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오. 자네는 이런 책을 읽나?」
끈적한 목소리에, 스가나미 아유코는 STM[각주:1]에서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가와 있었던 걸까, 바로 옆에 선 백의의 나베타 교수가 워크 테이블 위에 첩첩히 쌓인 레포트 파일 틈새에서 한 권의 중철된 잡지를 아무렇게나 끄집어낸다.
「흠, 오컬트 잡지인가. 어떤 시대는 사라지지 않는 법이지. 그건 그렇고 우리 연구실의 톱인 아유코군에게 이런 취미가 있었을 줄이야.」
다크한 디자인의 표지에는 피색을 본뜬 듯한 홍색의 불길하기 짝이 없는 로고가 춤추고 있었다.
「아뇨, 그 책은.」
잡지가 빠져나간 덕분에 파일 다발이 무너질뻔해서, 아유코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내밀어 그를 떠받친다.
멀리서 탁한 매미 소리가 울러퍼진다. 대학은 이미 여름 방학이며, 연구실에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눈부신 빛 속에서, 자장공진기나 가상모델 실험을 계산 중인 컴퓨터가 덜덜 소인족의 연주회를 계속하고 있다.
「여자들이란 점같은걸 좋아하니까. 그 연장선상의 취미인가? 부모나 교수의 말은 안 믿어도, 이런 저속한 잡지의 엉터리 기사라면 순순히 믿을 수 있다 그건가.」
트럼프를 셔플하는 손끝의 움직임처럼, 페이지를 넘기며 나베타 교수의 눈은 아유코의 백의 아래, 브라우스의 팽팽한 가슴을 멋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곤란해 할 정도로 어린 여자가 아니다.
아유코는 느릿히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 가슴을 펴고 나베타 교수의 눈을 곧게 되받아쳤다.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교수의 시선이 역으로 갈 곳을 잃고, 손가에 펼쳐진 잡지 위를 떠돈다.
「보자보자…. 미로쿠 경전, 가이아 교. 도쿄 수태. 파멸의 때…. 목차만 봐도 전혀 의미 불명이로군. 불길한 단어로만 치장한 창작 기사들 뿐이겠지만. 흐응, 월간 아야시이(妖しい)라니, 딱 맞는 이름이군.」
「월간, 아야카시(妖)라고 읽는다고 합니다.」
표지에 영어로 새빨갛게 적혀 있잖습니까. 주의력 부족이신가요.
교수가 잡지를 툭툭 친다.
「오컬트나 점 같은건 말이야, 절망과 희망을 교대로 주면서, 인간을 세뇌하는 수단에 불과해. 봐, 이 기사. 이거……. 도쿄 수태? 뭐야, 이건. 흐응, 무슨 증거도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엉터리로 적어서 진짜라고 믿게 만들려고 하는 것 뿐이야. 무지한 자들일수록, 알 수 없는 일들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야.」
「이 연구실에서 행해지고 있는 양자 계산학도 알 수 없다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만.」
「스가나미군.」
나베타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 얹힌다.
손끝이 머리칼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아유코는 미동하지 않았다.
「내 말 뜻은 그저, 자네가 무지하지 않을거라는 의미야.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알 수 없는게 아니지 않은가. 즉, 피부를 맞대고 사귀어 보면……. 알겠나? 아무리 점에서 최악의 상성이 나왔다고 해도 그런건 하등 믿을 가치가 없어. 아니, 이치를 따지는 학문을 배우는 자가 그런 저속한 엉터리 잡지를 좋아한다는 것을 지도자 입장에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 만은 없지.」
「구독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어제 취재하러 온 기자가 최신호라면서 두고 간 잡지입니다.」
냉철한 말투로 아유코는 말했다.
「뭐……? 취재…?」
나베타가 내놓은 말에는 “어째서 가르쳐 주지 않았냐”는 억양이 명백했다.
「참고 취재로, 사진 촬영은 없다고 말하자 교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만,」
「그런가. 그랬었던가.」
「그렇습니다.」
「흐음………, 오컬트 잡지 기자 나부랑이가 양자학에 무슨 볼일이 있었지? 아니, 그 이전에 이해는 할 수 있는건가?」
몸에 붙은 버릇이라곤 하나, 우선 타인을 바보취급 하고 나서 대화를 시작하려드는 말투엔 울컥했으나, 남성 우위의 연구실 속에서 기분을 밖으로 드러내놓지 않는 것은 이미 아유코에겐 익숙한 일이였다.
「찾아왔던, 히지리라고 했던 기자는 사전 조사도 충분해서, 이해는 했을거라 생각합니다.」
솔직하게 질문에 대답한다.
「내 말은, 그 기자가 뭘 물어보러 왔냐 그거야.」
「조지 가모프의 빅뱅이론은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지 아닌지. 그리고 알파 붕괴에 의한 원소 변화에 대해서. 그리고 허수방정식에 의한 우주의 시작. 그런 것들이였습니다만……」
「뭐야…, 그건…….」
「교수님께서 알파 분자 붕괴이론을 모를린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서양 속담에, 반드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비유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양자학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유코는 테이블 끝에 줄지어선 비커를 바라보았다.
