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바운티헌터/SS]

훈풍 〜서투른 연인〜

(한정판특전 소책자SS)

 

 

본편 쥴 해피엔딩 후일담 s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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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히 낡고 먼지로 넘치는 대저택 안을 걷는다.
나는 저택의 주인을 찾고 있었다.
그곳은 전체적으로 빛이 없어서 어두웠다.
거기에 있는 가구는 전부 호사로운 것들인데, 손질된 기미가 전혀 없다. 고급스러운 커튼도 낡아 해져, 군데군데 찢어진 곳이 보였다. 저택 전체가 엉망이었다. 생활감이 전혀 없었다. 주인의 옅은 집착을 표하고 있는 것처럼.

 


(아…….)

 

순간 비틀했다. 몸에 스민 독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벽에 손을 짚고, 몸을 지탱한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였기 때문에 근육이 완전히 빠진 모양이었다.

 


「하아……, 하아…」
누워 있던 침실에서 얼마 걷지도 않았을 텐데, 벌써 숨이 가빠졌다.
현상금 사냥꾼은 몸이 자본이다. 이렇게까지 몸이 쇠약해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우도(雨島)에서 돌아온 후, 쥴과 싸웠다.
비정한 암살자, 쥴. 나이프로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을 특기로 삼으면서, 독에 집착해서 반드시 상대를 독살하려 든다.
나도 싸움 도중 독이 발라진 나이프에 당했다.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으나 아이를 감싸느라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바보 같음을 저주하면서도 죽음을 각오했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는…… 모르겠어.)

 


의식을 잃은 뒤의 기억이 없었다. 누군가가 물이나 약을 먹여줬던 기분은 들었지만…. 

 

(이…… 입으로 먹여준 거지, 그건….) 

 

입술에 닿은 감촉. 흘러들어온 차디 찬 액체의 맛. 그런 것들을 감각으로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에 당해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체력이 회복되면서 시력은 돌아왔다. 그 덕분에 겨우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나는 쥴의 저택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나를 간병해 준다면…, 뻔하겠지.)

 


왜 날 구한 걸까. 그리고 왜 제 저택에 두고 간병을 계속한 걸까.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저택의 주인을 찾아야만 했다. 

 

(흐유……. 그건 그렇고 힘드네……) 

 

근육, 얼마만큼 빠진 걸까. 벽을 따라 걷는 데도, 가끔 앉아서 쉬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멈춘 곳이 마침 딱 창가라서, 창문을 열고 한숨 쉬기로 했다. 녹슬어서 덜컹거리는 경첩을, 힘없는 손가락으로 애써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흘러들어왔다. 갑자기 움직여서 달아오른 몸을 보드랍게 식혀준다.

 


(기분 좋아.)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달콤한 장미 향기.
그러고 보니, 쥴의 저택에는 장미 정원이 있었다. 비더 때문에 여기 왔을 때 봐서, 장소도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있는 위치에서 어느 방향에 있는지가 문득 신경 쓰여 창밖을 보니, 찾을 필요도 없이 눈앞에 있는 게 보였다. 장미 냄새가 다른 장소보다 강하게 느껴졌던 것도 창이 뜰과 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미가 조용한 달빛을 받아, 선명하고도 아름답게 흐드러져 있었다.
잘 관리된 덩굴, 위에서 봐도 상당한 높이. 게다가 말라죽은 꽃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이 꼼꼼하게 관리한 증거였다. 방치된 저택과 다르게 사람이 공을 들여 손질한 장미.
전에 찾아왔을 때보다 시간이 꽤 지났을 텐데, 저택 주인은 변함없이 꽃만 돌보는 모양이었다. 아름다운 꽃을 창밖으로 바라보았다. 낡은 저택과 장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그 그림 안에서 딱 하나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응? 저건… 쥴이잖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찾던 사람을 발견했다.
창문을 조심히 움직여 닫았다. 벽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찾던 청년을 발견했다. 꽃을 솎아내고 있었던 건지, 손에 원예용 가위를 들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정원에는 몸을 기댈만한 벽이 없어서, 자력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약해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식은땀이 줄줄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를 살려준 이유를 가르쳐줘.)
(왜 나를 보살핀 거야?)

 


쥴한테 던지고 싶은 무수한 질문이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았다.
하지만 지금 있는 장소에서 물어봤자, 쥴한테 목소리가 닿을 자신이 없었다. 몸이 약해진 탓에 배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쥴한테 질문을 하기 위해, 느릿느릿 정원을 걸어 나갔다.

 


「으윽…」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뿐인데, 중간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자기 몸을 너무 과신했던 거 같다. 지면에 엎어져, 필사적으로  호흡했다. 숨을 들이키는 것도, 내뱉는 것도 괴롭다. 폐가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다. 

 

 

「헉…… 허억」
(응……?)

 


눈앞이 어두웠다. 또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걸까?

지난번에는 회복했으나, 이번에도 그리 될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남은 시력을 확인하고 싶어서, 어느샌가 감고 있던 눈을 필사적으로 떴다.

 

 

「쥴…!!」
시력에 문제는 없었다. 눈앞이 어두워졌던 것은, 눈앞에 쥴이 서 있었기 때문. 내가 괴로워하는 동안 다가온 걸까? 전혀 몰랐다.

