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바운티헌터/SS]

그 마음을 몸에 걸치고

(한정판 특전 소책자SS)

 

본편 브레멘 해피엔딩 후일담 s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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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정리는 서툴렀다.
경험을 쌓으면 그만큼 처리 속도도 빨라질 거라 생각했지만, 전보다 얼마만큼 성장했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이래서야 정말로 그가 어이없어하는 시선을 보내겠지.
리자 버넷은 피로에 지친 비취색 눈동자로, 남몰래 한숨 쉬었다.
낮부터 시작한 작업은 해가 진 뒤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램프에 기름을 한 번 더 붓고, 리자는 다시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처리했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 제출할 것, 누군가에게 전달할 것…. 그것들을 분류하는 작업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진짜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술집 안쪽 작업실은 오늘 리자의 전유물이었다. 이 방 안에 있으면 가게의 소란스러움도 기분 좋은 작은 소음이다. 즉, 작업하기에 매우 적합한 환경이라는 뜻이었다. 

「자… 얼른 끝내자」

의욕 고취를 위해 팔을 걷어 올린 후, 깃털 펜 끝을 잉크에 담갔다.
스승인 브레멘과 혈맹을 맺은 후, 주점 일보다 브레멘이 직접 청탁해 오는 일이 많아졌다. 덕분에 잘하지도 못하는 사무 처리에 시간을 할애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니, 못하는 것을 못하는 채 방치할 순 엇다. 이것은 분명 브레멘이 제자인 자신에게 부과한 시련이라고, 리자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

중재자가 되면 서류 정리도 훌륭한 일 중 하나. 그렇게 읊으며 기분을 고취시키려 했으나, 막상 서류에 적힌 글자를 읽다 보면 역시 자신은 무투파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리자는 몸을 쓰는 게 더 성미에 맞았다. 멍하니 있는 사이 흘러내린 잉크가 종이를 적셨다. 급히 닦아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싸구려 종이도 아니었다.
거대한 얼룩에 한숨을 흘리려던 그 순간, 방문이 열렸다.
이 방에 노크도 없이 쳐들어올 사람은 한 명뿐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사부」
「…다녀왔어요, 리자」

문을 연 채 브레멘은 잠시 굳었다. 바로 평소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긴 했으나, 그 찰나의 공백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짧은 인연이 아니었다. 게다가 리자도 그렇게 둔한 편이 아니었다.
브레멘의 진의를 읽을 수 없는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속을 헤아리고자 하는 눈빛을 눈치챘는지, 그는 문을 닫으며 곤란한 듯이 웃었다.

「아뇨, 이렇게 다녀왔냐는 말을 들으니까 마치 부부가 된 것 같아서요」
「……윽」

순식간에 달아오른 뺨을 들키지 않고자 리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서류를 내려다봤지만, 문장은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당황한 자신 같은 거 숨겨봤자 소용없다. 브레멘은 이미 다 꿰뚫어 보고 있겠지.
어떻게든 얼버무리고자 서류 다발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불현듯 등 뒤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사부…!」

꾸욱 들러붙는 몸을 밀쳐내고자 저항했다. 하지만 브레멘이 뒤에서 팔을 뻗어 리자의 움직임을 가로막았다.
허리에 감긴 두 팔에 힘이 들어간다. 그 압박감이 싫지 않았다.

「사부……, 기척 죽이고 등 뒤로 접근하지 말아 주실래요?」

브레멘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깃털 펜을 잉크병에 꽂고, 빈 손을 그의 손에 살짝 얹어주었다.
사실, 기척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다. 하지만 브레멘이 의도적으로 기척을 지우면, 그걸 읽어내는 건 몹시 어려웠다. 그 경지에 도달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수련이 필요할까?
언제쯤 이 터무니없는 스승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목표는 멀고 멀었다.
언제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따라잡고, 추월하겠다는 의기가 없으면 마음가짐에서 이미 진 거나 다름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귀여운 얼굴이 휙휙 바뀌고 있네요」
「보, 보이세요?」

브레멘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리자는 무심코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보이진 않지만, 알죠」
「제가 그렇게 알기 쉽나요……?」

아무리 사부가 상대라도 분했다.
아무리 해도 브레멘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항상 뭐든 꿰뚫어 봤다.

