 죽은 자들을 산보시키는게 취민가?」
라이도우는 콜트라이트닝에 탄환을 장전하며 억양없이 물었다.
「키긱, 학습능력이 없나, 14대째. 내 육체는 불사, 총으론 죽지 않는다.」
「그런가.」
방아쇠를 당기자,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길게 초연을 남기는 탄두가 박쥐 악마의 발치에서 튀었다.
「키기기긱, 변함없이 속사로군. 허나 명중률은 꽝ㅡ」
뿜어져 나오는 불꽃소리가 아르카드의 조소를 집어 삼킨다. 탄두의 착탄점에서 막대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키아아아악!!」
「화염탄이다, 발화연료를 극한까지 증폭시켰다.」
콜트에서 연이어 발사염이 튀었다.
「쏴죽일수 없다면 태워죽인다.」
「내게 날개가 있단 사실을 잊은거냐!!」
「불타고 있군.」
어두운 하늘에 불길을 드리우는 날개가 높이 치솟아오른다.
「도아마스!!」
라이도우는 내달리며 외쳤다.
「여어,」
섬광같은 빠르기로 개 악마가 함께 내달린다.
「뛴다, 등을 빌려줘.」
「또 그거? 그거 아픈데.」
「참아.」
개 악마가 혀를 차면서 지면을 박찼다. 라이도우도 뛰었다.
구두 뒤축이 잔상을 그리며 도아마스의 등을 내달려올라, 그 후두부를 힘껏 밟았다. 도약하는 동료 악마를 발판삼아, 라이도우는 둔청색의 날개와 나란히 상공으로 비약했다. 발치의 도아마스가 머리를 감싸쥐고 낙하해간다.
「캬아, 인간이, 이렇게나 높이!!?」
「마지막이다.」
콜트의 총구에서 발사된 화염탄이, 박쥐악마에게, 직격했다. 뿜어져나오는 화염이 둔청색의 몸을 휩싼다. 하지만 아르카드의 움직임은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둔해지지 않았다.
「키기긱!」
거대 박쥐의 날개가 열풍과 함께 쇄도해온다.
「14대째, 너야말로 마지막이다!!」
급선회비행으로 이어지던 탄환을 피한다. 바람과 불꽃을 두르고서 아르카드의 독니가 육박해온다.
「날개없는 자는 허공에선 무방비, 키기긱, 남은 건 떨어지는 것뿐, 낙하도중에는 궤적도 자세도 쉬이 바꿀 수 없지, 이정도로 손쉬운 표적은 없다. 」
바람을 가르며 추락하던 검은 외투가 반전했다.
「캬악?」
몸을 돌리며 옆으로 이동한다.
「말도 안돼! 낙하도중의 인간이 방향전환?!」
「히호」
검은 외투의 소매를 부유하는 잭 랜턴이 움켜쥐고 있었다. 랜턴의 호박머리를 발판으로 학생복의 소년이 다시 도약한다. 고개를 돌린 박쥐의 안면에 이어져 탄환이 명중한다.
「키, 키아아아악!!」
라이도우는 두 다리로 박쥐의 둔청색의 날개에 올라탔다. 콜트의 총구가 아래로 향하고, 화염탄이 연사된다. 총격음과 화염의 분출음이 바람속에 겹쳐지며, 그대로 낙하해간다.
*
하늘에서 요란한 불기둥이 추락한다.
「라이도우?!」
재빠르게 달려온 도아마스는 지변에 부닥친 불기둥의 폭풍에 휘말려 데굴데굴 땅을 굴렀다. 열풍과 흑연이 주위일대를 석권한다.
