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 번역. 이 작품이 PC로 나왔을때의 하트나라 첫 소설본이였던걸로 기억하는데 게임 발매 전에 읽어둘까 싶어서 읽고 번역하다가 후반부가 너무 재미 없어서(...) 하다가 때려쳤습니다. 그리고 팔 수 있을때 훅 팔아버렸죠.... 그리고 정작 게임도...OTL
2008년 번역... 어떤의미론 굉장하다야. 여튼 2막 초반까지 하다가 때려쳤으니 그 뒤엔 없습니다.
이미 푹 삭은 소설이지만 일단 자료 백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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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게임을 하지 않겠나.」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꺼냈다.
장미 문양이 양각되어 있는 아름다운 은색 리볼버.
「이거, 진짜?」
질문할 필요까지도 없는 소리지만,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느닷없이, 어째서 권총같은걸 꺼내는거야? 조금 전까지 귓가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가. 사랑스러운 듯 앨리스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던 그 손으로―
「굉장히 즐거운 게임이야. 적어도 시시하진 않지.」
익숙한 모양새로 탄창을 빼내 한발, 탄환을 장전한다.
찰칵찰칵 탄창을 돌리며 짙은 감청색의 눈동자를 앨리스에게 향한다.
「룰은 간단. 이제부터 순서대로 번갈아 총구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트리거를 당긴다.」
탄창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빙빙 돌고 있다. 흡사 룰렛같다.
「어려울 건 없어. 총알이 관자놀이를 관통하면 그 시점에서 게임오버. 살아 남은쪽의 승리가 되지.」
「저기, 잠깐 잠깐.」
「내가 이기면, 너는 내 것이다.」
앨리스의 말을 막아내듯이 그는 말했다.
기품 있는 미소를 띄우곤 있지만, 그 눈동자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려운 구석이 있었다. 그는 앨리스에게 으름장을 놓는 것도 아니고, 권력으로 그녀를 억압하는 짓도 하지 않지만 때때로, 눈짓하나로 그녀를 옭아맨다.
목덜미로 한줄기 땀이 흘러 내렸다.
그는 진심이다.
지루함을 뿌리치기 위해 목숨조차 태연하게 내던질 수 있다.
「악취미.」
동요하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어조를 강하게 한다.
「당신 모자에 필적하리만한 악취미 게임. 이 룰로는 당신이 이긴 시점에서 나는 이미 죽어 있는거 잖아? 그러면 나는 당신의 것 같은거 될 수 없어.」
「네가 게임을 리타이어 하면 되지.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내 승리. 그거라면 돼. 네가 쓸데없이 죽을 필요도 없고.」
터무니없는 자신가다. 자신이 진다고 하는 가능성에 대해선 생각이 전혀 미치지 않는 것 같다. 지기 싫어하는 앨리스는 악취미인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를 힘껏 노려보았다.
그 여유 넘치는 표정을 일그러트려보고 싶다.
단정한 얼굴이 공포를 띈 꼴을 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내가 이기면 당신을 무릎 꿇려 주겠어.」
앨리스는 벌써부터 승자의 미소를 띄고, 말을 이었다.
「앨리스님, 지금까지의 셀 수 없는 무례,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부터 당신의 종복이 되겠습니다. 이제 편식하지 않겠습니다. 싫어하는 당근도 우걱우걱 먹겠습니다―라고 무릎을 꿇리고서 말하게 해줄게.」
「너의 종이 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당근만큼은 사양하고 싶군.」
그는 손가락으로 총을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하지만 너도 정말 욕심이 없는 여자다. 나를 무릎 꿇리고 싶은 거라면 솔직하게 그렇게 말해. 그런걸로 네가 내 것이 된다면 싼 대가지.」
「사람을 물건 취급하지마.」
「이거 실례…, 그런데 누가 먼저지? 너인가?」
총신을 쥐고 그립을 앨리스 쪽으로 내민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탄창에 앨리스의 푸른 리본과 마론색의 긴 머리가 드리워졌다. 그런 위험한 것, 느닷없이 휙하고 건네받아도 곤란해. 어쨌든, 지금까지 총과는 인연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왔는걸.
「뭐, 코인을 던져서 결정하는 수도 있지만.」
「당신이 먼저라도 좋아.」
「그런가. 레이디 퍼스트가 내 신조지만, 뭐, 그러도록 하지.」
그는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커다란 붉은 장미를 몇 개씩이나 장식한, 마치 마술사가 쓸 것만 같은 실크 햇.
언제봐도 이상야릇한 모자.
앨리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총구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잠깐!!」
그 어떤 주저도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메마른 금속음이 두 번.
앨리스는 숨을 삼키고, 비슬비슬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허리에 힘이 빠지다니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경험이다
「왜 쏘는거야. 그것도 두 번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어떠한 사전 선고도 없이 자기 자신을 향해 연속으로 두 번이나 트리거를 당긴 것이다.
「아아, 미안하군. 기세가 넘쳐 버려서, 그만.」
기세가 넘친다던가 넘치지 않는다던가 그런 문제? 그 이전에, 누가 진짜로 쏘라고 했어?
새삼스럽게 지금이 되어서야 두려워졌다. 눈썹하나 까닥 않고 목숨을 걸 수 있는 남자. 일초의 주저도 없이 트리거를 당기는 손가락. 앨리스의 하찮은 허세나 프라이드 같은건 격철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나 깨져 버렸다.
「자아. 네 차례.」
그는 총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총신은 램프 밑에서 요염한 빛을 발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기―처리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라곤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한 조형물이다.
무섭다.
하지만 이제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깨진 프라이드의 파편을 주섬주섬 주워 모으고서, 앨리스는 찬찬히 총을 손에 쥐었다. 싸늘한 은의 감촉.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무겁다. 깊이 숨을 들이 쉬고 나서 총구를 관자 놀이에 대었다. 검지를 트리거에 얹는다. 하지만 떨려서 잘 되지 않는다. 심장이 경종을 울리고, 숨이 거칠어진다.
탄환이 두개골을 꿰뚫고, 붉은 벨벳 소파에 뇌수가 흩어져 튈 확률은 4분의 1. 검지 손가락을 약 몇 센티 당기는 것만으로 세계가 끝나버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 어느 세계가?
이 세계? 나의 꿈이?
「한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지.」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앨리스에게 지극히 상냥한 시선을 보내왔다.
「과거, 나에게 같은 게임을 제안한 남자가 있었다. 그 녀석의 머리가 날아간 것은 확실히 세 발째였지.」
앨리스는 굳은 미소를 띄웠다. 웃을 수 없는 농담은 딱 질색이다.
「그 때 사용했던 것도 그 총이다, 앨리스.」
최악……. 터무니없이 싫은 남자다.
허나 앨리스를 동요시키는데 있어 그 악취미스러운 농담은 지나칠 정도로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피냄새 나는 조직의 톱을 자칭하는 남자에게 있어선 꼬마계집 하나 당황시키는 것쯤이야 아주 손 쉬운 모양이다.
분했다. 당길 수도 없는 트리거에 계속 매달려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죽음이라고 하는 어두침침한 심연을 들여다봐서, 꼼짝도 못한채 얼어 붙어버린 자신이 우스웠다.
「무서운가?」
「무서워. 그게 잘못이야?」
간파 당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제 정색하는 수밖에 없다. 무섭고 무서워서, 조금전부터 몸의 떨림이 그치지 않는다.
「그런가.」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같은 자세로 굳어있는 앨리스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든다.
「그럼 내가 대신하지.」
「에?」
의문을 던지는 것보다 빠르게, 그는 다시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트리거를 당겼다.
이번에는 세 번의 금속성이 앨리스의 고막을 울렸다.
틀림없이 세 번이었다.
「당첨은 여섯발 째인가…. 운이 좋았군.」
억양 없는 어조로 태연히 지껄이고서 그는 총을 소파에 내던지고, 김이 피어오르는 티컵에 손을 뻗으며 황홀히 가늘게 눈을 뜬다.