「당신에 관한 일에서 저를 얕보면 곤란하죠…. 그건 그렇고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데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재미없네요」

그러더니 허리에 감긴 팔에 좀 더 힘이 실렸다.
진심으로 으스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귀에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저만을 생각해 주세요」
「사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실이었다. 새콤달콤한 것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기보다 바로 옆에 있는 진짜를 봐주세요, 리자」
「사, 사부」
「브레멘이라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윽」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간지럽고, 부끄러워서 몸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작게 브레멘 하고 이름을 외쳤다.
‘좀 더’하고 이어지는 명령에 가까운 그 속삭임에 리자는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브레멘, 브레멘.
중재자이며 리자의 사부, 그리고 지금은… 그 이상의 존재인 그의 이름. 소리 내 말하자, 그 특별함이 고막을 타고 뇌에 스며들었다.
브레멘 리마르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휘둘리는 것이 분하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했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도 그 몸이 멀어지면 그게 또 외롭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또 부끄러워서— 리자는 머리 위에 올려진 브레멘의 턱을 힘껏 밀어 올렸다.



「오늘 안으로 끝내고 싶은데, 일도 못하겠어요」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세요」



브레멘은 ‘어서’하고 재촉하며 다시 몸을 붙였다. 쿡쿡 그가 미소를 흘리는 게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이런 상태에서 태연하게 작업하는 걸, 그도 당연 생각하지 않겠지.

「사람이 못됐네요, 사부」
「응? 제가 네게 못된 짓을 할 거 같나요?」
「………」

뒤돌아 보니, 척 봐도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리자 역시 그 이면에 있는 그의 본모습을 알고 있었다.
아니, 전부 파악한 건 아니지만 이 사람 좋은 외견이 모든 것이 아니란 건 알고 있다. 리자가 쏘아봐도, 브레멘의 웃음은 전혀 무너지지 않았다.

「사부가 저한테 못되게 굴지 않으신다고요? 그럼 지금 당장 떨어져 주세요. 작업 좀 하게」


꾹꾹 밀어내자, 어느새 물러설 마음이 든 걸까, 브레멘의 체온이 멀어졌다.



「별수 없네요」
「사부,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스스로 그를 밀어냈으면서, 그가 떠나자마자 서늘해지는 등에 다소 쓸쓸함을 느꼈다.
종 잡을 수 없는 자신의 생각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처리 중이던 서류를 훑었다.

묵묵히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리자는 잠시 후 고개를 들었다.
집중력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집중했기 때문에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소리는 들렸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부? 장작은 왜 그렇게 패고 계세요?」

뒤돌아보니 브레멘이 마침 새로운 장작을 집어넣는 중이었다. 벽난로는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다. 벽난로 쪽을 향하고 있던 등줄기에 땀이 맺힐 정도로 실내는 뜨거웠다. 그런데도 브레멘은 장작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춥지도 않은데, 아깝게……」

오히려 더웠다.

「아, 죄송합니다. 혹시나 리자가 춥지 않을까 싶었서요」

브레멘이 그 이상의 추궁을 허락지 않는 미소를 보였다. 브레멘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으니, 이 행동에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신경 쓰였으나 지금은 일단 서류 처리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그래도 여전히 더워서, 리자는 가슴께의 단추를 하나 둘 끌러서 손으로 부채질했다.

「………」

그건 그렇고 덥다. 이번엔 하지만 덥다. 이번에는 앞치마를 벗었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땀을 흘릴 정도로 뜨거워진 열기를 참지 못하고, 결국 항의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브레멘이 리자의 어깨를 살포기 눌러 앉혔다.

「자아, 리자」
「뭐예요…?」


「그렇게 불신 어린 표정을 하면 상처 입는데요」


「도저히 상처받은 사람의 얼굴로 보이지 않는데요」

아무리 봐도 봐도 최고로 멋진 미소였다.



「그건 제쳐두고」
「제쳐두지 마세요」

브레멘은 리자의 딴죽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들고 있던 핑크색 뭔가를 눈앞으로 내밀었다.



「익숙하지 않은 서류 업무에 힘쓰는 네게 주는 선물입니다」
「………」



처음엔 눈앞에 있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옅은 분홍색 덩어리처럼 보였다.
브레멘이 그 덩어리를 펼쳐,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그것은 네글리제였다. 이미 받았던 한벌과는 형태가 달랐다. 완전 새 네글리제였다.
연분홍색에 레이스 장식이 달린, 소녀처럼 사랑스러운 네글리제.
하나를 받았으니 두 개나 세 개나 똑같다…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확실히 말해 전보다 이쪽 게 더 부끄러웠다. 어디가 어떻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부끄러웠다.
이런 게 나한테 어울릴 리 없다.
입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뻔해서, 다급히 리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 저기… 사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입어주실 거죠, 리자?」
「아뇨, 안 입을 건데요」
「모처럼의 선물인데요?」



기죽은 눈빛이 자신을 쳐다보자, 반사적으로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착각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브레멘 같은 사람이 이런 일에 진심으로 기죽을 리 없지.

