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Bite
다카스오/스오우의 어느 미련과 독점욕 숙부
「흠, 흠~ 흐음~」
콧노래를 부르며, 뜰로 나가 빨래를 걷었다.
기묘하게도 오른팔을 못쓰게 된 후로 전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집안일을 돕게 되었다. 가사일은 야시로 씨가 완벽하게 해주니까 솔직히 내가 나설 자리는 없으나, 간단한 일을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내가 손을 대면 효율이 더 좋지 않다는 건 아니까, 이건 단순한 자기 고집이다.
타카야 씨도 야시로 씨도 「그럴 필요 없다」고 하지만, 「전처럼은 무리더라도 뭐든 조금씩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부탁하자, 내 고집을 허락해주셨다. 뭐, 이것도 수행이라 그거지.
시간을 들여 수건을 바구니에 담으며 힐끗 시선을 들어올렸다.
「왠지 엄청 안개가 심하네……」
대체 이 안개는 어디서 솟은 걸까. 이제 겨우 두 시가 지났는데, 이미 모가리야마의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낮부터 짙은 안개 주의’ 안내, 분명 일기예보 앱에는 없었는데. 이거 몇 시간만 더 지나면 1m 앞도 보이지 않겠는걸.
「모가리 마을은 시즈오카였나……?」
다행히 오늘은 휴일이라 타카야 씨는 집에 있기에, 안개 때문에 사고를 당할 걱정은 없었다. 야시로 씨에게도 「오늘 마당일은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라고 말해두자.
「……응?」
시간을 잔뜩 들여 빨래를 거둔 후, 한숨 돌리던 그때. 담벼락 문을 열고, 터벅터벅 불안한 발걸음 소리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마당 안에서 서로의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남자아이,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일까. 그 녀석은 내 모습을 보더니, 불안한 표정으로 멈춰섰다. 마치 거기에 누가 있을 줄은 상당도 못했다는 듯이.
괜히 겁을 주지 않게끔, 몸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왜 그래? 길을 잃었어? 이름은 말할 수 있어?」
내가 모가리 마을 모든 집을 꿰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우리 동네에 이런 아이가 있었나?
내 질문에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던 아이는, 오히려 나를 째려보았다. 생각보다 눈빛이 강했다.
「길을 잃은 거 아냐. 여기가 내 집인걸. 형은 누구야? 엄마는? 형아는 어디 있어?」
「……뭐?」
이 녀석, 무슨 소리야?
멋대로 들어와 놓고, 여기가 자기 집이라고 우기는 정체불명의 미아. 이 녀석, 오멘이나 에스더 같은, 뭔가 위험한 무언가인가…?
내가 눈썹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불안감이 극에 달한 거겠지. 삽시간에 아이의 눈이 촉촉해졌다.
「……흐에엥…. 엄마, 형아…… 어디 있어?! 어디야…?!」
「으아악…… 울지 마」
우는 아이는 이길 수 없는 법.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당황해 하고 있자니.
소란을 헤아린 거겠지. 복도 안쪽에서 타카야 씨가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지, 스오우 군——」
그 순간, 울던 아이의 얼굴이 활짝 개였다.
「—형아!!」
아이는 내 옆을 넘어, 댓돌 앞에서 채 신조차 벗지 않고 와락 타카야 씨한테 매달렸다. 타카야 씨는 조금 놀라면서도, 그 작은 몸을 받아세웠다.
「앗, 잠깐… 너!!」
「아니, 됐다. 괜찮아」
그 지나친 행동을 꾸짖으려고 했으나, 당사자인 타카야 씨가 저지했다.
아이는 스스로 매달려 놓고서, 타카야 씨의 아름다운 모습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그제서야 크나큰 실수를 깨달은 것처럼.
「……형아가 아니네. 형아, 형아 말고도 형제가 있었나…?」
얼굴에? 표정을 지으며 묻는 아이를 향해 타카야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오우 군」
「네?」
「웅?」
나와 아이의 대답이 멋지게 어우러진다. 서로 얼굴을 맞대는 우리를 보며, 왜인지 타카야 씨 혼자 뭔가 알고 있는 표정으로 쿡쿡 웃었다.
「절대 나만큼은 잘못 볼 리 없지. 이 아이는 스오우 군이야. 오래 전, 처음 날 만났던 7살 나이의 스오우 군」
「네…? 뭐라고요?!」
아이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이게 나? 7살 당시의, 타카야 씨를 형아라 부르던 나? 뭐야…. 살짝 충격인데? 분명 좀 더 영리한 아이였을 텐데… 이 멍청한 표정이 정말 맞나…?
「아니, 그보다 어째서 어린 내가 여기에…?!」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때의 쓰라린 기억이 되살아난 거겠지. 타카야 씨가 고통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그때의 너는 이렇게 작았구나……」
「안 작아. 키로 세면 앞에서 5번째란 말이야!」
「앞에서 5번째면 충분히 작네」
「우………」
내 대꾸에 뿌우 하고 뺨을 부풀린다. 「미안, 미안」하고 대신 사과하는 타카야 씨의 눈이 부드러웠다.
「만나서 반가워, 스오우 군. 아저씨는 스오우 군의 형아는 아니지만, 네 편이야.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단다」
와타나베 스오우한테 오오에 타카야의 얼굴이 "먹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숙부는 아이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하면서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훌륭하게 성공했다. 나한테는 불신과 경계심을 드러내면서, 타카야 씨는 일절 의심하지 않는 일 없이 끄덕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너 진짜… 그런 점이 말이지…. 나지만 진짜 속보여서 별로다.
「어머니나 형아가 돌아올 때까지, 아저씨랑 놀면서 기다릴까?」
「그래도 돼?」
「물론이지. 여기는 네 집이잖아? 사양할 필요 없어」
매혹적인 제안에 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홀라당 넘어가면서 용케도 살아왔구나, 나.
「오쿠미즈, 이 아이한테 간식을 챙겨다오」
타카야 씨는 몸을 일으키더니, 아까부터 이쪽을 바라보며 '하와아…'하고 눈을 빛내는 메이드 가이를 불렀다. 야시로 씨는 「Dig in!」이라는 말을 들은 개처럼, 파닥파닥 뛰어왔다.