「역시 이 홍차는 최고다. 마치 아침에 갓 따낸 꽃같은 향기가 나.」
「바, 바보 아냐?! 뭘 생각하는 거야?!」
앨리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홍자에 대한 감상을 입에 담는 남자를 향해 외쳤다.
대체 얼마나 악운이 강한 남자람.
안도와 공포가 번갈아 엄습해 온다. 이윽고 그 감정은 분노와도 같은 열기를 띄고 앨리스를 지배했다. 이 남자는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게임을 즐기고 있었던게 아니다.
처음부터 목숨을 잃는 일 같은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목숨은 눈 앞의 쉬폰케이크보다도 가벼운 것인 것이다.
「죽는게, 무섭지 않아?」
마치 기도하는 듯한 심정으로 질문했다. 만약 지금, 그가 눈앞에서 죽으면?
비록 제멋대로고 변덕쟁이에 고집스러운 남자지만, 최소한 슬퍼는 하겠지. 그 죽음에 가슴 아파하고, 눈물 흘려 줄 만한 관계는 쌓아왔다.
「무섭지는 않아. 나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존재니까.」
거기에 비관의 색은 없다. 그는 지극히 정당한 사실로서 그것을 이야기했다.
앨리스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숙인다. 언제나 죽음과 옆집살이하며 살아온 그에게 목숨의 소중함을 설파할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다. 애초에 그와 자신은 가치관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는 세계조차 다른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생각하는 쪽이 어찌 되어 있다.
그런데도 견딜 수 없게 된 것은 어째서일까.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말로 이렇게나 답답한걸까.
「하지만, 앨리스. 네 대신은 어디에도 없어.」
그는 어느새 앨리스의 옆에 앉아 어깨를 끌어안는다. 훤칠한 외양에 비해 상당히 든든한 팔.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올리자, 앨리스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게임의 승자는 누굴까나?」
「…당신이야.」
「그럼 약속대로, 너는 내 것이다」
―――이 남자, 미쳤어.
과거의 연인과 같은 얼굴을 한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싶은걸까. 곁에 남고 싶은걸까. 앨리스는 그것을 알 수가 없었다. 변덕스러운 발언을 토하는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그저 눈을 감고 기다릴 뿐.
주머니 속의 작은 병을 꽉하고 움켜 쥐었다.
「이것은 꿈이야.」하고 멀리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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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꿈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앨리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미지근한 바람이 장난치듯 코끝을 간지럽히고서 스쳐 지나간다. 부드러운 햇살과 흙의 냄새. 따끔한 잔디밭의 감각.
「어머, 졸고 있었던거니?」
고개를 들자 언니 로리나가 미소를 띄우고 있다. 앨리스는 몸을 일으키고서 쓱쓱 눈가를 비볐다.
「응, 그렇거 같아. 꿈을 꾸고 있었어.」
「어떤 꿈?」
「글쎄. 확실히 게임이라던가 룰이라던가……, 어쨌든 이상한 꿈.」
잠에서 깨어난 순간 꿈의 내용은 사라져 버리고, 누군가가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듯한, 기묘한 애절함만이 남아 있다. 어두운데도, 밝다.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가고 싶지 않다. 도망치고 싶은데도, 남아 있고 싶다.
다시 한번 눈을 감으면 계속 그 꿈을 꿀 수 있을까. 하지만 바로 생각을 고쳐먹는다.
언니와 느긋히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을 낮잠 같은걸로 헛되게 할 순 없지. 일요일 오후는 로리나와 앨리스, 두 사람만의 시간인걸.
「꿈은 소원의 발로라던데, 게임을 하고 싶었던게 아냐?」
「그럴리가. 그것보다 언니. 책 계속 읽어줘.」
「후후훗. 네가 잠들어 있는 새에 다 읽어 버렸어.」
「뭐야, 그랬어? 그럼 마지막에 어떻게 됬어? 과정은 넘겨도 괜찮으니까 결말만이라도 가르쳐 줘.」
그렇게 재촉하자, 로리나가 질린듯 어깨를 으쓱였다. 낭만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앨리스는 옛날부터 미리 범인이나 트릭을 알아내고 난 다음부터 추리소설에 도전하는 타입이었다. 친구에겐 괴벽이라는 소릴 듣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아서 진도를 뺄 수가 없었다.
「저기, 언니. 그 이상한 나라에 빠진 여자아이, 마지막엔 어떻게 되?」
「여왕님의 재판정에 서서 사형판결을 받게 되서. 그래서 그 아이는 필사적으로 도망치지.」
「도망쳐? 어떻게? 물론 경비가 붙어 있을거 아냐. 재판이 너무 지겨워서 모두 졸기라도 했었어?」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어쨌든 거기서 도망치려하다가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잠에서 깨어나.」
「잠에서 깨어나? 뭐야, 꿈속의 이야기였어? 어쩐지…. 그러니까 도망칠 수 있었던거네.」
솔직하게 감상을 표하자 로리나는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언니의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앨리스는 어김없이 후회한다. 어째서 자신은 언니가 바라는 여자아이처럼 될 수 없는 걸까.
폭신폭신한 것이나 나폴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어딘가 살짝 꿈을 꾸는 데가 있는 귀여운 여자아이.
언니는 자신이 반짝이는 눈으로 이야기를 계속해주길 졸라대는, 그런 솔직하고 귀여운 여자아이로 자라주길 바라고 있었던게 아닐까.
「잠에서 깨어난 뒤 주인공은 어떻게 돼?」
「이야기는 거기서 끝.」
「에? 거기서?」
그 무슨 무책임한 이야기람.
「이것 모두 꿈이었습니다.」로 해결되는 거라면 아무도 고생하지 않지. 이야기이니까 대충대충 경우주의로 처리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마지막에 주인공의 언니의 심리 묘사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 주인공이 훌륭한 숙녀로 자랄 수 있도록―하고 비는거야. 이게 이 이야기의 끝.」
「후응…….」
왠지 요점이라곤 쬐끔도 찾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말하면 언니를 다시 슬프게 만들어 버릴 것 같아서 그만뒀다.
앨리스에게 있어서 로리나는 동경의 상징이었다.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진 그 날부터 그녀는 동생인 앨리스와 이디스를 돌봐왔다. 일이 다망하다는 것을 핑계 삼아 집에 붙어있지 않는 아버지보다도 훨씬 부모답게.
아름답고 총명해서, 무얼 시켜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 어머니가 돌아가신뒤 고생만 했을텐데도, 그녀에게 그 나긋나긋한 미소가 떠나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가능하다면 언니처럼 되고 싶다. 그래도 그 방법을 모르겠다. 비굴한데다 소극적이고 콤플렉스 투성이인 자신에게서 탈피할 수 있는 날은 도대체 언제쯤이 될까.
문득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바람에 실려 온 장미향이 콧구멍을 간지럽혔다. 학교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도 싫지는 않지만, 이렇게 정원에 드러누워 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 쭉 이대로 있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언제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장미 향기에 둘러 쌓여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시시한 수다를 하며 언제까지, 언제까지나―.
「어머? 아직도 졸리니? 수면부족일까?」
「아니, 안 그래. 햇살이 기분 좋아서 그만 눈꺼풀이….」
오늘은 왜인지 몹시 졸음이 몰려온다. 수면은 한껏 취하고 있을텐데, 조금이라도 마음을 늦추면 꿈속의 세계로 끌려가 버릴 것 같다.