「제가 아니라 사부님 선물 아닌가요?」
「설마. 당연히 네게 주는 선물이죠」



거짓말.
마음속으로는 큰 소리로 반박했다. 진심으로 리자한테 선물하고 싶었다면 좀 더 다른 걸 골랐겠지. 고기나, 비상식량, 실용적인 옷이나, 생활용품 같은 거…. 거기까지 생각했다 자신의 가난함에 울적해졌다.



「어쨌든… 안 입어요」
「모처럼 당신을 위해 고른 건데?」
「………」


「당신에게 어울리는 걸 고르느라 얼마나 고심했는데……」
「저기……」


「흠흠, 그렇군요. 입고 싶지 않다고…」
「저기, 사부……」



브레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푹 박혔다. 이 슬퍼 보이는 표정에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 넘어갈 거 같은 자신의 마음을 질타해 가며, 리자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잠시 뒤, 브레멘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왠지 모르게 짐짓 토해낸 듯한 느낌으로.

「……알겠습니다, 리자」
「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놀라서 비취색 눈동자를 크게 떴다.
사부가 자신의 의견을 수용하다니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
최근 들어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포기한 양 옆의자에 놓인 네글리제를 곁눈질했다. 너무 쉽게 물러선 브레멘의 모습이 믿기지 않아서.



「그래, 그렇군요, 당신이 그런 취미를 갖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사부」
「저도 아직 한참 모자랐네요」
「저기… 혼자 멋대로 떠들지 말고… 잠깐… 이게 무슨 짓이세요?!」
「무슨 짓이라뇨」



——옷을 벗기고 있죠.
담담하게 그리 응수하는 브레멘의 말대로, 옷 단추가 삽시간에 풀려나가고 어깻죽지가 드러났다.

「사부,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완전히 성희롱이다. 옷깃에 걸린 손을 뿌리치려고 몸부림쳤으나, 커다란 손은 리자의 저항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브레멘은 행위와 상반되게 느껴질 정도로 상쾌한 웃음을 띠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옷을 입고 싶지 않은 거 아닙니까. 조금 전에 스스로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벗기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응? 아니었나요?」
「말씀하시면서 벗지 마세요!」
「아니, 그렇지만 입고 싶지 않다고——」
「입을게요 입을게요 입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늦었다. 내뱉은 말을 돌이킬 수 없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브레멘이 활짝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리자는 마치 사로잡힌 피식자의 기분이 들었다.


「입혀 드릴까요?」
「그건 사양할게요」
「아쉽군요. 그럼 그건 다음번 즐거움으로 남겨두겠습니다」
「다음번 같은 거 없거든요」


일단 세게 나가봤으나, 이번처럼 잘 구슬려져 브레멘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되는 게 아닐지 걱정이긴 했다.
대체 언제쯤이면 사부를 이길 수 있을까?
브레멘이 건네준 네글리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갈아입을 거니까 저쪽 봐주세요」



브레멘은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사부…!」
「어쩔 수 없네요」


브레멘이 등을 돌린 것을 단단히 확인한 후, 리자는 조용히 옷을 벗었다.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마른 소리, 피부를 스치는 소리, 그것들이 공연히 더 귀에 들어왔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져서 심장이 아팠다. 온몸이 예민해졌다.
벽난로 안의 장작이 타닥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에 몸이 움찔 흔들릴 정도로.



「………」




얇은 천에 팔을 집어넣자, 그 아래로 맨살이 하얗게 비쳤다.
전에 받은 네글리제보다 더 얇은 천 같은데, 기분 탓인가?
살짝만 움직여도 풍성한 레이스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괜찮습니까?」
「아뇨,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아, 귀엽네요. 잘 어울려요, 리자」


막을 틈도 없었다.
무시당한 리자의 침묵이 방안에 떠돌았다.



「지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참인데요」
「죄송합니다. 안 들렸어요. 뭐라고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귀엽네요」
「………」



멋진 표정을 짓는 브레멘한텐 이미 무슨 말을 해봤자 소용없었다.
제자인 나는 이미 그것을 학습했다. 체념의 한숨을 한 번 내쉬고서 겉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무리 그래도 네글리제 차림으로 서류 처리를 할 순 없다. 그래서 겉옷을 걸치려 했는데, 다음 순간 브레멘한테 겉옷을 빼앗겼다.



