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지에 게재된 하트나라의 앨리스 숏 스토리 번역입니다. 엄청 오래전에 번역해둔거.
어느 잡지인진 까먹었는데 굉장히 오래된 잡지인건 확실하네.
블러드X앨리스<-비발디.
비발디 중심의 이야기로 장미정원 네타가 포함되어 있으니 익숙치 못한 분들은...
그뭐냐, 블러드와 앨리스가 결혼했습니다. 이 숏 스토리(...)
[하트 나라의 앨리스/SS]
† 우리들은 행복에 익숙치 않아 †
그 저택엔 아름다운 비밀의 화원이 있다.
주인 스스로가 장미를 손질하는 그 화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블러드 듀프레. 그리고 그 친누이인 하트의 여왕 비발디. 서로 적대하는 두 사람이건만, 그 두사람이 사실 남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
두 사람은 지금까지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을 제거해왔다. 자신들의 과거, 즉 시간을 지워온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장례를 치루는 행위이기도 했다.
(즐겁구나.)
비발디는 언제나 그렇게 느꼈다.
기분이 편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주 다소긴하지만 짜증도 가라앉는다.
(유쾌하도다.)
모자장수 패밀리의 보스와 하트 성의 여왕은 서로의 영지와 둘러싸고 다투는 적. 그러한 그들이 남매인 사실은 누구도 모른다. 비밀을 지니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공허한 몸뚱아리를 채우는 '무언가'가 된다. 자신만이 지닌 '무언가'가 있으면, 남을 내리 깔 볼 수 있다. 남을 기만하는 쪽에 설 수 있다.
그것은 분명 그녀의 동생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자신을 옮아매고 있는 '역할'에서 해방되어, 평범한 오누이로 돌아오는 것은 이 장미화원에 있을때 뿐. 그를 위해 블러드는 이 정원을 만들었다. 감상과도 같으면서도 다른, 어떠한 무언가를 위해.
무수한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이 화원엔 밤이 어울린다. 붉은 장미가 밤의 청아함을 비춰낸다.
허나 저녁을 유독 좋아하는 비발디는 밤에 핀 장미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게 싫었다.
가고 싶을때, 내킬 때만 장미화원을 찾는다. 가끔 밤에 찾아온 적도 있으나 그것은 밤에 피는 장미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동생을 만나기 위해서도 결코 아니었다. ㅡ 허나, 오늘밤은 다르다.
[설마… 네가 초대를 해줄 줄이야. 게다가, 정식으로. 네게 그런 예의가 있었다니, 놀랍구나.]
[나 역시, 절차를 밟을때 정도는 있어.]
[흐응. 그런 적은 거의 없었지.]
[거의 없는 일이니까 의미가 있지.]
[희소성이라면 있을지도.]
달빛 비치는 장미 화원 한가운데.
환상적인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남매의 말다툼이다.
비발디는 금색 지팡이를 손에 쥔채로, 평상시처럼 오만하게 행동하고 있다. 그녀도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차리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녀는 괜찮다. 왜냐면 그녀는 여왕이니까.
더욱이 상대는 동생. 설령 모자장수 패밀리의 보스라고 해도, 어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렇군. 드문 일이라는건 인정하지. 오늘밤은 누님을 번거롭게 할 정도의 용무니까.]
[호오…]
[내 아내를 소개할까 싶어서,]
[아내?]
[물론.]
[아내라고 했나?]
[그래.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네가… 결혼을? 설마. 협박 당한것은 아닐터. 스스로 청해 타인의 곁에 정착한다?]
[물론이고 말고. 이 내가 바라지 않는 결혼을 할리가 없지. 내게 그런걸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모르겠군…, 피치못해 임신이라도 시켰다면….]
비발디가 신분에 걸맞지 않게 품위없는 소릴 꺼내기 전에,
바스락하는 소리가 나며 블러드의 뒤에 있는 덤불 속에서 한사람의 소녀가 나타났다.
[앨리스….]
[머, 멋진밤이네, 비발디.]
소녀는 비발디에게 인사를 청한다. 평상시와는 달리 긴장한 모양새로.
비발디는 소녀를 잘 알고 있다. 푸른 에이프런 드레스를 입은 그 소녀의 이름은 앨리스=리델.
이(異) 세계에서 온 '타관 사람'이다.
[타관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다. 앨리스를 만나기전까지는 뜬소문이라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바로 뒤집혀졌다.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마음을 허락하고 여동생처럼 귀여워하고 있었다.