 

「……」

 

쥴의 선선한 미모가,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그는 암살을 생업으로 한 자로, 망설임없이 사람을 죽인다. 그런 남자가 정원 가위를 손에 든 채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언제 죽임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렇게 직접 마주보면서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간병했던 것은 역시 그란걸.
눈앞에 섰을 때의 분위기, 향기, 기척. 몸이 느꼈던 모든 것이, 입술을 통해 약이나 물을 전해줬을 때의 그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어째서?)

 

이유를 묻고 싶었다. 질문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닥에 엎어져 있을 뿐. 숨이 가프고, 목구멍으로 뜨겁고 쓴 액체가 치밀어 올랐다.
그저 괴로웠다.

 

 

「……너」

 

그때까지 가만히 서서 보고 있기만 하던 쥴이 입을 열었다.

 

 


「무리하면 안 돼. 아직 일어설 수도 없는 몸으로 여기까지 오다니, 자살행위야」

 

나는 튼튼했다.
겸손하게 말해도 남들 배로 튼튼했다. 실제로는 「이상하리만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엄청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안 죽고, 잘 다치지도 않았다.
독도 잘 안 듣고, 해독되는 것도 남들보다 훨씬 빨랐다.
하지만 쥴한테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걸어다니는 것은 일단 내 몸으로도 너무 무리였던 모양이다.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고통을 견뎌냈다.

 

 


「이렇게 되면 방까지 옮기는 데도 몸에 안 좋아…. 잠깐 거기서 쉬고 있어……」

 

 

쥴은 그렇게 말하며 나한테 등을 돌려, 다시 장미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굳이 그가 그렇게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이미 자력으로 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말에 기댈 수밖에. 통로에서 기어나와, 모퉁이 덤불에 몸을 기댔다. 우연히도 가시가 없는 장미 덩굴이라서, 다치는 일은 없었다.
후욱, 후욱하고 뜨거운 숨이 목구멍을 오갔다.

 


잠시 거기서 쉬고 있자니, 서서히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나 등에 닿는 수풀의 딱딱함이 느껴졌다. 약간이나마 체력이 회복된 모양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악할 수 없었던 주위 상황도, 조금씩 손에 잡혔다.
쥴의 장미 정원은  상당히 넓었다. 이렇게 장미보다 낮은 시점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압권이었다.
 전에 여길 방문했을 때, 전부 독이 있는 장미라고 들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제 어느 정도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렇게 느끼고, 그에게 말을 걸어 본다. 문득 의문스럽게 여겼던 것을 물어보고 싶어졌다.

 


「어째서 장미에서 독을 채취하려는 생각이 든 거야?」 

 

어느샌가 목구멍으로 느껴지던 뜨거움은 가셔 있었다. 독이라면 뱀이나 개구리 같은 파충류, 나방이나 거미 같은 걸로도 채취할 수 있었다. 무수한 입수 대상 중에서 하필 장미였던 걸까? 비의 섬으로 향하는 배안에서 동물을 기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독꽃을 먹고 죽으면 귀찮다는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미를 보살피는 수고에 비하면, 우리에 넣어 관리할 수 있는 작은 생물한테서 독을 채취하는 게 훨씬 더 간단하지 않나?
그런데 굳이 장미를 선택한 것은 역시 꽃을 좋아하기 때문 아닌가? 그저 내가 그에게 감정이 있길 바라기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뿐인가?

 


「………」

 


내가 소리내 말한 것에 놀란 걸까, 쥴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잠시 조용히 침묵하더니, 이어 입을 열었다. 

 

 

「어째서……? 살아 있어서 그런 것뿐이야」 

「자연히 살아 있는 꽃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연구해서 개량한 장미도 있잖아?」

 

 


여기를 찾아왔을 때, 그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그때는 그저 심드렁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역시 그것은 그가 장미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쥴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바로 내게 흥미를 잃은 모양새로 장미 손질을 재개했다.

 


그것을 보고, 내 말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조금 전의 질문만으로는 내가 무엇을 묻고 싶어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직 몸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도 심심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질문의 의도를 보충했다.

 

 


「하지만 쥴. 동물한테서 독을 채취하는 게 더 편하지 않아? 식물이랑 병행해도 좋고. 그편이 더 풍부하게 독을 채취할 수 있잖아」

 


쥴은 이번엔 돌아보지 않았다.
정원 가위로 발육이 좋지 않은 꽃봉오리를 잘라내면서 대답한다.

 


「움직이는 것은 싫어. 꽃은 움직이지 않잖아」
「?」

 


이번엔 쥴의 표현이 부족했다. 의미를 몰라 끙끙 댄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니, 그가 말을 덧붙였EK.

 


「꽃은 내가 어딜 가도, 돌아오면 줄곧 거기 있어」
동물은 움직여서 어딘가로 가버릴 우려가 있으나, 꽃은 있어야할 장소에 있다.

 


그것은 집착처럼 들렸다.

 


「그건 즉 꽃을 좋아한다는 의미 아냐?」

 

 


내 질문에 쥴이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본다.

 


(아.)

 

 

갑자기 손에 들고 있는 가위가 무섭게 느껴졌다. 무방비하게 지면에 앉아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스멀스멀 불길한 예감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하지만 쥴은 바로 다시 장미를 돌아본다. 그리고서는 내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성가실 뿐이야」

 

 

숨막히는 긴장에서 해방되어, 내심 안도했다.
조금 전에 느꼈던 것은 대체 뭐였던 걸까….
살기처럼 느껴져서 무심코 움찔했으나, 냉정히 생각해보니 아닌 거 같았다. 분위기가 딱딱해졌다고 하는 게 제일 가까운 표현이겠지.

 


(당혹스러워 한 건가?)