「저기, 사부…. 저 아직 작업할 생각인데요」
「알아요. 그래서 얇은 옷을 입어도 춥지 않도록 방 안을 뜻하게 덥혀놨잖아요?
「네…?」


설마 그 때문에 아까부터 장작을 패고 있었던 걸까? 아니, 확실히 브레멘이라면 가능성 있다. 가난뱅이 체질인 리자가 그런 발상을 하지 못한 것뿐. 즉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는 이 네글리제를 리자한테 입일 생각이었으며, 그대로 작업까지 시킬 속셈이었던 거다.
그의 꿍꿍이에 완전히 넘어간 것을 깨달았으나, 모든 것이 이미 때늦어 있었다.


얄팍한 희망을 걸고 리자는 브레멘을 올려다보았다.



「추우니까 역시 겉옷 입을래요. 주세요. 장작도 아까우니까 더는 쓰지 마시고요」
「그래요? 추우신가요? 그렇다니 별수 없네요」



순순히 요구가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브레멘은 들고 있던 겉옷을 저쪽 먼 의자에 던져버렸다. 당황하는 리사를 아랑곳 않고, 그녀를 들쳐 안더니 조금 전까지 리자가 앉아 있던 의자에 자기가 대신 앉는다.


「이걸로 완벽하네요」
「뭐, 뭐, 뭐, 뭐가요?!」


뒤에서 끌어 안기자, 심장이 다시 아플 정도로 맥박 쳤다.
조금 전에도 비슷한 자세긴 했지만 그것과 지금은 전혀 달랐다.
아까는 옷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등에 느껴지는 브레멘의 열기도 천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좀 더 부드럽고 온건했다.



하지만 얇은 네글리제 원단은 있으나 마나한 정도다.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허리에 감긴 팔도 피부에 직접 닿아있는 것과 마찬가지. 머리가 끓어오를 것 같았다. 사고력이 뿌리째 뽑혀서, 이제는 갈 곳 없는 열만 남았다.



「자,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세요」
「………」



신경 쓰지 말라니, 그런 게 가능할지 않을지 브레멘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성격 최악.
어떻게 반론해도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리자 역시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런 걸 알고 있는 게 결코 자랑은 아니지만.



요컨대 마음가짐의 문제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긴장하면 오히려 졸리지 않아서 다행일지도. 이 자세는 졸음을 쫓는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발상을 전환해 처리 중이던 서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지며, 내 심장 고동과 뒤섞였다.



브레멘은 정말로 리자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을 생각 같았다. 이 상황 자체가 이미 방해나 다름없는데…. 그러다 가만히 있는 것에 질린 건지 리자의 땋은 머리를 열심히 풀더니, 손으로 빗기 시작했다.



그 손끝 움직임 하나에 리자가 얼마나 휘둘리고 있는지 브레멘은 과연 알고 있을까? 아니, 모를 리 없겠지. 그는 알면서 이러는 거다.
그리고 리자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브레멘을 거스를 수 없었다.



진심으로 거부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최근엔 그 조차도 애매했다. 마음 한구석으로 그의 열기를 갈구하는 자신이 있었다.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닿길 바라는 자신이 있음을 리자 역시 깨닫고 있었다.
부드럽게 머리를 빗는 몸짓에 긴장감이 차츰 사라졌다. 그 대신 조금 마음이 차분해졌다.
벽난로의 모닥불처럼, 온몸에 스며드는 따스함. 경종을 울리던 심장이 서서히 원래의 속도를 되찾고, 안도감이 서서히 번졌다.


언제,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
그저 온화한 온기.


「…사부」



토해낸 말이 조금 꼬였다.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뭔가요, 리자」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기분 좋았다.
그 목소리가 부르는 내 이름은 언제나 특별했다. 다른 누군가의 부름과는 뭔가 다르게 들렸다.
‘사부’하고 다시 한번 부르자, 브레멘은 정중하게 「뭡니까」하고 대답했다.



사부는 제자인 자신에겐 상냥했다.
다시 한번, 그저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점점 몸이 무거워졌다. 의식이 함께 가라앉았다.



「…어쩔 수 없는 아이네요」


—어린애 취급 하지 마세요.



불평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리자 본인은 확실히 입 밖으로 꺼낸 기분이었지만.


