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코마타는 배가 고팠다.
지루하게 걸음을 옮기며, 형형히 중천에 빛나는 카구츠치를 올려다보며, 크게 혀를 찬 다음 갈색 머리카락을 크게 쓸어 올린다.
「식물계 악마는 좋겠다.」
가슴 아래부터 발끝까지 전부 뒤덮는 바디 슈트 위에, 실버 그레이의 짧은 쟈켓과도 같은 차이니즈 칼라 형의 방마복을 껴 입고, 얼굴 반쪽을 검은 털의 짐승가죽과도 같은 매끄러운 페이스가드로 가리고 있었다. 노출된 눈매는 아이 라이너로 그린 듯 샤프하고, 얼굴 양쪽에는 검고 큰 고양이 귀가 튀어 나와 있었다.
「칼파 타루같은 식물계 마물은 빛과 물만 있으면 만족이라니깐 말이야.」
몸에 쫙 달라붙는 바디 슈츠는 빼어난 각선미를 강조하고, 신체의 라인을 여실없이 보여주었다. 또한 중력을 무시한채 자랑스럽게 위를 향하고 있는 가슴선도 확실하게 떠올라 있다. 걸을 때마다 실룩이며 율동하는 형태 좋은 둔부에서는 보라색의 긴 꼬리가 뻗어나 있었다.
「빛은 충분히 있잖아. 이렇게나 잔뜩.」
네코마타는 손끝에서 날카로운 손톱을 뻗어, 고양이 귀를 긁었다.
「좋겠다. 식물계 악마.」
샤프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전방, 도로―였던 것 앞으로 황갈색의 지평선이 보였다.
좌우에는 폐허화된 빌딩과, 아직도 확실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빌딩들이 불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다. 황토가 된 발치로 가끔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은, 지층 밑에 채 가라앉지 못한 아스팔트나, 무너진 건물의 잔해일 것이다. 넓은 하늘은 물색에서 보라색 그라데이션이 져서 몹시나 아름답다.
「기쁘지?」
낮게 한숨을 쉰 다음, 네코마타는 힘껏 한쪽 팔을 쳐들고서 땅에 내리치듯 내렸다.
실제로도, 내리쳤다. 한쪽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하앙? 기쁘냐고 물어보잖아.」
개구리 울음 소리와 비슷한 울림이, 격돌음과 겹쳐진다.
거듭 네코마타는 손 끝에 쥔 것을 황토 위로 내리쳤다.
「대답은? 여자 아이가 질문 하잖아. 대답하는게 예의 아냐? 대답 해. 기쁘지? 빛이 잔뜩 있어서. 배부르잖아, 응?」
팔을 든다.
손끝엔 먼지와 수액 투성이가 되어 경련하는 작은 나신이 있었다. 나무 뿌리긴 했으나, 그것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성이며, 머리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네코마타에게 붙잡혀 있다. 줄기에는 보라색 꽃과 오렌지색 열매도 달려 있었다.
― 만드라고라였다.
「나는 이렇게 배가 고픈데, 넌 배 부르잖아?」
네코마타는 땅에 사는 마물에게 말을 걸었다.
만드라고라는 고래로부터 만능약으로서 드높다. 성서에도 불임을 치유했다고 적혀져 있으나, 그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위험이 수반된다. 땅에서 뽑혀져 나올 때, 만드라고라는 초고주파의 비명을 발산하는 것이다. 그 목소리를 들은 자는 고막뿐만 아니라, 뇌 그 자체가 파괴되고 만다. 마도사들은 점토를 이용해 귀를 막은 다음, 개를 통해 이 마물을 채취하고 있다.
「너희들 풀쪼가리랑 달리 나는 빛같은거 못 먹는단 말야.」
물통에 남은 물을 확인하듯, 손끝을 세게 흔든다.
먼지 투성이인 작은 여성이, 증오와 슬픔 뒤섞인 눈으로 네코마타를 바라보았다.
「쏘아 보지만 말고 무슨 말 해보지 그래. 하앙? 자랑하는 비명은?」
발할 수 있을리도 없었다.
만드라고라의 무기인 입은 벌릴래야 벌릴 수 없는 상태였다. 사슬로 입술 위아래가 피어싱되어 있었다. 침인지 수액인지도 모를 액체가 입가에서 가늘게 흘러 떨어져, 작은 나신 위로 달팽이 기름같은 끈적끈적한 흔적을 만들고 있었다.