「라, 라이도우, 라이도우!」
도아마스는 땅에 엎드린채 필사적으로 주인의 이름을 외쳤다. 흑연탓으로 잘 보이지 않는다. 들이닥치는 열풍이 흑백의 털을 태운다. 터무니없는 불꽃에 폭발이다, 더욱이 아득한 상공에서부터 추락한 것이다, 데빌 서머너라해도 살아있는 인간인 이상 다치지 않았을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라이도우우우!!!!」
「뭐지,」
등 뒤에서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 라이도우?」
바로 등 뒤에서, 검은 외투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어, 어라, 어떻게? 박쥐녀석이랑 같이 떨어진거 아냐?」
「바닥과 충돌하기전에 탈출했다.」
「무, 무사한거지, 라이도우?! 어디 탄덴 없고?」
「타지 않아. 이 외투는 쿠즈노하 마을의 사문석(蛇紋石)과 각섬석(角閃石)을 섬유로 하여 만들어졌다.」
학생복 차림의 소년이 팔을 내밀었다. 그 팔에 자신의 손을 얹고, 도아마스는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호, 혼자 설 수 있어.」
「그런가.」
내민 손이 다시 거두어지자 무심코 어금니를 악문다.
「그게 뭐야.」
두다리를 뻗고서 도아마스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러지?」
「언제나 터무니없는데다 막무가내잖아. 평생 동료 악마가 하는 말 무시하면서 막무가내로 살아.」
「어째서 화를 내지?」
「어차피 나같은거 짐 나르는데라던가 발판 대신으로 밖엔 써먹을데 없는걸.」
「아팠었나? 털이 더럽혀져 있다.」
도약할 때 구둣발로 밟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손끝으로 털을 정돈해준다.
「돼, 됐어, 그런거.」
「그런가.」
손이 멀어진다.
「됐단 말은 딱 됐단 말이야, 딱 그게 좋단 말. 좀 더 어루만져도 된다는 말.」
도아마스는 당황하며 말했다.
라이도우는 무릎을 꿇고 손끝으로 도아마스의 털을 쓸어내렸다. 아직 채 꺼지지 않는 불길이 그 외투와 주저앉은 개 악마, 한사람과 한 마리에게 평등하게 주홍색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강하게 때론 약하게 흐르는 바람소리가 겹쳐지는 호흡의 간주였다.
「라, 라이도우.」
도아마스는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을 가늘게 하고 보면 불기둥의 잔해는 메기도의 불로도 보인다. 위대한 파괴의 불꽃을 앞에 두고 이렇게 서로 가까이있다. 깊은 어둠과 안계, 귀곡성같은 바람, 흐늘흐늘 떠도는 죽음자들의 그림자, 그 전부가 두사람에게 복음을 내리고 있다.
막 멸망해 버린 마을이라는 멋진 장소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터, 털 손질하는거 제법 능숙한걸, 라이도우.」
「고우토가 자주 주문해와서.」
「고양마보다도 내 털 쪽이 훨씬 더 엑셀런트한 느낌이지?」
「어려운 외국어는 모른다.」
「엑셀런트란 말은 말이야,」
「히~호~~」
작은 악마가 둥둥 허공에 뜬채로 손에 든 랜턴을 도아마스의 입에 부닥트렸다.
「아, 앗뜨거! 뭐뭐뭐 뭐얏.」」
허공에 뜬 호박머리가 바로 등 뒤에 있는 학생모의 소맷자락에게 다가온다.
「잭 랜턴도 아팠던가.」
라이도우의 상반신이 돌아간다. 머리를 빗어주던 손이 멀어진다. 조금전까지 털을 골라주던 부드러운 손길이 척봐도 만져봤자 기분 좋지도 않을 듯한 소악마의 머리에 얹혀져 있다.
「래, 랜던꼬마. 지금 내게 시비거는걸까나.」
「히홋.」
도아마스의 눈앞에 발광하는 랜턴이 쑥하고 들이내밀어졌다.
「누, 눈부셧.」
「히호히호, 히호!」
「겉보기랑 안 어울리는 어리광쟁이녀(女)…, 뭐, 뭐야…. 어린애같이 ‘쓰담쓰담’ 받아서 기뻐한다고?」
도아마스는 얼굴을 붉히며 으르렁거렸다.
「아, 아냐 나는 그, 라이도우가 털을 골라주고 싶어하는것 같아서! 소환주의 뜻을 따르는게 동료 악마의 역할이잖아, 그래서 그냥, 라이도우가 하는 대로 있었던것 뿐이야.」
「히호호홋, 히호호호호, 호호호호호호.」
― 그렇다면 비켜, 나는 라이도우한테 쓰다듬어 달라고 할테니까.