몸이 가볍게 떠오른 기분이 들었다. 무거운 의식 속에서 간신히 브레멘이 나를 안아 든 것을 헤아렸다. 아직 일이 안 끝났는데.
‘일어나’. 그렇게 몸에게 명령해도 손끝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이래서야 브레멘한테 어린애 취급당해도 별 수 없다.


그는 가볍게 리사를 끌어안고 계단을 올라, 완전히 그녀의 소유가 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고서 살며시 얼굴을 붙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리자」
——안녕히 주무세요, 사부.



마음속으로만 대답했다.
가벼운 입맞춤이 이마에 닿고, 그 입술이 떨어지기도 전에 리자의 의식은 완전히 끊어졌다.

역시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는 건 좋았다.
오랜만에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리자는 술집에서 거리로 걸어 나갔다.
브레멘이 맡긴 서류 처리는 당초 예상 일정보다 하루 더 걸렸다. 원래는 그날 밤 끝났어야 했는데.


그날 밤.
생각이 거기에 도달하자마자, 뺨이 단번에 붉게 물들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생생하게 그날 그의 손끝의 감촉이 피부로 느껴졌다. 놀랄 정도로 가까웠던 열기도, 떠올리지 않고자 하면 할수록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우우……」


곁에 없는 순간에도 기억 속의 브레멘한테 시달린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 기억을 억지로 머릿속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잊어버릴 수 있다는 듯이, 리자는 힘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흔들리는 땋은 머리가 뺨에 닿아서 아팠다.
브레멘, 이 머리도 만졌더랬지.


「……아, 진짜…! 사부 바보!!」


여기엔 없는 그 남자를 향해 외쳤다.
그래도 될 정도로 그에게 이것저것 잔뜩 희롱당했다. 하지만 그걸 마음 한구석으로 기쁘게 여기는 자신도 있었다.


제자한테가 아니라, 리자라는 한 사람의 인간에게 여태까지 숨겨왔던 속내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날 밤 일은 확실히 부끄럽긴 했지만.


「………」


잠깐 방심하면 연분홍색 귀여운 네글리제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 잔상을 떨쳐버리기 듯, 척척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눈앞의 일만 생각하자.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주점 게시판에서 찾은 일이었다.
브레멘이 맡긴 일을 처리하면서, 리자는 틈틈이 주점 일도 맡고 있었다.


금전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현상금 사냥꾼' 로서의 자신으로 있고 싶었다. 브레멘과 혈맹을 맺었지만, 리자는 완전히 그의 부하가 된 게 아니었다.


그녀 안에서 리자 버넷은 브레멘의 부하가 아니라 제자이자 현상금 사냥꾼이었다.
브레멘은 자기 의뢰만 맡아주길 바라는 모양새였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리자의 자존심이었다.
하찮은 오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살펴본 주점 게시판은 한산해서,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었다.
거기서 고른 것은 창녀만 노리는 현상범 체포.


약한 여자만 골라 덮치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반드시 잡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범인을 사로잡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수사였다. 지금까지 범인은 함정 수사였다. 범인은 여태까지 수사망을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범인의 이목을 끌어, 습격당하는 순간에 체포하는 것. 그렇기에 이렇게 대상이 나타나지 않는 대낮에 최대한 창녀로 보일만한 옷을 찾고자 거리로 나왔다.
일만 끝나면 다시 입을 일 없는 옷을 사게 되는 거겠지. 뼈아픈 지출이지만 별수 없다. 그러니까 어중간한 의상이 아니라 최대한 확실한 의상을 골라야겠지.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가게를 돌아다녔지만, 옷 고르기는 건 쉽지 않았다. 일단 옷 자체가 부끄러워서 손을 대기 힘들었고, 자의식 과잉이겠지만 남들이 리자를 보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네가 그런 걸 입느냐고 말하는 거 같아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지. 못 정하겠어…. 큰일이네」


몇 번째인지 모를 옷가게, 수많은 의상들 앞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일단 바깥공기를 쐬기 위해 가게를 나오자 바깥은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밤이 될 때까지 옷을 못 살 거 같아서 마음은 초조한데, 구매할 옷의 후보조차 고르지 못한 자신이 있었다.
리자의 눈동자가 한 인물을 포착하고 깜빡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란 이런 것일까. 어느새 달려가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놀란 상대의 팔을 꼭 잡고 이름을 불렀다.