「와아~ 귀여운 손님! 알겠습니다~」
「메이드 씨?!
「네, 메이드랍니다. 뉴후후훗♡」
타카야는 웃으며 메이드 가이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를 가볍게 안아올렸다.
「오렴, 스오우 군. 저쪽에서 잔뜩 이야기를 나누자」
「응」
'아' 하고 내가 작게 소리를 낸 것도 모르고, 타카야 씨는 어린 나와 함께 거실로 가버렸다.
숙부한테 악의가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 와타나베 스오우는 그 자리에 남겨졌다—. 그리 느낀 순간의 쓸쓸함은 도저히 감출 수 없었다.
「아저씨는 친절하구나. 형아랑 똑같아……」
간식을 먹으며 7살짜리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카야 씨는 아버지와 형아 사이에 있는 형제. 이 꼬맹이는 혼자 그렇게 납득한 모양이었다. 타카야 씨도 굳이 그 오해를 풀려 하지 않았다.
그때 아이가 타카야 씨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그러지?」
「아저씨라면 우리 새 아빠가 되어도 좋을 거 같아. 우리 엄마, 가슴은 작지만 상냥하고 귀엽거든?」
…이 녀석,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어린애 특유의 엉뚱한 말에 타카야 씨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입가를 가렸다. 아— 그 부드러운 얼굴이란.
「……?」
좀 전의 그 대화에서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으나, 그게 무엇인지 캐묻기도 전에 타카야 씨가 입을 열었다.
「그건 영광인데, 네 형아는 파파가 되면 안 되는 건가?」
「안 돼~. 형아는 내 형아인걸! 파파가 아니야」
「스오우 군은 형아를 좋아하는구나」
「좋아. 형아도 나이를 먹으면 아저씨처럼 될까…?」
「그럼. 분명 그렇게 될 거야. 스오우 군, 스오우 군은 형아가 이 아저씨가 되면 싫을까?」
「아냐. 아저씨는 멋진걸. 우히히, 기대되네……」
7살의 나는 타카야를 올려다보며 황홀한 표정으로 웃고, 숙부는 아이의 두서없는 이야기에 한없이 상냥하게 맞장구 쳤다.
혼자 멋대로 추측한 거지만, 타카야 씨는 사실 아이를 거북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카야 씨는 지금 극히 자연스럽게, 마치 아이의 친아버지처럼 행동하고 있다.
「여기, 묻었네」
더럽혀진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동작이 몹시나 익숙했다. 7살짜리 나는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들이며 눈썹을 축 떨구었다.
「우움…… 죄송합니다」
「괜찮아. 천천히 먹도록」
그야말로 지극정성이다. 내 눈앞에서. 그건 내가 아닌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야시로 씨가 끓여준 차를 마시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대체 아까부터 뭘 봐야하는 걸까, 나. 연상의 남자가 베푸는 자애. 친아버지도, 당시의 숙부도 결코 내게 주지 않았던 것을 아낌없이 받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속이 묵직해졌다.
아니, 나는 타카야 씨를 원망하고 그러진 안항ㅆ다. 서로 지닌 모든 것을 나누고, 인과를 해결한 지금. 내가 이 사람을 원망할 리가 없지.
그 시절의 그는 지금의 내 또래였으며, 증오스러운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한테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제대로 정리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그저 필연이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무리다. 이건 도저히 못 보겠다. 하지만 추하게 질투하는 모습을 숙부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 자존심은 있다. 7살짜리 아이와 동급이 되는 건 사양이다.
들키지 않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꼬맹이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팔려 이쪽을 보지도 않은 타카야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꺅, 꺅 하고 웃는 소리와 즐거운 듯 맞장구 치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려와서 귀를 막고 싶어졌다.
주방에서는 야시로 씨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메이드 가이는 평소보다 다부진 모드였다.
「저녁밥은 뭐가 좋을지 모르겠네요. 아이가 좋아할 메뉴로 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요……」
무뚝뚝한 반응에 고개를 돌려, 노골적으로 기운이 없는 나를 발견한 야시로 씨가 순간 당황했다.
그 모습에 미안해져서, 일부러 농담조로 말했다.
「이거, 나도 참 수행 부족이네요. 어린애 상대라지만 NTR 내성이 없어서 좀 힘든 거 같아요」
「스오우 님, 나리는 결코 그런 생각이——」
「알고 있어요」
쓴웃음을 띠우며 그 뒷말을 가로막았다.
타카야 씨는 오래 전, 내가 자칫 죽을 뻔햤던 일에 큰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 불안할 미아를 함부로 대하는 건 인간된 도리도 아니고.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간과할 수 있냐 없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아, 저 잠깐 적당히 머리 좀 식히고 올게요」
「스오우 님, 조금 전보다 안개가 더 짙어졌어요! 지금 밖으로 나가시는 건 위험하세요」
「잠깐, 현관 앞에서 심호흡만 하고 올게요」
「우우…… 스오우 님……」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붙잡는 야시로 씨에게 손을 흔들어 준 후, 나는 오오에 가를 뒤로했다.
멀리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돌아보니 사방이 안개로 자욱했다. 몇 분이 지나자, 오오에 가로 돌아갈 길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자포자기가 되어 되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익숙해지 모가리 마을, 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엉?」
나의 부족한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뺨에 툭 하니 닿는 차가움. 숨 쉴 틈도 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으악, 최악」
이게 바로 설상가상인가.
다급히 가장 가까이에 있던 큰 나무 밑으로 피신했다. 이만한 나무가 있으면 현재 위치 정도는 대략적으로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 모가리 마을은 조금만 길에서 벗어나면 그야말로 심산유곡이었다. 이 마을에서 나무를 약속 장소로 삼으면 원조 『너의 이름은』처럼 애틋한 엇갈림을 필연적으로 맛보게 된다.
「나도 참, 대체 뭘 하는 건지……」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자신의 어리석음과 지금의 이 그림 같은 비참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역시 어른인 척,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 두 사람을 바라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어린 내게, 그 무렵 해주지 못했던 일들을 최대한 해주고 싶어하는 타카야 씨의 기분은 절절히 이해한다. 반대 입장이라면, 나도 그랬겠지.
하지만 그가 친절하게 대하는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혹시라도 타카야 씨한테 날 선 말을 던지기 전에.