 


잠시 생각해 봤더니 어느 찰나, 깨달았다.
방금 얼어붙은 그 순간, 쥴은 당혹스러워 했다. 

 

 

(그건 진심인가? 스스로도 몰라서 얼버무린 것뿐?)

 

 

신경 쓰였으나 추궁할 순 없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지금의 쥴에게 질문을 던지는 건 벌집을 건드리는 행위나 다름없을 정도로 무모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왜 나를 보살폈는지 물어볼 걸 그랬다. 그의 태도가 딱딱해진 지금에 와선, 당초 목적으로 했던 질문도 할 수 없었다. 등을 돌린 쥴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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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로 꽤 많은 시간이 자났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연인 사이가 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
지금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다.

 


나는 본가에. 그는 마을 빈집에.
이사 초기에는 그가 마을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을지 꽤 마음 졸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 사람들도 그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가 식량난을 구제할 획기적 신약을 개발한 덕분일지도. 하지만 뭐든 처음이 중요하니까, 계기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서서히 친해지면 되겠지.

 


나는 이 마을에서 중재자 일을 하고 있었다. 고향에 술집을 만들어, 내가 그쪽에서 중재자 일을 맡을 수 있게끔 브레멘이 손을 써준 덕분이다.
처음엔 일에 익숙해지느라 고생했다. 전설의 헌상금 사냥꾼인 브레멘한테 사사했으나, 중재자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운 것은 아니었다. 실전에서 배워야할 것들도 잔뜩 있었다.
쥴은 그러한 힘든 시기에 많은 도움이 되어주었다. 주점에 틀어 박힌 나를 빈번히 찾아주었다. 시간이 없어서 만나러 가지도 못했는데, 불만 하나 없이 날 격려해 주었다. 엄마랑도 잘 지내고 있어줘서, 몹시 고마웠다. 

 

(오늘도 쥴한테 줄  선물을 건네받았네.)

 

 

지금은 쥴의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들고 있는 거대한 가방 안에는 엄마랑 같이 만든 바바우아가 들어 있었다. 오늘 같은 화창한 날에는 더더욱 맛있겠지.

 


(이제 곧 여름이네.)

 

 

이 마을은 황무지 속에 만들어졌다. 여름이 되면 어마무시하게 더워진다. 마을을 개척한 선조님들은 어째서 이런 데다 마을을 세울 생각을 한 걸까? 엄청난 근성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바람도 없고, 화창했다. 계절은 봄이지만, 예년보다 훨씬 더 더운 느낌이었다. 걷는 것만으로도 살짝 땀이 스몄다.

 


이 동네 출신인 나조차 이랬다. 외지 출신인 쥴은 사뭇 덥겠지.

 

겨온 바바루아는 그런 그를 달래줄 선물도 겸하고 있었다.
마을 중심에 있는 우물을 지나, 그의 집으로 향했다. 쥴은 갑작스럽게 마을로 오게 되어서, 처음엔 살 집이 없었다. 새롭게 집을 짓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빈집이 없을지 찾아보니, 우연히도 도회지로 나가게 된 가족이 있었다. 그렇게 타이밍 좋게 그 집을 가구째로 빌렸다. 마침내 쥴의 집 앞에 섰다.

 


상당히 오래된 집이었다. 새하얬던 벽은 더러워져 황토색이 되어 있었고, 초가지붕 군데군데로 짚이 비져나와 있다. 하지만 안은 나랑 엄마가 살기 쉽게 정리했다. 눈앞의 문을 열면,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겠지.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찾던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실례합니다」

 


철컥 문을 연다. 하지만 문이 다 열리지 않았다.

 


(뭐… 뭐지?)

 


시선을 떨구자, 뭔가 부드러운 것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거기에 걸려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 조금만 더 열어야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벌어진 틈만으론 무리였다.
3일 전에 방문했을 땐, 바닥에 물건 같은 건 없었다. 평소처럼 모든 것이 원래 장소에 정돈되어 있었다. 그 뒤에 뭔가 어지른 건가?
이러니까 남자 혼자 사는 곳은 별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들려 했다.

 


(응……?)

 


뻗은 손이 허공을 갈랐다. 떨어져 있는 그것이 내 손에서 벗어나려는 듯 스슥 움직였다.
의아해서 문 틈새로 안을 살피자, 떨어져 있는 것이 좀 더 꾸물거리더니 이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쥴?!」

 


뭔가 물건이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쥴이었다.
새파란 얼굴로 바닥에 추욱 엎어져 있었다.

 


「왜 쓰러져 있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면 몸이라도 안 좋아?」
「 아니…, 괜찮아. 미안. 지금 비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줘」

 


그러더니 비틀비틀 일어나, 문을 열어준다.
쭈뼛쭈뼛 집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선물을 건낼 생각으로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거기 멈췄다.
하지만 쥴은 문을 닫고,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현관에 서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 듯, 무시.

 


(뭐야?! 어째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이라도 했나…?)

 


다급히 뒤를 쫓았다. 그는 거실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소파에 쓰러졌다.
러그가 깔린 소파가 인간의 무게만큼 꺼졌다. 촉감이 좋은 손님용 소파였으나, 지금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차지했다. 내가 앉을 여지가 없었다.

 


(역시 몸이 좀 안 좋은 거 같아….)