비커 속의 염산수가 밖으로 흘러 나오지 않는 것은(단순한 물이든 우롱차든 상관없이), 액체가 비커의 벽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테이블에 놓은 손이, 테이블 위에서 멈추는 것도,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할 수 없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모두 마찬가지다. 하지만 원자나 전자등이 지닌 에너지는 확정되어 있는게 아니다. 팩터만 가해지면 “불확정”해진다.
사실, 원자는 알파 붕괴에 의해, 완전히 다른 원소로 변화한다. 다른 원소라는 것은, 근본적인 구성의 차이, 세계 그 자체의 변화와 다름없다. 책상이면서도 책상이 아니고, 손이면서도 손이 아니게 된다. 그렇기에 그를 통과할 수 있게 된다.
「뭐야. 그 기자는 물질의 변화, 변질에 대해 질문했다 그건가?」
「그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해 물었던 것 같았습니다.」
원자핵과 강하게 묶여져 있는 소립자는 절대로 원자핵과 떨어지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기에― 물은 비커안에 담기고, 책상위에 놓인 손은 책상을 관통하지 않으며, 낙타는 바늘 구멍을 통과할 수 없다― 이 세계는 성립되는 것이다.
「흐응. 시답잖은 오컬트 잡지 기사에 우리 연구실의 이름을 써먹거나, 코맨트되면 곤란한데.」
「참고 취재라고 했으니, 이름이 나올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유코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도내에 있는 대학 치고는 큰 캔퍼스에, 녹음이 우거져 빛나고 있다. 세미나에 참가하러 온 듯한 커플이 잔디밭 그늘 위에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대량의 태양빛이 웃음을 나누는 두 사람을 축복하는 것처럼 내리 쏟아지고 있었다.
연인인 유이치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폰으로 문자가 왔다. 바빠서, 최근엔 전화통화도 별로 못했다. 오늘은 빨리 마치고, 내쪽에서 뭔가 권해 볼까. 전에 갔던 아오야마의 그 레스토랑에 빈 자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연어와 아보카도 카르파쵸. 그리고 디저트로 나온 산딸기 밀피유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예산위원회도 가까우니까. 그런 떨거지 잡지에 이름이 나오고 그러면 교수회의 때 발목 잡힐게 뻔해.」
아유코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말면서, 나베타가 끈질기게 말을 잇는다.
「우리 연구실 이름을 쓰지 못하게, 확실히 못박아 뒀나?」
「거기까지는.」
아유코는 고개를 저었다.
「오컬트 잡지 기자따윌 신용할 수 있겠어?」
나베타의 얼굴이 뺨으로 급접근한다.
「히지리라고 하는 인간은 외견은 70년대 히피풍이였지만 대응도 말 씀씀이도 굉장히 정중했습니다.」
「뭐야……. 그 기자가 자네 타입의 남자였나?」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아야코군, 그 취재 내용.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 연구실의 실험내용에 관한게 포함되어 있다면 문제야. 딱히 힐난하는건 아니야. 어때? 와인이라도 마시며, 오늘밤 저녁식사와 함께 천천히 얘길 나누는건.」
이 천치!! 하는 말을 아유코는 목구멍으로 집어 삼켰다.
이 교수는 몹시 좋아하는 것과는 대극에 위치해 있지만, 대놓고 매몰차게 굴수가 없다.
필요한 존재다.
지금 당장 의자를 박차고 떠나는 것도, 학부장에게 성희롱을 호소하는 것도 간단하지만, 그 때문에 자신이 연구실 내에서 고립되어도, 나베타가 추방되어도 문제가 된다.
「마침, 점심시간이야. 일단 함께 점심은 어떤가?」
연구자로서의 자신의 지위는 낮았기에, 아직 이 남자의 뒷방패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깊은 관계를 맺는것도 싫다. 극단적으로 미움 받지 않는채로, 능히 대처해 나가는게 좋다. 파벌과 남자들이 지배하는 대학 내부에서, 젊은 여성 연구원이 살아남는 것, 자립하는 것은 화성 비행사의 길만큼이나 전도다난한 일이였다.
연구자로서, 독립―…. 무심코 자문했다.
그게 꿈이야?
무얼 바라는 걸까. 뭣 때문에 애쓰고 있는 걸까. 연어와 아보카도 카르파쵸를 먹고싶다. 갖고 싶은 DVD도 있다, 여름용 스커트도, 편광 펄이 들어간 매니큐어도 갖고 싶다. 언젠가 유이치로와 결혼할 때에는, 드레스는 제쳐 두고서라도, 피로연에 꽃만큼은 잔뜩 장식해두고 싶다. 그리고 미래에는, 모두의 주목을 받는 논문을 차례차례 발표해, 전용 연구실을 갖고 싶다.