적어도 여기 있으면 무성한 입사귀로도 완전히 막을 수 없는 빗방울 덕분에 물리적으로도 머리가 식겠지.
육체와 무관한 기묘한 피로감을 느끼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를 바보 취급하는 것처럼 빗방울이 떨어져서, 목덜미를 타고 흘러떨어졌다.
「에효…. 한심하기도 하지……」
엄마 다음에는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이라니.
타카야 씨랑 얽히면 뭔가 자기와 같은 피를 나눈 사람들만 질투하는 느낌이다.
얼마만큼 그러고 있었을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귀로, 불현듯 빗소리와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물을 튀기며, 누군가가 정신없는 발걸음으로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였다. 그것이 집쪽에서 들리는 것인지 아닌지는, 안개 때문에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지만.
「……타카야 씨?」
싸늘하게 식어가는 내 몸에 미약한 기대감이 불켜졌다. 내가 없는 걸 알고 일부러 찾으러 온 건가?
쑥스러움과 기쁨에 '타카야 씨'하고 부르기 직전 멈춰섰다.
짙은 안개 속에서 얼굴도 모르는 인간이 날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정말로 타카야 씨가 맞나…?
갑자기 밀려오는 두려움에 몸이 뻣뻣해졌다. 어둠이 그러하듯,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원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짙은 안개 속을 돌아다닐 바보는 나 하나 뿐이다. 그런 때 이 발소리의 주인은 도대체 뭐가 그리 급한지..…….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내 눈앞에 안개 속에서 불쑥 인영이 뛰쳐나왔다.
「으악?!」
말해두겠는데, 놀라 외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이런 곳에 선객이 있을 줄 몰랐겠지. 단정한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소리를 높인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듯이 거북한 눈빛을 보였다.
「아……, 안녕」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다소 긴장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럼에도 확실하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어렸다.
내가 옆으로 비켜서서 자리를 양보하자, 그는 비를 피하기 위해 거기에 섰다.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상대가 서 있는 쪽, 몸 절반이 부자연스럽게 뜨겁게 느껴졌다.
실례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그래. 그가 잘못 보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나 역시 잘 못 볼 리 없다.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타카야 씨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예전, 그래…. 어린 내가 형아라고 불렀던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
이 무렵이 이미 성장은 끝났겠지. 키는 지금과 비슷했으나, 신체의 탄탄함이 아직 부족했다.
하지만 그 탁월한 조형이 이 세상에 둘일 리 없다. 다른 사람이 틀릴 수 있어도, 난 절대 틀리지 않는다.
이 사람은 타카야 씨다.
내 형아다.
초등학생인 내 눈에는 완숙한 어른으로 보였던 형아였으나, 지금 이렇게 나란히 서 보니까 나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고등학생이란 걸 알겠다. 아니, 물론 안면 편차치나, 키 차이 등등의 메울 수 없는 격차는 있지만. 같은 반이 되어도 절대 접점이 없겠지, 나랑 이 사람….
「비가 갑자기 내렸네요」
「그러게요……」
떠보는 듯한 말에 대답하면서, 그는 긴 속눈썹에 묻은 물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아,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정말이지 촉촉하고 싱그러운 남자 그 자체구나.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네? 뭔데요?」
타카야 씨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와서, 나는 펄떡 일어났다. 타카야 씨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얼굴을 살피듯이 들여다 보았다.
「혹시 당신, 시즈메 씨의 친척이십니까?」
무심코 미끌할 뻔했다. 아니, 뭐… 이만큼 닮았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겠지.
여기서 섣불리 부정하면 괜한 의심을 살 수 있다. 거짓말도 처세의 일종. 나는 다급히 웃음을 띠었다.
「아, 넵! 맞아요. 저는 시즈메 씨의 사촌 동생인 와타나베 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즈메 씨의 의붓동생인 오오에입니다. 집을 나가 있어서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타카야 씨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 무렵 타카야 씨는 이미 어머니를 좋아했기 때문에— 내가 또래란 걸 알면서도 어머니의 친척한테 좋은 인상을 주고자 유달리 예의를 차린 거겠지. 그 모습에 약간 가슴이 따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나의 고뇌 따위 알 리 없는 타카야 씨가 퍼득 깨달은 듯 말을 이었다.
「와타나베 씨, 이 근처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남자아이 못 보셨습니까? 시즈메 씨의 아들인 스오우 군을 안개 속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이 정도 쯤'하면서 손으로 제 허리 근처를 가리켰다.
……과연, 대충 알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안개 속에서 과거의 모가리 마을과 지금의 모가리 마을이 이어진 모양이다. 그리고 그는 필사적ㅇ로 이 자욱한 안개속에서 자취를 감춘 어린 나를 찾고 있었다고.
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냉정했다.
모가리 마을에는 오니도 히루코도 메이드 가이도 있다. 새삼 과거의 나나,과거의 타카야 씨가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거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지난 여름, 평생치를 경험했다.
상황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지금 오오에 가문에 꼬맹이를 보호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일단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아이라면 집에 있을 거예요. 아까 오오에 가문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거든요」
「그렇군요, 다행이다……」.
뭐랄까, 그 말에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곁으로 꾸며낸 안도가 아니란 느낌? 이 타카야 씨는 누가 봐도 조카가 무사하단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아니, 잠깐. 잠깐만. 이 시기, 타카야 씨는 나를 혐오하지 않았던가……? 의문을 풀기도 전에, 타카야 씨가 말을 이었다.
「와타나베 씨는 지금부터 돌아가려던 참이신가요?」
「네. 그러다 마침 안개에 갇혀서…」
「안개가 걷힐 때까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이래선 현지인도 조난당할 수 있으니까요. 뭣 하면 오늘은 우리 집에서 묵고 가시는 건 어떠실까요?」
「고맙습니다.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신세 지겠습니다」
아니, 그 경우 내가 묵게 되는 것은 어느 쪽 오오에 가문이지? 우리 집? 아니면 그들이 있는 오오에 가?
불현듯 떠오른 그리운 얼굴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거기엔 아직 살아 계신 어머니가 있겠지. 한번 만나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나를 모르는 어머니라 할지라도. 가능하다면 그 밝고 시원시원한 말을 다시 듣고 싶었다.
