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키니 아머는 숙녀의 소양 편 -
ㅋㅋㅋㅋ
「음……. 어라? 여기는……?」
사쿠라 이치코가 눈을 뜬 것은 웅장한 분위기의 건물 안.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과 색색의 스테인드 글래스, 그리고 벽 한가득 그려진 성화가 엄숙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여긴 교회? 우와, 굉장하다…….」
이것이 뇌.리.에 비.쳐.진. 영.상.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공기의 흐름도, 의자의 차가운 감촉도, 전혀 만들어진 것 같지 않다. 정말로 자신이 중세의 교회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녀석이 만든 것 치고는 꽤나 공이 들어 갔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하는 이치코였으나,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왠지 쌀쌀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자신의 몸을 확인해보자, 위화감의 정체는 확실해졌다.
「!!!!」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
「어, 어, 어, 어째서 알몸인건데에에에!!」
얼굴을 붉히며 그 자리에 주저 앉는 이치코. 주위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으나, 부끄러운 것은 부끄럽다.
「그 녀석한테 반드시 불평해 주겠어……!」
그런 식으로 이치코가 으르렁거리고 있자니, 마침 딱 알맞게 눈앞으로 그 상대가 나타났다.
「어라? 이치코. 아직도 이런 곳에 있었습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가난뱅이 신, 모미지.
그리스풍의 순백의 천을 감싸고, 등에는 꼼꼼하게 날개까지 단 채로 단상 위에 강림해 있는 그 모습은, 빈말(?)로라도 가난뱅이 신이라고 하기 어렵다. 덤으로 옆에 있는 쿠마카이까지 활을 쥔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야, 그 모습. 안 어울리는 거에도 정도가 있지 않아?」
「어쨌든 게.임. 마.스.터.니까요, 저는♡ 이 게임을 관장하는 신이니까, 신성한 모습을 하는 게 당연하잖습니까.」
그보다 저, 원래부터 신인데요. 그렇게 덧붙이는 가난뱅이 신.
「그건 됐고, 내 차림을 좀 어떻게든 해! 누드라니 대체 어찌된 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모미지를 쏘아보지만,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나른한 표정을 띠울 뿐이었다.
「누드 한 둘 갖고 그렇게 남을 부라려 보지 마시죠. 어차피 다 몰라요. 소설판이니까.」
「어어이!! 그만 하라구! 그런 메타발언 하지마!!」
게임 속의 세계에서까지, 가난뱅이 신한테 휘둘리다니. 이치코는 한숨을 쉬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치코의 집에서 개최된 사소한 잔치 자리의 일.
초여름에 감기에 걸린 이치코와 모미지의 쾌유 축하파티라는 명목으로 란마루나 나데시코, 츠와부키 등의 친구들을 초대, 보비를 비롯한 변태들도 포함한 평소와 같은 멤버 끼리 떠들썩하게 놀고 떠들며 잔치도 무르익었을 무렵, 모미지가 여흥을 즐기자며 끄집어 낸 것이 수수께끼의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였다.
『뇌 게임 뇌 라이프.』라고 하는, 게임 데이터를 직접 뇌에 반영, 마치 게임 세계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는 가난뱅이 신 아이템이라는 모양이다.
「이 날을 위해 공들여 만든 판타지 RPG가 있답니다~♡」하는 모미지의 말대로, 머리에 아이템을 착용하는 이치코 일행이었다.
하지만 막상 게임이 시작되고 보니 홀로 교회에 우두커니 서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전라로.
「그건, 그겁니다. 아직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요. 이치코는 아직 <무직>인만큼, 알몸이라 그거겠죠☆」
왜인지 으쓱대는 표정을 띠우는 모미지.
「그게 뭐야…. 게다가 뭔데, 직업이란 건.」
「RPG에 흔히 있잖아요. 마법사라던가, 도적이라던가.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여기서 일단 그런 직업을 선택하는 겁니다.」
과연. 제단을 자세히 살펴보니, 거기가 조작판이 되어 있고, 터치패널이 비치되어 있었다. 『기사』나 『무투가』나 『상인』등등, 나름 있어 보이는 직업이 줄지어 서 있다.
「헤에. 의외로 본격적이네.」
「당연하죠. 꽤나 진심으로 만들었으니까요, 이 게임.」
자신만만한 표정을 띠우는 모미지. 공들여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허언은 아닌 모양이다.
「그럼 나는 이 <검사>로 할까나. 평소에도 죽도를 쓰고 있고…. 뭣보다 주인공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 제단의 패널을 터치하는 이치코.
「엣. 잠깐. 뭐야, 이거?!」
그 순간, 그녀의 몸이 강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후후후…. 걱정할 필요 없이 단번에 잡 체인지가 완료 됩니다.」
빛이 가시자, 그녀의 말대로 이치코의 몸은 낯선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걸치고 있긴 했으나…….
「푸흐흐흡……. 잘 어울리시네요, 이치코.」
이치코의 옆에 있는 커다란 전신 거울에 비치는 것은, 갑옷을 입은 검사풍의 차림.
「뭐, 뭐야. 이거어어어어어어!??!」
아니, 갑옷은 갑옷이지만 가슴께는 크게 벌어져 강조되어 있고, 배꼽도 노출, 허벅지도 전혀 숨길 맘이 없는 노출도가 한 가득한 갑옷이었다.
「바, 방어력은 물론이고 수치심도 제로 잖아!!」
「무슨 소리를. 여검사라고 하면 비키니 아머가 전통이잖아요~~♡」
히죽 웃는 모미지.
「거야 게임에 나오는 여자아이들은 왠지 노출도가 높은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어떤 의미로 전라보다 부끄러운 복장에, 이치코는 난처해했다.
「괜찮습니다. 란마루 군이나 나데시코 양도 꽤나 자신의 의상을 마음에 들어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다들 그런 느낌이래두요.」
란마루나 나데시코도 마찬가지라면, 뭐어 그렇게까지 부끄러울 것도 없나…하고 납득하는 이치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어?」
「이치코가 여기서 꾸물꾸물 거리는 동안, 옛 저녁에 직업을 결정하고 게임을 스타트 했습니다. 자. 이치코도 얼른 안 하면 누군가가 마왕을 쓰러트려 버릴 거요,」
촛대의 촛불이 도전적인 웃음을 띠우는 모미지를 비춘다.
「흐음. 즉, 이 게임은 그 <마왕>인가 뭔가를 쓰러트리면 되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마왕>을 쓰러트리고, 사로 잡힌 <공주님>을 구하는 겁니다.」
「요즘 세상에 참 고전적일 정도로 알기 쉬운 게임 목적이네.」
「덧붙여 타이틀은 <모미지 퀘스트>입니다.」
「뭐야, 그 안이한 타이틀?! 그것도 포함해 완전히 왕도라 그거구나…….」
괜히 어려운 게임으로 머리를 쓰는 것보다야, 이런 게 더 맘 편하고 좋을지도 모른다.
「뭐어, 모처럼이고. 네가 만든 <모미지 퀘스트>랬나? 즐기고 올게.」
교회 문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치코를, 모미지가 손을 흔들어 배웅한다.
「네. 힘내세요, 검사 이치!」
하지만 문에 손을 댄 그 때, 이치코의 마음 속에서 극히 사소한 의문이 생겨났다.
모미지는 어째서 일부러 이런 손이 많이 가는 여흥을 준비한 걸까.
정말로 순수하게 모두에게 게임을 즐기게 해주고 싶은 건가? 아니. 모미지는 그런 기특한 녀석이 아니다. 얼마전만 해도 감기에 걸려 알아 누웠을 때, 철저하게 심술을 부려댔다.(그 뒤에, 내 감기가 전염되었을 때 배로 보복해 줬지만.)
「저기……. 너는 우리들이 게임을 하는 동안 뭘 하고 있을 거야? 만든 본인이니까, 게임에 참가할리 없잖아?」
이치코의 대사에 모미지는 미간을 찌푸린다.
「듣고 싶으신 겁니까…, 이치코.」
「뭐, 뭐야. 가르쳐 줘.」
「쿡쿡……. 묻지 않았더라면 솔직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을.」
모미지의 웃음에 이치코는 일말의 불안을 느낀다.