「열받는 눈. 흥. 그 가슴도 엉덩이도 피어싱 해줄까?
손끝에서 튀어나온 잭나이프같은 손톱을 끄집어 내어, 그 예리한 끄트머리를 만드라고라의 나신에 가까이 댄다.
미니츄어 사이즈의 여체가, 흔들다리처럼 허공에 흔들렸다.
「아, 차차. 진짜로 찔러버렸다.」
네코마타는 다급히 손을 거두었다.
고통의 표정을 짓는 네코마타의 몸에서, 새로이 수액이 흘러나온다.
공복이라 목도 마르다. 하지만, 이 마물의 체액을 마실 맘은 없었다. 만능약이든 뭐든, 고문이나 진배할 정도로 맛이 없기 때문이다.
네코마타는 혀를 차면서 지면의 황토를 퍼올려, 손톱이 자국이 남은 여체를 난폭하게 비볐다.
「자, 이걸로 나았지? 나아. 타박상이라면 몰라도 몸에 찢어진 상처 같은게 있으면 비싸게 못 판단 말이야.」
상처 부위에서 수액을 잔뜩 짜낸 뒤의 만드라고라라고 생각되고 만다. 안그래도 시장의 가게 주인들은 뭐든 싸게 후려치려고 한다. 매입가격은 얼추 판매 가격의 반 혹은 3분의 1정도다.
「고생해서 캐냈으니까 말이야.」
만드라고라의 머리칼― 줄기를 다시 움켜 쥐고서, 붕붕 휘두른다.
「적어도 7천 마카는 받아야지.」
그만큼 있으면 적어도 며칠동안은 충분히 먹을 수 있다.
모래 악어 두개골 스테이크, 흑아조(黑牙鳥)의 유정란, 브랜드 쉐이크된 블러드 칵테일을 큰 잔으로 마시며―…. 위가 호소하듯 비명을 지르자, 네코마타를 이를 징계하듯이 바디 슈츠의 복부를 쳤다.
폐허 더미를 넘으려 하다가, 다리가 꼬였다.
배를 때린 것에 대한 역습인걸까, 이제껏 간신히 참아오고 있던 공복감이 동굴 안에서 이무기가 출현하듯 머리를 쳐들었다.
위가 주먹으로 화해, 신진 대사에 필요한 영양분을 움켜쥐기 위해 주변 장기를 마구 두드린다.
3일전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다. 신선한 혈육이 먹고 싶다. 아니, 고기라면 뭐든 좋다. 페이스 가드 아래로, 멋대로 이빨이 부닥쳤다.
자신의 팔을 보았다.
네코마타는 바디 슈츠와 방마복을 감사히 여겼다. 피부가 노출되어 있었더라면, 앞뒤 생각없이 자기 팔을 물어 뜯어 버렸을 것이다.
자신의 살을, 스스로 씹고, 흘러넘치는 자신의 피를 게걸스레 빤다.
너무나도 감미로운 유혹이기에, 크게 마른 침을 삼켰다.
「망할….」
그러한 상상을 떨쳐내기 위해, 수중의 만드라고라를 좀 더 세게 휘둘렀다.
「나, 나는. 변태도 짐승도 아니야.」
프로펠라처럼 회전하는 작은 여체에서 끼끼하는, 소리되지 않는 비명이 새어나온다.
「배 고파아~~.」
이케부쿠로 시장은 아직도 멀다.
붕붕 돌아가던 손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어라?」
손가락 사이로 보라색 꽃잎을 남긴채, 만드라고라의 나신이 허공 속으로 날아갔다. 팔랑개비처럼 회전하며,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고서, 빌딩 벽면이였던 모양이던 커다란 건물 파편 안쪽으로 사라졌다.
「자, 잠깐.」
네코마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황토를 걷어 찼다. 공복감을 달래기 위해, 손에서 빠져나간 마물에 대한 매도를 담아, 혀를 계속 찬다. 어디에 떨어진거야. 웃기지마. 고생해서 캐낸거란 말이야.
몸을 구부린채, 파편들 사이사이를 뛰어 넘으며 바삐 둘러본다.
「어디야?!」
마물의 체액 특유의, 금속 탄내가 코를 찔렀다.