격앙해 일어선 도아마스는 라이도우의 쓰다듬을 받고 있는 호박머리를 쏘아보았다.
「뭐야! 너야말로 어리광쟁이잖아!」
「히홋.」
― 그래, 라고 말하는 백열의 안광이 도아마스를 바라본다.
개 악마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스스로의 악력에 손끝이 떨린다. 손바닥에 검은 손톱이 파고들어가, 선홍색의 피가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랜턴꼬마의 머리는 화장을 할 필요가 있는 모양이네…, 압정을 잔뜩 박아 넣던가 5치나 되는 바늘을 100여개정도 꽂아넣던가, 그래, 라이도우가 어루만지는 걸 주저할만할 정도로.
「힛, 호.」
살기를 느낀걸까, 부유하던 호박머리가 반원을 그리며 검은 외투의 그림자 속으로 도망쳐숨는다. 도아마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랜턴 꼬마, 알고 있을라나? 제일 큰일이었던건 라이도우란 말이야. 그렇게 높은곳까지 뛰어오르더니 불 속을 빠져나오기까지. 여기 어느 누구보다도 머리를 쓰담쓰담 해줘야하는 건 라이도우잖아, 알고 있어?!
도아마스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그는 샤이하니까, 말이나 태도로 드려내지 않는것뿐으로, 사실은 ‘쓰담쓰담’ 해주길 바라는 걸지도….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게 틀림없다. 그걸 하는 사람은, 할 수 있는 사람은,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랜턴꼬마의 랜턴으로 쓰담쓰담하면 큰 화상을 입는다, 고양마는 썩은 물고기 눈같은 육구(肉球)가 말랑말랑할뿐이고, 아테루이는 논외, 역시나…, 나다. 나밖에 없어!
피 맺힌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본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은 다섯개, 칠흑색이지만 손톱도 있다. 검은 손톱은 다소 길지만, 인간 여자 역시 자주 손톱을 기르곤 한다. 그와 마찬가지다. 도아마스는 손바닥을 혀로 핥았다. 주먹을 너무 쥐어서 피가 흐르곤 하지만, 침을 바르면 금새 멎으니까, 핥아서 깨끗이 해두자. 라이도우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럽혀져 있으면 미움받을지도 모른다. 할짝할짝 침을 발라 젖은 손을 털로 닦아내고, 다시 꼼꼼하게 핥는다.
「저, 기 말야, 라이도우.」
손을 뻗으려했지만 쭈그려앉아있던 학생모가 불연듯 일어섰다.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외투가 도아마스의 손으로부터 멀어져간다.
「에, 에엣. 내 손, 아직도 더러워?」
다시 손을 핥기시작했을때, 불기둥의 잔재가 작열음과 함께 솟구쳤다. 학생모의 챙이 향한 곳에서 흙먼지가 춤춘다. 패여진 대지에서, 박쥐악마 아르카드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키, 키기긱, 불사신이라고 말했을텐데.」
「충분히 탄 것처럼 보이는데.」
라이도우는 콜트에 새롭게 화염탄을 장전하며 말했다.
「이런건 금새 재생해, 이 육체는 불멸, 그 누구도 쓰러트릴 수 없다.」
「그런가―,」
총구가 들려올려진다.
찰나, 콜트가 튀어 올랐다.
「?!」
손에서 벗어나,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는 핸드건을 무시하고, 라이도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아니 어떠한 충격으로 인해 총이 튕겨져 나간것은 안다, 그것은 뭐지,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쏜건가.
14대 쿠즈노하 라이도우인 자신이, 전혀 알아채지 못하다니!?
「키긱, 왜 그러지, 총을 줍지 않는건가, 키기기기긱.」
거대 박쥐의 웃음소리에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가 겹쳐졌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해진 학생모를 따라 등뒤에 선 잭랜턴과 도아마스의 목도 움직였다. 안개의 일부분이 갈라지고 빛이 비쳐들어왔다.
새하얀 빛, 인간의 형태를 띈 빛이다.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와 함께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그 인영의 등뒤로 눈부신 후광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니, 그것은 인공적인 빛이다, 호광등의 빛이다.