「아돌프, 부탁할 게 있어」
「싫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잖아」
「네 부탁이니까 절대 변변찮은 거겠지」



팔을 붙잡힌 채, 아돌프는 싫은 듯이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리자 역시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변장용 의상을 고르는데, 정말 조금, 정말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조언 좀 해줄래?」
「싫어. 혼자 알아서 해」


쌀쌀맞게 거절당했으나, 이건 처음부터 예상했던 대로였다. 리자는 이 정도에 굴하지 않았다.


「아돌프, 정말 잠깐만이라도 좋아」



상대가 짜증스럽게 눈썹을 찌푸리며, 거창하게 한숨을 내쉬어도 절대 팔을 놓지 않는다. 리자의 괴력에 대해 알고 있는 아돌프는 억지로 팔을 뿌리치려 들지 않았다.
억지로 뿌리치려 했다간 뼈가 부러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랬으면 이미 팔을 떨쳐내고 떠나가겠지.


「애초에 이런 것까지 혼자 하는 게 현상금 사냥꾼 아닌가? 네가 이러니까 반쪽짜리인 거야」
「윽……」



아픈 데를 찔렸다.
하지만 반박할 순 없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어쨌든 난 싫어」
「브레멘 씨의 체면이 걸려 있어」
「………」



일단 해 지기 전엔 무조건 옷을 사고 싶었다.
아돌프 상대로 최후의 수단이나 다름없는, 브레멘의 이름을 꺼냈다.


「브레멘 씨가 부탁한 임무의 일환이야. 여기서 이상한 옷을 골랐다간 나중에 브레멘 씨가 무슨 말을 들을 수도 있단 말이야. 그게 싫어」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완전 거짓말이라고 할 순 없었다.
제자인 내가 실패하면 사부인 브레멘의 평판에도 금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돌프는 깊이 생각에 잠긴 듯 한번 시선을 떨구더니, 고개를 들었다.


「…별수 없군」
「고마——」
「괜히 고맙단 말 하지 마. 알겠어? 널 돕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브레멘 씨를 위해 돕는 거야」
「알아」


그럼 바로 가자, 하고 말을 하면서 아돌프를 옆에 있는 옷가게로 끌고 갔다.



「그래서? 뭘 찾는 건데? 뭘로 변장하게?」
「으음… 이런 걸 찾고 있어」


그러면서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나는 옷을 끄집어냈다.


「……윽」
「창녀로 변장할 거거든」


'네가?'라는 시선을 느끼고 욱 했다.
하지만 아돌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자의 손에서 의상을 낚아채더니, 그걸 선반 위로 돌려놓았다.



「방금 그 의상은… 가슴이 모자라서 넌 못 입어」
「뭐라고?」
「그런 거라면 이쪽이 더 그럴싸해 보일 거야」



그렇게 말하며 다른 옷을 내민다. 확실히 아까의 옷보다 어울릴 것 같았으나, 그래도 역시 안 어울리는 일에 애쓴다는 느낌은 똑같았다.


「네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변장을 하는지는 모르겠고 묻지도 않겠지만, 어린애가 어른 옷을 입는 일은 그런 직업에선 흔한 일이야」
「………」


과연. 슬프지만 현실이다.
명백하게 어린애들한테 그런 짓을 시키고 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납득가지 않은 게 있었다.


「……누가 애야?」
「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분노했다.
분노 때문에 힘이 세진 탓에, 자칫 옷을 찢어버릴 뻔했다. 다급히 자신의 분노를 억누르는 리자를 향해 아돌프는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의상을 구매했다.

생각 외로 잘 풀렸다.


오래간만의 현상금 사냥꾼일이라 긴장했는데, 설마 첫날에 현상범이 미끼인 리자한테 걸릴 줄 몰랐다.
연이은 범행 때문에 거리의 매춘부 수가 줄어들었다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쳤겠지.
그런 상황에서 변장한 리자의 모습은 눈에 잘 띄었고, 현상범도 그를 노렸다 그거다.


이건 아돌프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았다. 낮에는 말을 가로막혀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지.
하지만 감사하게 된다면, 


그의 협조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게 들통나지 않을까? 아니, 아돌프라면 사건을 해결한 게 리자라는 걸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그렇다면 감사가 아니라 사죄가 필요하려나?


현상범을 넘긴 다음, 다른 수속도 무사히 끝마친 후, 옷값을 뺐더니 얼마 되지 않는 현상금을 챙겨 주점 안쪽 계단을 올랐다.



이젠 완전히 이쪽이 내 집 같았다.

브레멘의 제자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가 생각났다. 그 후로 독립하여,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조금은 성장했을 텐데, 이렇게 브레멘의 주점에서 숙식을 하고 있자니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실패만 일삼던, 풋내기 현상금 사냥꾼 시절.