[비발디, 오해하지 말아줘. 나 애같은거 생기지 않았으니까.]
[그래, 내 아내는 임신하지 않았어. 그럴 시간은 없지. 잠시동안은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싶은 참이라서.]
여동생처럼 여기고 있던 소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의기양양히 말하는 동생.
[지금…, '아내'라고 한겐가?]
믿을 수 없다.
[물론이지.]
블러드는 느긋한 모양새다.
[무슨 말도 안되는…!]
냉정을 가장할 수 없었다. 동생은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한방 먹였다는 표정이다.
평상시라면 그 표정에 분통을 터트렸겠지만, 그런 여유조차 없다.
[앨리스가…?!]
[물론. 그녀가 내 아내다.]
[앨리스, 사실인가?]
비발디는 동생을 무시하고 앨리스에게 물었다. 블러드는 울컥한 모양이지만, 그녀 알바가 아니다.
[아? 응. 그렇게 되버렸어.]
[맙소사…! 너처럼 귀여운 아이가 하필이면 이 같은 사내에게 꺾이다니…!]
비발디는 분통을 터트리며 발을 굴렀다.
맘에 들어했던 장난감…, 아니 장난감보다도 훨씬 더 좋은 것을 빼앗긴 어린 아이같은 기분이다.
[이 같은 사내라는 발언이 맘에 걸린다만.]
[말 그대로의 의미인게다. 변변찮은 남자가 아냐. 아아, 너같은 것에게 빼앗길 정도라면 새장속에라도 가둬 넣어버릴 것을…. 그쪽이 더 나을텐데…, 가엽구나, 앨리스.]
[흥. 분해해도 이미 늦어. 그녀는 내 것이다.]
블러드는 앨리스의 팔을 끌어 당기고, 마치 비발디에게 내보이듯이 끌어 안는다.
[나는 물건이 아냐.]
[하지만, 내 것이다.]
[내 말을 좀 들어….]
앨리스는 쓴소리를 하면서도 블러드를 뿌리치지 않는다.
[……?]
비발디는 위화감을 느꼈다. 분한 마음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녀가 알고 있는 동생과는 다르다. 언제나 나른하고, 기분파. 젠체하는 동생.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않는… 설령 집착한다해도 여유로운척 진의를 얼머무리는 동생. 그런 태도를 취하고는 있지만 동생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잔혹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같은 습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메마른채로, 무언가를 망가트리지 않고선 견딜 수 없어하는 그 습성.
[맹세했겠지?]
[당신이, 말야.]
[네 몫까지 대신 맹세한거다. 언약은 성립되어있지.]
아내라고 하는 여자에게 휘둘리는 블러드는 평상시보다도 한심하지만,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래서야…)
이래서야 마치 사랑에 빠진 평범한 남자같지 않은가.
[앨리스. 너… 정말로 이 남자의 아내가 된게냐?]
[응. 거짓말같겠지만, 사실이야. 벌써 결혼식도 올려버렸는걸. 엘리엇이나 디와 덤…, 패밀리 일원 모두 축복해줬어.]
동생의 처…, 앨리스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행복한 모양이다.
얄미운 소리를 하며, 다투듯한 말이 오고가도, 피어오르는 감정은 숨길 수 없다.
이 결혼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원해서 이뤄진 것이다.
블러드도, 앨리스도… 서로 원했기에 맺어졌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자 비발디는 순간 정신을 잃을것만 같았다. 무언가 무서운 것에게 둘러싸인 듯한 감각. 평상시의 짜증과는 다르다. 과거에 없을 정도의 초조함과… 이해하기 힘든 고독감. 이 무한하고도 좁은 세계, 장미 화원 속에서, 일순 혼자가 된듯한 감각이다.
장미의 달콤한 향기도,
그녀가 좋아하는 붉음도,
그들을 채색하는 밤의 부드러움도 사라져 가는 것은 일순.
[뭐, 그런 소리다. 누님에게도 일단은 알려둘 셈이라서. 그녀는 이제 앨리스=리델이 아니라, 앨리스=듀프레. 나의 아내로서, 이 모자장수 저택의 여주인이다.]
블러드가 앨리스의 옆에서 설명했다.
기쁜듯, 평정을 가장하곤 있지만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모양새다.
[그래]
비발디가 자신을 되찾는 것도 일순이었다.