「언니, 오해 하지마. 언제나 졸고 있는건 아니니까. 학교에서는 확실히 눈을 뜨고, 성실하게 수업 받고 있어.」
「응, 알고 있고 말고. 요전의 면담에서 선생님이 앨리스를 칭찬하셨어. 성적도 우수하고, 매사에 실수가 없다고,」
「선생이 그런 소릴 했어?」
무심코 멍청한 목소리가 된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빈정거림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자신이 교사에게 있어서 대하기 힘든 학생인것은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 불합리한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이견을 외치고, 선생이 무조건적으로 화를 내면 조리있게 응전한다. 그것은 교사만이 아니라, 동급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부유층 아가씨니까.」같은 소리로 역차별하며 시비를 걸어오는 패거리에게는 철저하게 되갚아 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한 마리 늑대인 체하고 싶은게 아니다. 학교에 나름대로 친구도 있고, 집으로 돌아가면 상냥한 언니가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나 동생과는 잘 지내지 못하지만, 애초 모든 것을 원만하게 처리하려고 하는 것 자체에 무리가 있다. 이것은 동화도, 꿈도 아닌 현실 세계의 이야기니까.
이것은 현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언제나 사람들과 어정쩡한 관계밖에 가질 수 없는 자신.
아무리해도, 무얼 한다 해도, 언제나 위화감이 언제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자신이야말로 현실.
『허세를 부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 없는 증거입니다.』하고, 자학적으로 자기를 분석해봤자 허무할 뿐이다.
「앨리스. 너 혹시 학교를 좋아하지 않는거니?」
「당연히 좋아하지. 착실히 잘 해나가고 있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스마일을 만들어 보였다. 사랑하는 언니를 슬프게 하는 것은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다.
밝고 귀엽고. 솔직한 동생을 연기해야지.
로리나는 책을 덮고, 애매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토했다.
「그래…. 앨리스는 이미 어린애가 아니니까.」
「느닷없이 무슨 소리야. 나는 아직 어린애인걸.」
「가족에게 비밀을 만들 수 있게 되면, 이미 어른인거야.」
― 그런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
「머지않아, 이렇게 일요일 오후를 함께 보내는 일도 보내주는 일도 없어지겠지..」
「그럴리 없데도, 참! 나는 쭉…….」
쭉 이렇게 있고 싶은데.
먼 곳을 바라보는 언니의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은 없다. 그저 그 사실이 묘하게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태양에 구름이 걸려 잔디위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다. 강한 바람이 불어서 프릴 달린 하늘색 스커트가 팔락였다.
로리나가 짝하고 손뼉을 쳤다.
「옳지. 지금부터 게임을 할까?」
「게임?」
「물론. 꿈에 나올 정도인걸. 어지간히 하고 싶었던거지?」
앨리스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게임 같은거 하고 싶지 않다. 그저 잔디밭위에 드러누워서, 잡담을 나누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가끔 정도는 괜찮잖아. 게임은 혼자서는 할 수 없으니까 같이 하자. 그래, 뭘 할까? 체스? 그렇지 않으면 트럼프가 좋을까나?」
― 트럼프?
두근하고, 심장이 반응했다.
뇌리를 적시는 선명한 붉음. 1부터 시작되어 12로 이어지는 카드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스콜처럼 쏟아져 내린다. 앨리스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미지에 사로잡혀 손으로 가슴을 내리눌렀다.
그래, 게임이다.
게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붉은 하트, 열 두장의 카드로.
「잠깐 기다리고 있어. 트럼트 갖고 올테니까.」
로리나는 책을 놓고 일어섰다.
「내가 올 때까지 자면 안돼, 알겠지?」
「응, 확실히 기다리고 있을게.」
앨리스는 눈을 깜빡여서 붉은 잔상을 지워냈다.
가벼운 걸음으로 떠나가는 언니의 뒷모습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눈꺼풀은 점점 더 그 무게를 더하고, 몸 속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푸른 하늘. 흐드러지게 핀 꽃. 바구니 안에는 스콘에 클라티드 크림(clotted cream), 브라운브레드 샌드위치. 조금 바삭거리는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먹는 것이 기호.
그런 작은 일상 하나하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바로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노란색 나비가 앨리스의 코끝에서 춤추다 팔랑팔랑 날아 간 곳에 있는 새하얀 토끼를 본 순간, 다시 심장이 두근하고 튀어 올랐다.
「토끼……?」
약 3초. 숨이 멎었다.
토끼 같은 건 드문 것도 아니지만, 옷을 입고 이족 보행하는 토끼가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런 건 일상도 뭣도 아니다. 최소한 앨리스를 에워싼 평범한 세계에서는.
「잠깐, 당신. 여기는 쫓아와야하는 장면이잖습니까. 멍청히 있지 말아주세요!」
놀랍게도 말했다.
토끼는 마치 앨리스가 그를 붙잡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처럼 부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그래도 앨리스가 움직이지 않자 초조한 모양새를 노골적으로 드려낸다.
「여보세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무기력해서 어쩔 셈입니까. 자아, 빨리 쫓아오세요.」
그런 소릴 들어도, 곤란해.
무기력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바지만, 처음 보는 토끼에게 지적당하면 열이 받는다. 애당초, 자신은 지금 맹렬하게 졸리다. 거기다, 환상을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쳐있다. 다소 진귀한 토끼를 본 것 정도로 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까보냐.
반쯤은 오기가 되어 앨리스는 눈을 감았다. 귀찮은 일을 떠맡는 것은 사양이다. 말하는 토끼같은거랑 얽히게 되면, 어딜 어떻게 생각해도 명백하게 성가신 사태에 말려들게 된다. 그건 그렇고 졸리다. 아니, 어쩌면 이미 꿈속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토끼가 말하는것도 딱히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납득하려고 한 순간, 갑작스레 둥실 몸이 떠올랐다.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낯선 청년이 앨리스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은회색의 머리칼에 안경을 쓴,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남자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로군요. 어째서 쫓아와 주시지 않는 겁니까?」
「랄까, 누구?!」
아무래도 잠기운이 홱하니 날아갔다. 어째서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안겨져 있는지 모르겠다. 가는 몸에 새하얀 피부의 남자는 자세히보면 단정한 생김을 하고 있지만, 생김새가 조금 곱다고 해서 넋을 잃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그러니까, 누구!!」
「귓가에서 소리치지 말아 주세요. 확실히 들리니까요.」
남자는 혀를 차는 모양새로 귀를 쫑긋쫑긋 움직였다. 머리 위에 얹혀진, 마치 토끼같은 긴 귀.
귀………?
「벼, 변태!!!」
「자, 잠깐. 날뛰지 말아 주세요, 제발.」
이게이게이게, 이 상황이 날뛰지 않고 베길 만한 상황일까보냐. 앨리스는 힘껏 발버둥치며 저항했다. 그럼에도, 남자는 비실하게 생긴데 비해 의외로 힘이 강해서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최악이었다. 한 대낮부터 토끼귀를 단 수상쩍은 남자와 떡하니 마주치다니. 몸의 위험을 느끼자 더욱 격하게 저항한다. 여자라고 해서 그리 간단히 당할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내려줘, 이 변태!!」
「물론 도착하면 내려 드리고 말고요. 그럼, 갑니다.」
남자는 방긋 웃고 나서 느닷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앨리스를 끌어 안은채로, 정원에 출현한 큰 구멍을 향해.
구멍…?
조금전까지 이런 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살짝 눈을 땐 틈을 타서 팠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만으로도 머리가 혼란스럽다. 그래, 그러고 보니 말하는 이족보행 토끼는 어디로 갔지? 붉은 체크 무늬 옷을 입고 큰 시계를 늘어트리고 있던 그 토끼는….
「꺄아아아아아아악!!!」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져 간다.
바닥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져 간다. 급강하하는 세계. 소리로는 나오지 않는 비경을 지르며, 앨리스는 손을 뻗었다. 그 최후에 바라보았던 빛을 향해.
*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마등이라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나 언니, 동생의 얼굴이 빙글빙글 돌면서 명확하게 죽음을 의식했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정신을 잃을 뻔 했을 참에 앨리스는 나락의 바닥에 도착했다. 격한 충격이 아니라, 푹신푹신한 쇼파 위로 점프한 것 같은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쭈뻣쭈뻣 주위를 둘러본다.
돌로 만들어진 벽에 내어진 동그란 창문으로 통해 푸른 하늘이 엿보였다. 아무래도 여기는 정말로 높은 곳에 있는 것 같다. 벽과 벽 사이로 마치 주택지마냥 쭉 이어진 지붕들이 보인다.