「어차피 이미 늦었고, 말하도록 하죠…. 당신들이 게임을 즐기고 있는 동안 저는 한 발 먼저 로그아웃 하도록 할 겁니다.」
의기양양한 웃음을 띠우는 모미지.
『플레이어는 게임을 클리어 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지만, 게임 마스터는 언제든지 출입 자유니까 말이야.』
옆에 있는 쿠마카이가 노트에 그렇게 적는다.
「엣? 그건…….」
현실의 이치코의 방에는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를 쓰고 잠든 자신의 몸이 있다.
모미지 혼자만 먼저 돌아가게 되다면, 그녀의 앞에 무방비한 모습을 내놓게 된다.
「설마, 네 목적은…….」
「후후훗. 그렇습니다. 저항할 수 없는 당신의 몸에서 행복 에너지를 잔뜩 쥐어 짜내갈 생각입니다.」
잔치 자리를 가장해, 짐짓 게임까지 끄집어 냈다.
가난뱅이 신의 목적은 처음부터 행복 에너지의 약탈이었던 것이다.
「우, 웃기지마!! 얼른 원래 세계로 돌려 보내 놔!」
격앙해 따지고 드는 이치코와는 대조적으로, 모미지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그건 무리입니다. 플레이어는 번듯히 게임을 클리어하지 않으면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설정입니다.」
옆에 있는 천사 차림의 쿠마카이는 『덧붙여 이 게임의 공략은 아무리 서둘러도 50시간 이상은 걸려』하는 문장이 적힌 노트를 들고 있다.
「뭐, 뭐라고……?!」
덫에 걸린 것을 눈치채는 이치코. 이대로는 모미지의 뜻대로 되고 만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런 곳에서 간단히 행복 에너지를 빼앗길 수는 없는데…….
「뭐어, 모쪼록 태평하게 게임이라도 즐기도록 하세요. 아하하하핫♡」
거만한 웃음을 지으며 모미지는 제단의 콘솔을 조작한다.
「자아, 귀환 버튼을 클릭……. 어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몇 번이고 패널을 터치하는 모미지였으나, 변화가 일어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네……. 귀환 프로그램에 버그가 생겼나? 칫……. 이것도 이치코의 행복 에너지 때문인걸까요……?」
다급히 키를 두드리는 모미지.
그녀의 초조해하는 모습에 이치코는 내심 희망의 빛이 비쳐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아직 어떻게든 될 것 같네……!」
저 녀석이 게임 밖으로 탈출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면, 승산은 있다.
「네가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게임을 클리어하면 되는 거지?!」
그럼에도 모미지는 어디까지나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우지 않는다.
콘솔에서 몸을 뗀 그녀는 등 뒤의 날개로 허공을 훼쳤다.
「흐응. 어차피 무리입니다. 귀환 프로그램이야 『중추부』로 돌아가면 1시간 정도면 작성할 수 있으니까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모미지의 시선에 이치코는 허리의 검을 들이밀며 몰아 세운다.
「1시간 쯤 있으면 이딴 게임, 여유로 클리어 클리어야! 목을 씻고 기다리도록, 해. 이 가난뱅이 신!」
「제법이로군요……. 할 수 있다면 해보세요. 말해두겠지만 쉽진 않을 겁니다, 이 게임.」
악당의 대사를 남기고, 스테인드 글래스를 꿰뚫고 날아가는 모미지.
그 등을 쏘아보며 이치코는 중얼거린다.
저 녀석, 반드시 쳐죽여 주겠어.
이치코가 교회을 나오자, 중세 유럽풍의 거리가 시야에 펼쳐졌다.
「정말로 쓸데 없이 정성 들였네….」
돌로된 길. 벽돌로 된 집이나 가게. 길가는 사람들도 중세 기사풍이거나, 상인풍인 등등, 실로 판타지 RPG다운 모습이다. 자신을 덫에 빠트리기 위해 만든 게임치고는 아까울 정도로 정성들인 디테일이다.
「이런. 넋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앞으로 1시간 밖에 없으니까 효율적으로 움직여야해…!」
모미지가 탈출 프로그램을 완성할 때까지, 대략 1시간.
그 시간 안으로 <마왕>을 쓰러트리고, <공주님>을 구출해 현실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클리어 까지 50시간은 걸린다는 RPG, 착실하게 플레이했다가는 눈깜짝할 사이에 타임 오버다.
「그러니까 일단, 정상적이지 않는 녀석들을 찾는 것부터 시작할까.」
괜찮아. 어떻게든 될 거야.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는 이치코.
나한테는 실로 믿음직한(치트) 능력을 지닌 친구들이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몇분 뒤, 마을의 주점에서 이치코의 비통한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거, 거짓말!! 정말 몰라!?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콧수염을 기른 장년의 마스터(NPC)가 한숨을 쉬며 대답한다.
「그러니까 몇 번이나 말하잖아. 오늘 이 마을에는 <무투가> 여자도, <닌자> 여자도 없다고.」
「그, 그럴수가…….」
마스터의 말에 추욱 어깨를 떨구는 이치코.
게임 스타트 지점인 이 마을. 이 마을의 정보가 모이는 술짐이라면 분명 먼저 게임을 시작했을 란마루나 나데시코의 행방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눈에 띠는 두 사람이라면 분명 바로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젠 그녀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솔로 클리어를 노려야 하는 건가?
아니 그 가난뱅이 신의 짓이다. 게임 내에서도 주도면밀하게 덫을 쳐놨다고 생각해야겠지. 역시 혼자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른다.
「아, 진짜!! 어째야 하는 거야….」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동안에서도 시간은 시시각각 흘러간다.
아~ 우하고 신음하면서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는 이치코에게, 마스터가 잔을 닦으며 말을 건다.
「검사 아가씨. 결국 뭘 고민하는 거야?」
「아. 짚이는 동료도 없고. 어떻게 마왕을 쓰러트려야 하나 싶어서. 혼자서 어떻게든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런 이치코의 말에 마스터는 코웃음을 날린다.
「아가씨가 혼자 마왕을 쓰러트린다고? 관두라구. 놀랍게도 마왕은 신과도 필적하는 힘을 지닌, 냉혹무비한 존재라고 해. 벌써 몇 명인지 모를 용사들이 도전했지만 누구 하나 돌아오지 않았다구.」
「그, 그렇게 굉장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지만, 일단 상대는 그 모미지가 준비한 마왕이다. 결코 쉽지는 않겠지.
「나쁘게는 말 안 할테니까, 적어도 실력 있는 동료들을 데리고 가라구. 저기, 지금 막 돌아온 마법사 여자아이는 어때? 젊은데 엄청난 실력이라고 하던데…?」
그렇게 말하며 가게 입구를 가리키는 마스터. 뭔가 인파가 생겨 있는 듯했다.
「어이어이, 진짜 굉장하다. 저 마법사!」
「아직 신입인데 드래곤을 처리하다니.」
아무래도 <마법사>인 듯한 여자아이가 구경군들한테 에워 쌓여 있는 모양이다.
「서쪽 숲의 실버 드래곤이라고 하면 숙련된 전사가 맨발로 도망칠 정도로 흉폭하지 않았어?」
「그걸 설마 <마법사> 여자아이가 혼자서 토벌할 줄이야….」
이치코는 입구 근처에서 손님들에게 에워 쌓여 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돌린다.
레이스나 프릴을 쓴 마법사 로브를 걸친 소녀. 그 귀여운 복장과, 어깨에 짊어진 거대한 용의 뿔이 훌륭하리만큼 언밸런스했다.
모자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그녀는 당당한 어조로 구경꾼들에게 대답했다.
「아니아니…. 그렇게 대단하진 않아. 드래곤 같은 것보다 우리 아버지가 훨씬 더 무섭다구!」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호쾌한 목소리다.
그녀는 이쪽 카운터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 아저씨!1 드래곤 토벌 완료했다구!! 보수를 줘!」
여기, 하면서 마스터가 금화가 들어간 자루를 마법사 소녀에게 던진다.
「오옷. 엄청난 돈이다. 도마뱀 한 마리 갖고 이만큼이나 받다니. 쉽구만.」
이 아이, 설마…….