[스스로 원해 생애의 무덤에 발을 들여놓다니, 너도 별난 성격이로군, 앨리스.]
[그건 원래 남자쪽 대사다만, 누님.]
비발디가 일부러 한숨을 쉬고 앨리스를 동정해보이자 블러드가 화가난 모양새로 말을 건네온다.
앨리스는… 그녀는 웃고 있었다. 블러드와 마찬가지로 기쁜듯이.
(아아, 행복하단겐가.)
**
[임금님은 또 애첩을 찾으시고 계신 모양이야.]
[그래서 성내에 계시지 않으시다니.]
[아아. 폐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
[…ㅡ 나라면 여기에 있다.]
성에서 일하는 메이드는 모두 시끄럽다.
테라스에서 한창 잡담 중이던 메이드들은 등 뒤로 비발디가 다가오는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거기의 그대들. 지금의 이야기를 다시 해보도록….]
비발디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금색 지팡이 끝으로 오른쪽에 있던 메이드를 가리켰다. 지명된 메이드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얼굴없는 자지만, 그 정도의 변화는 비발디 역시 알 수 있다.
[킹이 어떻다던가 이야기하고 있었지? 다시 한번 확실히 말하도록.]
[아, 아뇨. 그, 그게….]
메이드는 망가진 인형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다.
잔혹하기로 이름 높은 여왕.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했을때 그녀가 내뱉을 말이 무엇인지는 이 성에서 일하는 자 모두 알고 있다. 비발디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짜증을 억누르는 방법은 달리 얼마 되지 않는다.
[혀는 재앙의 근원이라할까, 동정의 여지가 없군요.]
[자업자득이라는 그거? 페터씨도 참, 여전히 앨리스 이외에는 골고루 차갑구나~ 하핫]
[섣부른 말은 몸을 망친다. 그 말, 당신에게도 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에이스군.]
[하하핫.]
[뭐가… 우스운지 모르겠군요.]
여왕의 뒤를 따르고 있던 재상은 불쾌한듯 눈썹을 찌푸리고, 기사는 자리에 걸맞지 않게 명랑한 웃음 소릴 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회의가 있었지.)
이 두사람을 대동한 이유를 잊어버릴뻔 했다.
아무래도 멍해있던 모양이다. 집중되지 않는다.
블러드의 결혼. 정보망을 동원하고 있었으니 사전에 눈치챌수도 있었을텐데.
(어지간히 빨리 준비를 마친건지, 공들여 숨기고 있었던건지….)
혹은, 양쪽 다인가.
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거겠지.
뒤에 있는 재상의 모양새는 변함이 없다. 이 토끼도, 언제나 기분 나쁘게 냉정하다. 표면에 드려내지 않는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앨리스의 결혼사실을 아직 모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후련하기 짝이없다. 등뒤의 토끼가 침울해진다면 조금 더 기분이 상쾌해질 것이다.
(음. 짜증도 조금은 가라앉는군.)
주위의 메이드나 병사들은 모두 침을 삼키고 여왕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자아, 어떻게 할까….
[흠…. 지금의 짐은 여자의 목을 칠 기분이 아니다.]
비발디가 그렇게 말을 내뱉은뒤 곁에 있던 근위병에게 지팡이를 가리킨다.
[대신에 이 자의 목을 쳐라!]
[에엣?!]
뜬금없이 사형선고를 받은 병사가 순간 놀라 고개를 든다.
허나 여왕의 변덕에 익숙해져 있던 다른 병사들은 재빨리 지목된 병사를 구속했다. 마찬가지로 구속당한 병사도 일찌기 체념하고 저항을 멈춘다. 병사를 끌고 병사들은 복도 저너머로 사라진다.
[죄상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폐하….]
머리에 새하얀 토끼귀가 나있는 재상, 페터=화이트는 가여운 병사에게 시선조차 주지않고 그저 태연히 비발디에게 묻는다. 처형하려면 죄상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그 자는, 조금 전 짐의 드레스 자락을 밟았다. 불경죄로다.]
[그런 일도 있었습니까? 뭐, 폐하가 하시는 말씀이라면 그런거겠죠.]
페터는 안경을 추켜 올리며, 유능한 재상답게 추궁하지 않는다.
[화풀이네. 건드리지 않으면 화는 입지 않는다지만,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입는거구나, 하하핫.]
[정말로…, 뭐가 우스운건지 모르겠군요.]
[하핫. 나도 잘 모르겠어.]