지저로 내팽개쳐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도착한 곳은 전망대에 올라선 것처럼 시원하다.
「하트 나라에 잘 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앨리스.」
「하아……?」
앨리스는 싱글벙글한 표정을 띄고 있는 토끼남을 아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게 지나치게 갑작스러워서 도대체 어디부터 캐물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선,
「나를 돌려 보내줘.」
「무리입니다.」
한치의 주저도 없이 거절당했다.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신속한데다 간결한 답이었다.
어쨌든 의미 없는 대화. 상대는 유괴범이니까,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낼 맘 같은거 있을리 없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앨리스의 이름까지 조사를 끝낸 계획범인 것이다.
「그렇게 수상쩍어 하는 눈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나는 말이죠,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마음은 없습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이 세계로 데리고 온 거니까요.」
「무슨 뜻이야……?」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해 지길 바라는 심리, 당연한거지요?」
앨리스는 뻐끔하고 입을 벌렸다.
지금, 유괴범의 옆에 스토커라는 딱지도 플러스 됐다.
점점 더 뜬금 없어진다. 이 토끼남 어째서 자신을 고른거지?
바로 곁에 그렇게 아름다운 언니가 있었잖아.
확실히 이 토끼남은 머리가 이상한게다.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나같은 여자는 고르지 않는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다면, 지금 당장 집으로 돌려 보내 줘.」
「당신은 돌아가고 싶은겁니까?」
―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토끼남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기는 당신이 바란 세계인걸요?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를 부를리 없잖습니까.」
스토커, 여기 극에 이르다.
아무래도 토끼남의 뇌 속 설정에선 앨리스가 원했기 때문에 그가 여기로 데려왔다―는 것 같다.
「저기, 우리들 처음 보는거지? 당신을 부른 기억 같은거 눈꼽만치도 없는데.」
「싫어라~, 처음 만나는게 아니지요. 나는 쭉 당신의 곁에 있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쫑긋쫑긋 귀를 움직인다.
「그러니까 당신에 대해선 뭐든지 알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언니에 대한 일은 물론, 그 언니에게 당신의 보이프렌드를 빼앗겨 버린 일도.」
「뭐…!」
앨리스는 움찔했다.
채 아물지 않은 딱지를 억지로 뜯어낸 것 같은 아픔이 가슴을 내달린다.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는 일을 어째서 이 남자가 알고 있지?
「당신은 가여운 사람입니다. 아주아주 좋아하는 언니가 아주아주 좋아하는 보이프렌드를 채가 버리다니.」
「채, 채 간게 아냐. 그건, 그 사람이 멋대로 언니를 좋아하게 된 것 뿐. 언니는 남의 것에 손대는 사람이 아닌 걸.」
「그래요. 당신의 언니는 여동생의 남자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아니야. 그 증거로 언니는 당신의 보이프렌드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죠.」
토끼같이 붉은 눈이, 야유를 담아 웃고 있고 있다.
과거 가정교사였던 남자는, 앨리스와 친밀한 관계를 키워가는 한편, 언니인 로리나에게도 마음을 빼앗겼다. 언니가 그를 본 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의 연심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 사실이 거꾸로 앨리스를 상처 입혔다.
언니에게 있어서 하잘것도 없는 남자를 앨리스는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와 자신은 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똑똑하게 깨닫게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로리나가 그에게 흥미를 보이는게 좋았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고개를 흔들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어떤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앨리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힌 콤플렉스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가엽게도. 가여운 앨리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토끼남은 거듭 반복한다.
초조함이 늘었다. 좋아한다던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던가 지껄여 대는데 비해 말투는 전혀 꺼리낌이 없다.
「당신의 뒷조사력엔 감동했어. 이제 됐어, 알아서 돌아갈래.」
「자,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어디로 돌아가는 겁니까!」
「집인게 당연하잖아. 적당히 알아서 돌아갈 길을 찾을게.」
「무리라니깐요~. 아직 게임에 참가하지도 않았는데, 돌아갈 수 있을리 없잖습니까.」
「게임?」
「그래요. 이 약을 마시고 나서부터야 게임이 시작됩니다.」
토끼남은 천진하게 웃고서 포켓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 넣는다.
햇빛을 받아 작은 병이 반짝반짝 난반사를 일으켰다. 그 눈부신 빛에 시선을 빼앗아 버렸기에, 이어져 토끼남이 취한 행동을 피할 수 없었다.
「읍……??」
키스, 당했다.
억지 키스였다. 강제로 입술을 비집어 열고 무언가를 먹인다. 그것이 작은 병에 들어 있던 액체였다는 것을 깨달은 앨리스는 전력을 다해 저항했다. 어깨를 두드리거나, 가슴을 밀쳐내거나, 팔을 풀어내려고 시험해보지만, 당연하다는 듯 힘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머리속이 새하얘진다. 낯선 남자에게 납치 당한 끝에, 입술을 빼앗기고, 이상한 약을 마시게 되다니.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비극을 깡그리 쓸어 담아 넣은 쿠키 박스를 선물 받은 듯한 기분.
「괴로우셨습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거에요. 호기심에 져서 여기까지 와버렸으니까.」
이윽고 토끼남은 입술을 땐 후, 틀려 먹은 소리를 해댔다.
「뭐 어쨌든, 이걸로 게임 참가자가 확정되었습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것인지, 이 세계에 영주(永住)할 것인지는 당신의 뜻대로. 나로선 당신이 후자를 선택해 주셨으면 하…」
「죽어!!!」
앨리스는 혼신의 힘을 주먹에 담아, 토끼남의 안면을 가격했다. 손에 확실히 반응이 온 것을 느낀 순간 의식이 아득해지고, 앨리스는 그 곳에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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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얀 토끼놈. 귀찮은 걸 떠맡기다니…….」
익숙치 않은 남자의 목소리에 앨리스는 깨어났다.
천천히 눈꺼풀을 뜨자, 돌로 만들어진 벽 사이로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 온다.
손으로 빛을 가리자, 돌로 된 바닥에 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안개 낀 머리로 바로 옆에 선 인물을 올려본다. 검은 롱코트를 두른 장신의 남자. 푸른기가 도는 긴 머리카락. 앞머리를 사이로 의심이 흘러넘치는 검은 눈동자가 엿보인다.
가슴께와 어깨에, 큰 회중시계를 늘어트리고 있는게 보였다.
그러고보니, 하고 앨리스는 생각해낸다. 확실히 그 토끼남도 어깨에 시계를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 누구?
「어이, 네놈. 일어나.」
남자는 초조한 목소리를 냅다 내던졌다. 느닷없이 남을 네놈이라고 부르다니 무례하긴. 그런 걸 멍하니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킨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전과 같은 장소다. 하지만 앨리스를 여기로 데려온 장본인인 토끼남이 없다.
「뭘 멍해 있어. 빨리 돌아가. 여기는 내 집이다.」
「집………?」
「그래. 나는 유리우스=몽레. 이 시계탑의 파수꾼이다. 네 이름은?」
「나는… 앨리스=리델.」
「앨리스=리델?」
그러자 남자―― 유리우스의 얼굴은 불길한 것이라도 본양 딱딱하게 굳었다.
「너, 타관사람? 어째서 타관사람이 이런 곳에 있지!?」
네놈 다음엔 타관사람 취급이다. 토끼귀가 붙어있지 않은 만큼 제대로 된 사람인가 하고 생각했더니 태도가 무례한 점에선 확실히 그 토끼남과 좋은 승부를 겨룰 수 있을 것 같다.
「그, 그런 소릴 들어도, 돌아가는 길도 몰라. 그 토끼남에게 느닷없이 끌려 와 버렸으니까.」
「페터=화이트라면 이미 여기엔 없어. 멋대로 룰을 깨다니,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성가신 남자로군.」
유리우스는 매우 귀찮은 듯 한숨을 쉰다.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은 이쪽이다.