마스터가 그녀에게 묻는다.
「어이, 누님. 그 드래곤을 처리하다니. 어떤 대마법을 쓴거야?」
「마법? 아……. 굳이 말하자면 <란마루 헤드 배트>려나!!」
모자를 벗으며, 척 주먹을 내보이며 웃는 핑크색 머리카락의 소녀.
그것은 이치코가 잘 아는 미소였다.
「란마루!」
「오, 이치코! 이런 곳에 있었구나!」
말을 걸자, 아무래도 란마루도 바로 이치코란 걸 깨달은 듯 하다.
「이거야~, 게임 안으로 들어온 이후 계속 너를 찾았는데 말야. 좀처럼 안보이길래 심심풀이 삼아 토벌 퀘스트를 하고 있었어.」
어깨에 짊어진 용의 뿔을 내보이며, 란마루가 방긋 웃는다.
「나도 란마루를 찾았어! 실은 큰일이 났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가는 이치코.
하지만 란마루는 이치코의 의상을 빤히 바라본 다음, 의아한 표정을 띠운다.
「큰일이랄까……. 네가 입고 있는게 훨씬 더 큰일 같은데. 아니, 큰일이라기보다 변태잖아, 그거.」
얼굴을 붉히며, 살색 비율이 높은 이치코의 갑옷을 바라보는 란마루. 동성조차도 직시하는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다.
「변태가 아니야! 이래봬도 일단 <검사>라구!?」
방금 전 모미지는, 란마루네도 노출도가 많은 의상이니까 괜찮다고 말했다.
그럴텐데, 완전히 속아 넘어간 모양이다. 이런 수치 플레이로 정신적인 데미지를 주다니, 그 녀석의 수법은 너무 고루하다.
「그보다 란마루야 말로 <마법사.라니. 전혀 캐릭터가 안 맞잖아.」
「가끔은 이런 귀여운 옷도 입어 보고 싶어서 말이야. 아버지도 안 보고. 헤헷…….」
란마루는 수줍은 듯 웃고서, 프릴이 달린 스커트를 팔랑여 보였다.
「평소에는 고지식한 주제에, 실은 꽤나 여자아이로구나. 란마루는. 아아……. 가난뱅이신한테 속아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귀여운 옷을 입고 싶었는데.」
「하지만 뭐……. 좋아서 야한 옷을 입고 있는 녀석도 있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란마루는 주점 안쪽, 스테이지 근처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저도 스테이지에서 춤추고 싶다고 말하잖아요! 이래보여도 어엿한 <무희>에요!!」
낯익은 얼굴의 소녀가, 주점 스탭을 향해 따지고 있다.
「아니. 저기….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를 스테이지 위에 올릴 수는…….」
「뭐라고욧?! 누가 어린애라고?! 이런 숙녀를 보고 그런 표현은 너무하시와요!!」
처억하고 상대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들이미는 소녀.
그 험악함에 스테이지 담당으로 보이는 상대 남자는 우물우물 거리고 있다.
「나데시코……. 왜 또 저런 차림을.」
아무래도 <무희> 직업을 선택한 듯한 나데시코.
아라비아 풍의 호화로운 장식이 달린 허리끈과, 속옷으로 착각할 정도로 노출도가 높은 무희 의상을 걸치고 있다.
「나데시코랑은 먼저 만났지만, 어떻게서든 주점에서 춤을 추겠다고 말을 안 들어. 가게 쪽에서 몇 번이고 거절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게 말하는 란마루.
스테이지 옆의 나데시코는 훨씬 더 열이 올라, 남자한테 덤벼 든다.
「애당초 어린애는 안된다고 말해놓고, 거기의 고양이 귀는 어째서죠?!」
나데시코의 시선 끝에는, 스테이치에 털썩 주저 앉은 타마(마네키네코ver)의 모습이 있었다.
기분 좋은 듯이 『우냐』하고 울면서 데굴데굴 거린다.
「아니. 저 아이는 딱히 고용한게 아닙니다!! 어느새 이 주점에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왜인지 손님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바빠져서, 주의를 줄 시간도 없었던 것뿐입니다!」
분개하는 나데시코를 향해 남자는 다급히 그렇게 설명했다.
「저거……, 이치코의 고양이지?」
「응. 하지만 설마 타마 짱까지 이 게임에 참가해 있을 줄이야. 심지어 마네키네코로써 부끄럽지 않는 활약을 하고 있어.」
이 주점, 작지만 손님들로 붐비는 것은 그러한 이유였던 것이다.
NPC 상대로도 마네키네코의 힘은 통용되는 구나. 이치코가 그렇게 감탄하고 있자니,
「어라. 이치코 양 아니신가요.」
아무래도 저쪽의 대화가 일단락 된 것일까, 나데시코가 말을 걸어 왔다.
「나데시코. 그런데서 뭘 하는 거야?」
「그야 당연히 섹시 톱 댄서로써 츠와부키 님의 시선을 독점하기 위해서죠.」
잘난 척 없는 가슴을 펴는 나데시코.
그런 그녀의 굴곡 없는 체형에 이치코는 「풋」하고 뿜었다.
「아하하핫!!! 하필이면 『섹시』라니!! 초등학생 학예회인 줄 알았어♡」
「캬악!! 이 소가슴녀!! 애당초 당신도 그런 에로한 차림으로, 대체 무슨 속셈이신가요!! 츠와부키 님을 유혹하려는 속셈은 아니겠죠?! 정말이지… 방심할 틈도 없네요!」
당장이라도 이치코한테 덤벼 들듯한 나데시코를, 란마루가 「진정해」 하고 달랜다.
「그보다 이치코. 너야말로 이런 데서 뭐하는 거야? 좀 전에 큰일이 났다고 말했지?」
란마루의 말에 퍼득 정신을 차리는 이치코.
「그래! 느긋이 지낼 때가 아니었지! 나, 너희들을 찾고 있었어. 들어줘. 실은…….」
사건의 전모를 이야기하는 이치코.
실은 이 게임 자체가 모미지의 덫이며, 앞으로 수십분 이내로 클리어해서 그녀를 막지 않으면 심한 꼴을 당하고 만다는 것을 전한다.
「과연……. 이거 모미지의 장난이었던거구나. 그러면… 협력할게, 이치코. 곤란할 때는 서로 돕는 게 친구고 말이야!」
「별수 없군요. 이 주점에 있어봤자 왜인지 츠와부키 님이 오실 기척은 전혀 없고…….」
실로 간단히 협력을 승낙해 주는 란마루와 나데시코.
이치코를 눈치채고 다가온 타마도 「냐앙!」하고 찬성의 뜻을 표하는 듯 했다.
「다들…… 고마워.」
역시 친구는 있고 봐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 4, 50분 내로 마왕을 쓰러트리라니. 대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시간적으로 상당히 어려울 것 같은데.」
「아아. 좀 전에 주점 아저씨한테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무래도 이 게임의 마왕은 바다 건너에 있는 남쪽의 외딴섬에 있는 성 안에 있는 모양이야.」
「과연. 거기거 라스트 보스의 성이란 거네. 하지만 외딴섬이라니 어떻게 가야하는 걸까.」
쇼민쇼라이가 수중에 있으면 하늘을 날든 뭘하든 간에 손쉽게 향할 수 있었을 텐데, 이곳은 뇌에 투영된 게임의 세계. 그런 편리한 아이템을 갖고 들어오는 것을 모미지가 허락할 리가 없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 외딴섬으로 가려면 비행선이 필요한 모양이야.」
「비행선?」
실로 RPG 다운 용어의 등장이었다. 얼굴을 찌푸리는 이치코에게, 나데시코가 설명을 덧붙인다.
「그래서 그 비행선을 갖고 있는게, 이 마을의 유력자인 귀족이라던가. 하지만 그 귀족, 동쪽 동굴의 마물한테 딸을 납치 당해 곤란해하고 있다고 해요. 그리고 그 마물을 쓰러트리려면 서쪽의 마녀가 만든 마법의 돌이 필요하다고 해요. 그리고 그 서쪽의 마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북쪽 동굴에서…….」
「오케이, 오케이. 거기까지만 해도 돼.」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진다.