 


엎어진 그의 팔 틈새로 보이는 얼굴이 새파랬다. 눈밑에 시커먼 다크 서클이 끼여 있었다.
꿀꺽 군침을 삼켰다.
심호흡했다. 지금부터 던질 질문에 불길한 대답이 돌아와도 절대 당황하지 않도록,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쥴, 당신 혹시 병 걸렸어……?」

 

만약 그런 거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간병은 물론 하겠지. 그런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로 「나는 그를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 앞서간 걱정일지도 모르나, 세상에 절대란 없다. 실제로 너무나 평소와 다른 상태였다. 병에 걸렸다고 한다면, 절대 가벼운 것이라 할 수 없는 증상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그가 내게 있어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된 증거겠지.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건 너무 잔혹하지 않나. 할 수 있다면 좀 더 소프트하게 깨닫고 싶었다.
불길한 의미로 고동치는 심장을 느끼며, 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소파에 얼굴을 파묻은 채 대답했다.

 

 


「어……」

 


끝났다….
뭐냐고 물어봐도 곤란하지만, 뭔가가 끝났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감각. 모든 미래가 밝을 거라 믿었던 아니었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바바루아를 갖고 왔는데….

 


「아니, 병은 아니야」
「………」

 

 

(대답이 늦잖아!)

 

몸만 나쁘지 않았더라면 딴죽과 함께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연인 앞에선 최대한 귀여운 여자로 있고 싶은데, 내 상식밖의 괴력을 그에게 맛보여줄 뻔했다.
짜증나서 관자놀이에 핏대가 설 정도였다.
하지만 쥴이 본인이 병이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을뿐, 실제론 아닐 가능성도 있다.
왜 쓰러져 있었는지를 확실히 밝혀두는 게 좋겠다.

 


「하지만 상태가 이상하잖아.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적, 여태까지 없었고. 대체 무슨 일이야?」
「………서 그래」
「어? 뭐」

 


뭔가 말을 한 거 같은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렸다.
역시 그가 이렇게까지 약해지다니, 범상치 않았다.

 

 


「……잠을 못 자서 그래」
「또…?!」
「응. 갑자기 졸려져서, 그대로 잠들고 말았어」 

 

 

만났을 때도 불면증이었다. 하지만 이 마을에 정착한 후로는 의외로 잘 자고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마을에서 신약을 개발, 연구 중인 그는 재료 수집을 위해 자주 밖으로 향했다. 거기서 햇빛을 쬔 것이 불면증 개선에 도움이 된 걸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햇빛도 잘 안 드는 저택 안에 있었고…. 장미 손질도, 일도 밤에 했으니… 야행성이었지….) 

 

물론 마음의 상처 때문에 잠들지 못했던 이유도 컸다. 하지만 라이프 스타일도 그의 불면증의 원인이 되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언뜻 쥴의 라이프 스타일에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다시 불면증에 걸렸다니, 정신적인 원인인가? 그러면 연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겠지.

 

 

「저기……, 어째서 잠을 못 자는 거야?」


정신적인 이유 때문에 불면증 증상이 돌아온 거라면, 답은 없을 지도 모른다. 애초에 원인을 알았더라면, 이미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겠지. 현관앞에 쓰러져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쥴은 담백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더워서」
「……뭐?」
「여기는 더워. 밤에는 가끔 바람도 안 불잖아? 그러면 도통 잠들 수가 없어」
「………」

 


「그렇다고 낮에 자려고 하면, 너무 밝아서 못 자겠어. 라이프 스타일이 바뀐 탓도 있고. 밤보다 더워서. 그래서 매일 잠을 못 자」
「저기……」
「터무니없는 더위야. 몸속에서 수분이 쭉쭉 빠져나가. 이 곳에 사람을 방치하면 자연사하지 않을까? 독으로 죽이는 것보다 간단하겠어……」 

 

 

(당신이 사람을 죽이는 데 독살을 고집했던 건 죽이기 쉬워서가 아니었잖아….)

 

그는 암살자로서 사람을 독살하는 데 집착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최근의 일.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추억보다, 당면한 그의 불면증이 더 중요했다.

 

「아니, 덥다니……. 아직 봄인데?」

 

 

여름엔 현재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더워진다.

 

 

「알아」
「……」

 

소파 주위의 공기가 묵직했다. 「암운이 자욱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쥴…… 더운 걸 엄청 못 참는구나….) 

 

그러고 보니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은 모공이 막혀서, 땀을 잘 흘릴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더운 장소에서 사는 게 다른 사람에 비해 유달리 힘들다든가.
 쥴이 그런 타입일 줄은 몰랐다. 「어쨌든 바람을 느끼고 싶어서 공기의 흐름을 더듬고 있자니, 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 밖에 없었어. 그래서 현관 앞에 있었는데, 어느 샌가 잠든 거 같아」

 

 

「그……, 그랬구나…」

 

 

(역시 특이하네….)

 

바람을 찾다가 현관에서 잠들다니,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았다. 천진하다고 해야 하나, 상식이 있는 어른이라면 더위를 투덜거리면서도 참았을 텐데. 

 

 

「일단 좋은 대처 방법을 찾아보고는 있는데……. 전혀 못 찾겠어……」

 

 

신약 연구 대신, 이번엔 더위 대책 연구를 시작했다 그건가.
확실히 이 마을의 더위, 스스로 해결할 수 밖에 없겠지.

 

 

「그렇구나. 나도 뭔가 방법을 찾아볼게」

 

 나도 그를 위해 아낌없이 도울 셈이었다. 일단 주점을 찾는 사람들한테 물어보기로 하자. 

 

「일단 바바루아 어때?」 

 

갖고 온 꾸러미를 흔들며, 권했다. 