그것보다 그 토끼남 녀석은 멋대로 끌고 온 주제에 이번엔 방친가. 이정도로 무책임한 유괴범은 본적이 없다.
「어이, 울지마. 여자의 눈물만큼 귀찮은건 없으니까.」
「누가 울까 봐. 아아 정말, 일이 이렇게 됬다면 좀 더 그 토끼남을 패두는 거였는데. 절대로 용서 못해.」
좀 전의 불쾌한 광경이 뇌리에 되살아난다. 키스당해서 묘한 약을 먹었던 일. 앨리스의 인생 워스트 1위에 당당히 등극할 수 있으리만큼 불쾌한 일이었다.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에 못된 짓을 당한 흔적은 없지만, 그런데도 화딱지가 치미는 것은 변함이 없다.
「흐응. 여자주제에 남자에게 주먹을 휘두른데다가, 노렸던 데는 머리라. 타관 출신 여자아이는 전부 야만스러운건가?」
「에?」
앨리스는 의아한 얼굴로 유리우스를 보았다.
「당신, 보고 있었어?」
「여기는 내 집이다. 멋대로 기어 올라와서 공공연연히 떠들어 대고 있는 녀석들이 있으면 상태를 보러 가는게 당연하지.」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터 보고 있었어?」
일어서서 다가가자, 유리우스는 한 발짝 물러선다.
「뭐, 뭐야, 너는. 그거다, 그 작은 병.」
그렇게 말하고서, 앨리스가 쥐고 있던 작은 병을 가리킨다.
「그 안에 든 것을 입으로 옮겨 먹여 줬겠지? 거기서부터다.」
「어째서 거기서 막아 주지 않은거야!!」
무심코 목소리가 커진다.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울분을 토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우스는 미간을 험악하게 찌푸리며 앨리스를 내려다보았다.
「왜 내가 막아 줘야 하지? 너는 스스로 원해서 여기에 왔고, 스스로 원해서 약을 먹었다. 내가 막을 이유는 없지.」
「틀려! 나는 원하거나 하지 않았어. 멋대로 끌려와서, 억지로 약을 먹게 된거야.」
갑작스럽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울지 않는다고 단언했으니까 체면이 있어서라도 눈물을 흘릴 순 없다. 입술을 꽉 깨물고 북받쳐 오르는 것을 억눌렀다.
「미안. 당신에게 이런 소릴 해도 의미 없는 거겠지.」
앨리스는 심호흡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맘은 없었어. 그냥 조금 한꺼번에 일어나서 상황을 따라갈 수 없는 것 뿐.」
「화를 내다가 사과하다가, 바쁜 여자로군.」
질린듯이 말을 내뱉고, 유리우스는 벽에 손을 얹었다.
「어쨌든, 여기에 있어봤자 너는 돌아갈 수 없어. 이 상황을 타파하고 싶다면 빨리 게임을 진행해.」
「저기, 그 게임이라는거 뭐야? 그 토끼남도 같은 소리를 했는데.」
「돌아가는가 돌아가지 않는가, 뭐, 그런 게임이겠지.」
앨리스는 작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토끼남의 이야기도 의미불명이었지만, 유리우스의 이야기에도 요점이라곤 전혀 없다. 단지 막연히「게임」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고 있을 뿐.
그런 앨리스의 심중을 파악한건지, 유리우스는 말을 이었다.
「게임은 혼자서 할 수 없다, 그런 룰이다. 너를 끌어들인 장본인을 만나고 싶다면 탑을 나가서 하트 성으로 가라. 저 악취미스런 건물, 보이겠지?」
유리우스는 먼 곳을 손가락질 했다. 마을이 들어선 곳보다 더 높은 장소에 하트를 단 커다란 성이 보인다. 악취미라고 평하는 것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무턱대고 호화로운 장식을 해대서 나쁜 의미로 눈에 띈다.
「싫어. 그런 변태남 같은거 두 번이나 만나고 싶지 않아.」
「나도 같은 의견이지만, 어디론가 가지 않으면 게임은 진행되지 않아. 같은 소릴 반복하는 것 같지만, 게임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그런 룰이다.」
「그거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된다는 소리? 어디론가 가야만 하는 거라면, 여기를 선택해도 되잖아?」
「안돼.」
유리우스는 차갑게 말을 뱉어냈다.
「나는 일 때문에 바빠. 돌아가고 싶다면, 딴 댈 알아 봐.」
*
시계탑에서 쫓겨난 앨리스는 혼자서 마을 광장을 걷고 있었다.
전혀 본 적 없는 땅이다. 어디를 목적으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걷는다.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여기가 어딘지 물어봐도, 모두 하나같이 기묘한 얼굴을 하더니 멀어져갈 뿐이었다.
말은 통한다. 하지만 말에 담긴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절망적인 기분으로, 주머니 속에 있는 작은 병을 움켜쥔다. 어째서 이런 것을 갖고 와 버린 걸까. 잽싸게 버리면 될텐데, 왜인지 손에서 땔 수 없다. 이 작은 병은 중요하다. 본능이 그렇게 고하고 있었다. 이유 같은건 모른다.
어찌할 바 몰랐던 앨리스는 숲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로 접어들었을 무렵, 우뚝하니 멈춰 섰다. 너무 걸어서 다리가 아프다. 차라리 하트 성이라던가를 목적 삼은뒤, 그 토끼남에게 직접 물어볼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는 그럴 기운조차 솟지 않았다.
이제부터 뭘 어찌하면 좋을까. 지금쯤 언니는 나를 찾아 헤매고 있겠지. 게다가, 돌아가는게 늦어지면 아버지에게 꾸중 듣는다. 아이에게 흥미가 없는 주제에 예의범절에 대해서만은 엄한 사람이니까.
「너, 무슨 일이야?」
문득 누군가가 말을 걸어와서 돌아 보았다.
거기에는 붉은 코트를 두른 청년이 서있었다. 코트 안에 군복을 받쳐 입고, 허리에는 장검을 차고 있다.
「혹시 길을 헤매는 거야? 하하핫, 내게도 경험이 있으니까 잘 알지. 무심코 멈춰 서서 발치를 빤히 바라보게 되버리는 거.」
청년은 상쾌하게 웃어 보였다. 크게 열린 입사이로, 새하얀 이가 반짝하고 빛난다. 확실히 한참 발치를 빤히 보고 있었던 앨리스에게 있어서, 그 반짝임은 구원이었다.
「당신, 군인?」
「아아. 나는 하트 성의 기사로, 에이스라고 해, 너는?」
「하트 성…」
터무니없는 울림에 일순 태세를 갖췄지만, 이내 경계를 늦춘다.
기사라고 할 정도니까, 틀림없이 이 나라 사정에 정통하겠지. 게다가 웃는 얼굴도 상쾌하고.
왠지 굉장히 믿음직해 보이는 사람이다.
「나는, 앨리스=리델이라고 해. 그 하트 성에 있는 토끼남에게 끌려 왔어.」
「에엣? 페터씨에게?」
에이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년은 흥미로운듯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너 혹시…, 타관사람?」
나왔다, 타관.
확실히 그 말 그대로긴 하지만, 남의 면전에다 대고 할 소린 아니고 본다.
「당신, 토끼남에 대해 알고 있어?」
「물론이지. 그 사람은 하트 성에서 재상으로서 일하고 있어. 즉, 내 상사라는 소리.」
재상? 상사?
두통이 일었다. 그 스토커가 최고 관리로 일하고 있다니.
하트 성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명백히 글러먹은 인사행정이로군.
「저기, 나 돌아가고 싶은데 여기가 어딘지 잘 몰라서 돌아갈 수 없어. 도대체 어디로 가야 여기에서 나갈 수 있어?」
「우응. 실은 나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말이지. 이 숲에서 나갈수 없어서 곤란해 하고 있어.」
뭐라.
믿음직한 구명줄을 움켜잡았다고 생각했더니 그게 사실은 거미줄이었다.