페터는 질려서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게 됐다. 조용해진 건 좋지만, 에이스가 변함없이 방긋방긋 거리는게 거슬린다. 허나 거슬린다해도 병사와 달리 처형할 수 없는 자도 있다.
[흐음….]
또 짜증이 부활할 것같다.
[짐은 산보하러 가겠다. 따라 오지말도록.]
뾰족한 목소리로 말을 남기고, 비발디는 등을 돌려, 발빠르게 그 자리를 떠난다. 그 뒷모습을 보며 페터는 [따라와 달라고 부탁해도 안 따라 가네요.]하고 중얼거렸다.
[그치만, 회의는 어떻게하지? 나, 다음 회의에는 출석해란 소리 들어도 도착 못할 것 같은데. 난 참, 운이 나쁘니까 말야.]
[이대로 대기하고 있으면 되잖습니까.]
[에에~…]
**
저녁 시간대는 산보 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대다.
비발디는 단언한대로 혼자 나섰지만, 향한 곳은 성의 정원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장미는 흐드러지게 피어있지만, 그곳은 적의 저택 내.
비발디가 향한 곳은 동생이 소유한 장미화원이었다.
성의 장미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그녀의 짜증을 돋구는 데가 있다. 블러드가 일군 정원에 핀 장미는 자신을 상처입히지 않는다. 최소한… 이제까지는 그랬었다.
(짜증이 가라앉지 않아.)
동생의 결혼. 누나라면 축복해야할 일이겠지.
적대하고 있다고해도, 누나로서 꺼림칙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다. 거슬리는 것은 동생의 상대가 자신도 사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앨리스였기 때문일까. 자신이 얻을 수 없는 행복의 형상을 봤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ㅡ
[블러드, 잠깐…!]
갑작스럽게 담 저쪽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비발디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 이 장미 화원의 소유자와 그의 가 있었다. 그들은 반대편에 있는 비발디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딱히 아무것도. 그렇군... 생각한다고 한다면 아가씨도 나처럼 집중해 주셨으면 하는 점인가?]
[아가씨라고 불리는거 싫어.]
[실례. 지금은 이제 아가씨가 아니였지. 부인.]
[바…, 읏]
블러드는 앨리스의 몸을 끌어 안고, 턱을 들어올려 입술을 맞췄다.
[…]
깊고 긴 입맞춤. 앨리스는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다.
소녀의 뺨을 장미빛으로 물들이는 것은 비발디가 잘 알고 있는 남자.
그리고 생판 면식도 없는 남처럼 느껴지는 남자다.
동생인데도 다른사람같다. 소녀와 마찬가지로 장미빛으로 젖어 있는것처럼 보인다.
(착각이겠지.)
행복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들리는 거리가 아닌데도 호흡까지 느껴진다.
[블러드….]
앨리스는 블러드의 웃옷을 꽉 움켜쥔다.
이 소녀도 잘 알고 있는 소녀일텐데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다른 얼굴. 그녀의 동생외엔 끌어 낼 수 없는 표정.
[우리들은 부부다. 달리 부끄러워할 필욘없어.]
블러드는 부드럽게 웃으며 잔디위에 앉아, 앨리스를 끌어 안는다.
[무엇보다도 부부든 아니든, 내가 사양할 필요는 없지만]
[그치만 여기 밖이야….]
[신경쓸 필욘없어. 아무도 오지 않아.]
블러드는 앨리스의 머리를 살짝 잔디 위에 내려놓고, 그 양옆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여, 아내의 목덜미에 붉은 흔적을 남긴다.
[그, 그치만….]
아내라고해도 그녀는 아직 어린 계집애다.
앨리스의 저항은 남편을 달뜨게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비발디가 올지도 모르고….]
뺨을 붉히면서도 어떻게든 변명을 찾으려 한다. 애처로울 정도로 그녀는 젊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군, 만약 누님이 온다면….]
스커트와 구두 사이로 드러난 앨리스의 무릎을 어루만지며 블러드는 나태하게 중얼거린다. 그녀가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을 짐짓 모른척한다. 가는 발목을 쥐고, 힐끔 뒤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
[보여주면 되지.]
**
이 세계의 시간대는 내키는대로 변한다.
아침 다음에 밤이 오고, 밤 다음에 낮이 온다.
한번 찾아온 황혼 무렵 다음에 찾아온 것은 또 다시 저녁시간대였다.