눈물 대신 앞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7살짜리 내가 나타난 후로 왜 이렇게 센티멘털하게 구는 거냐고, 나.
옆에서 느껴지는 타카야 씨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자, 친근감 어린 미소가 돌아왔다.
그래, 어린 나 빼를 제외한 모두에게 향해지던 완벽한 미소.. 날카로운 눈매, 높은 콧대, 신이 만들어낸 완벽한 조형물. 나이와 무관하게, 도저히 자신과 혈연이 있는 걸로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다행이네요. 만약 형이 살아 있었더라면, 시즈메 씨의 친척이 저희 집에 만약 오빠가 살아있었다면 시즈메 씨의 친척이 우리 집에 놀러온다는 건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요」
「네?」
형이 살아 있었더라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내가 모가리 마을로 돌아오기 2년 전쯤으로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초등학생일 땐 아직 살아 계셨을 텐데? 하지만 여기서 타카야 씨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내심 혼란스러워하면서, 자연스럽게 되물었다.
「지금은 셋이서…… 살고 계신가요?」
「네. 시즈메 씨와 스오우 군, 저 셋이서 살고 있습니다. 시즈메 씨한테서 못 들으셨나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타카야 씨. 확실히. 집에 놀러올 사이의 사촌이 오오에 가문의 가족 구성에 대해 모른다는 건 이상하겠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래, 조금 전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거였다.
새로운 아빠. 7살인 내가, 이미 아버지가 없는 것을 전제로 말했던 것에 위화감을 느꼈다. 아쉽게도 그땐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어디가 부자연스러운지 알아채지 못 했지만.
조금 전 나는 과거와 미래가 이어졌다고 판단했으나— 이건 타임 슬립이 아니었다. 애초에 다른 세계다. 어디서 어떻게 분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내가 살아온 것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약해졌으나, 진한 안개는 아직도 이 세계를 이 나무 아래에 가둬두었다.
혼란스러움에 사로잡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자니, 타카야 씨가 작게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와타나베 씨는… 정말로 시즈메 씨랑 똑같이 생기셨군요. 마치 남매같아요. 그런 말 자주 안 들으시나요?」
「어? 그래요? 아하하하… 그런가?」
번거로운 듯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타카야 씨가 살짝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자신이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것이 남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잘 알고 있는 웃음.
그 아름다움에 반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자니, 차가운 손가락이 내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저, 저기……」
비에 젖어서 그런 거겠지. 숙부의 몸에서 샴푸인지 뭔지 모를 좋은 냄새가 나서 당황했다.
어? 뭐지, 이 상황. 마치 키스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잖아.
아니, 아니. 말도 안 돼. 이때 타카야 씨는 어머니에게 반한 상태였다. 같은 얼굴이라면 누구든 좋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랑 타카야 씨도 실제론 이것저것 극복끝에 겨우 맺어진——
「그래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미소를 띤 타카야 씨의 얇은 입술 사이로 새하얀 송곳니가 언뜻 보였다.
「――너, 정말로 그녀의 사촌인가?」
내 두 눈을 찌른 것은, 거짓을 허용치 않는 붉은 시선.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려던 그 순간.
「——윽?!」
그대로 멱살을 붙잡혀 나무둥치에 내리쳐진 내 입에서 압축된 공기 덩어리가 밀려나왔다. 타카야 씨가 조금 전까지 띠고 있던 미소는,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발 디딜 곳을 잃어버린 발가락이 허공을 긁고, 무시무시한 악력에 기도가 막혔다.
「그녀는 외동이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의지하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로 와타나베 가문을 질색하지. 놀러 올 정도로 친한 사촌이 있다는 이야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우리가 우연히 외출한 사이에, 자칭 그녀의 친척이, 이런 시골 마을까지 사전 약속도 없이 놀라왔다고?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할 셈인가?」
「타, 타카야 씨――」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나는 네게 성밖에 밝히지 않았을 텐데?」
「커윽!!」
경솔한 발언 때문일까. 다시 한번 나무둥치에 내리쳐졌다.
찰나, 언뜻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나눈 그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이 나무 아래에서 서로를 인식한 그 순간부터 이미— 이 사람은 나를 적으로 보고 있었던 걸까?
「아, 아아아… 아윽……!!」
목구멍을 꽈악 짓누르는 힘은 이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동공은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고, 그 눈동자는 타는 듯한 붉은 빛이었다.
오니의 힘은 이미 몸소 맛보았다. 한쪽 팔만으로도 날 손쉬이 목졸라 죽일 수 있겠지.
정면에서 쏟아지는, 묵직하기까지한 증오와 살의. 상대가 타카야 씨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거품을 물고 기절했겠지.
「나는 오오에 가문의 유일한 남자다 어디의 말뼈따귀인지도 모를 무리가, 우리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내버려둘 것 같나? 시즈메 씨와 스오우 군, 둘 중 하나라도 무사하지 않으면… 알겠나?」
「커, 윽……!!」
「안심해, 죽이진 않을 테니. 팔다리를 부러트려 벌거벗긴 채 모가리야마에 던져주마. 원래라면 천적도 뭣도 될 수 없는 야생 동물에게 천천히, 산채로 뜯어먹히게 되겠지. 알고 있나? 그들은 일단 눈알이나, 혀, 성기 등의 부그럽고 먹기 쉬운 부위를 노린다. 너는 시각을 잃고, 도움을 청할 혀도 잃고, 사내로서의 존엄성도 잃게 될 거다. 뭐, 도움을 청해봤자 모가리야마에서 널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야. 기뻐하도록. 내일은 사람이 산에 들어설 수 없는 금족일(禁足日)이다. 네 비명소리는 공공연연히 무시당하겠지. 내일 모레까지 살아있다면 혹시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물론 그때는 너 자신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말이야」
「읏, 흐읏……」
꽈아아악 목을 조르며, 오니가 웃는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오줌을 지릴 정도로 무서웠다. 이 지옥 같은 시선 앞에서 '나는 미래의 와타나베 스오우입니다'하고 바보처럼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고 하자. 그 다음 순간, 분명 뼈가 부러져 있겠지.