페이스 가드를 내린다. 턱이 극단적으로 예리한 달걀형 얼굴이 나타났다. 연예계 스카우트 맨들이 보면 죄다 몰려들 정도의 미모였다. 입이 고양이귀 근처까지 찢어져 있지만 않았더라면―….
네코마타는 형태 좋은 코를 실룩였다.
「아아, 망할.」
냄새의 근원을 향해 척척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다.
만드라고라는 건물 무더기 사이로 뻗어져 나온 철편에 꿰뚫려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나신이 크게 접혀지고, 몸 부분은 반쯤 절단되어 가고 있었다. 하반신만이 꿈틀꿈틀 단말마같은 경련을 되풀이 하고 있었고, 만능약의 원료가 되는 수액은 몸과 일체화된 철편을 잔뜩 적시고 있었다.
「바보오옷!」
모처럼 산채로 캐온건데, 망하아아알. 죽은 만드라고라도 약재료로 못 쓰는건 아니지만, 돈이 별로 안된다.
네코마타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거듭 찼다.
「망할망할, 죽지 마. 몸 좀 찢어진 것 갖고.」
무의식중에 혀를 차던 행동이 혀를 빠는 형태로 변한다.
네코마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만드라고라의 수액이 너무 냄새나서 깨닫는게 늦었다.
피 냄새다.
가깝다.
무릎을 굽히고, 소리 내지 않도록 게걸음 친다. 코가 실룩였다. 틀림없다, 향기롭고도 신선한 피가 공기 중에 휘발하고 있다.
수장룡의 화석처럼 땅에서 꿈틀거리는 오그라진 가로등을 조그맣게 넘었다.
눈과 비례하는 샤프한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좌우 손 짚을 난간도, 벽도 없는 콘크리트 계단만이 아무런 흠없이 거의 멀쩡한 상태로 황토 위에 남아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네코마타의 초점은 그 위에 얹.혀.져 있.는. 것.만을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누워 있다.
몸을 좀 더 낮춰, 소리없이 접근했다.
무슨 종족일까. 계단 끄트머리에서, 네코마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형태지만 냄새로 보자니 유령이나 외도는 아닌 것 같다. 물론 자신과 같은 마수족도 아니다.
팔만 뻗어, 손톱 끝으로 옆구리를 찔러 보았다.
단정한 외모의 수컷이다. 눈을 내리 깔고 있는데, 속눈썹이 굉장히 길다. 기장이 짧은 바지만 한 장 입은 차림새로, 기하학적인 검푸른 라인이, 얼굴과 상반신을 채색하고 있다. 근육 울퉁불퉁한 늠름한 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빼빼 말라 빈약한건 또 아니다. 균형잡힌 몸이라고 형용해야겠지.
「오니?」
말해놓고 고개를 저었다. 뒷목덜미 근처에 원추형의 돌기가 나있지만, 뿔치고는 각도가 이상하고, 색도 질감도 오니의 머리에 있는 것과는 달라 보인다.
「하앙?」
손톱으로 찔러봐도 전혀 꿈쩍도 않는다. 막 죽은 걸까.
네코마타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며, 계단위로 몸을 내밀었다. 코가 반응하고, 입 안에 타액이 고인다. 수컷의 왼팔에는 깊은 상처가 있고, 거기서 진홍색의 피가 반쯤 말라붙어 가면서도 대량으로 스며 나오고 있었다.
마네가타의 진흙탕내 나는 더티 블러드가 아니다. 설마 진짜로 사람인건가? 아니, 사람한테는 이런 문양도없고, 뒷목에 뿔도 나지 않는다.
짓누르듯 몸을 내밀며, 네코마타는 수컷을 내려다보며 바디 라인을 따라 나 있는 문양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았다.
천천히 문양을 더듬는 손가락에, 검푸른 문양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녹아가는 듯한 도취감이, 네코마타의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샘물처럼 솟아 나온다. 기분 좋다. 엄청 기분 좋다. 이 수컷은, 어쩜 이렇게 멋진 걸까. 무심코 젖어 버린다―. 입 근처가. 침으로.
「엄청 좋은, “고기”.」
입을 쫘악 벌리며 말했다. 수컷의 종족은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뭐든 상관없다. 명확한 것은, 눈 앞에 있는 혈육이 상당히 고급이며, 자신이 몹시나 굶주려 있다는 사실이였다.