 

 

 

*************************

 

 

(오늘 밤도 바람이 없네….)

 

쥴의 집을  방문한 그날 밤.
집에서 샤워를 마친 후, 느긋하게 지냈다.
적당히 머리카락의 수분을 털어냈다. 기온이 높아서, 이것만으로도 나머지는 알아서 머리가 말랐다.
나는 그렇게 덥지 않았다. 평범한 봄밤이었다. 하지만 더위에 약한 쥴에겐 괴롭겠지.
뭔가 해주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나도 아무런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일 주점에서 뭔가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마을 주점에 오는 사람들은 전부 마을 사람이었다. 즉, 이곳 기후를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더위 대책을 생각해 본 적 없을 사람들이 대부분. 쥴한테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을 지도.

 

 


(잘 풀리면 좋겠는데….)

 


몸에 목욕 타월을 감은 뒤, 내 방으로 향했다.
내 방은 2층에 있기 때문에, 바람이 좀 불었다. 하지만 1층집인 쥴의 접은 공기의 흐름이 없었다.찌는 듯한 더위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그때 계단 위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누군가 있어.)

 

게다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훈련을 받은 인간. 교묘하게 기척을 차단했다. 여기가 익숙한 집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위화감만으로 그 기척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마 다른 곳이었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수도. 엄마는 아니었다. 그녀는 1층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 마을 인간도 아니었다. 이렇게 교묘하게 기척을 차단할 수 있는 인간, 마을 사람 중에 있을 리 없다. 이 마을 사람인 내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내가 기척을 느낀 것도 극히 찰나였다. 하지만 나는 내 단련된 감각에 자신이 있었다. 이 기척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침입자가 있다.

 


(격퇴해주지.)

 

방치해서 좋은 일은 없다. 허를 찔려 습격당하면, 이길 싸움도 진다. 1층엔 엄마도 있다. 어린 시절 결심한 것처럼, 그녀는 반드시 내가 지킨다. 침입자를 물리치고자 굳게 결심했다. 그를 위해선 상대의 기척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침입자에게 들켜선 안 됐다. 기습은 상대의 허를 찔러야 의미가 있는 법. 침입자는 내 허를 찌를 생각일지 모르나, 나는 그 빈틈을 찔러주자.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일 뻔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내가 침입자의 존재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거나 다름없다. 호흡도 걸음걸이도 그대로 유지한 채, 계단을 올랐다.
3층에 도착했다. 복도를 보자, 몇 여개 있는 방 한 칸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저건… 내 방이잖아.)

 


침입자는 내 방에 있는 걸지도. 하지만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방에 불을 켜뒀을 가능성도 있다.
세심한 주위를 기울이며, 내 방에 접근했다.

 

「……뭐하는 거야?」

 

방문을 열었다. 뒤돌아 본 인물을 보자마자, 순간 힘이 쭉 빠졌다.

쥴이었다.

 


「잠이 안 와서 실례했어」
「기척은 왜 죽인 거야?! 공격할 뻔했잖아. 심장에 안 좋게」

 


기척은 냄새와 달리, 느낀 것만으로 바로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자칫 지인을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다.

 


「기척……, 지우고 있었어? 몰랐어……」 

 

무의식 중에 기척을 지우다니, 무시무시하네. 하지만 쥴은 전직 암살자. 평소부터 직업병 때문에 기척을 지우고 다녔을지도. 아직도 그 버릇이 빠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문득 집안을 찾아오지 않으면 아무런 해도 없으니, 굳이 고쳐야 할 만한 나쁜 버릇도 아닐 테지.

 


(하지만 이번 건 좀 난데없긴 했어…. 엄마도 아무 말 없었잖아.)

 


그건 그렇고 쥴은 대체 어디서 들어온 걸까? 목욕탕에 있던 나는 그렇다 쳐도, 1층에 있을 엄마랑도 마주치지 않고 2층으로 오다니, 아무리 그라해도 지극히 어려운 일일  텐데. 그렇게 따지면 그가 정규 루트 이외의 루트로 침입해왔을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문으로 들어온 거 아니지?」 

 

설마 싶으면서도 물어보자, 쥴은 담백하게 긍정했다.

 


「네 모친에게 인사하는 게 귀찮아서 창문으로 들어왔어」 

「그 부분을 귀찮아 하지 마!」

 


변함없이 그는 어딘가 어긋난 대답을 했다. 혹시 일부러 이쪽의 의도를 벗어난 답변을 하는 걸 즐기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겠지…. 그렇게 요령 좋은 사람이 아닌걸.) 

 

 

감정을 되찾고 싶어서 발버둥 치던 그. 감정을 되찾기 시작하게 되면서, 이것저것 스스로 노력을 거듭하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요령이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어 속물적인 사람이라면 개발한 신약의 특허를 따서, 큰 돈을 벌었겠지. 그래도 얻은 돈의 일부를 마을에 기부하면, 마을 사람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쥴을 호의적으로 맞이했겠지.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개발한 신약은 마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고, 조합 방법까지 그대로 제공. 내가 남한테 들어 가르쳐 줬으니까, 특허를 따는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자신한테 특허를 딸 마음이 없었을 뿐. 이웃 나라에서 같은 약이 나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쩌면 그의 약을 참조해서 만들어진 약일 지도 모른다.
그는 그거에도 아무런 대응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많은 돈은 필요 없어. 너랑 같이 편하게 마을에서 살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이전처럼 매사에 집착하지 않기에 나온 기행은 아니었다. 소중히 여길 것은 선택했기에, 그 외의 것을 방치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이러니까 돈 때문에 고생해 본 적 없는 인간이란…….)