아유코는 조용히 눈을 내리 깔았다.
죄다 작은 야망. 남들 보기엔 시시한 꿈이겠지.
아아,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주부가 된다해도 OL도 학생도 유치원생도, 전부 마찬가지다. 사소한 행운. 본인 이외의 사람들에겐 아무래도 좋은 성공, 기분 좋은 꿈, 동경하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 그런 것들이, 그런것들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버팀목과 행복이 된다.
「연인은 있나, 아야코군?」
이 교수 역시, 나를 어떻게든 해보고 싶다는 하찮은 소망을 품고 있다. 그러니 마찬가지다.
잔디밭에 앉은 커플을 바라보고 싶어서, 눈을 떴다.
아야코는,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걸 좋아했다. 인생에 있어서, 누군가와 함께 진심으로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것의 중요함을 가끔씩 떠올릴 필요가 있으니까.
「에?」
창문을 향했던 목이, 두개골과 함께 낮게 진동했다.
「아, 아야코군」
「교수?!」
쾌청한 하늘에 검은 번개가 일었다.
밖에 보이는 커플의 모습이, 싸구려 인쇄물처럼 흔들린다.
「무, 무슨 일이.」
눈부신 빛과 검은 번개가 나선을 그리며 세계를 석권한다.
의자를 밀치고 일어선 아야코의 몸은 지진과는 다른, 발치가 사라지는 듯한 감각에 크게 기울어졌다.
자장공징기의 표면이 흔들리면서도 시야에 들어온다.
「위상이 반전되고 있어.」
바리라이트처럼 밀려드는 빛의 소용돌이가, 아야코의 손에 닿았다.
「?!」
빛에 감싸이자, 팔이 사라졌다.
절단된 게 아니다. 문자 그대로,「소멸」이였다. 마치 다른 차원으로 전송된 것처럼 기본적인 원자나 분자가 붕괴된 것처럼.
비커에서 물이 흘러넘쳤다. 가장자리 밖으로가 아니라, 바로 옆면에서부터.
비커는 깨지지 않았다.
『세계는 끝나고 말겠죠.』
취재를 하러왔던 기자와의 대화가 되살아 났다.
『방금 설명드린 대로입니다. 비커에 담겨져 있지 않은 물, 책상을 빠져나가는 손.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낙타가 정상 바이어스로서 존재하게 되겠죠. 양자학에선 그게 이상한 일 아닙니다만.』
『과연. 마력이라는 것은 그런 거로군요.』
『네?』
『키리카구레 사이조(霧隠才蔵)[각주:2]는 가능했다고 하잖습니까. 책상에 얹은 손을 관통시키는 건 물론이거니와, 문도 벽도 통과하는게. 그야말로 비커에 담기지 않는 물, 바늘 구멍을 빠져나가는 낙타와 마찬가지로. 키리카구레 사이조는 전신을 알파 붕괴시켜, 재구축하는 힘을 지니고 있던 악마였을지도 모르겠군요.』
『저기, 히지리씨…….』
『세계는 변할 겁니다.』
『………….』
『저희들을 에워싼 물질, 원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개념이 일변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 제기랄.』
『그렇게 된다면……. 세계는 끝나고 말겠죠.』
아유코의 몸 안에서, 불꽃이 작렬하고 있었다.
어딘지 바닥모를 심연의 끝으로 추락해 간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이며, 동시에 천국의 열락이기도 했다. 온갖 방향으로부터 거칠게 불어온 돌풍이 주위의 빛을 잡아 끌어, 허공을 향해 크게 흩뿌려진 만화경같은 세계를 만들어 낸다.
흩날리는 빛은, 아유코의 마음이기도 하며, 그리고 또한 누구인지도 모를 무수한 육체와 감정의 깜빡임이기도 했다.
무수한 희망, 고상하면서도 하찮은 꿈, 달성된 야망, 이루지 못한 바람, 사소한 만족감, 저주와 분노. 모든 것이 혼연일체가 되어 뒤섞이고, 비상하고, 거대한 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찬란함을 확장시킨다.
무한히 펼쳐진 빛의 어둠을 저지하는 것처럼, 검고 거대한 번개가 내리 쏟아졌다.
소리는 없었다.
들리지 않는다.
볼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다.
이젠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는 종언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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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건 많은데 외도 ㅋ. 개인적으로 3은 정말 좋아하는데 노벨라이즈 작품은 몇개 안 되는 데다 일본어 트인지 너무 뒤에 알게 되서/쩝. 이걸 중고로 구하는게 고작이였습니다. 오늘이 여신4 발매일..ㅠ 국내 정발되는건 몹시 기쁩니다. 외쳐 한글화..!!
참고로 이것은 프롤로그에 해당되는 것으로, 스가나미 아야코양은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언제 다음 외도가 발작할지는 모르겠네요. 할거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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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11124314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