수컷의 상처난 팔에 이를 세운다.
구강 점막 가득히 번져 나가는 달콤한 핏물에, 마음이 드높이 고양된다.
「아, 아아아앙.」
네코마타는 입술을 붉게 적시며, 환희의 신음과 함께 꼬리를 크게 흔들었다.
닛타 이사무는 한쪽 발이 아팠다.
걷고 싶지 않았다. 아니, 걷는 것 자체는 아무래도 좋다. 걸을 수 밖에 없겠지. 그건 그렇다. 운전면허같은게 없다. 면허를 딸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니까 당연하다. 하지만 면허가 있다해도 이 경우, 차가 남아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니까. 요컨대 걷고 싶지 않다는 것은 차에 타서 편하게 가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니 탈 수 있으면 타고 싶지만…….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물론 피곤하긴 하지만……. 최대의 문제는, 극히 기본적인…….
「뭘 중얼거려?」
옆에서 걷고 있던 타치바나 치아키가 호전적으로 말했다.
정중앙 가르마를 탄 청동빛 들어간 스트레이트 헤어 아래로, 이지적으로 보이는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평상시와 같은 헤어 스타일이다. 가슴께에 지퍼가 달린, 목언저리의 옷깃 둘레가 마치 목걸이 같은 푸른색 원피스는 바디 라인을 뚜렷하게 만들면서도 움직이기 쉽게 품도 충분해서 굉장히 입기 편해 보였다. 유명 디자이너의 오더 메이드가 틀림없다. 폭이 넓은 하얀 벨트도, 원피스와 같이 맞춘 부츠도 죄다 고가제품인 것은 일목 요연.
그야말로 익숙하기 짝이 없는 타치바나 치아키였다.
「혼자 납득하지말고, 설명해.」
학교에서 항상 들어왔던 고압적인 어조 역시, 평상시와 다름없다.
「나, 납득하고 있는거 아냐.」
「뭔가 생각은 했잖아.」
쏘아봐오는 검은빛 눈동자도, 평상시와 다를바 없다.
「그러니까말야, 곤란하단 말야.」
이사무는 목덜미의 땀을 닦았다.
어깨는 말랐지만, 목은 두텁다. 두 눈의 위치가 다소 떨어져 있긴하지만, 거울로 봤을 때 나름 쿨한 인상을 주는데 도움이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저기 말야, 곤란 어쩌고 수준이 아니잖아.」
「그래.」
멈춰서, 몸을 크게 돌렸다.
뭔가 발견했나 싶어, 치아키도 커다란 눈을 굴린다.
등뒤로, 블랙 아웃된채로 정지된 신주쿠 알터의 대형 스크린이 보였다.
그것과 마주서 있는 신주쿠 역 동쪽 출구 빌딩 마이시티는, 공습이라도 받은것처럼 무너져 있다. 언제나처럼 빌딩이 첩첩히 겹쳐져 있는 신주쿠지만, 건물 약 3분의 1이 붕괴, 혹은 반파되어 있었다. 도로에는 황토가 뒤덮여 있고, 보라색어린 하늘에는 태양이 접근해 있다.
둘 말고, 인영은 일절 없었다.
「그러니까 말야, 지금 문제는 말이지.」
이사무는 시선을 떨궜다.
위는 검은 쟈켓과 같은색 베스트. 로우라이즈 기미의 청바지는 무릎 위 아래가 스트라이프 형태로 찢어 갈라져 있다. 하지만 닳아 해진건 아니다. 이렇게 예술적으로 찢는데에는 세심한 주의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해골 문양의 커다란 벙클, 은으로 착각당할수도 있는 아연 합금 반지, 노점상에서 산 무광택 넥클리스. 죄다 엄선된 아이템이지만, 그중 제일로 자랑하는 것은 역시 머리에 쓴 스코틀랜드 모자(태머센터)와 사냥 모자(캐스켓)을 융합시킨듯한 레어 모자였다. 이 모자의 형태는 개성적이다.
패션에는 신경을 쓴다. 오늘도 마찬가지, 평소대로였다. 딱 하나를 제외하면.