단숨에 몸의 힘이 빠져서, 그 자리에 비슬비슬 주저 앉았다.
「앗, 괜찮아? 미안…, 그다지 도움이 되어 줄 수 없어서.」
「아니, 괜찮아. 당신은 잘못한거 없어.」
앨리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기사라고 불리는 만큼 상당한 책임을 지닌 입장일텐데 이런 곳에서 느긋이 길을 헤매거나 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하는 소박한 의문이 떠오른다.
「저기, 만약 괜찮다면 차가운 음료라도 사 갖고 올까? 지쳤지?」
「고마워, 그렇지만 괜찮아.」
이 숲에서 나갈 수 없어서 곤란해 하고 있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서 차가운 음료를 구입할 셈인거야. 우선, 마음만은 받아 두기로했다. 생각해보니 이 괴상한 나라에 와서 처음으로 상냥한 말을 들었다. 무례한 소리긴 하지만, 기사치고는 그닥 의지가 될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분명 심성은 좋은 사람인 거겠지.
「어라? 당신, 다쳤어?」
앨리스는 에이스의 장갑에 마치 피 같은 것이 달라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장갑뿐만이 아니라 옷 이쪽저쪽에 눌러 붙어있다.
「이건 내 게 아냐. 상대한테서 튄 피지.」
「튄 피?」
단숨에 체온이 내려갔다.
「아아. 그게, 지금 다섯 명 정도 죽이고 왔어. 모험을 방해하는 녀석은 용서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 그런거야?」
전면철회. 역시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앨리스는 세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어라? 안색이 나쁘구나. 나 잠깐 뛰어가서 마실거 사갖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바로 돌아올테니까 말야!!」
「에? 저기, 잠깐만!!」
앨리스의 제지조차 듣지 않은채. 에이스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건 그렇고, 늦다.
벌써 얼마정도 시간이 지난걸까. 한 시간인지, 두시간인지 엄밀힌 잘 모르겠지만, 그가 다시 길을 헤매고 있는 모습은 왠지 상상이 간다.
앨리스는 포기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언저리를 걷고 있으면 언젠가 그와 재회할 수도 있겠지. 어쨌든 날이 저물기 전까지 인적 있는 곳에 도착해야 한다.
잠시 쉬자, 기운이 났다. 앨리스는 고개를 들고, 곧장 숲 안으로 걸어 간다.
이윽고 길이 열리고, 밝은 장소로 나왔다.
「우와…….」
정리 된 길 너머로 큰 문이 보인다.
금속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기둥 사이에 끼인 철문은 견고해 보인다.
좌우로 뻗은 담은 끝없이 길어서, 막대한 부지를 소유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누군가의 저택인것 같지만, 문패가 없다.
방향으로 볼 때, 여기가 하트성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무슨 일이야, 누나?」
목덜미에 닿는 서늘한 감촉.
바로 옆에 무언가 예리한 것이 닿아 있다.
그것이 커다란 도끼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이 저택에, 무슨 용무야?」
반대쪽에서 똑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이상하게 여기고 좌우를 살폈다.
좌측에는 푸른 경비복을 입은 소년. 우측에는 붉은 경비복을 입은 소년. 쌍둥이처럼 보이는 그들은 히죽히죽 웃으며 앨리스의 목에 도끼를 들이대고 있었다.
「나…, 이 저택이 너무나도 훌륭해서 잠시 보고 있었던것 뿐. 수상한 사람 아냐.」
「스스로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제일 수상한거지, 형제?」
왼쪽의 소년이 말한다.
「그렇지, 형제. 우리들은 문지기니까, 수상한 사람은 처리해야지.」
오른쪽의 소년이 말한다.
문지기?
어딜 어떻게 봐도 그들은 어린아이다. 이 커다란 저택의 문을 맡길 수 있을 만한 다부진 타입이라고는 생각되진 않는다. 도끼만큼은 정말 훌륭하긴 하지만.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른다. 역시 그 시계탑을 나온 것은 실책이었다. 어떤 불평불만을 들어도 좋으니까 오기를 피워서라도 거기에 머물렀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 늦음.
「저어기, 누나. 우리들과 같이 놀자.」
「지금이라면 무료로 편하게 해 줄테니까.」
좌우의 도끼가 부드럽게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천진하기까지한 살기에 앨리스는 숨을 삼켰다. 설마, 하루 사이에 두번이나 주마등을 보게 되리라고는―
「어이, 뭐하는 거야, 트윈즈.」
가족의 얼굴이 빙글빙글 뇌리에서 돌기 시작 했을 때, 누군가가 문에서 나왔다.
올려다보니 목이 아플 정도로 키가 큰 남자다. 아름다운 금발에, 날카로운 눈초리. 허리에는 건 벨트(Gun Belt). 그리고 머리에는…― 토끼귀.
도끼의 존재 같은건 싹 잊혀졌다.
앨리스의 눈은, 그 기다란 귀에 못 박혔다.
「뭐야, 손님?」
「잠깐, 방해하지 마. 우리들 일하는 중이니까.」
「뭐가 일하는 중이냐. 언제나 땡땡이 치고 있는 주제에.」
거친 말투였다. 같은 토끼 동료라고해도 그 페터라 불리는 흰토끼와는 전혀 다르다. 한마디로 하자면… 무섭다.
타이밍 좋게 나타나 준 것에 감사는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궁지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증거로 남자는 언제라도 총을 뽑을 수 있도록, 손가락을 트리거에 걸치고 있다. 여유로운 표정을 띄우고 있지만 안광은 변함없이 날카로운 채.
「어이, 이 녀석 나쁜 녀석이냐?」
금발 토끼남은 어딘지 차가운 미소를 띄우며 푸른 옷의 소년에게 묻는다.
「글쎄. 나쁜 녀석으론 보이지 않지만 사람은 겉보기론 모른다는 말도 있고.」
「뭐어, 그래도 나처럼 외견도 내용물도 좋은 녀석 역시 있다구?」
쌍둥이가 붕붕 고개를 가로 젓자, 앨리스 역시 따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첫인상으로 사람됨을 정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아무리 봐도 성질 나빠 보인다.
「정말 뭐야, 네놈들 열받게!!」
그렇게 투덜거리며 금발남은 앨리스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일순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 말야, 나쁜 녀석이지?」
앨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 분명 이건 꿈이다. 꿈이라고 생각하면 여러가지가 납득간다. 흰 토끼에게 끌려온 것도, 키스당한 것도, 도끼가 들이밀어진 것도, 총이 겨누어져 있는 것도 전부 꿈. 일요일의 화창한 햇살 속에서 꾸는 백일몽.
그런데도, 목에 닿는 총구의 감각이 터무니없이 리얼해서 전신의 떨림이 멎지 않는다. 꿈인데도, 전부 꿈인데도, 죽는 것이 무섭다. 총탄이 경추를 꿰뚫을 때 찾아올 고통이 무섭다.
총구가 목을 파고 든다. 부탁이야, 꿈이라면 빨리 깨어줘. 부탁이니까.
「나, 나는,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쁜 녀석이 아냐.」
가까스로 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남자는 입가에 거친 미소를 띄운다.
「흐응. 그래도, 미안? 나, 실은 나쁜 녀석이야.」
트리거에 얹힌 남자의 손가락에 힘이 실리는 것을 보았다.
――――――죽는다.
확실히 죽음을 실감하고 눈을 감은 순간 총성이 울렸다. 앨리스를 둘러 싼 공기가 흔들리고, 쇠와 초연(硝煙) 냄새가 코를 스친다.
하지만, 고통은 없었다.
「어째서 막는거야, 블러드.」
「너희들, 내 저택 내에선 허가없이 죽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몇번이야 이야기 해야 알게 되는 거지?」
앨리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 샌가, 옆에 남자가 서있다. 그가 금발 토끼남의 손을 억눌러 자칫 큰일날 뻔한 참에 탄로(彈路)를 빗겨가게 해 준 것이다.
…………살았다.