요컨대 아무래도, 갖가지 「의뢰 이벤트」를 헤치우지 않으면 마왕한테 도달할 수 없는 구조인 듯하다. 모미지의 말대로 역시, 시간과 공을 들이지 않으면 클리어할 수 없다 그거다.
하지만, 가난뱅이 신의 뜻대로 될 까보냐고.
「뭐어, 일단 시간이 없어. 일단 행동해보자.」
그렇게 말하고서 이치코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딜 가게? 일단 정석 대로 근처 던전부터 수색할까?」
「아니아니. 일단 가는 곳은 이 마을 카지노야!」
초절정 행운 소녀는, 히죽 웃음을 띠웠다.
장소를 바꾸어, 이곳은 암운이 자욱한 마왕의 거성.
그 가장 깊은 곳에는, 이 RPG의 시스템을 통괄하는 중추부가 존재하고 있었다.
「아, 망할. 설마 거기서 갑자기 탈출 프로그램에 버그가 날 줄이야, 오산이었습니다.」
중추부에 줄지어서 있는 단말을 앞에 두고, 고생고생하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미지.
그런 그녀의 옆에, 초조한 표정을 띠운 쿠마카이가 다가와 노트를 펼쳤다.
『사쿠라 이치코 일행이 벌써 이 성 근처까지 와있어.』
「에에에에엑?! 진짜로?! 아직 그 이후로 30분 정도 밖에 안 지났는데요?!」
이를 가는 모미지.
「이치코 년……. 예의 그 바보같은 양의 행복 에너지를 써서, 치트 플레이라도 한 거려나요.」
설마 30분도 되지 않아 마왕성(라스트 던전)까지 도달할 줄이야. 이쪽의 예상을 아득하니 웃도는 공략 속도였다.
「이건 비장의 수를 쓸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모미지가 삐이익하고 피리를 불자, 어디서 나타난건지 모를 종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모미지 누님……. 아니 게임 마스터 님.」
하아하아 거친 목소리를 흘리는 것은 후드를 깊이 눌렀느 남자.
왜인지 스스로 자신을 귀갑 묶기하고 있는 부분을 포함해, 얕볼 수 없는 분위기의 인물이다.
「당신의 사명은 이치코를 붙드는 것……. 아시겠습니까?」
「맡겨 주십시오! 그 대신, 성공했을 때에는 채, 채찍으로……!」
「됐으니까 냉큼 가라구! 이 마조 개!!」
엉덩이를 걷어 차여 「아옹♡」하는 소리를 내며 떠나가는 종자. 그 뒷모습을 보고 모미지는 혼자 웃음을 띠운다.
「뭐어 저런거라도 시간 벌기 정도는 쓸 수 있겠죠. 혹여 당한다 하더라도, 이쪽에는 무적의 마왕님이 있으니까 말이죠. 후후훗…….」
한편 주점에서 합류한 이후 수십분, 빠르게도 그 마왕의 거성 앞에 도달한 이치코 일행.
「이야~ 비행선을 이렇게 편하게 손에 넣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어.」
예상했던 타임 리미트까지 아직 30분 이상이나 여유가 있다. 시간내로 마왕을 쓰러트리고 게임을 클리어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겠지.
「하지만 설마 카지노에서 번 논으로 귀족한테서 비행선을 사들일 줄은 생각도 못했사와요. 이치코 씨의 강한 악운, 실로 무시무시하군요.」
란마루의 토벌 퀘스트 보스는 판돈삼아, 포커나 슬롯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터무니 없는 액수를 손에 넣은 이치코. 딜러 NPC가 울상으로 석고 대죄를 할 때까지는 그리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귀족 아저씨, 그런 것보다 마물한테 납치당한 딸을 구해달라고 말했는데. 그쪽은 정말로 방치해도 되는 거야?」
「괜찮아. 그 사람한테는 돈을 듬뿍 줬으니까. 딸의 몸값으로 쓰든지, 마물토벌을 위한 용병을 고용하든지. 어떻게든 될 거야.」
납치된 딸은 가엽지만, 결국 그것은 게임 세계의 이야기.
그런것보다, 어쨌든 이쪽 사정이 더 우선인 것이다.
「뭐어, RPG의 세계든 뭐든, 돈의 힘이란 위대하다 그거야♡」
거의 대부분 돈의 힘으로 여기까지 도달한 이치코가 말한다.
「애당초 알지도 못하는 남을 위해 노력을 하다니, 내 캐릭터랑은 안 맞고?」
「지금부터 마왕을 쓰러트리려 하는 용사의 대사가 아니라구, 그거….」
쓴웃음을 짓는 란마루.
「그런 것보다 얼른 클리어해서, 가난뱅이 신을 쳐날려 버리자.」
이치코는 그렇게 성문에 손을 댄다.
하지만 문에 닿은 순간, 찌르르한 충격이 오른손에 일었다.
「흐엣?!」
무심코 뒤로 물러나는 이치코.
「뭐야, 이 문. 어떻게 된 거야?」
가만히 관찰해 보니, 아무래도 문 자체가 옅은 빛을 띠고 있는 듯하다.
「뭐야, 안 열려? 나한테 맡겨 봐……. 우옷?!」
문에 손을 댄 란마루 역시, 다급히 손을 뺀다.
「혹시 이 문, 판타지답게 마법으로 봉인 같은 게 되어 있는 거 아냐?」
「그럼 그건가? 봉인을 풀기 위한 열쇠라던가, 선택받은 용사의 검이라던가. 그런 아이템이 필요한 거?」
그거라면 완전이 손을 들어야 한다.
모든 이벤트를 스킵하고 왔으니, 이런 아이텝을 입수할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지금부터 돌아가 찾고 있을 시간도 없다.
「마법의 봉인이니까 어떻게 든 안 돼? 마법사!」
「터무니없는 소리 마! 애당초 나, 마법 같은 거 하나도 모른다구!」
그런 식으로 이치코와 란마루가 곤란해 하고 있는 것과 달리, 나데시코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띠웠다.
「후후훗. 여기는 제가 나설 차례로군요. 맡겨 주세요.」
「하지만 나데시코, 이거 마법의 자물쇠인데?」
「낙승이와요, 이런 거. 보자…… 여기가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저게 이렇게, 그렇게 되어서……. 좋아, 알겠습니다. 에잇!」
나데시코가 뭔가 가공을 하자, 끼이익하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실로 간단히 문이 열렸다.
「「말도 안 돼!!!!」」
나데시코에게 경악의 시선을 돌리는 이치코와 란마루.
「저, 이래봬도 미행과 불법침입에는 자신이 있답니다! 오호호호호홋!!」
「잘난척 웃고 있는 데 미안하지만, 그거 범죄야.」
이치코는 전에, 불법 침입해온 나데시코에 의해 자신의 집이 닌자 저택처럼 개조 되어 있었던 것을 떠올린다.
아무래도 이 닌자 소녀의 앞에서는 마법에 의한 자물쇠조차 식은 죽 먹기인 모양이다.
「하지만 너도 꽤나 인간이랑 거리가 멀구나…….」
진지하게 그리 말하는 란마루.
「란마루 양과 이치코 양에 비하면 별 게 아니죠. 자아……, 바로 향하도록 하죠. 시간이 없잖아요?」
성내로 침입한 이치코 일행.
어두침침한 석조 통로를, 속속들이 등장하는 마물들을 짓밟아 가며 돌파하는 이치코 일행.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으랴아아아아아압!!」
란마루의 주먹이 거듭 막아서는 몬스터를 처리한다.
일단 라스트 던전답게, 상당한 수의 흉악 몬스터들이 덥쳐 왔으나,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그닥 큰 문제가 아니었다. 골렘이든 키마이라든, 애기 손가락을 뒤트는 듯한 기세로 격파해 나간다.
「아, 이 녀석들 완전 잔챙이잖아. 괴물이라고 하길래 조금 싸워볼 맛이 있을 줄 알았는데.」
「과연 란마루 양이로군요. 뭐어…… 티끌만치도 마법사 답진 않지만.」
「수리검이나 연막을 쓰는 무희한테 듣고 싶진 않은데 말이지.」
나데시코 역시 묘한 인술로 괴물들을 희롱하고 있다.