걸어오는 인영의 등 뒤로만 붉은 벽돌에 화강암을 둘러넣은 화려한 외관, 불이 켜진 도쿄역이 어둠을 가르고서 떠올라 있었다.
「라이도우, 뭐야. 어째서 저녀석 등 뒤에만 현계의 풍경이 보이지?」
「즉, 이 이계를 지배하는 자란 의미다.」
「실례했군.」
인영의 거친 목소리가 울러퍼졌다. 13간(間)정도 거리를 두고 서있다. 하얀 턱시도를 입은 남자였다. 올백의 흰머리, 같은 색의 긴 구렛나루와 풍성한 턱수염, 연령은 중년이상 초로 이하정도일까. 그런데도 확실한 체구를 지녀서 키도 어깨넓이도 라이도우를 웃돌고 있었다.
「이번에도 야타가라스가 보내온 ‘청소부’라고 생각해서 말이네.」
남자의 얼굴에 드리워진 음영은 깊었는데, 미간에 새겨진 주름은 더더욱 깊었다.
「아르카드를 이렇게까지 몰아넣다니, 그 나이치곤 대단한 실력이야.」
「나는 청소부는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야타가라스의 사명을 받은 자다.」
라이도우는 칼의 츠바[鍔]에 손을 얹고 있었다.
누구인걸까, 무방비로 서있을 뿐인데도 압도적인 위압감이 밀려들어온다. 코끼리를 앞에 둔 개미가 된 기분이다. 이런 상대와 대치한 적은 과거 단 한번도 없었다.
「후훗, 야타가라스의 사명인가, 제도를 수호하는 라이도우란 말이로군, 몇 대째가 되지?」
「14대째 쿠즈노하 라이도우.」
「호오, 벌써 그렇게나 되었나.」
감개를 띈 목소리였다.
「야타가라스를 적대하는 자라고 판단하겠다.」
무라마사를 뽑아 그 끝을 하얀 그림자에게 겨눈다.
「훗, 적대하는 자라고 한다면?」
「제도에 이러한 이계(異界)를 만들어내고ㅡ 마차(魔車)나 박쥐악마를 소환한것은 물론 죽은 자를 농락한다. 처단하기에 충분하다.」
「젊으니 결론이 빠르군. 이 이계는 주변에 피해가 끼치지 않도록 만들어낸 것이다, 14대 라이도우. 그대와 나의 목적은 같아.」
「허언도 전법 중의 하나, 허언으로 현혹시키려한다면 무의미하다.」
「같은 목적인게다. 그렇기에 이렇게 나 스스로 나온게지. 야타가라스가 파견한 자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또 '청소부'일거라 생각했지 설마 라이도우라곤 생각지 못했다네. 무례를 저지른것은 사과하고 병사를 물리도록 하지.」
「병사를 물린다고?」
그 말을 잇듯이 검은 외투자락 뒤에서 도아마스가 외쳤다.
「웃기지마, 영감. 병사래봤자 옆에서 숯검뎅이가 된 박쥐 한마리뿐인데. 불사신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서있는게 고작일 것 같은데 물리고말고 할것도 없잖아.」
갱도 안쪽의 은광맥이 가지쳐나가듯 안개가 선이 되어 흘러나왔다. 새하얀 턱시도차림의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흐르는 안개 속에서 쿠라마텐구의 모습이 떠올라 오고 있었다.
라이도우도 들어 본적 있는 마물이다. 별칭은 대텐구[大天狗]. 민화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텐구처럼 코가 기이할 정도로 큰것도 아니고, 입이 부리의 모양을 한것도 아니다. 그 표정은 ‘오니의 가면’이라고 형용해야할까, 쿠라마텐구의 일족은 우시와카마루[牛若丸]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었다고 전해진다.
야마부시의 옷차림에, 이마엔 두건이 아니라 철륜, 등에 자란 남색의 날개, 각기 손에는 창이나 칼, 나각을 쥐고 있었다. 그래, 모습을 보인 쿠라마텐구는 한 마리만이 아니었다.
「히호~~」
잭랜턴의 한숨소리와 도아마스의 쉰 목소리가 겹쳐졌다.