즉, 저녁이 이어지고 있다. 좋아하는 시간대인데도 기분은 개이지 않는다.
[바보 같도다. 그 XXXXXXXXX. 블러드놈. 녀석은 일족의 수치인게야.]
저물어가는 황혼 속을 비발디는 혼자서 걷는다. 어느샌가 풍경만이 바뀌어간다.
(바보같은 일족만큼 수치스러운 것은 없지. 내게 그러한 꼴을 보여서 어찌하겠다는게냐. 바보놈이.)
어디를 어찌 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상당히 걸음을 옮긴 기분이 든다.
성의 부지내로 들어와 있었다.
익숙한 성의 정원에도 무수한 장미꽃이 피어있지만 맘에 들어하던 꽃도 기분을 띄워주진 않는다.
(옛날부터 시시한 일에 손을 대는 녀석이었지….)
동생과는 달리 비발디는 장미를 사랑해도 스스로 그를 돌보거나 하진 않았다. 관리는 모두 병사에게 맡기고, 그녀는 그 아름다움을 즐길 뿐.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 않는다. 그것이 여왕이다.
[……….]
(불안한겐가….)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채워져 있는데도 아직도 말라 있는걸까.
어린애같은 과시욕.
그만큼 행복하면서도 아직 불안한게다.
바보같다고 여기면서도 비발디는 불러드를 차마 비웃을 수 없었다.
(완전히 채워져서 안심할 수 있는 날 같은건 오지 않아. 시간이란건 믿을수 없어.)
이 세계에서 시간은 채워지지 않는다. 애매하고 불확실한 형태로 괴일 뿐이다.
손을 뻗어 눈에 띈 붉은 장미를 한송이 찌푸러트린다. 가시가 그녀의 피부를 상처입혔다.
[아파….]
예상하곤 있있었는데도, 어린애처럼 소리가 샌다.
움켜쥔 장미보다도 붉은 피가 새하얀 피부위를 흘러 떨어진다.
[아프다….]
(하여튼, 나도 어리석어.)
자조하고 싶어지는건 당연하다. 그녀와 동생은 근본적인 부분에서 터무니 없을 정도로 닮아있다.
서로의 공통된 부분을 증오하고, 불행한 타자(他者)를 서로 가여히여기며, 바보취급하고, 조소함으로서 어딘지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러드는 앨리스를 손에 넣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않는 어리석은 동생과, 그 남자를 선망해버린 어리석은 누이. 어리석은 점까지 멋지게 닮아있다.
[아….]
상처는 옅어진듯 피는 금새 사라진다.
상처는 삽시간에 아물고, 피부는 원래대로 깨끗히 나았다.
[……]
시간을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간단하다.
스스로 아물게 한것인데도 상처가 남지 않는 사실이 화가 난다.
(다시 한송이, 꺾어볼까….)
그렇게 생각하고 비발디가 손을 뻗엇을때...
[폐하……, 손님이 오셨습니다만….]
혼자 우두커니 서있던 비발디에게, 메이드가 말을 걸었다.
[뭐지, 상관치 말라고 말했을텐데]
[소,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오시면 바로 전하라는 분부가 계셨기에….]
[ㅡ비발디, 놀러왔어!]
메이드의 뒤에서, 밤색 머리칼의 소녀가 불쑥 얼굴을 보인다.
[앨리스….]
앨리스=리델, 아니 앨리스=듀프레였다.
**
[새신부가 남편을 두고 어슬어슬 나다니는게 아니다.]
앨리스와 나란히 정원을 산보하며, 비발디는 훈계하듯 말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위선에 찌든, 어울리지 않는 대사다. 앨리스의 모습를 살피자, 그 목덜미에 옅게 붉은 흔적이 남아있다. 그녀의 몸에서는 걷어낼 수 없는 장미향이 떠돌고 있었다.
[찾아와 준건 기쁘지만, 네 남편은 마음도 넓군. 와도 괜찮은건가?]
[비발디는 내 소중한 언니인걸. 블러드도 화내지 않을꺼야.]
[언니…? 내가 너의?]
눈을 빛낸다. 물론 비발디는 앨리스를 여동생처럼 귀여워하고는 있었지만, 친동생은 아니다.
블러드가 비발디에게 화를 내지 않을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남자는 핏줄에게도 가차가 없다.
[응. 왜냐면, 블러드와 결혼했으니까, 비발디는 내 언니가 되는거잖아? 이렇게 생각하는거…, 민폘까나?]