잇달아 등장하는 괴물들을 학살하는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전혀 전선에 나설 맘이 없는 검사가 헐렁한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역시 저 두 사람이 있으면 편해서 좋아.」
때때로 괴물의 브레스나 나데시코의 투척물 같은 유탄이 날아오긴했으나, 이치코의 압도적인 행복 에너지에 의해 피할 것까지도 없이 무효화 된다.
그래서 이치코는 후방에서 루트 지시를 내리는 역할 뿐이었다.
「그래서 타마 짱. 다음은 어디로 가면 돼?」
발치의 타마가 「냥!」하고 울더니, 올바른 길을 가리킨다.
실은 이 마왕성, 미궁처럼 복잡한 분기와, 침입자를 붙잡으려 하는 음험한 덫들로 가득차 있었으나, 이치코 일행은 그것을 알리조차 없었다. 주인을 행복으로 이끄는 마네키네코 덕분이겠지.
「고마워, 타마 짱.」
타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는 이치코 일행.
안쪽으로 나아감에 따라, 통료를 비추는 촉물의 간격이 넓어지고, 어두컴컴해진다.
순조롭게 마왕에게 접근하고 있는 분위기다. 남은 시간 15분. 아직 어떻게든 된다.
「기다리고 있어, 가난뱅이 신……!」
잠시 달리고 있자니 커다란 홀에 도착했다.
「여기가 골인가?」
그제까지의 통로와 달리, 홀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벽에 설치된 촉대의 불빛만으로는 홀 앞을 조망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방심할 순 없어…….」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이치코. 그순간 갑자기, 몸에 뭔가가 휘감겨 들었다.
「꺄악!」
「이치코!」
「이치코 양!」
몸의 자유를 빼앗겨, 그 자리에 엎어지는 이치코.
아무래도 어느샌가, 자신의 몸이 로브 같은 것에 묶인 모양이었다. 심지어 왠지 매니악한 매듭으로.
「큭……. 뭐야, 이거!!」
이치코가 어떻게든 로브를 풀고 탈출하기 위해 버둥기고 있자니, 실로 어색한 국어책 읽기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핫핫핫핫! 보자. 자, 잘 와줬다. 용사들이여! 음……. 이 앞으로는 한 발짝도 지나갈 수 없…다?」
간신히 몸을 틀어 뒤돌아 보자, 거기에는 칠흑의 로브를 걸친 마술사 차림의 모모오가 있었다.
「엣. 모모오! 네 짓이야, 이거?!」
「죄송합니다, 이치코 누님……. 하지만 이러면 모미지 누님이 저를 채찍으로 때려주신다길래……, 하악하악♡」
왜인지 웃음을 띠우고 있는 것은, 이 뒤에 모미지가 줄 쾌감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인 걸까.
「개, 너!! 배신한 거냐?! 이치코한테는 너도 실컷 신세를 졌잖아!!」
모모오의 목깃을 움켜쥐고 호통치는 란마루.
하지만 모모오는 일절 부끄럼 없는 모습이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원래부터 나는 모모오 누님의 노예라고!!」
그런 모모오의 한마디에 「아아, 그러셔」하고 중얼거리고서, 란마루는 모모오를 째려 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단단히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 겠군.」
바닥에 쓰러진 이치코를 등 뒤로, 란마루가 모모오와 대치한다.
「어제의 친구는 오늘의 적. 은의를 잊어버린 짐승 개에게 가르쳐 주마. 세상의 이치. 주먹을 나눌 숙명이라면 각오를 다해 짓뭉갠다! 이 린도 란마루……, 네놈의 근성 바로 잡아 주마!!」
위세 있는 외침과 함께, 란마루는 주먹을 거며 쥐었다.
「딱 좋아. 이쪽도 너와는 언젠가 결착을 지을 생각이었어. 가쿠란 걸. 아니…. 지금은 마녀인가? 나도 여기서는 <마법사>다. 여기는 마법력으로 승부를…….」
「시건방진 소리!!」
모모오가 대사를 끝내자마자, 그의 배에 란마루의 강렬한 보디 블로가 꽂혔다.
「아후……….(♡)」
란마루의 묵직한 일격이 주는 지나친 고통에 견실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마는 모모오. 황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는 비틀비틀 일어선다.
「후훗……. 뭐야, 그게 끝인가? 좀 더 나를 만족 시켜 주지 않는 거냐!」
컁컁하고 짖으면서 모모오가 만신창이의 몸으로 란마루를 덥쳐든다.
거친 콧김에 충혈된 눈을 한 치와와가 침을 흘리며 란마루의 몸에 들러 붙는다. 그 순간, 란마루의 몸에 오싹하니 소름이 내달렸다.
「우왓!! 그러니까 그건 하지 말라고!! 진짜 기분 나빠!!」
「자아, 얼른 좀 더!! 좀 더 나를 때려!! 나 MP(마조히스트 파워)는 아직 이 정도가 아니야!!」
당황하는 란마루에게 하악하학 매달리는 모모오.
그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이치코가 한숨을 쉬었다.
「아……. 이런 흐름인가. 모모오를 상대하는 건 됐고, 얼른 이 로프를 어떻게든 해줬으면 하는 데.」
이제 타임 리미트까지는 거의 시간이 없다. 이런 데서 붙잡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치코의 마음도 허무하게, 란마루는 모모오와 불모한 드잡이질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란마루 양, 지금 도우러…….」
그런 란마루의 핀치에 쿠나이를 거며쥔 나데시코였으나, 불현 듯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몸을 떤다.
음지에서 들려오는 것은 후후훗…하는 웃음 소리.
「멋져요, 멋진 의상입니다. 나데시코 님……! 제 나데시코 님 메모리얼에 꼭 넣어 두고 싶은 광경입니다.」
등 뒤에 있던 것은 코피를 흘리면서 나데시코를 바라보는 변태 집사였다.
「시노부?! 당신, 이런 데서 뭘하고 계신 건가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사의 모습이 아니라 순백의 법의를 걸친 신관 같은 차림이었으나.
「당연하잖습니까. 이 게임에서 제 직업은 <성직자>……. 즉 길잃은 소녀들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제 삶의 길입니다.」
「성직자가 아니라 완전 성범죄자의 영역이네요.」
게슴츠레 눈을 뜨고서 쏘아보는 나데시코.
「후훗……. 자아, 마음껏 싸워주십시오, 나데시코 님! 그 미숙하고 융기 없는 몸에 억지로 끼워 맞춘 무희의 의상. 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새겨 두겠습니다!!」
시노부의 말에 나데시코가 미간을 찌푸린다.
「유, 융기가 없는 몸?」
「네. 그렇습니다, 나데시코 님. 그 유아 체형과 섹시 의상이 의외로 하모니를……」
「유아 체형이라서 미안하네에에에에에에!!!」
격앙한 나데시코가 날라차기를 먹인다.
그것을 휙하고 피하면서도 자신만만한 웃음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시노부.
어느샌가 아가씨와 집사에 의한, 평소와 다름 없는 육탄전이 개시되고 있었다.
「아아, 진짜.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지금은 그럴 겨를이 아닌데!!」
이치코는 로프에 꽁꽁 묶인채, 바닥에 납죽 엎어져 발버둥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대략 10여분 정도겠지.
「큰일이야……. 이대로는…… 그 녀석의 뜻대로 되고 말아.」
시시각각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고립무원 상태로 초조해하는 이치코. 그러고 보니 오늘 파티에 저 변태들도 있었던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이대로는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다. 행복 에너지를 가난뱅이 신에게 빼앗겨 버리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런 대서 정말로 게임 오버라니…….」
눈물 어린 눈으로 중얼거리는 이치코.
하지만 그런 이치코의 역경을 구원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백은의 갑옷차림을 한 청년.
그는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내, 손쉽게 이치코의 자유를 빼앗고 있던 로브를 끊어냈다.
그는 방긋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이치코?」
「츠와부키……? 너까지 여기에…….」
갑작스러운 츠와부키의 등장에 놀라는 이치코.
심지어 마치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차림세였다. <기사> 직업 같은 거려나.
그런 츠와부키의 도움에 이치코는 저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뭔가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만다.