「이, 이거 뭐야. 도대체 몇 마리나 있는거야? 어느사이에 포위당한거지?!」
셀 수 없다.
나란히 늘어선 텐구들 사이에 있는 가샤도쿠로, 네비로스, 오보로구루마도 여러마리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어둠을 대신해 마물의 군단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라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었다.
「어떻게,」
라이도우는 칼을 거며쥔채로 물었다.
「어떻게라네.」
새하얀 신사복의 남자가 의젓하니 턱수염을 쓰다듬는다.
「이 정도 되는 마물의 포진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했지. 후훗, 무력함을 한탄할 필욘 없네, 자넨 아직 젊은게다.」
「이런게 가능한 것은 야타가라스 뿐이다.」
「그렇지.」
「뭐?」
라이도우의 앞쪽에 작은 검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진짠가.」
검은 고양이, 고우토였다.
「설마, 진짜인건가?」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턱시도를 입은 사내의 미간 사이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 고양이, 혹여 고우토 동자인가?」
「오옷.」
고우토가 응했다.
「지금은 고양이에게 혼을 봉해 넣은건가, 후훗, 마지막에 만났을때엔 큰 도롱뇽이었는데.」
「그 몸은 움직이기 어려웠지.」
「고우토, 아는 사인가?」
라이도우는 낮게 물었다.
「몇대째나 전에, 몇 번인가 만난 적이 있지. 지시를 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누구지?」
「그 답은 이미 나와있다.」
검은 고양이의 목이 찬찬히 라이도우쪽을 돌아보았다. 고양이를 마주 바라보던 학사모의 챙 끝이 극히 짧게 좌우로 흔들렸다.
「현역 쿠즈노하 라이도우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이만한 포진을 깔아둘 수 있는 자라고 하면,」
「야타가라스―.」
「그렇다.」
고우토가 기나긴 한숨을 흘렸다.
「저 남자가, 야타가라스인건가?」
「극히 적지만은, 그 문양을 내려받은 인물이다. 즉, 야타가라스가 분신으로 인정한 것이지. 그 후손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이가’는 정통한 분가(分家). 그랬었지, 사이가 마고이치[雑賀魔護壱]여.」
*
고개를 들고 새하얀 턱수염을 쓰다듬는 사이가를 바라보며, 고우토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 야타가라스의 사자가 '불가침 조약'이니, '고래로부터 전해지는 동맹'이니 하던것은 너에 대한 말이었던건가. 뭐가 목적이지?」
「거기에 있는 14대째 라이도우와 같지.」
그 말과 함께 웃음을 흘린다.
「제도수호라는건가.」
「나라를 수호하는 그 자체가 내 목적이며, 야타가라스로서의 사명이지.」
「서양의 악마를 소환하다니, 그리스도교 혐오증은 나은건가?」
「이제와 수단은 불문, 목적을 달성해 내는 것이 전부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 제도의 수호는 그 어떤것보다도 우선되니까.」
「이거이거, 도쿄역에 이만한 군세을 모아서 도대체 누구와 싸울 셈인거다.」
「말해도 믿지 않겠지.」
사이가의 목소리에는 고독과 비애가 담겨져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믿고 말고도 없어.」
안개가 흘렀다.
어둠 속에서 썩은 해초같은 냄새가 옅게 떠돈다. 고우토는 그것이 어둠 깊은 곳에 몸을 감춘 죽은 자들의 냄새라는 것을 알았다.
「올거다.」
사이가의 쉰 목소리가 안개속을 퍼져나간다.
「나타날거야…, 머지않아……, 바로…. 시간이 없다, 서둘러야해….」
「뭐가 오지? 나타난다니?」
「말해도 믿지 않겠지…….」
「또 그 소린가.」
고우토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흘렸다.