 


헌상금 사냥꾼 시절에 돈 때문에 한창 고생했던 나는 쥴이 특허를 따서 돈을 벌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다음엔 꼭 따라고 해야지.)

 

 

쓸데없는 참견일 지도 모르지만,
돈은 있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번 신약처럼, 누군지도 모르는 말뼈다귀의 배를 불려주는 일은 절대 싫었다.
쥴은 내가 하려는 일을 막지 않겠지. 

 

『네가 그러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그가 할 법한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게 이쪽이 도울 여지를 남겨두고 뒷일을 방치하니까,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돕게 되고 싶어진다. 

 

 

(정말이지, 이쪽이 돕고 싶어질 정도로 요령이 없다니.) 

 

 

「애초에 당신, 뭐하러 온 거야?」 

 

팔짱을 끼며 쥴을 쏘아보자, 그가 말했다. 

 

「말했잖아. 잠이 안 와서 실례했어. 네가 방으로 돌아올 때까진 책이나 읽을까 싶어서, 책장을 살피고 있었어」
「책이라면 빌려줄게.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라는 말은 쌩둥맞은 질문에 가로 막혔다.

 


「……동화 좋아해?」
「어?」
「책장에 페가수스나 그리핀이 나오는 책이 잔뜩 있어서. 그건 동화 아닌가?」 
「아니야. 그건 어른들이 읽는 책이야. 꿈이 있어서 멋지지 않아?」 

 

 

페가수스나 그리핀이 실존하는지 아닌지는 견문이 좁아서 잘 모르겠다.

아는 사람 중에 마녀가 있으니, 그녀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래……?」
「응, 그래. 어쨌든 오늘은 그만 돌아가.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바로 잠이 올 거야. 내 추천」 

 

 

책장에서 적당한 책을 꺼내 쥴에게 떠넘겼다. 덧붙이자면 그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책장에 놔둔 것은 읽으면 가슴 두근거려서 잠을 설치게 되는 애독서뿐. 하지만 취미가 다르면 잠이 올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 대략 틀린 말도 안겠지. 

 

 

「그러니까 그만 가. 다음부턴 창문으로 들어오지 마. 위험해」
「괜찮아. 일 때문에 창문으로 드나드는 건 익숙해」

 

 


쥴은 그만 돌아가라는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날 만나러 오는 데 그런 흉흉한 스킬 쓰지 마. 그냥 보러 와주는 게 더 기뻐」
「네 말이 그렇다면 다음엔 문으로 들어올게 하지만…… 가끔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도 좋은 거 같아…」
「?」

 

 


그의 시선이 이상했다. 얼굴보다 아래쪽을 향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시선 끝을 따라가 보니, 내 가슴께를 향해 있었다.

 

 

(윽……! 부끄러워……!)

 

나는 몸에 수건만 감은 차림새였다.
부끄러워져서, 평소 집에서 입고 다니던 원피스를 찾았다. 바로 방문에 걸린 후크에 걸쳐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문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뒤에서 뻗어져온 쥴의 손이 움직임을 가로 막았다. 

 

 

「잠깐……, 놔 줘……」

 


목욕 타월이 떨어질 것만 같아서 초조해졌다. 두손으로 목욕 타월 옆구리 부분을 쥐었다.
 그러다 등뒤에 있는 그가 몸을 끌어안아왔다.

 


(손…… 손이 닿잖아!)

 

 

피부로 느껴지는 그의 손의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그 부분부터 몸이 화악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도망쳐?」
「어째서냐니……, 당연하겠지! 부탁이니까 놔줘…」

 

 


억지로 뿌리치면 그 구속을 벗어날 수 있겠지.
하지만 목욕 타월까지 날아가버릴 수 있다. 그게 무서워서, 섣불리 뿌리칠 수 없었다.

 

 

「부탁……. 그거 좋은 거 같아」
「으응…」

 

 

뭐가 신경을 거스른 걸까. 아니면 뭐가 기분이 좋았던 걸까.
쥴은 내 목에 얼굴을 파묻고서, 맥박이 강한 곳을 세게 빨았다. 살짝 이를 세우는 것에, 저릿한 쾌감이 손끝까지 일었다.

 

 

「읏…… 하읏……」

 

 

(농담 마……. 이런 건…….)

 

 

엄마도 있는 집에서, 이런 치태를 보일 순 없었다.

 

「더는…… 안 된다니깐」
목을 돌려,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왜. 평소엔 안 싫어하잖아」

 

 

조금 떨어진 상태로 쥴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와 숨결에 오싹한 자극이 목덜미에 일었다.

(으응…….)

 

 

몸의 떨림이 가라앉는 것을 기다린 후, 다시 저항을 재개하려던 그때.

 

 

 

「리자, 부탁할 게 좀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엄마가 방으로 들어왓다.

 

 

 

 

「「「!」」」

 

 


셋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쥴은 언제나처럼 침묵, 나는 말을 잇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 어머나……」

 

 

엄마는 그렇게 말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어 「느긋히 지내렴」하는 말과 함께 방을 나갔다.

 

 

 

(아, 진짜….)

 

나 스스로가 한심했다. 자기 혐오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수치심에 떨고 있는데, 쥴이 느긋하게 말했다.

 

 


「너희 어머님도 저렇게 말씀하시니까, 느긋히있다 갈게」
농담하지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마도 쥴이 느긋히 있다 갈 거라곤 생각 안 할 거라고. 이렇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그를 보내고 싶었다. 