「이야기는 나중에. 뭔가 사정이 있지?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얼른 가.」
이치코의 손을 잡아 당기며 일으켜 세우는 츠와부키.
지나치게 타이밍이 좋은 감이 들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게임을 클리어해서, 가난뱅이 신의 계략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땡큐, 츠와부키…….」
감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츠와부키와 다른 멤버들한테서 등을 돌리는 이치코.
등 뒤로 모모오의 교성이나 나데시코의 노성이 들려오는 와중, 이치코는 홀 안쪽 통로로 뛰어가기 시작한다.
변태 상대는 그녀들에게 맡길 수 밖에 없다. 한시라도 빨리 마왕한테로 가지 않으면…….
「하아……. 하아…….」
홀을 빠져 나와, 기나긴 복도를 달린다.
안쪽으로 나아감에 따라 「우우우……」하는 무시무시한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저것이 마왕의 목소리인 걸까.
「하지만 마왕은 대체 어떤 괴물이지? 설마 팔이 대 여섯 개라던가. 눈알이 세 개라던가 그러진 않게씾?」
자신의 상상에 몸을 떠는 이치코. 그 가난뱅이 신이 생각하는 일이다. 이쪽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괴물을 준비해뒀겠지.
관두자. 어쨌든 상대가 어떤 모습이든 간에 쓰러트리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달리는 동안, 마침내 복도의 막다른 곳에 도달했다.
이치코가 호사스러운 장식이 가해진 문을 열자, 붉은 빌로드가 깔린 홀이 눈에 들어온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누군가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마왕의 옥좌인 듯 하다.
10여 미터 이상은 될 듯한 거대한 옥좌를 향해 검을 내밀며, 이치코는 외친다.
「자아, 포기하도록 해. 마왕! 당신한테 원한은 없지만, 냉큼 쓰러트리고 게임을 클리어 하도록 하겠어!」
하지만 그 옥좌에 앉은 인영은 「우우우……」하는 흐느낌을 흘릴 뿐이었다.
「너무해……. 이런 건 너무해요……. 오늘은 나마 님의 라이브를 위해 모처럼 유급 휴가를 써가면서 인간계로 내려온건데… 어째서 이런 일이…….」
「다, 당신은. 전에 만났던 모미지의 상사…… 야마부키 씨?!」
옥좌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마왕의 정체는 가난뱅이 신의 수장, 야마부키였다.
이치코보다 몇 배는 됨직한 거구에, 검은 고딕 드레스도 그렇고, 분명 「마왕」의 풍모이긴 하지만…….
「애초에 모미지의 말을 순순히 들은 게 실수였어요.」
쿨쩍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야마부키.
「저, 저기~….」
곤란해하는 이치코한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야마부키는 완전히 불평 불만 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에너지 회수에 협력해 주세요…라니. 불성실한 그 아이치고는 드물게 성실하구나 싶어서 협력해 줬더니… 벌써 1시간 가까이나 이런 곳에서 대기라니……!!」
「하아…….」
「처음에는 5분 뿐인 약속이었단 말이죠?! 아아, 정말. 라이브에 지각하고 말잖아요……!!」
아무래도 이 마왕한테도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저, 저기……. 그쪽도 큰일인 것 같긴한데….」
「큰일이고 뭐고!! 제가 얼마만큼 이 라이브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아시나요?! 거금을 들여 맨 앞줄 티켓을 입수해서, 반년 전부터 이날을 위해 스케쥴을 조정해 왔는데……! 그런데, 그런데 모미지 때문에……!!」
엉엉 소리를 내어 우는 야마부키.
그 모습을 보고 이치코는 실로 거북하고 껄끄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너, 너무 불쌍해……. 이 신은 쓰러트릴 수가 없어….」
평소부터 모미지한테 마구 휘둘리고 있던 이치코였기에, 이 가여운 상사의 마음을 아플 정도로 잘 안다. 완전히 전의 상실이다.
「여기까지 생각해서 마왕을 캐스팅한 거라면, 터무니 없는 책사겠지. 그 녀석.」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치코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여하튼 자신의 행복 에너지가 걸려 있기 때문에.
「저기, 요컨대. 만악의 근원은 모미지란 거네요.」
야마누키가 눈물을 닦으며 대답한다.
「네. 그래요. 상사를 속인 죄. 뭣보다 제게 나마님 라이브를 단념하게 만든 죄는 무겁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치코는 히죽 웃음을 띠웠다.
「저는 마왕을 쓰러트리는 건 딱히 아무래도 좋아요. 요는 그 가난뱅이 식을 많으면 되는 거고……. 여기선 서로 협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내미는 이치코.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표정을 짓는 야마부키였으나, 그녀도 훗하고 웃음을 띠운다.
「마왕에게 거래를 청하는 용사도 묘한 이야기지만……. 좋지요. 일단 지금은 에너지의 회수는 제쳐 두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모미지에게 저를 화나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 것을 그 몸으로 가르쳐 주지 않으면……. 우후후훗.」
야마부키도 이치코가 내민 오른손에 손가락을 댄다.
「세계의 절반…은 아니지만, 모미지를 함께 반죽음으로 만들기로 하는 거겠네요.」
「네. 모미지는…… 이 안쪽, 중추부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안내하도록 할테니 따라와 주세요.」
석재로 된 성의 한 칸이면서도, 그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하이테크한 기계들이 잔뜩 늘어서 있는 게임 중추부.
게임 마스터 모미지는 마침내 탈출 프로그램을 완성하려던 참이었다.
「꽤나 시간이 걸렸지만 겨우 어떻게든 되었습니다. 이걸로 행복 에너지를 빼앗으러 갈 수 있겠군요.」
모미지의 손가락이 그야말로 프로그램 기동 키를 누르려 하던 그 순간.
중추부에, 그녀가 익히 잘 아는 소녀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기다려, 가난뱅이 신!!」
뛰쳐 들어온 것은 검사차림의 이치코.
「엣, 이치코?! 야마부키 누님은 어떻게 한 겁니까?!」
당황하는 모미지를 쏘아보며 이치코는 흥하고 코웃음 친다.
이치코의 등 뒤에서 거대한 인영이 중추부 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우후후훗……. 모미지, 당신이 나를 속인 덕분에 저는 오늘 라이브에 갈 수 없었답니다? 그 빚은, 어떻게 할 셈일까나……?」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띠우는 야마부키. 그 커다란 손이 달아나려 하는 모미지를 순간 잡아 올린다.
「자, 잠깐만요! 속이다니!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린 것뿐입니다!」
「거짓말!! 최저 50시간은 걸린다고 말했던 주제에!!」
「헤에, 모미지……. 이 시기에 이르러 아직도 변명이야? 당신도 상당히 신경줄이 두텁네. 우후후훗.」
야마부키의 오른손이 움켜쥔 모미지를 조여든다.
「잠깐만요! 그만! 죽어!! 진짜로 농담이 아니게 된대두요!! 사과하겠습니다! 사과할테니까 용서해 주세요오오!!」
그녀의 웃음이 진짜 분노를 뜻하는 것을 알고 있는 모미지.
「치……. 아무래도 단념해야할 때 같군요.」
공포에 질린 나머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완전히 저항할 마음도 사라진 모양이다.
「비겁합니다, 이치코. 야마부키 누님을 구슬리다니……!」
「흥! 누가 할 소리야! 남을 실컷 속여 놓고서!!」
그리고, 거기에.
「어이, 이치코! 늦어서 미안!!」
「앗, 어라? 벌써 해결하신 건가요?」
「흠. 어떻게 된 모양이군.」
방에 나타난 것은 란마루, 나데시코, 츠와부키 세사람. 덤으로 타마도 함께인 모양이다.
「응. 덕분에. 만악의 근원(게임 마스터)를 붙잡았어.」
야마부키에게 구속당해 있는 모미지를 쏘아보자, 그녀는 실로 원망스럽다는 양 혀를 찼다.
옆의 쿠마카이도 「이제 다 틀렸군」하고 한숨을 쉰다.
「일단락 되어서 다행이야. 뭐어, 모미지의 장난이라 해도 나는 꽤나 즐거웠지만.」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는 란마루.