「기관 야타가라스조차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 혼자서라도 할 수 밖에 없지.」
「3백년전의, 초대 사이가 마고이치[雑賀孫一]처럼 말인가.」
「그때는 야타가라스와 야타가라스가 서로 반목했었지.」
겐키(元亀) 원년에서 덴쇼(天正) 8년에 걸쳐 10년 동안, 이시야마(石山) 전쟁에서 사이가 마고이치는 '야타가라스의 문양 아래서' 사이가 군을 통솔해 싸웠다. 적은 시대의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전국시대 최대의 정치군사세력이었던 본간지(本願寺)파를 무너트리기위해 노부나가는 대군을 이끌고 10여년에 걸친 이시야마 공략을 행했다. 그것은 침략이나 진공이 아닌 냉혹무비한 '완전말살'이었다. 노부나가로부터 내려진 명령은 '그 땅에 사는자라면 짐승이라해도 살려두지 말것'이란 것이었다. 기나긴 전쟁이 이어져 마침내 이시야마는 제압되고 만다. 그리고 본간지 세력은 분열되어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노부나가는 마왕이었다.」
새하얀 턱시도의 사이가가 중얼거린다.
「비유가 아니라, 실로 마왕이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야타가라스가 기치를 들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실제로 일어선것은 사이가의 야타가라스 뿐이다.」
「야타가라스는 정치에는 관계치 않아.」
고우토의 울음소리을 라이도우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후훗, 그렇게 아닌척한 하면서 혼노지(本能寺)에서 노부나가를 죽인건가. 그것이 야타가라스 본가의 해결방식인가? 그렇다면 애초에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게 혼간지 파에 힘을 빌려줬으면 됐을것을.」
「하지만 혼간지의 중들도 농민에게 과한 세금을 물고 있던데다, 당시의 위정자는 노부나가였고, 무엇보다 ‘그러기로 결정한’건 내가 아니고.」
고우토가 헛기침을 한다.
「그래서?」
라이도우는 무라마사를 겨눈채로 물었다.
「훗, 제도 수호라는 목적은 같다는 소리다네, 14대째 라이도우군. 다툴 필요도 이유도 없어. 피차 불가침으로 하고 여기에서 헤어지기로 하지. 나는 바쁘다네, 시간은 얻기 힘들고 잃기 쉬운법. 서둘러야해서.」
사이가가 고개숙여 인사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거기에 떠도는 죽은 자들의 백령(魄靈)은 뭐지?」
「불가침이란 말의 의미를 모르는건가?」
새하얀 턱시도가 돌아섰다.
「아르카드는 사령을 모으고 있었다. 생전의 모습과 다를바 없을 정도의 영체라면 마력에 의한 통제나 금지된 술법의 사용이외엔 존재할 수 없다.」
「라이도우군. 잘 듣게나.」
「너는 제도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 말과 동시에 검은 외투가 전방으로 튀었다. 고우토의 저지의 목소리와 도아마스의 외침이 등뒤를 스친다. 돌진하는 새하얀 칼날의 앞에서 쿠라마텐구들이 신체를 방패삼아 제빠르게 하얀 턱시도를 둘러싸고 있었다.
「됐다.」
사이가의 일갈이 울려퍼지자 텐구들이 좌우로 갈라진다.
「후후훗, 의견조차 묻지않고 문답무용인가, 젊다는건 굉장하군.」
검은 외투와 하얀 턱시도의 사이에 장애물은 없다. 바람이 선이 되어 질주한다. 턱시도를 입은 사이가가 팔을 들어올려 라이도우를 가리켰다. 그 순간, 라이도우의 시야를 떠돌던 바람의 흐름이 역행했다.
「큭!」
몸이 반전된다. 밀려 되돌아온다. 아니, 그것은 지나치게 간단한 표현이다. 뒤쪽으로 튕겨 날아가고 있다.
「안심하게나, 같은 목적을 지닌 자를 죽일 맘은 없네.」
가까이에 있을 사이가의 모습이 저쪽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허나 젊기에 행할 수 있는 만용을 그리 자주 내비쳐도 곤란하지.」
콜트를 튕겨낸 ‘힘’이다.
「잠시동안은 바닥에 뻗어계셔 주실까.」
사이가의 손끝에서 나오는 힘인가, 정체는 뭐지? 빛도 소리도 없이, 굉장한 압력만이 엄습해온다. 그런 것은 ‘기’― 기의 응집체인건가.
「제도를 지키기위한 결계가 임계점을 넘을 때까지 말이네.」
잡음과 충격음이 라이도우의 귓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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