[아니ㅡ 그렇진 않다만….]
비발디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앨리스는 기이한 소녀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미지의 생물과 대면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때가 있다.
[동생].
이 소녀가 자신의 여동생이 된다?
(나쁘진 않군….)
그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어째서 거기에 생각치 미치지 못했던걸까. 최근의 자신은 지나치게 멍하게 보내는 구석이 많다. 아니지, 최근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지도. 시간이 나아가거나 돌아오기도 하는 이 애매한 세계에서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애매할 뿐.
변덕스런 짜증으로 능숙하게 감추고 있지만 비발디는 멍한 구석도 많다. 평온할때엔 어찌해야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하는 것이다.
[블러드가 아내로서 소개했었지만, 비발디에게 내가 직접 보고하는건 아직이었지? 나 스스로 확실히 인사해 두고 싶었어.]
[예의바른 아이로구나….]
[당연하지. 당신은 내 언니인걸?]
앨리스의 언니. 그리고 앨리스의 남편의 누나이고, 유일한 가족.
(그렇군. 긴장하는게 당연했던걸지도 모르겠군.)
배우자의 가족에 해당되는 상대다. 아는 사이라고 해서 소원히 여길 순 없다.
['언니'와는 말야,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당신이 허락해 준다면.]
앨리스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그늘 같은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 비발디는 문득 깨달았다.
(아아, 이 아이도….)
안식을 모른다. 채워지지 못하기에 치솟는 초조함.
자신도 그렇다. 기쁨이 끓어 오르는데도, 무언가 애매한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 짜증이 치민다.
(불안한 것이다. 왜냐면, 나는….)
블러드는 아내를, 앨리스는 남편을, 그리고 비발디는 여동생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도 채워지지 않는다.
(아아, 정말이지 바보같도다.)
세사람이, 세사람 모두.
[흠… 언니를 존경하다니 실로 좋은 마음 가짐이로다. 그럼 이 몸도 무언가 결혼 축하를 베풀어 주지.]
[축하해 주는거야?]
[물론. 보석에 옷, 미술품이라도 좋다. 갖고 싶은 것을….]
[필요없어. 당신들 남매는 발상이 똑같네.]
삐친듯한 말투. 남매이기에 가진 '연결'에 소외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비발디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앨리스를 질투한것도 블러드를 질투한것도 아니다.
자신과 각기 다른 형상으로 특별해진 두 사람이 나란히 서로 마주한 모습에, 자신이 튕겨져 나간듯한 기분이 들었던게다.
(그 못난 동생도 그랬던거겠지.)
블러드는 비발디를 질투하고 있었다. 아내와 블러드사이엔 성립할 수 없는 연결을 갖고 있는 누나. 그리고 블러드는 마찬가지로 앨리스도 질투하고 있었던거겠지. 스스로를 추켜세우는게 아니지만, 블러드에게 있어서 비발디는 특별하기에. 세사람 모두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이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방통행.
(이래서야, 채워질리가 없겠지.)
[그럼, 평상시처럼 티파티에 너를 초대해 주지. 나와 너만의 티타임이다. 이번에는 특별히 내가 직접 홍차를 타 주도록 하마.]
[비발디, 당신 홍차 탈 수 있었어?]
여왕이 직접 홍차를 타내온다는 소리를 듣고, 앨리스는 눈을 크게 뜬다. 지금까지 메이드가 준비하는 것밖에 본적이 없다.
[이제까지 타본 적은 없다. 하지만 할수 없는 일이란건 세상에 없으니 안심하거라.]
[그거 엄청… 불안해.]
그렇게 말하면서, 앨리스는 쿡쿡 웃음을 흘린다.
[흥. 걱정할 필욘 없다. 맛있는 홍차를 타내어 결혼을 축복해 주지.]
[고마워.]
미소짓는 소녀는 한층 더 사랑스럽다.
(동생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다만….)
[다만, 이 몸의 홍차를 마시기 위해선 내가 묻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엣? 뭐야, 어려운 질문?]
[어렵진 않다. 간단만 질문이니.]
[정말? 그럼, 괜찮지만….]
[물론 간단하고 말고. 앨리스, 너는 나와 블러드…, 어느 쪽이 좋지?]
[에…?]
[네가 이 세계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누구지?]
비발디는 흡사 천진한 소녀처럼 앨리스에게 묻는다.