「그런데 빈보다. 결국 이치코 양이 이쪽의 마왕 씨와 화해한 모양인데, 이 게임은 언제 끝나는 건가요?」
나데시코가 구속 당해 있는 모미지에게 묻는다.
「후훗……. 듣고 싶습니까?」
완전 패배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모미지는 히죽하고 웃음을 띠운다.
「뭐야. 거드름 피우지 말고 냉큼 말해.」
모미지의 표정에 일말의 불안을 느끼는 이치코.
설마 아직도 뭔가 책략을 꺼낼 셈인건가, 이 가난뱅이 신은.
「처음에 말했을 텐데요. 이 게임은 <마왕을 쓰러트리고 공주님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아무리 마왕 야마부키 씨를 회유해봤자, <공주님>을 구하지 않으면 엔딩은 안 나옵니다.」
「<공주님>? 어디에 있는데, 그 아이는?」
큭큭큭하고 웃음을 흘리는 모미지.
「아뇨아뇨.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공주님은 이미 이 자리에 있으니까.」
「하아?」
의외인 말에 전원이 멍청히 있자니, 추가타를 넣는 듯이 모미지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영예로운 <공주님> 역할은 츠와부키 군, 당신입니다!」
척하고 츠와부키를가리키는 모미지.
「하아……? 나?」
지명당한 본인도 뭐가 뭔지 곤혹스러워하는 모양새다.
「하아?! 츠와부키가 공주님!? 말도 안 되지, 그거!」
「그래요! 공주님이라기보다는 왕자님 아닌가요?!」
경악하는 일동을 모미지가 히죽이죽 웃으며 바라본다.
「뭐어, 원래부터 이치코 지향으로 만든 게임이니까요. 모처럼이니 여자 아이들 일동이 공통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공주님 역으로 설정하자 싶어서.」
「소, 소중하다니……. 란마루랑 나데시코는 그렇다쳐도 나는 딱히…….」
「어라어라. 이치코 짱.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점이 수상하네요~.」
불과 몇 분전까지는 흑막 모미지를 징계하는 흐름이었는데, 어느샌가 그녀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어, 어쨌든! 츠와부키가 여기에 있으니까 클리어 조건은 다 된거잖아?! 얼른 끝내자구, 이딴 게임!」
얼버무리듯 거친 어조로 말하는 이치코.
하지만 뭐가 우스운지, 모미지는 굉장히 유쾌한 웃음을 띠웠다.
「아뇨아뇨. 공주님이 그냥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끝나다니 아무런 재미가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된 로.맨.틱.한 엔.딩.에 걸맞는 연출을 하지 않으면 클리어 할 수 없는데요?」
「연출? 뭐야, 그거.」
란마루가 의아한 듯 묻는다.
「즉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와 공주님의 키스!!입니다! 키스 씬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건 왕도 잖아요?」
「키, 키스라고오오오오?!」
당황하는 이치코.
이번에 마왕을 쓰러트린(엄밀히는 회유 포섭한) 용자라고 하면 이치코 본인이다. 그것은 즉, 자신이 공주님 역할의 츠와부키와 키스를 하게 된다는 의미로…….
순간 얼굴을 붉히는 이치코.
힐끔 츠와부키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도 영 싫지만은 않은 모양새로 머리를 긁고 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급전개에 이치코의 머릿속에서는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다.
「키스래! 어쩌지?!」「아무리 어쩔 수 없다지만 이런 데에서 간단히 해도 되는 거야?」「클리어를 위해서니까 별수 없지 않아?」「아니아니, 안돼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라구!」「적어도 브레스 케어를 할 시간을!」
이치코가 전에 없이 격하게 고민하고 있던 그때, 나데시코가 옆에서 끼어 들어왔다.
「자, 잠깐만요. 빈보다! 이 경우 용사는 한 사람으로 한정되는 건가요?」
그 의문을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모미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아뇨. 이치코가 여기로 올 수 있었던 것도 란마루 군과 나데시코 양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잖아요? 물론 용사는 파티 전원을 가리키는 겁니다.」
히죽 웃는 모미지.
그 한마디에 이치코 일행에 격한 전율이 일었다.
「그럼 제가! 츠와부키 님과 입맞춤을 나누는 것은 제 역할이에요!」
「아니아니. 잠깐, 나데시코. 이 성의 괴물을 제일 많이 쓰러트린 건 나야. 그러니까 즉 내가 키, 키스를 한다해도 이상하진 않잖아?」
쑥스러워 하면서도, 확실하게 나데시코를 견제하는 란마루.
「잠깐만 둘다. 마왕을 어떻게 한 건 나고, 거긴 내 역할인게 도리에 맞지 않아? 아……. 아니, 그… 딱히 꼭 츠와부키랑 키스를 하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게임을 끝내기 위해서 별 수 없이. 별수 없이!」
이치코도 지지는 않았다.
「엣. 이치코 양은 성에 들어선 이후로 딱히 한 게 없지 않나요?」
「그러는 너도 집사한테 태클을 건 것뿐이었잖아.」
「란마루도 모모랑 장난을 치기만 했잖아?」
「애당초에 이치코 양은 항상 마음이 없는 척 하면서…….」
「아아, 정말. 귀찮아! 실력으로 승부하자구, 나데시코! 이치코는 무리할 필요 없어. 소중한 퍼스트 키……, 키스는 정말로 하고 싶은 녀석이랑 할 때를 위해 남겨 둬야하니까.」
「아니, 그건… 저기, 그…….」
모미지의 한 마디가 계기가 되어, 까닥하면 난전으로 발전할 것만 같은 이치코 일행.
마왕을 쓰러트린 파티는, 바야흐로 지금 괴멸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야마부키는 한숨을 쉬고, 타마는 그저 바들바들 떨고 있다.
단 한 사람, 모미지 혼자만이 미소 짓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크크큭……. 역시 츠와부키 군을 공주님으로 설정해두길 잘했군요. 에너지 탈취 계획은 실패했지만, 이치코 일행이 재밌게 꼬이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 뭐어 이번에는 무승부인 걸로.」
서로 쏘아보며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이치코, 란마루, 나데시코.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을 구한 것은 츠와부키의 한마디였다.
「뭐어, 잠깐만 너희들. 싸움은 관두자. 공평을 기하기 위해서 여기선 내가 정해도 되나?」
전에 없이 늠름한 표정으로 말하는 츠와부키.
「따, 딱히 상관은 없지만…….」
「츠와부키의 결정이라면 나는 불만 없어!」
「저도요.」
납득한 모양새의 세 사람을 보며, 츠와부키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좋아. 그럼…… 전원 이 몸한테 접문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하아? 전원?」
츠와부키가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치코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니까 즉, 이렇게. 세 방향에서 동시에 이 몸을 끌어 안아서 말이야! 특히 가슴이 큰 이치코, 너는 정면이다! 작은 건 무리할 필요 없어.」
「츠, 츠와부키……?」
「작은 거라니, 제 말인건가요……?」
평소의 츠와부키라면은 생각할수도 없는 변태 발언에 순간 싸해지는 란마루와 나데시코.
「왜 그래, 너희들. 이 몸은 언제든지 OK라구? 입술에 하는 게 부끄럽다면야 이참에 가슴에라도…….」
「어이, 잠깐.」
성희롱 발언을 거듭하는 츠와부키의 이야기를 가로 막는 이치코.
「좀 전부터 듣고 있자니 어딘가의 변태 땡중 같은 대사를 토하네, 당신.」
다가가 빠안히 츠와부키(?)를 쏘아본다.
「변태 땡중? 무슨 소리를. 이 몸은 어딜 어떻게 봐도 정진정명 츠와부키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이치코의 갑옷 가슴께를 소프트 터치하고 있다.
「본성 다 나왔거든!! 정체를 밝히라구, 이 에로 땡중!」
하고 라이프 스트레이트로 힘껏 주먹을 날리는 이치코.
「쿠억!!」
쳐 날아가 벽에 격돌하자, 퐁하는 소리와 함께 츠와부키의 모습이 변태 땡중…… 보비로 변화했다.
「우왓!? 진짜로 땡중이 됐어!!」
「정체를 드러내셨군요…….」
여자아이들의 쏘아보는 시선에 허둥거리는 보비.