어떻게 말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들은 나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거기에는 어머니도 살아 있고, 형아도 나랑 사이가 좋고, 셋 다 아무 문제 없이 살고 있겠지. 내 말실수로, 그들의 세계에 괜한 악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커헉… 아…… 윽……!」
대답하지 않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 걸까, 목에 가해지는 힘이 늘어났다.
설령 힘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걷어차거나 긁는 등 마음만 먹으면 뭐든 반항할 수 있었겠지. 애초에 나는 그러한 성인(聖人)이 아니며, 평화주의자도 아니니까.
하지만 불가능했다. 설령 이 사람이 내게 폭력을 휘두르더라도, 내가 이 사람한테 폭력을 휘두를 순 없었다.
타카야 씨는 타카야 씨다. 그것이 나의 타카야 씨가 아니더라도, 또 하나의 내게 있어 둘도 없는 타카야 씨다. 다른 세계의 내가 혹시라도 내 소중한 타카야 씨를 상처입힌다면— 나는 그 녀석을 용서하지 않겠지.
「……큭…… 타, 카야…… 씨…… 괴로워……」
마침내 산소 결핍으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헛수고라는 것을 알면서도 왼팔 하나로 어떻게든 억센 팔을 떼내려 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 오른팔이 장식용 의수란 걸 깨달은 걸까. 순간, 팔에 들어간 힘이 약간 느슨해져서 겨우 땅을 딛을 수 있었다.
「――쿨럭, 쿨럭……!!」
애타게 기다려온 공기가 기도를 찢고 들어오는 느낌에 세게 기침했다.
「고개를 들어라.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어」
숨을 크게 들이킨 순간, 억지로 얼굴을 틀어잡혀서 그런 거겠지. 차가운 엄지손가락이 우연히 입안을 파고 들어왔다.
「흐에에……?!」
순간 깨물릴 것을 경계한 거겠지. 붉은 눈동자가 한층 더 험악해졌다.
순간적으로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으나, 그 후로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않고 도망치지도 않는 내 모습을 보고 당황한 듯 타카야 씨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 어… 으…망…… 옹까락…… 놔……!」
타액이 손가락을 타고 손목께를 적셨다. 더럽힐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당치도 않게 타카야 씨가 손가락을 밀어넣어왔다.
「그, 아… 타아야… 이…… 으응?!」
혀를 눌린 탓에, 자연히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내가 깨물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얻은 거겠지. 중지와 집게손가락까지 비집어 넣더니, 도망치려하는 혀를 붙잡는다.
혼란에 빠진 나를 젊은 숙부가 귀족적인 잔인함을 담아 냉혹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우…, 우… 이… 이어… 놔…… 우에요……!」
「왜 그러지? 말해. 넌 대체 누구냐?」
말하라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아마 진심으로 내 정체를 묻는 게 아니겠지. 이미 이 사람 안에서 그 목적은 변해가고 있었다. 심문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며 놀고 싶어하는 방향으로.
「우에에………… 우어………! 흐우…………」
미지근한 침이 턱을 타고 뚝뚝 흘러떨어졌다. 이 사람, 약간 결벽증 기질이 있는데 내 침이 묻는 것이 신경 쓰이진 않는 걸까?
「으…… 으망……! 이어… 와…… 와 우에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
노골적인 조롱에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치사해. 나는 이렇게 침으로 젖어 멍청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청결한 모습이라니.
무심코 째려보자, 고작 그 정도 반항조차 용납하지 않는 듯 보면 그 정도의 반항도 용납하지 않는 손가락이 혀를 꽉 잡아당겼다.
「이어……! 아야, 아으아오…!!」
「말할 마음이 없나? 이 쓸모없는 혀, 이대로 뽑아줄까?」
말과 달리 차가운 손가락은 고통을 주고자 하는 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심술을 부리는 동작이었다. 세 손가락으로 재주도 좋게 혓바닥 뒤와 옆을 동시에 훑는 듯한 흉내를 낸다.
「우, 아… 으…… 으안………♡」
눈앞이 안개와 상관없이 흐릿해졌다.
바보. 고작 혀 좀 주물러졌다고 반응하지 말라고! 타카야 씨에 대한 내 쾌락 내성이 너무 허접 아니냐고. 아, 위험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익숙한 그거라서.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위험했다.
「하하. 뭐야, 그 얼굴은? 꼴불견이로군, 너」
내 모습을 보고, 그 우아한 입술이 가학의 빛을 띤다.
오니에게 있어 성욕과 식욕과 살의는 긴밀하게 이어져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의 무사를 확인할 수 없는 불안감, 외적에 대한 살의, 거기에 나의 묘한 반응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아, 진짜 최악이다. 그런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설령 7살인 내가 원해도, 이 사람이 아이한테서 피를 착취할 리 없다. 그가 여전히 통제할 수 없는, 피에 대한 갈증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자칫 날 상대로 과오를 범할 가능성이 있었다. 어쨌든 성별만 다를 뿐, 얼굴 생김새는 그가 깊이 사랑하는 여자와 똑같기 때문에.
과오. 그 한마디에 가슴 속이 꽉 막혔다. 줄곧 감춰왔던 미련이 술렁거렸다.
도소의 피의 은총은 한 사람당 생애 한번.
히루코가 스스로 원해서 내놓으면 효과는 몇 배로 뛴다.
따지고 보면… 다른 이 세계의 이 사람은 아직 도소(屠蘇)의 피 동정(노 카운트) 아닌가?
「이어 아요!! 옹아아 아 줘…」
내 말투가 달라진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걸까, 타카야 씨가 슥 눈썹을 치켜떴다.
「뭐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우웨엑…… 콜록!」
타카야 씨가 타액의 실이 드리워진 손가락을 떼자, 마침내 숨쉬기가 편해졌다.
말을 재촉하듯, 침으로 젖은 손가락이 입술을 덧그린다. 나는 침으로 입가가 끈적끈적해진 상태로, 숙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정체라면… 말보다 피로 증명하는 게 더 빨라」
「……뭐?」
그 한마디에 순간 타카야 씨가 멈칫했다.
「모, 목숨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내 피를 마셔. 그럼 내가 당신에게 적의가 없다는 걸 확실하게 증명해줄 거야」
「무슨 소리를――」
「모르는 척 할 필요 없어. 오오에 가문의 남자가, 이 말 뜻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스웨터를 살짝 젖혀, 경동맥을 드러냈다.