 

 

「그.만. 돌.아. 가!」
한 음 한 음 또박또박 잘라 말하자, 쥴은 겨우 내 몸에서 몸을 뗐다.

 

 


「…알겠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준 책과 함께 그는 쓸쓸히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계단 위에서 혼자 끙끙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1층 거실에서 엄마랑 둘이서 아침 밥을 먹었겠지.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은 뒤다. 대체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자고 일어난 다음 어젯밤 일을 깡끄리 잊길 빌었으나, 역시 무리였던 모양이다. 엄마의 놀란 얼굴까지 선명하게 기억났다.

 

(하필 엄마가 보다니….)

 

엄마도 쥴과 내 사이를 인정해주고 있으나, 그것과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남자와 사귀는 것과 남자와 어디까지 갔는지를 부모에게 숨기는 것은 매너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주위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숨긴다. 나는 어제 그 암묵적인 룰을 깨버렸다.
엄마에게 혼나는 것보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이 괴롭고, 그 때문에 엄마와의 사이가 껄끄러워해지는 것이 괴로웠다.
엄마는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니까. 아무리 쥴과 깊은 사이가 되어도, 그 사람을 대신할 존재는 없다. 

 

 

(슬슬 1층으로 가자….)

 


일도 있으니, 계속 여기 있을 순 없지. 게다가 같은 집에 있는 이상, 언젠가 반드시 맞닥뜨리게 되어 있다. 결심이 섰다고 보긴 힘들지만, 어기적 어기적 계단을 내려갔다. 엄마는 이미 일어나서, 1층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좋은 냄새……. 게다가 엄청 호화로워…….) 

 

 

식탁 위엔 요리로 가득 차 있었다. 4인용 테이블이라서, 둘이서 먹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다. 손님이라도 오나? 거실에 들어서자, 엄마가 말을 걸어왔다.
「좋은 아침, 리자」
「……!」
아무것도 없었던 양 날아오는 인사. 고민했던 내가 더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태연한 느낌이었다. 아니면 태연을 가장하고 있을 뿐, 마음 속으론 내심 동요하고 있다든가?
쭈뼛쭈뼛 나도 인사했다.

 


「……좋은 아침」
「얼른 식탁에 앉으렴. 후우, 입이 많으니까 요리하는 것도 큰일이네」 

 

 

역시 손님이라도 오나? 내 자리에 앉아, 우유를 마시며 물었다.

 

 


「엄청난 양이네. 누구 와?」
「응? 쥴 군 말인데? 슬슬 깨워 오렴」 

「읍…! 쿨럭…!! 쿨럭……!!」

 

 

놀라서 기침했다.
「여… 여기서 쥴이 왜 나와?!」 

「왜냐니…… 어제 집에 왔잖아」 

「그 뒤에 바로 돌아갔어! 엄마도 참!!」 

「화는 왜 내니? 부끄럽다고 역성 내지 마렴」

 「그…… 그치만…. 그런 화제 꺼내지 좀 마」 

 

 

부끄럽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다. 거기서 탈출구를 판 후, 어딘가 먼곳으로 달아나고 싶다.
엄마의 반응만 신경 쓰느라, 어제 일을 둘이서 이야기 한다는 상황 자체를 상정도 못 해봤다.
얼굴이 핫핫했다.

 

「얼굴이 새빨개.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해? 뭐, 쥴 군이 없다면 별수 없지. 모처럼 만들었으니 둘이서 먹자」
엄마도 나를 불쌍히 여긴 건지, 화제를 바꾸었다. 평소의 엄마라면 심술궂게 「『그런 게』 뭔데? 무슨 화제를 꺼내면 안 되는데~?」 등등의 질문을 던져 왔을 텐데, 날 봐줬다고 할 수 있겠지.
복잡한 심경으로 포크를 쥐었다.

 

 

「……잘 먹겠습니다」

 

잠시 둘이서 호화로운 요리를 먹었다.
계란 프라이. 베이컨에 시금치무침. 포크 소테. 갓 구운 빵. 포타주 수프.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뿐.

 


(맛있다….)

 


아침으로 먹기엔 양이 많다.
나도 엄마도 평소 이렇게 식사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팍팍 먹어치웠다. 매일 몸을 움직이느라, 이 정도 요리가 나와도 금방 다 먹어치울 수 있었다. 특히 나는 내심 안도한 것도 있어, 식사 속도가 빨랐다. 

 

(이제 모른 척 해주는 구나.)

 


더는 껄끄러운 기분을 느낄 것도 없고, 무서워할 것도 없었다. 어제 이야기가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니 심히 안심이 됐다.

 

「리자」

 

 

그대로 식사를 진행하며, 엄마가 입을 열었다.

 

 


「왜?」
「나, 여행을 떠날 생각이야」
「………」
「……뭐?」

 

농담인가 싶어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엄마는 진지 그 자체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줄곧 이 마을에 있었잖아? 이제 슬슬 바깥 세상을 보고 싶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난데없지 않아? 갑자기 뭐야」 

「갑작스럽긴. 옛날부터 생각했던 일이야. 이미 결심했어」
「……어제 일 때문에? 역시 화났어?」 

 

 

이 타이밍에 여행을 나간다니, 어제 사건과의 관계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하지만 엄마는 딱 부러지게 부정했다.