「이, 이럴수가……. 이 몸의 영력 패치가…….」
그 모습을 보고 모미지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영력으로 이 게임의 표기 정보를 덧쓴 겁니까. 게임 내의 자캐 표시를 마치 패치를 씌운 것처럼 다른 인물의 얼굴로 변경한 거겠죠.」
아무래도 게임 마스터 모미지조차 보비의 변장을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 인간이 가난뱅이 신 아이템에 간섭하다니.」
야마부키도 경악하고 있는 듯 했다.
자주 잊고 그러지만, 보비는 영능력자로써 상당히 우수하다. 변태성만 없으면.
「애당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셋이 같이 라니, 츠와부키가 그런 가벼운 제안을 할 리가 없지!」
보비를 쏘아보는 란마루.
「그렇사와요! 진짜 츠와부키 님이라면 누구와 키스할지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분명 제일 먼저 저와…….」
「아니……. 그건 그거대로…… 글쎄다.」
변함없이 망상을 펼치는 나데시코에게 이치코가 의아한 표정을 띠우고 있다.
「하지만 왜 츠와부키 군의 모습이 된 거지?」
초조함을 보이는 보비에게 묻는 모미지.
「아, 아니. 딱히……? 수상쩍게 여겨지지 않게 그 소년의 모습을 빌려 이치코 일행한테 저속한 짓을 하려는 생각은, 털끝 만치도 없었어!」
보비는 시선을 돌리며 시치미를 뗀다.
「변함없이 최저구만, 땡중…….」
「이, 이런 인간한테 입술을 바치려 했다니! 최악이에요!」
란마루와 나데시코는 싸늘한 눈으로 보비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어쩌실 건가요, 이치코. 제가 공주님으로 설정한 것은 츠와부키 군이 아니라 아무래도 보비였던 모양인데요? 즉 보비와 키스하지 않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푸푸풉…♡」
웃음을 참으며 설명하는 모미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재미난 사태에 내심 기뻐하고 있는 모양이다.
보비 역시 실로 기쁜 표정을 띠운다.
「헤에? 진짜?」
웃음을 띠우며 다가오는 보비의 모습에 이치코의 전율을 느끼며 뒷걸음질 친다.
「잠깐. 란마루! 나데시코!! 당신들도 용사 파티잖아?!」
눈물 어린 눈으로 호소하는 이치코였으나 란마루와 나데시코는 퍼득 시선을 돌린다.
「이, 이거~. 그건 그렇고 굉장하다. 이 게임. 이 벽의 감촉, 완전 진짜 같아~.」
「이 정도 쯤 아데노코지의 기술을 결집하면 간단히 만들 수 있답니다~」
이제와 게임의 디테일에 감탄하는 척하고 있다.
「이, 이 박정한 것드으으을!!」
「포기해라, 사쿠라 이치코. 나도 큰 가슴이 제일 좋으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보비의 거친 콧김이 바로 근처까지 육박해 왔다.
「보자보자. 어디에 접문하면 되지? 그런 에로 갑옷이 상대라서야, 접문할 장소가 곤란하구만.」
다시 보비의 오른손이 이치코의 가슴을 건드리려 하던 순간, 이치코의 분노가 정점에 이르렀다.
「네 놈 같은 건 그냥 땅바닥이랑 키스하라구!!!!」
포효화 함께 이치코의 강렬한 돌려차기가 보비의 안면에 메다 꽂힌다.
「푸헙!!」
지나친 충격에 돌바닥에 내팽개쳐지는 보비. 그대로 돌바닥을 깨부수고, 움찔움찔 경련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이치코 일행의 시야는 갑작스럽게 새카매졌다.
「뭐, 뭔가요?!」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게임 중추부의 광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치코 일행은 어둠 뿐인 세계에 휙하니 내던져졌다.
「우왓. 암 것도 안 보여!」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는 일동이었으나, 모미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바 없었다.
「아, 걱정할 거 없어요. 엔딩에 도달한 것뿐입니다.」
「엣? 키스는 어떻게 된 건데?」
「뭐어, 안면에 발차기를 날려서, 형식적으로는 키스한 걸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네요. 입이 아니라 다리에, 지만. 싱거운 결말입니다. 아~, 시시해.」
한숨을 쉬는 모미지.
그리고 그대로, 이치코 일행의 눈앞으로 스크롤(모미지의 이름만)이 흘러지나가기 시작했다.
「후우. 겨우 끝이 났습니까…. 그럼 저는 한 발 먼저 현실 세계로 돌아가겠습니다. 더 이상 나마 님의 라이브를 놓칠 순 없으니까요.」
이치코의 뇌리에 울려 퍼지는 야마부키의 목소리. 플레이어도 아닌데 엔딩까지 붙들려 있어야 하다니, 정말로 가여운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가도 안 늦나요?」
「네. 괜찮습니다. 왜냐면 이번 라이브는 기네스 도전 라이브 <레전드 오브 나마 ~ 여명 너머로~(10시간 150곡)>이니까요.♡」
라이브에 대해 즐겁게 논하는 모양새는, 조금 전 분노해 있던 때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여, 열 시간이라니…. 그럼 처음 1시간 정도는 딱히 괜찮지 않나요?」
「1시간 정도라니 뭔가요?! 오프닝부터 라스트까지 전부 지켜봐야 진짜 팬이라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팬에게는 팬 나름의 집착이 있는 모양이다.
「하아……. 그, 그렇군요…….」
「뭐어, 처음 1시간을 놓친 만큼 나중에 모미지한테 잔뜩 설교하기로 하고……. 그럼 사쿠라 이치코 양, 잘 지내시기를. 앞으로도 저 아이를 잘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말하고서 야마부키의 기척은 어둠 속에서 스윽하고 사라져갔다. 아마 라이브 회장으로 향한 거겠지.
「도, 동정해서 손해봤다……. 아니, 야마부키 씨는 어떻게 라이브를 볼 생각이지? 그런 거구로…….」
눈 앞을 흐르는 스탭롤을 바라보며, 이치코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웅………?」
벌떡하고 일어나는 이치코.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를 벗어 던지고 주위를 둘러보자, 거기에는 낯익은 자신의 방. 파티 중이었기도 해서, 음식이나 음료수들이 마구 잡이로 흩어져 있다.
「아, 돌아왔구나……. 좋아, 옷도 평범한 걸로 돌아와 있어.」
후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이치코. 역시 그런 노출도가 높은 옷은 결단코 사양하고 싶다.
「아, 끝났다. 끝. 뭐어, 그럭저럭 재밌었어!」
「마지막 만큼은 납득이 안가지만 말이죠. 진짜 츠와부키 님과 키스할 수 있는 이벤트가 필요했어요.」
보자니 란마루나, 나데시코에 이어, 모모오나 보비, 시노부 일행도 속속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뭐어, 무사히 해결되서 다행이야.」
그런 이치코의 옆에서 한숨이 들린다.
「저는 무사하지 않지만요. 지금부터 야마부키 누님한테로 출두 결정입니다. 으흐흐흑…….」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미지.
「그건 자업자득이잖아. 이만큼 모두를 끌어 들여 놓고. 심지어 츠와부키까지 이용하려 하다니…….」
「그건 그렇고, 츠와부키 군이라고 하니 묘하네요.」
아직도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를 쓰고 잠든 츠와부키의 모습을 보며, 모미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가?」
「제가 공주님으로 정한 건 가짜였긴 하지만, 진짜 그는 게임 안에서 뭘하고 있었던 걸까요? 모험을 하고 있는 기척은 전혀 없었는데.」
게임내, 초보자의 마을.
「자아, 쌉니다! 약초는 묶음 구매가 득! 해독초는 타임 세일 중입니다~.」
한 사람의 젊은이가 도구점에서 바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감탄한 도구점 주인이 그에게 말을 건다.
「형씨. 꽤나 호객 행위가 능숙한 걸. 장래에는 가게를 맡겨도 되겠어.」
「감사함다. 수퍼나 편의점 알바는 꽤나 경험이 있으니까요.」
아르바이트에 열의를 쏟아 붓는 <상인> 츠와부키.
그 덕분에 이 날, 도구점 매장은 호조였다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또 별개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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