낮에 아돌프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니까 너는 반쪽짜리인 거야.
아돌프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들끓은 분노가 손에서 벽으로 전해졌다. 쩌적 하는 소릭 들리자, 리자는 다급히 손을 뗐다.
어쨌든 아돌프는 내일 생각하자. 지금은 빨리 이 민망한 옷을 갈아입자. 그렇게 마음을 바꾸고, 제 방문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


문손잡이가 저항 없이 빙글 돌아가는가 싶더니, 힘껏 열린 문과 함께 방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어둠에 순간 눈이 어질 했다.
순간적으로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잡힌 팔이 아팠다. 공격하려고 뻗은 주먹이 마른 소리와 함께 붙잡혔다.



상대도 제법이다.
예전에 적이 집에서 매복했던 것을 떠올렸다. 브레멘의 주점이라고 안심한 게 잘못이다. 이쪽에도 추격자가 매복해 있었을 줄이야.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그대로 짓눌려, 움직일 수 없게 된 몸에 식은땀이 솟았다.


「……읏」



실로 싫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큰소리로 외치자. 아래층 주점에는 현상금 사냥꾼들과 현상범들이 있다. 종업원은 브레멘의 부하다. 기척에 민감한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으니, 소리를 지르면 분명 누군가가 알아주겠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건 분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고집부릴 때가 아니었다.
크게 공기를 들이켠 순간, 입이 막혔다.



「리자」
「우웅……?!」
「접니다, 리자」


그 목소리, 틀림없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귓가에 닿았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리자」
「…사부……」


그 손이 떨어질 때, 입술을 살짝 더듬었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떠오른 상대의 윤곽에 눈을 끔뻑였다.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세요…」


내뱉는 말은 필연적으로 비난하는 어투가 되었다. 브레멘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썹을 추욱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요」
「놀라죠. 유감스럽지만 사부의 기척은 아직도 읽기 힘들단 말이에요」
「뭐, 제 기척을 읽을 수 있는 인간은 애초에 많지 않죠」



결코 허세가 아님을 잘 알고는 있지만, 마치 지당하는 양, 여유로운 표정으로 브레멘이 웃고 있는 브레멘의 모습에 화낼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리자」
「다, 다, 다녀왔습니다…. 그보다 사부… 대체 이건 뭔가요……」


왜 이렇게 거친 환영을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늘은 일도 잘 풀렸다. 애초에 잘 풀리지 않았을 때도 브레멘은 리자가 걱정할 정도로 리자한테 물렀다.
뒤에는 벽, 다른 탈출구는 브레멘이 막고 있는 상태에서 리자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땋은 머리가 어깨에서 흘러 떨어졌다. 브레멘은 평소처럼 온화한 웃음을 띠고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분위기는 날카롭고 얼얼해서 리자의 피부를 찌를 정도였다.



「…사부?」
「그 옷은 대체 뭔가요?」



그 시선에 절로 제 가슴께를 바라본다.
평소에는 옷 속에 숨겨져 있어야 할 쇄골이 지금은 드러나 있았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 잊고 있었다.
순간 가슴을 감추려는 양손을 브레멘이 가로막았다.



「저기, 사부…, 이건 어디까지나 변장을 위한 거고…」



결코 자신의 취미가 아니다.
노출광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설명하려는 말은 어느새 꼬여서, 마치 변명처럼 들렸다.



「현상범을 유인하려고 했는데요. 그 녀석이 창녀만 노리는 비열한 녀석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입은 거지, 결코 제 취향은 아니에요」
「과연」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노출된 피부가 부끄러움에 붉게 물들었다.



얼마 전이었더라면 「성희롱이에요」하고 분노를 터트렸을 텐데, 관계가 미묘하게 변한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보이고 싶지 않았다면, 타고난 괴력으로 어떻게든 했겠지.
하지만 브레멘에 붙잡힌 두 팔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즉 그것이 리자의 솔직한 심경인 거겠지.



「그 옷은 리자가 손수 고른 겁니까?」



질문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해서 대답이 늦어졌다.



「……이건 아돌프의 도움을 받아 고른 거지만… 다음부터는 직접 고를 수 있도록 할게요!」



브레멘까지 반쪽짜리라고 말하면 울적해질 것 같았다.
선수를 치듯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래도 그는 다른 의도로 던진 질문인 모양이었다. 반응이 둔했다.