「어쩌면 좋지.」
이사무는 슬픈 듯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이 생긴거야. 왜 아무도 없어? 거리는 왜 망가진건데.」
「그러니까, 그런것보다 말야.」
「그런거?」
치아키의 가는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고민되네.」
「그래. 핵폭탄이 떨어졌든, 대지진이라도 일어났든. 전화가 안 터지는건 대체 왜야?」
「몰라.」
「뭔가 생각하고 있었잖아. 혼자 중얼거리지만 말고, 가능성에 대해 토론해 본다던가, 문제 해결을 위해……」
「그러니까, 신발이 없다고!!」
이사무는 외쳤다.
치아키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그 얼굴이 가면처럼 무표정해진다. 그리고 짧게 한마디.
「신발?」
「병원 어딘가에서 한쪽 잃어버렸어. 자, 보라구. 한쪽에는 양말만 신고 있잖아.」
무릎을 가볍게 든다.
발가락 부분이 금색칠 되어진 애나멜 광택의 하얀 신발은 한쪽 밖에 없었다.
「신발?」
치아키가 되풀이했다.
「여태까지 몰랐어?」
이사무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러니까 “아가씨”는, 정말이지. 같이 걷고 있었는데 내 신발이 없는것도 아직까지 몰랐다니. 직면한 일에만 눈이 팔려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배려하는 섬세함이란게 없는 거냐?
「이사무군. 고민된다던게……. 어쩌면 좋지랬던게, 신발이 없어서 였어?」
「이탈리아 제라구. 아직 새 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사무군……, 주위를 봐봐. 잘 살펴봐.」
「뭐야.」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이사무는 동급생의 말을 솔직히 들었다.
「어떤 상황으로 보여」
치아키가 차갑게 물었다.
「뭐가?」
바람이 발치의 황토를 낮게 휘날린다.
「바보야…?! 세계가 이렇게 됐는데, 신발이나 걱정하고 있게?!」
어디선가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길게 꼬리를 드리운다.
「그러니까 말야, 치아키. 이건 신발 이전에 스타일의 문제잖아.」
「패션 이란 소리야……?」
「그래. 잘 아네.」
「누가 본다고 그래.」
스트레이트 헤어가 좌우로 크게 흔들린다.
「아무도 없어. 큰소리로 외쳐봤자 아무도 안 나와. 빌딩은 무너졌지, 발치는 모래가 됐지. 진짜, 뭐야. 대체. 이럴 때 남들 눈이나 신경 쓰다니. 어디서 머리라도 세게 맞은거야? 농담도 적당히 해. 대체 무슨 생각이야.」
「치아키. 잠깐만. 진정하래두.」
「이 풍경, 똑바로 봐. 이게 진정하게 생겼어?」
「그러니까 남들 그런게 아니래두.」
이사무는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패션이란 건, 자기 자신한테 젤로 중요한 거잖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바 아니고. 치아키는 항상 고급 브랜드로만 입고 있는데, 그거 남자들 맘이나 끌어 볼려고 입고 있는거야?」
「웃기지마…….」
「그치? 아니잖아. 스타일은 자기 자신이 기분 좋은가 안 좋은가, 그거라구. 요컨대 삶의 방식. 어떤 셔츠를 고를지, 어떤 신발을 고를지, 팔찌를 할까말까. 전부 인생의 선택 그 자체라구. 안 입은 셔츠가 있다는건 즉, 안 타본 전차, 안 가본 길. 그거랑 똑같은 거지.」
「웃기지 말라니깐…….」
「난 진지해. 패션을 가벼이 여기는 녀석, 업신여기는 녀석은 인간이 아니라고 단언해도 좋아. 공부만 하면 된다. 일만 하면 된다, 그거야? 그런거 그냥 살아있기만 하면 된다란 말이랑 똑같은거잖아. 짐승도 아니고. 하지만, 적어도 난 달라. 그러니까, 신발이 없다는 건.」
「웃기지 말랬잖아!!」
치아키가 크게 소리쳤다.
「무, 뭐야. 뭘 화내는 건데. 화내고 싶은건 내 쪽이야. 신발이 없다구.」
「마을이 이렇게 됐어.」
치아키의 목소리는 어느새 울음 소리가 되어 있었다.
「난 몰라.」
「그런 감상 밖에 없어……?」
「내가 이렇게 만든것도 아니고. 내가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사무는 붕괴된 거리를 둘러보았다.