굶주린 짐승의 코앞에 레어 스테이크를 내미는 것처럼. 오니의 귀에는 분명 피 흐르는 소리까지 들리고 있겠지.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혹은 일부러 자극하기 위해 웃어 보였다.
「……자, 마셔도 좋아. 내 게 아니더라도, 당신은 타카야 씨니까. 도소의 피는 오오에 타카야,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사양할 필요 없어」
「너 대체…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었지?!」
「아니, 그러니까 의문을 해소하려면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라니깐? 내 피가 당신에게 아무 득이 되지 않는다면, 아까 말한 것처럼 산에 버리던가. 이 제안은 그쪽한텐 득 밖에 없지 않아?」
꿀꺽, 새하얀 목이 움직였다.
모르는 사람한테 과자를 받아선 안 된다. 그것이 생애 한 번밖에 입에 담을 수 없는 달콤한 과자라면 더더욱.
충동과 경계와 의심과 굶주림. 그것들이 그의 마음 속에서 격렬하게 다투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기에 나는 웃었다. 이 고귀한 사람의 갈등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아니면 내가 무서워? 오니 주제에」
도발하자마자 타카야 씨는 내 몸을 나무 둥치에 몇 차례씩 내 몸을 내리쳤다. 목덜미에서 송곳니가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고말고, 히루코 상대로 이런 능욕을 용납할 사람이 아니다.
「죽여버리겠어……!」
불타오르는 붉은 눈으로 그렇게 말해도 무섭지 않다. 오히려, 애타게 갈망해온 순간에 안도의 한숨마저 새어나왔다.
오른팔을 잃은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팔 하나로 두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진심으로 값싼 대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가급적이면 그런 식으로 바치고 싶지 않았다고. 이렇게 저 자신의 의지로, 둘이서 서약을 나누 듯 이 목덜미를 바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타카야 씨는 이제 내 피를 마시지 않는다. 굶주림을 극복했으니 그럴 필요도 없다. 그 후로, 그 사람은 나를 상처 입히는 것을 극단적으로 기피하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바랄지언정, 그 목덜미에 그 사람의 송곳니가 박힐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후회가 있다면 오직 그것뿐. 변칙적이긴 하지만 그 소원을 이제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오오에 타카야가 저 스스로의 원하여 내 피를 마시고, 나는 이 피로 그를 돕는다.
따끔, 송곳니 끝이 피부를 스치던 그 순간——
「……형아~, 형아~~!!」
올곧게, 망설임없이. 타다닥, 작은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안개 입자를 둘러 쓴 작은 실루엣이 타카야 씨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 순간 험악한 분위기가 사그라지고, 타카야 씨는 어린 나를 받아들였다. 그의 눈동자에서 피에 대한 흉폭한 갈증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스오우 군!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어」
「미안……」
「괜찮아. 무사해서 다행이야」
안부를 확인하며 꼬옥 서로를 끌어안는 그 모습을 보며 똑똑하게 깨닫게 된다.
아아, 역시나—. 그들은 그 시절의 우리와 다른 존재다.
「형아, 나 확실하게 형아를 찾아냈어. 굉장하지?」
「응, 굉장하네」
아이는 만족스러운 듯이 후후 하고 웃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부러움과 동시에 지금 이곳에 없는 사람이 너무나도 그리워졌다.
……그래, 이 사람이 아니다. 내가 물리고 싶었던 건 나의 타카야 씨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깨물고 싶은 것도, 분명 내가 아니겠지. 그래 이것은 서로에게 있어 운 좋은 사고에였던 거겠지.
목소리는 변함없이 들리지만, 불과 몇 미터 앞에 있을 그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내게 확실한 현실은 내 등뒤에 있는 나무 둥치의 감촉뿐.
「형아, 집으로 돌아가자」
「응……」
아이를 안은 채 나를 힐끗 쳐다본 타카야 씨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벌리려 했으나.
무슨 말이 나오기도 전에, 두 개의 세계는 새하얀 안개에 가로막혔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자니, 다소나마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안개가 가시긴 했다.
놀랍게도— 바로 집 근처였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자칫 조난당할 뻔하다니. 이거라면 걸어 돌아갈 수 있겠지.
두 사람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백일몽을 꾸는 듯했다.
조금 전 느낀 불안감이나 질투심 같은 건 이미 내 안에서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비에 젖었지만, 바로 씻으면 된다.
「스오우 군」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아직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빗속, 검은 우산을 들고서— 숙부가 거기 서 있었다.
침으로 범벅이 된 입가를 서둘러 닦았다. 타카야 씨는 이렇다할 말 없이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이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걸었다.
우리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딱히 삐져있는 게 아니라, 아직도 안개 속의 신비한 만남에 넋을 놓은 상태에 불과했다. 공교롭게도 타카야 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아, 어쩌면.
「타카야 씨, 그 꼬맹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보호자가 와서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갔거든요」
「흐응」
……응? 「흐응」이라니?
평상시의 타카야 씨라면 「그건 정말 보호자가 맞았나?」 라거나,「보호자를 사칭하는 수상한 사람한테 넘긴 거 아닌가?」 등등 집요하게 확인해도 이상할 게 없을 텐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극진하게 보살폈으면서, 묘하게 시큰둥한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 보호자에 대해 물어봐도 설명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론 살았지만.
게다가… 아까 전부터 왠지… 어깨를 움켜쥔 손가락의 힘이 센 거 같은데.
서로 말없이 걸어, 어느새 우리 집이 보이는 작은 길에 접어 들었을 때.
타카야는 아무 이유 없이 우산을 떨어트렸다.
첨벙하고 웅덩이가 흙탕물을 튀겼다.
「타카야 씨, 우산이——」
우산을 집기 위해 뻗은 팔을 붙잡혀서,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순간, 뜯겨나갈 것처럼 젖혀진 스웨터 틈새로 드러난 경동맥에—— 오니의 이빨이 박혔다.
「——윽,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찌익, 피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느낀 것은 말 그대로 극심한 고통이었다.
「아, 아파!! 타카야 씨, 아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무자비하게 혈관이 박힌 송곳니, 탐욕스럽게 빨려나가는 피의 흐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고 죽음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억센 팔에 붙들린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버둥칠수록 혼을내 듯이 송곳니가 깊숙히 박혀서, 문자 그대로 먹힌다.