「병아리 토끼가 멋대로 쏜거야, 보스.」
붉은 옷의 소년이 당당히 답한다.
「뭐라?! 누가 병아리야, 어이!」
「왜냐면, 보스의 명령을 바로 까먹잖아. 그건 닭 이하의 병아리지. 머리도 병아리 색이고 말야.」
「죽인다, 네놈!!」
병아리 토끼라고 불려진 남자는 곧 바로 쌍둥이에게 총을 겨눴다. 하지만 다시 바로 손이 억눌린다.
「학습하지 않는 녀석이군… 쏘기 전에 생각해.」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기묘한 모자였다. 볼륨 있는 실크햇에 장미나 깃털이 잔뜩 장식되어 있다. 어느 동네 마술사도 이렇게 화려한 토핑은 하지 않겠지.
그 다음엔, 얼굴이다. 그의 본 순간 소리 칠 뻔했다.
닮았다. 너무나 닮아 있다. 아니, 완전히 똑같은 얼굴이다. 과거, 가정교사였던 첫사랑의 그 사람과.
조금 삐침이 있는 흑발에, 길게 째진 눈. 얇은 입술. 인후의 목젖까지도, 전부 그 사람 그 자체였다. 오로지 단 하나 다른 것은, 결코 이런 화려한 모자를 쓰지 않는 점. 심플한 옷을 좋아했던 그 사람은, 승마복인지 예복인지 모를 하얀 롱 쟈켓을 걸치고, 지팡이를 휘두르거나 하지 않는다.
「엘리엇. 네게는 이 아가씨가 적으로 보이나?」
「보, 보이진 않지만. 적일지도 모르지. 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병아리 토끼는 엘리엇이라는 이름인 듯 하다. 그건 뭐 아무래도 좋지만,
「잠깐 기다려. 쏴보지 않으면 모른다니, 쏘면 죽잖아!」
지적하지 않고선 참을 수 없었다.
「시끄럽게! 어쨌든, 적이라면 적인거야!」
앨리스는 아연히 엘리엇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불합리한 이유로 총을 맞는다니 참을 수 있을리 없다. 아무리 이 세계가 꿈이라고 해도.
문득 정신이 들자, 모자를 쓴 남자가 앨리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나른하고, 싸늘한 시선. 역시 다른 사람이다. 그 사람의 눈짓은 좀더 상냥하다. 최소한 남을 품평하듯이 빤히 바라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걸 생각하자 앨리스는 바로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 사람의 좋은 구석만을 떠올려 버리는 점이. 아직 미련을 끊어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잘라내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뭐야, 블러드. 이런게 취향이었어?」
의외라는 듯 엘리엇은 말한다.
이런거라서 미안하게 됬네, 앨리스는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자신도 대강 입버릇은 나쁜 쪽이지만, 이 남자의 무신경함은 당해낼 수 없다.
「저기, 취향이 아니라면 쏴 버리자. 애시당초, 모자장수 패밀리의 영토를 서성거리는 녀석이라니 절대로 제대로 된 녀석일리 없잖아.」
「모자장수 패밀리라고?」
앨리스의 반응에 엘리엇은 눈을 크게 떴다.
「너, 모자장수 패밀리를 모르는 거냐?」
「몰라. 나는 그냥 지나가던 길이고, 물건을 사러 온게 아냐.」
아무래도 이 거대한 부지에는 모자가게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쳐도, 위험한 곳이다. 저택에 접근한 사람들을 일일이 다 쏴서 죽여 버리고 있으면, 손님 같은게 오지 않게 될 텐데.
「혹시… 당신이 모자장수인거야?」
앨리스는 곁에 선 남자를 보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화려한 모자를.
「아아, 그렇다.」
그는 수긍하고서, 말을 잇는다.
「그리고 너는, 타관사람이지?」
「엣?! 타관?!」
앨리스가 답하는 것보다도 빨리, 엘리엇이 반응했다.
「너, 그랬나?」
「으응, 그런 소리 자주 듣긴 하는데…」
타관사람 취급당하는 것도 이젠 익숙해졌다.
그러자 모자를 쓴 남자, 블러드는 작게 웃고서 지팡이로 탁하고 문을 두드렸다. 그것을 신호로, 무거운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이거 재미있는 아가씨로군. 잠시 심심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블러드는 앨리스를 향해 손을 뻗으며, 눈을 가늘게 뜬다.
「다과회에는 반드시 손님을 초대해야 하는 룰이 있다. 자아, 아가씨, 너를 우리들 모자장수 패밀리의 티파티에 초대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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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너머에는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넓음과 정원의 아름다움에 앨리스는 숨을 삼켰다. 잘 손질된 울타리에, 좌우대칭으로 비치된 커다란 분수. 연못의 수면에 비친 푸른 하늘은 주위에 펼쳐진 잔디밭의 녹색을 두드러지게 만들고 있다. 뭍가의 망루에는 새들이 모여서 한껏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앨리스도 나름 부유층에 속하는 집안의 아가씨다. 나름 저택이라 할만한 것을 갖고 있고, 정원사를 고용해야 할 정도로 넓은 정원 역시 갖추고 있다. 리델가 이상으로 거대한 저택부지를 소유한 친구들도 적잖이 있지만, 이곳은 앨리스가 아는 한 가장 커다란 사유지다. 귀족 중에서도 웬만한 작위를 지닌 자가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규모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도… 이 저택의 주인은 그다.
기묘한 모자를 쓴, 블러드라고 불리는 남자. 앨리스의 보폭에 맞춰 걷고 있는 그는, 차분한 분위기를 갖곤 있지만 아직은 젊은이로 보인다. 그런데, 이만한 정원을 소유할 수 있을 정도의 유력자인 것이다. 모자장수라는거 그렇게나 잘 버는 직종인건가? 그가 쓴 모자는 빈말으로라도 유행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어쨌든 두번이나 죽을 뻔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버린 걸까.
아무리 기진맥진해 있다고해도 이런 위험인물 소굴에 기어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다리가 아픈걸 참고 조금만 더 걸어갔었다면 좀 더 친절한 사람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블러드가 내민 손을 잡아버린 것은….
「자아, 오늘은 네 생일이다. 축하해 줄테니 편할대로 앉아도 좋아.」
이윽고 정원 안에 셋팅된 테이블에 도착하자, 블러드는 자리를 권했다.
「누구의 생일이라고?」
「네 생일이다. 티파티 준비는 갖춰졌다. 남은건 극상의 찻잎이 티포트 속에서 춤추며 가라앉는걸 느긋히 기다릴 뿐.」
앨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완전히 의미불명이다 앨리스의 생일은 오늘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그에게 생일을 가르쳐준 기억도 없다.
블러드는 딱하고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내고서, 고용인 같은 여성을 불러 홍차의 셋팅을 지시했다. 과연 모자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만큼, 이거 또 제법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홍자를 내오기 전에 자기 소개를 하지. 나는 블러드=듀프레. 이 저택의 주인이다.」
그는 모자를 벗고서 한번 가볍게 목례해 보였다.
「나는 블러드의 부하로, 엘리엇=마치라고 하지. 잘 부탁해.」
엘리엇은 긴 귀를 쫑긋거리며 방긋 웃었다. 앨리스를 죽이려했던것은 깨끗히 잊고 있는 듯한 천진한 스마일이었다.
「거기에 있는 쌍둥이는 트위들=디와 덤. 이 저택의 문지기다.」
「내가 디야, 누나.」
「나는 덤. 잘 부탁해, 누나.」
아직 홍차도 채 준비되지 않았는데, 쌍둥이는 테이블위에 놓여진 과자를 손이 닿는대로 먹어치우고 있었다.
앨리스도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 쌍둥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푸른 제복을 입은 쪽이 ‘디’고, 붉은 제복을 입은 쪽이 ‘덤’. 지금은 옷 색으로 판별할 수 있지만, 만약 같은 색 옷을 입으면 분별할 자신이 없다.