「원인이나 이유를 알고 싶진 않아?」
「세상이란건 언제나 제멋대로 변하는 법이잖아. 항상 다니던 게임 센터가 갑자기 없어진다거나, 편의점 도시락 먹기에 딱 좋았던 주차장이 새 맨션이 된다거나. 굳이 이유를 따져봤자 대체 뭐가 달라진다고.」
「그거랑은…, 완전히 다르잖아.」
「전에 폰 망가졌어.」
「갑자기 무슨 얘기야….」
「폰 말야. 폰.」
스트랩을 당겨, 주머니 안에서 전화도 문자 송신도, 인터넷 접속도 완전히 끊긴 폰을 끄집어 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완전 못쓰게 돼서 말야, 엄청 곤란했거든. 뭐어, 1엔갖고 신형으로 바꿨으니 상관없지만.」
「이사무군……,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거야.」
「이유나 원인을 알아 봤자, 망가진 폰은 망가진거야. 못 써. 이러이러한 원인으로 망가졌습니다. 네, 그렇습니까. 이게 고작이잖아? 이유를 안다고 해결이 돼? 마을은 이런 이유로 무너졌습니다. 과연, 그래서요? 상황은 암 것도 달라지지 않잖아.」
폰을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고서, 쟈켓에 묻은 먼지를 턴다.
「걱정 안돼……?」
치아키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건 경찰이나 소방서일이지. 자위대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랑은 상관 없어.」
「아무도 없단 말야…….」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사무를 고개를 돌렸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신규 어트랙션을 구경하고 있는 느낌이였다. 인류가 멸망하고, 몇여년이 경과한 대도시를 상상해 만들어진 셋트. 세계에, 생존자는 단 둘 뿐. 물이나 식량을 찾아 방황하고 있다. 빛이 닿지 않는 장소에는 X-MEN같은 초능력자들이 숨어 있을테니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사무는 스스로의 공상에 혀를 찼다.
칫. 애도 아니고.
그런게 진짜 있을리 없잖아.
「그러니까, 좀전에도 말했다시피. 어디 학교나 체육관로 대피한거겠지. 뉴스에도 자주 나오잖아. 강당같은데서 떼로 몰려 대피하는 그거. 싫다. 새빨간 남들이랑 모여서 잔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걱정이야…….」
「그러니까 말야, 치아키네 집까지 같이 가준대도. 다이칸야마지?」
딱히 기사인양 굴 생각은 없지만, 이런 경우 같이 가주는게 사나이란 거다. 이런 폐허가 된 거리를 여자 혼자 나돌아 다니게 할 순 없다.
「가자.」
역은 무너졌고, 전차도 없다. 이동수단은 도보 뿐이다. 이사무는 가볍게 혀를 찼다. 신발만 두짝 다 있었더라면 그리 나쁠 것도 없을텐데. 좁고 수더분한 대피소에 들어가는 것보다 밖을 걸어 다니는게 당연 몇배는 더 낫다.
「이사무군…. 그러고보니 병원에 있던 히지리란 사람. 뭘 조사한댔지?」
파편을 넘으며, 치아키가 다시 질문한다.
「그 돌팔이 저널리스트? 몰라. 현장 리포트라도 적어서 떼돈이라도 벌고 싶었던거 아냐? 패션 센스는 나쁘지 않았지만.」
「신군은……….」
「나는 유우코 선생님쪽이 더 걱정이야.」
이사무는 말 끄트머리에 혀를 찼다.
여자란건 대체 머리가 어떻게 된거냐. 빨리 병원을 나가고 싶다고 말했던 주제에, 나오면 나온대로 또 이게 걱정이다니 저게 신경쓰인다니. 어째서, 왜, 왜, 왜, 왜.
내가 뭔가 알리가 없잖아. 치아키랑 똑같은 것만 봤다. 오늘은 계속 같이 있었으니까, 당연하지만.
처해진 상황은 마찬가지.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르는 건가.
「하지만…, 신군도 병원에 있었을텐데.」
이왕 걱정할거라면 좀 더 절실하고, 우선해야 할 게 있잖아!
「그런것보다 내 신발이 없다고!」
그를 똑똑히 상기시켜 주기 위해, 이사무는 크게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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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라이도우 프리퀄 소설인 VS 사인역사를 쓰신 분이십니다만,
히로인 취향이 다분히 티가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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