「리자, 당신은 제 자랑스러운 제자입니다. 실력이라면 확실히 신뢰하고 있지요」
「그러신가요…?」



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난 건지 모르겠다.



「제가 뭣 때문에 화를 내는지 전혀 모르는 거 같네요, 리자」
「죄송합니다, 사부」



분하지만 정말 모르니까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멘의 미소가 한층 더 진해졌다.



「나 말고 다른 남자가 골라준 옷을 입다니, 나쁜 아이네요」
「네? 그런 거——」
「흐응. 『그런 거』로 치부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이건…!!」



사적인 감정은 없었다.
아돌프도 존경하는 브레멘을 위해 마지못해 나선 것뿐이다.
옷의 출처에 대해 짐짓 리자에게 물어 확인하려 들었으나, 브레멘은 이미 사정을 파악했겠지. 안 그러면 이렇게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리 없었다.
정보에 밝은 브레멘이다. 아돌프가 어떤 상황하에 옷을 고르게 됐는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런데도 브레멘은 리자의 말을 심술궂게 거듭했다.



「하지만 이건?」
「이건… 그런 종류가 아니고요……」
「그런 종류가 대체 뭔대요?」
「사부! 알면서 놀리지 마세요!」


브레멘과 달리 리자는 여유가 전혀 없었다. 여유를 지닐 수가 없었다.


「놀린 적 없습니다. 남 듣기 안 좋은 말씀 마세요」
「이런 걸 놀린다고 하는 거라고요」
「전 진심입니다, 리자. 다른 남자가 고른 옷을 당신이 걸치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그 말과 함께 그의 손이 옷 위로 내려왔다.
저항도 덧없이 브레멘의 손은 리자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등 뒤의 훅을 끌렀다.



「그러니까 얼른 벗어주세요」
「자,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못 기다립니다」


‘잠깐’하고 거듭 이어지려던 말이 입맞춤에 삼켜진다.



「흣…… 응…」
겹쳐진 입술이 비명을 앗아가고,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추욱 늘어진 리자의 몸을 브레멘이 안아 들었을 땐, 이미 옷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얇은 원피스 형 속옷은 그의 시선을 가리기엔 그저 불안했다.
바라건대, 램프도 없는 이 방의 어둠이 브레멘의 시야를 조금이라도 가려주기를 빌 뿐. 입맞춤은 점점 더 깊어졌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으읏, 응… 사부…」
「브레멘. 이럴 땐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말했을 텐데… 역시 벌을 줄 필요가 있겠네요」




키스만으로도 희롱당한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닦아주는 그 동작은 지극히 부드러웠다.
그럼에도 리자를 살포시 침대에 내려놓은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심술궂은 빛이 있었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니… 못 참을 거 같네요」
「네? 지금까지 뭔가 참고 계셨나요?」
「………」


아차.
아무래도 뭔가 실수한 거 같다.
브레멘의 미소에 위기감을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침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제가 여태까지 참는 거 없이 행동했다, 당신은 그리 생각하신 거군요?」
「아뇨, 말실수였어요. 죄송합니다」
「……그런 말로 얼버무리지 마세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잖아요, 리자」



브레멘이 손을 뻗어 리자의 퇴로를 조심히 가로막았다. 침대 시트 위로 올라온 무릎이 침대 스프링을 삐걱거리게 했다.



「저런 옷을 입고 거리를 걸어 다녔던 겁니까?」
「일이잖아요」
「과연. 그럼……」


천천히 얼굴이 다가왔다. 목덜미에 숨결이 닿았다.
몸이 뜨겁다.



「입을 수 없게 해야겠네요」
「잠깐…… 사부! 무슨…」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다가온 입술이 리사의 쇄골 아래에 닿더니, 힘껏 피부를 빨려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잠시 후 멀어진 브레멘은 심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피부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흔적만큼.



「이제 이 옷은 못 입겠네요」
「사부…… 브레멘……」
「아니, 입어 주셔도 좋아요. 당신이 제 것이라는 증거가 잘 보일 테니까」
「차암……」


떠오르는 붉은 흔적.
브레멘의 것이라는 낙인.
손끝으로 부드럽게 흔적을 더듬다가, 자신의 행동에 절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귀엽네요, 리자. 그러니까…」
「네…?」
「좀 더 남길게요」
「잠깐…」


다시금 쏟아지는 입맞춤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당분간은 단단히 목까지 가리고 다녀야겠다. 그러한 각오와 함께 리자는 브레멘을 꼬옥 끌어안았다.




END

 

 

 

Posted by 1112431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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