그 시선을 눈치챈 쌍둥이는, 웃어 보였다.
「티파티에 손님이 찾아오다니, 오래간만이네, 형제.」
「문을 열기 전에 언제나 우리가 닥치는대로 죽여버렸으니까말야.」
과자를 먹는 천진한 모습으론 상상도 안 되는 말이 튀어나왔다.
「죽여버리다니…….」
그들은 농담을 하고 있는게 아니다. 조금 전 확실히 몸소 체험했으니까.
「내 집에는 부르지도 않은 손님만 오지. 그것도, 성가신 문제를 갖고 기어들어오는 손님만.」
블러드는 오렌지 색 케이크를 썰어 앨리스에게 건넸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의 몫이라 생각되는 콤보트(compote)나 무스(mousse)나 쿠키등도 차례차례 앨리스에게 돌아온다. 아무래도 달콤한 걸 좋아하는것 같진 같다.
「나는 성가신 문제 같은거 안 갖고 와. 애초에 여기에 볼일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아아, 알고 있다. 너는 나의 손님이다. 이제 엘리엇이나 문지기들이 무례를 저지를 일도 없을 거다.」
블러드가 말하자, 엘리엇은 왜인지 기쁜듯 몸을 쑥 내밀었다.
「좀 전엔 미안. 네가 블러드의 손님이라면, 환영하지.」
줄곧 나쁜 인상밖에 들지 않던 남자였지만, 한입가득 케이크를 밀어 넣고 맛있게 우물거리는 모습은 질릴 정도로 무방비해서, 다소 맥이 빠진다.
아직 죽임 당할 뻔했던 때의 두려움을 잊은건 아니지만, 단지 보스에게 충실할 뿐. 그렇게까지 악인은 아닐지도. 그런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 걸로 보아, 어지간히 이 터무니없는 세계에 익숙해져 버린 것 같다.
「자아자아, 많이 먹어! 당근 케이크에 당근 쿠키에 당근 콤포트에 당근 무스다. 전부 다 최고로 맛있다구~.」
「다, 당근…?」
테이블위에 있는 과자는 한결같이 오렌지색이다. 재료가 당근이라면 납득은 가긴하지만… 이건 너무 한 것 같은데.
「아아, 많이 먹어라. 가능하다면 신속하게 내 눈에서 그 오렌지색을 일소해다오.」
블러드는 미간을 찌푸리고서, 2단 당근 케이크에서 눈을 돌렸다. 옆에 앉아있는 엘리엇과는 대조적인 리액션이다.
「고, 고마워.」
가능하다면 사양하고 싶었지만, 엘리엇 나름의 환영의 표시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앨리스는 묵묵히 눈 앞의 과자를 집어 먹었다. 확실히 맛은 굉장하지만, 먹는 즉시 혀가 오렌지색이 될 것 같다.
하지만 토끼는 역시 당근을 좋아하는구나. 새삼스럽지만.
문득 또 한 사람의 토끼남이 생각났다. 그 남자도, 보통 땐 당근만 먹고 있는걸까.
「잘도 그렇게 당근만 먹어대네. 과연 토끼.」
붉은 제복을 입은 덤이 앨리스의 생각을 대변하듯이 중얼거린다.
「앙? 누가 토끼라고?」
「여기서 토끼라고 하면 너밖에 없잖아, 병아리 토끼.」
「나는 토끼가 아냐!! 당근도 안 좋아해!!」
엘리엇은 쌍둥이에게 터무니없는 소리를 외치며, 일어섰다.
금방이라도 건벨트에서 총을 뽑아낼듯한 기세다.
「잠깐 진정해. 이런 소릴 하기엔 뭣하기만, 당신 토끼고, 당근도 좋아하잖아? 사실을 들었는데 오히려 화를 낸다는 건 문제있어.」
「아냐아냐, 나는 토끼가 아냐. 이 귀는 멋대로 자란 것 뿐이다!」
「에―….」
「게다가, 나는 당근 같은거 안 좋아해. 토끼가 먹는걸 누가 먹겠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당근이 아니라 당근케이크와 당근 무스와 당근 쿠키다.」
글렀군.
앨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저기, 블러드씨도 뭐라고 말해 줘요. 이 토끼씨에게.」
「홍차가 맛있군.」
태연한 얼굴로 블러드는 입가에 티 컵을 가져가고 있다. 나몰라라하는 자세다.
「이야~ 역시 토끼잖아.」
그만두면 될텐데, 덤이 추가타를 넣는다.
「어이, 꼬맹이. 몇번이나 말하게 할 셈이냐! 토끼가 아니라고 하잖아!」
「토끼가 아니면 대체 뭔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건 좋지 않아.」
쌍둥이가 연달아 놀려대자 엘리엇은 마침내 총을 뽑았다. 앨리스는 순간적으로 몸을 굽혀 테이블 밑에 숨었다.
「죽어라, 이 애송이들!!」
「너야말로 죽어!」
총성이 울러퍼지자 앨리스는 귀를 막았다. 문지기들은 총탄에 기세가 꺾이는 일도 없이 커다란 도끼를 움켜쥐고 그에 응전한다. 평화로워야할 티파티는 순식간에 결전 양상을 띈다.
그런 와중에도 블러드는 눈썹하나 까닥 않고 홍차 향을 음미하고 있다.
「저기, 블러드. 부하들을 말리지 않아도 돼? 이대로라면 누구 하나는 죽겠어.」
「이 정도 장난질로 죽을 정도로, 내 부하는 허약하지 않아.」
그렇게 느긋할 수 있는 걸까. 그에게는 흡사 무수한 수라장을 헤쳐 나온듯한 여유와 확신이 보였다. 앨리스는 전혀 그럴 수 없었는데.
「그런 것보다 오늘은 굉장한 찻잎이 손에 들어왔다. 생일 축하로서 실컷 마셔도 좋아. 케이크가 부족하다면 바로 만들게 하도록 하지.」
「당신, 뭔가 착각하고 있는것 같은데. 오늘은 내 생일이 아냐. 마음만은 기쁘지만 축복 같은거 받아도 곤란해.」
새삼 정정하는데도, 블러드는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띄운채로다.
「너의 생일을 오늘로 해선 안 된다는 룰(Rule)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지루한게 질색이다. 허나, 너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지루하지 않겠지.」
티 컵을 들어올리며, 나태한 눈으로 말을 잇는다.
「생일 축하하지, 앨리스. 너는 운이 좋은 아가씨다. 여기까지 살아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지.」
**
도대체 운이 좋은건지, 나쁜 건지.
하마타면 죽을뻔했으니까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들은 일단 앨리스는 일단 손님으로서 받아 들여주었다.
블러드는 내킬때까지 이 저택에 체재해도 된다고 했다.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손님용 방에 도달했다. 모자를 모티브로 삼아 통일성 있게 인테리어된 넓은 방이다. 일상생활을 보내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춰져 있다. 이러한 대우로 봐서는 그녀는 확실히 환영받고 있다.
자신도 의외로 뻔뻔한 여자다. 내친김에 여기까지 와버렸지만 달리 갈 곳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창 밖을 보자니 이미 새카맸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개여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 버린 걸까?
혼자가 되고나니 갑자기 여러가지 일로 불안해졌다. 전개가 지나치게 엉망인지라 이것은 꿈의 세계라고 뇌까리고 있는 자신. 그런데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꿈에서 깨어날 수 없는 모순.
그렇지만 우선 살아가야 된다. 꿈이든 뭐든, 자신의 의지가 작용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앨리스는 의자에서 일어서, 방을 나왔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얼해야 될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언가를 해야된다. 언제나 무기력했던 자신으로선 감히 생각하지 못한 충동이었다.
방을 나온 것은 좋았지만, 이 저택. 너무 넓어서 길을 전혀 모르겠다. 어딜봐도 똑같은 복도, 똑같은 문만이 줄지어서 있다.
「뭔가 찾고 있나,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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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은근히 많이 했었다는 것을 깨닫고 혼자 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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