「……아, 으… 으으윽……」
고통과 빈혈에 눈을 까뒤집고 고개를 젖히자, 의도치 않게 제 스스로 목을 내놓는 자세가 되었다. 오니는 그를 놓치지 않고, 나를 탐했다.
주마등일까? 나는 그 순간, 언젠가 숙부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니의 타액에는 먹잇감의 상처를 즉시 아물게 하는 특수한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고.
경동맥을 물어뜯어도, 먹이를 죽이지 않게 효율적으로 생피를 빨기 위해 그리 진화했다고.
그때는 납득했다. 일체의 낭비없이 피를 전부 다 빨아들이려면, 펌프는 끝까지 움직이는 게 편리하지.
수혈용 혈액도 구할 수 없는 시대에 인간을 납치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먹잇감을 죽이는 것보다 사육하여 정기적으로 피를 빠는 게 훨씬 더 나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면, 고문용 치고는 묘하게 방이 많았던 오오에 가문의 지하 감옥은 사실 혈액 공급을 위해 먹잇감을 사육하기 위한 우리로도 사용되었던 게 아닐까?
『이제와선 아무래도 좋은 지식이야. 흡혈 같은 거, 이젠 나와 평생 인연이 없게 됐으니 말이야』
타카야 씨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숙부는 내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죽지 않을 정도의 흡혈, 상처를 막는 정도의 힘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살려두는 한 먹이가 도망칠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일단 죽이면 두 번 다시 피를 빨 순 없게 되지만, 비밀이 샐 가능성은 차단된다.
하지만 혹시라도 먹잇감이 도망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의 의지로 도망치지 않았다고 한다면? 스스로 원해서 오니의 공범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흡혈 행위.
그것이 평범하게 사는 자들은 평생 맛볼 수 없는 쾌락을 가져다준다면—— 스스로 귀신에게 몸을 바칠 숭배자는 어느 시대나 존재하지 않았을까?
전학 간 학교가 적응이 잘 안 되는 지역이면, 나는 도서실이나 도서관에서 방과 후 시간을 보냈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지금으로 치면 말도 안 되는 동화책이라 불릴 만한 쇼와의 괴기 서적. 화려하고도 거창한 표지. 흡혈귀에게 습격당해, 목덜미에서 피를 흘리는 금발의 미녀는 생명을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황홀하고도 농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드러내놓은 가슴께가 묘하게 성적으로 그려져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성적인 절정을 작은 죽음이라고 하듯이. 죽음과 성(性)은 항상 종이 한장 차이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흡혈 행위는 피를 빨리는 쪽한테도 분명——
「아…… 아…… 아……♡」
그대로 꽉 짓눌린 채, 타카야 씨의 바지를 이유 없이 움켜쥐었다.
서서히 왼손은 허공을 긁다가, 이내 추욱 늘어졌다.
「타카…… 야, 씨……♡」
힘 빠진 상대로, 그저 피를 빨린다.
온몸이 흠뻑 젖어 추운데도 뜨겁다. 과연. 이렇게 무방비하게 몸을 맡기면 피를 빠는 쪽도 더 편하겠지.
츄읍. 식사할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숙부가, 내 목덜미에서 천박한 소리를 내는 것에 오싹해졌다.
「아우, 우우……♡」
빗물에 묽허진 타액이, 벌어진 입가로 뚝뚝 흘러떨어졌다.
송곳니가 뽑혀져 나가는 감촉마저도 아찔했다. 뚫린 구멍은 이미 아물기 시작한 듯, 피가 뿜어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로 타카야 씨는 작게 고개를 튼 채, 붉게 묽든 입술을 열었다.
「……네 오른팔을 먹어 피의 굶주림을 극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 목덜미에 송곳니를 세우고 싶은 저열한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나?」
지옥 밑바닥에서 울러퍼지는 목소리가, 피비린내 나는 숨결과 함께 내뱉어진다.
알고 있었을 텐데.
이 사람이 무언가를 참고 있다가, 어떠한 계기로 참는 걸 그만두게 되면 그 반동이 터무니없어 진다는 것을.
「피의 굶주림은 모가리 야마의 오니가 새긴 것이었지만, 이 새로운 굶주림은 네가 내게 새겼다. 그런데 너는 나 말고 다른 이에게 그를 허락하려 했다. 그것도 내 눈 앞에서」
'그건 당신인데요'라는 말은 도무지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7살짜리 아이에게 철없이 질투를 느꼈다.
이뤄선 안 되기에 참아왔던 욕망을, 눈 앞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길 뻔했던 타카야 씨의 격정을 상상해보았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는 배려의 근저에 자신의 미련을 해소하고 싶다는 천박한 욕망이 있었음은 확실했다.
다른 세계의 동일인물, 결과적으로는 미수에 그쳤으니 괜찮지 않나?
그런 얄팍한 변명은 일정 통하지 않는데. 내 눈앞에 있는 이 '오오에 타카야'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허락하려는 생각을 했던 것, 그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부정(不正)이니까.
뜨거운 혀가 미련이 남은 듯 두 개의 상처에 닿았다.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아이한테 대충 안겨있는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타카야 씨가 차가운 뺨을 비벼왔다다. 피부가 녹아내린 것처럼, 두 사람의 뺨이 비에 젖어 들러붙었다.
「얼마나 이렇고 싶었는데——.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내 눈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목을 내민다고? 어째서 그런 잔인한 짓을 하지? 너는 내 것인데 어째서 나를 슬프게 하지?」
「……죄송, 해요……♡」
노성도, 매도도 아니었다. 방탕한 아들을 꾸짖는 듯한 말투에서 오히려 분노의 심각함을 느꼈다.
남의 마음도 몰랐던 건 당신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나도 줄곧, 당신이 이러길 바랐음을, 만족감에 완전히 멍청해진 머리로는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숙부가 충동적으로 내 피를 전부 마실 리는 없다.
그러니까 내가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고통도, 빈혈 때문도 아니라 그저 완전히 허리가 풀렸기 때문이었다. 전에 없는 쾌감 때문에, 이빨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틀렸다. 이거 완전히 틀렸다.