어떤 꽃이 좋아?
어떤 꽃이 제일 좋아?
마치 별것아닌 것을 질문하는 것처럼.
[비발디….]
앨리스는 곤란한 표정이 된다. 꽃이나 과자를 고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질문이다.
(누가 더 좋아?)
그때, 기분 좋은 바람이, 정원 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 부는 것은 이 세계에서는 그닥 없는 일이다.
(이것은 꿈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끝나는 꿈의 일부.
앨리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것처럼, 이것은 꿈에서 깨면 끝난다.
장미 몇송이가 바람에 흔들려, 꽃잎이 흩날린다.
[나는 말야, 비발디…. 이 세계의 여자들 중에선 비발디랑 젤 친하게 지내고 싶고,, 남자 중에서는 블러드와 젤 친하게 지내고 싶어.]
발치를 들어올려 비발디의 머리에 붙은 붉은 꽃잎을 떼내며, 앨리스는 조용히 말했다.
[흠. 그럼 나 역시 너의 '제일'이라는 소린가?]
[응. 나는 비발디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순위를 매기는건 어렵지만…. 난 욕심쟁이니까.]
[그렇군. '제일'은 둘이 있어도 나쁘지 않은 법이지.]
하나 뿐인 것에 집착하는 짜증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목을 맬 필요 같은건 없었을텐데.
[응. 제일이라던가 그런 순위랑 상관없이, 나는 당신을 좋아해]
[후후…. 그런가. 나도 그대를 좋아한다.]
(끝이 온다 해도, 그때까지는….)
이 세계의 시간은 있는듯 없는 것이기에 영원히 끝이란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허나 확실한 보증이 있기보다 불안정한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끝이 올 걱정을 않으면 초조해 하지 않아도 될터.)
마침내, 축복을 보낼 수 있다.
여기에 오기 전까지 동생과 마주하고 있던 그 부드러운 입술에ㅡ 축복의 키스를.
**
여왕은, 꿈을 꾸었다.
모자장수 저택의 비밀의 장미 화원에 초대받는 꿈이었다.
동생과 그 아내, 그리고 자신. 세사람은 밤에 핀 장미에 둘러 쌓인채 작은 티파티를 벌였다.
쓸데없이 구체적이고,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장면이라 무리없이 꿈에 녹아 들었다.
앨리스는 갖고온 바구니에서 스콘과 샌드위치를 꺼내고, 비발디와 블러드를 위해 뜨거운 홍차를 타낸다.
[네가 타주는 홍차를 맛볼 수 있을 줄이야. 일부러 행사한 보람이 있구나]
잔디 위에 깐 천 위에 앉는다.
앨리스가 내민 티 컵을 받아들며, 흡사 피크닉같다고 생각했다.
(피크닉은 좋아하지.)
즐거운 추억에 휩싸인다.
앨리스가 타준 홍차는 옅은 색에, 부드러운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좋은 향….]
입을 대자, 향기가 그윽히 입안에 펼쳐진다.
[다행이다, 맘에 들었어?]
[아아, 맛있군.]
건너편에 앉은 블러드가 비발디의 답을 가로채갔다.
[블러드…, 나는 비발디에게 질문한거야.]
[나 역시 나 나름의 감상을 말할 권리가 있다만.]
[지금은 비발디에게 묻고 있어.]
[누님이 아니라 내 쪽을 봐줘, 앨리스.]
옆에서 듣고 있자니, 이런 것이 마피아 보스인가 싶다.
[한심한 녀석.]
(허나, 행복하구나.)
그렇게 생각했을때, 블러드는 앨리스가 아닌 비발디를 보고 있었다.
[누님도 말이지.]
갑작스래 거울이 나타난다. 이것은 꿈이니까, 비발디는 놀라지 않고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다.
그 표정을 보니, 빨리 꿈에서 깨어나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로ㅡ
----------FIN
'여성향 > 비분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은 늑대 인간입니까?/SS] Distance (0) | 2013.10.15 |
---|---|
[화려한 나의 일족/황혼 폴라스터] 시종인 직통 전화기 통화 내용 리스트 (0) | 2013.08.02 |
[하트아리/SS] 하트 나라의 앨리스 ~ The Scent of Roses (0) | 2013.03.08 |
[AMNESIA/SS] 잘자렴, 내 소중한 너 (0) | 2012.04.07 |
[금색의코르다3/SS] 선물 (0) | 2012.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