사랑이 극한까지 효능을 높인다는 구조 상, 도소의 피를 누구에게 바치는 가에 대한 결정권은 최소한 히루코한테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오니에게 잡아 먹히는 존재에 불과한 히루코들이 만들어낸, 보잘 것 없는 자기 방어 수단이었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이 사람에게 피를 빨아달라고 애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본말전도다. 히루코가 오니에게 아양을 떨며, 부디 피를 빨아 달라고 목을 내밀다니. 타카야 씨는 이제 피를 빨 필요가 없는데, 어째서 새삼.
하지만 이거면 됐다. 이게 두 사람의 정답이니까.
나는 귀신(鬼神)의 숭배자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리고 지금도.
「하지만 이제 알아줬겠지? 내 사랑의 무게를. 오니 중에서도 제일로 질 나쁜 오니에게 사랑받는 게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했나? 스오우 군」
흐트러진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빗물이 내 뺨을 때렸다.
빗속. 핏빛으로 물든 입술로, 나를 내려다보며 한없이 고귀하게 미소짓는 숙부의 미모를. 마치 그를 공경하는 노예처럼, 멍하니 올려다보면서.
「네, 에…… 알겠어요……♡」
꼬부라진 혀를 때리는 차가운 빗방울 느끼고 있었다.
◆
안개가 걷히자, 그곳은 내가 익히 알던 모가리 마을이었다.
따끈따끈한 어린 몸을 끌어안은 채, 스오우 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스오우 군, 오른손을 보여주지 않을래?」
「오른손? 자」
내 요청에, 스오우 군이 작은 손을 내밀었다. 다행이다, 그의 손은 확실하게—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왜 자신이 그런 불안감에 시달렸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와 스오우 군은 아무 관계가 없을 텐데.
아니, 정말로… 없나?
「안 다쳤어. 괜찮아」
「그래…… 다행이다」
머리까지 치솟던 혈기가 가시자, 아무런 저항도 없던— 그것도 몸이 불편한 사람한테 억지로 누명을 씌워 괴롭힌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도저히 남 같지 않았다. 성별만 다를 뿐 그는 시즈메 씨와 똑같은 생김이었다. 그래. 스오우 군이 자라면 딱 그런 느낌으로—
거기까지 생각하니, 화악 뺨이 달아올랐다.
나는 그때,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이질적인 존재에 강한 의심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에게 '그런 짓'을 할 필요는 절대로 없었다. 그 순간, 대체 무엇이 나를 미치게 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리고 피.
그는 명백하게 도소의 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자신의 피를 마시면 일시적이 아니라,완전히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명확하게 암시했으니까.
그렇다면 그 용모를 통해 알 수 있는, 그는 역시 와타나베의 핏줄. 필연적으로 시즈메 씨가 우리 집안의 비밀을 가족들에게 흘린 셈이 되는데….
순간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녀는 성실한 사람이고,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스오우 군한테 위험을 초래하는 일을 절대 할 리 없다.
애초에 도소의 피는 와타나베의 핏줄에 비롯된 것조차 아니었다.
오니와 무녀의 피가 섞이면 태어나는, 그것도 확실하게 발현된다는 보장조차 없는 기적의 존재. 그런 사람이 세상에 두세 명씩이나 있을 리 없지.
전부 수수께끼다.
적어도 와타나베 군? 은 처음 보는 상대에게 겁을 먹는 타입으로도, 폭력에 휘둘리는 타입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는 내가 주는 폭력 앞에 제대로 된 저항도 보이지 않은 걸까? 더군다나 스스로 피까지 바치려고 하다니.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야말로 피를 빤 후 죽이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하려고?
설령 그의 몸에 도소의 피가 흐른다 해도, 이쪽이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그 헌신의 근원은 뭐지?
…나라서?
하지만 바로 부정했다. 처음 보는 남자 상대로 무슨 자신감이냐.
이렇게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은 부류의 떨림이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라왔다. 차라리 비에 젖어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내가 혼자 신음하며 얼굴을 붉히고 있자니, 스오우 군이 삐진 고양이처럼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었다.
「아야야… 왜 그래, 스오우 군?」
「형아한테 불륜의 냄새가 나!」
「……스오우 군,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 거야?」
「TV」
「……애들 교육에 나쁜 것만 나오고…. 그리고 형아는 불륜 같은 거 한 적 없어…」
「정말?」
흐림없는 시선에, 내심 뜨끔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불륜이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불륜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치민 혈기의 잔재라도 느낀 걸까? 스오우 군이 내 머리를 쓰담쓰담 해준다. 이 아이는 정말로 내 기분에 민감하다.
「……형아, 괴로우면 언제든 줄게. 지금 당장이라도 상관없어」
「마시지 않을 거야. 둘이서 약속했잖아? 어른이 되어서도 스오우 군의 마음이 변치 않는다면 그때 네 피를 받겠다고」
「우, 지금도 상관없는데……」
삐져서 꾹꾹 머리를 비벼오는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 아이는 내게 피를 주기 위해 의욕을 발휘해서 곤란했다.
그런데도 처음 보는 남자의 유혹에 굴복할 뻔한 내 자신이 한심했다. 조카와의 소중한 약속을 삼촌인 내가 먼저 깨트릴 순 없지.
하지만 그가— 와타나베 군이 나를 속이려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마셔보면 알 수 있다고 단언하던 그 눈빛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아니… 남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내가 처음 만난 남자를 아무 조건 없이 믿는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이상했지만….
그렇기에 마지막,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직전. 적어도 그에게 한 마디라도 사과를 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이룰 수 없었다.
그 남자.
순간, 진심으로 형이 귀신이 되어 나타난 게 아닐까 싶어 제 눈을 의심했다.
그 찰나,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우산 아래로 귀신 같은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던 그 남자는 대체 누구일까.
만약 두 사람 사이에 스오우 군이라는 방패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그 남자가 와타나베 군한테 해를 끼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자기가 한 짓을 제쳐두고, 이러한 것을 바라는 나는 역시 인간이라 할 수 없겠지.
「……미안, 스오우 군. 내가 나쁜 형아라서……」
「형아는 착한 형아인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조카의 얼굴에 뺨을 맞댔다.
이 아이한테 사과해봤자 소용없는데, 왜인지 나는 사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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