 


「그럴 리 없잖아. 어제 일은 확실히 뭐… 놀라긴 했어. 어느 정도 선은 지치길 바라지만,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 쥴 군은 나도 좋게 보고 있고, 너도 이제 어엿한 어른이라고 생각하니까. 이제 서로 그 일을 신경 쓰는 건 관두자」 

「그럼…… 왜 하필 오늘 그런 말을 꺼내는 거야? 무슨 계기가 있었을 거 아냐」

「흠……. 계기라고 하면 역시 어제 일인가? 어제의 그걸 보고… 아, 이 아이도 슬슬 그럴 나이가 됐구나. 어른이 됐구나 싶더라. 그러니까 나도 나이를 먹었고, 여행을 떠날 거라면 지금 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렇구나…」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혼자 날 키웠다. 그 동안 줄곧, 자신의 시간을 희생했다.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면, 응원해야겠지.
하지만 솔직히 찬성할 순 없었다. 모처럼 다시 둘이서 살기 시작했는데, 엄마가 나가버리다니 쓸쓸했다.

 


「당분간 마을 일은 너한테 맡길게. 괜찮아. 넌 야무지기도 하고, 쥴 군도 곁에 있잖니. 뒷일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너도 웃으며 보내주렴」
「알겠어……」

 


엄마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계속 붙잡을 수도 없었다.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으며, 상투적인 인사를 던졌다.

 


「다녀 와, 엄마」
그 뒤는 뭘 먹었는지도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어딘지 멍해 있는 사이, 대화도 식사도 끝났다. 그런 인상만이 남았다.

 

 

 

 


***************************

 

 

 어느 화창한 날. 엄마는 여행을 떠났다.
그후 1개월 동안 나는 혼자 생활했다. 쥴도 번번히 찾아와 주는 데다, 주점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왜인지 굉장히 쓸쓸했다.
 어둡고 조용한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켤 때, 몸의 절반이 뜯겨 나간 듯한 통증을 느꼈다. 자신이 여행을 떠나는 것과, 누군가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완전히 느낌이 다르구나. 일을 해도, 집에서 밥을 먹어도, 쉬어도 뭔가가 부족했다.
가족이 한명 없어지면 다들 이런 쓸쓸함을 맛보는 건가. 아니면 내가 엄마 졸업을 못한 것뿐일까. 후자라면 그야말로 「한심하다」라는 말밖에. 

 

 

(하지만 엄마는 나한테 마을을 맡기고 가셨어. 기대에 응하고 싶어.)

 


중재자 일을 하고 있으나, 그건 브레멘이 손을 써준 거였다. 내 능력을 인정 받은 게 아니라. 그러니까 엄마가 날 인정한다고 말해준 것은 내게 있어 몹시 중요한 일이었다.
그 평가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로지 일에 매진했다.

 

 


「이봐, 리자! 동쪽 밭에서 도둑의 척후로 보이는 사람을 봤다는 녀석이 있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래?」 

「알겠어. 바로 갈 테니까, 오른쪽 가장 안쪽 방으로 보내 줄래?」

 


주점에서 마을 사람들의 의뢰를 받았다.
도적에 의한 피해는 마을 전체의 문제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비용이나 노동을 제공, 대처하고 있었다. 일단 자경단을 조직, 교대로 파수를 보게 되겠지. 그리고 도적의 습격이 있을 거 같으면 내가 나서서 퇴치한다. 그림 주점을 만들었다곤 하나,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고 상주하고 있는 현상금 사냥꾼도 적었다.
 이웃 마을에도 도움을 청하곤 있으나, 그쪽 역시 도적들의 표적이 되었을 때는 도우러 오는 게 어렵겠지.

 


(수비에 치중하기 보다 공격적으로 나서서… 놈들의 아지트를  뭉개두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렇게 하러면 인원이 더 필요했다.

 

 

「하아……」

 

 

서류처리를 끝내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엄마가 인정해준 것처럼 어엿하게 제 몫을 하고 있는 게 맞나?
일어서서, 목격자가 와있는 방으로 향했다.

 


(오늘 일은 이걸로 끝….)

 


주점의 문을 잠근다.
걸음을 옮기자니,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렇게 일찍 귀가하는 건 오래간만이네.) 업무도 대충 마무리가 되어서, 오늘은 일찍 귀가하기로 했다.

 


최근 일 하느라 바빠서 쥴을 보러 간 적이 없었다. 어떻게 지내나 걱정이라서, 짐을 집에 놔둔 후 그의 집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마을을 가로 질러, 제 집으로 향했다.
날이 저물어 가고 있으니 집은 어두울 거라 생각했는데, 불이 켜져 있었다.

 


(엄마가 돌아오신 건가?!)

 

 

기뻤다.
문을 열면 그녀의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환영이 날 기다린다.
 그렇게 생각하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뛰었다. 

 

 

(엄마.)
벌컥 문을 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인영은 없었다. 하지만 부엌에서 소리가 들렸다.

 


(보고 싶었어, 엄마….)

 


거실을 지나쳐, 부엌으로 향했다.

 


「어서 와, 리자」
「아……」

 


나를 맞이해준 것은 엄마가 아니었다.

 


「쥴…」
연인이 우리집 주방에 서 있었다. 가슴 두근거려야할 상황인데, 목소리가 소침해졌다. 

 

 

「……기다리고 있었어. 같이 식사라도 어떨까 싶어서 요리 중이던 참이야」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찾아와, 심지어 요리까지 대접해준다고 한다.
고마운 이야기다. 감사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고마워」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감사했다.
(감사하지 않으면 벌을 받아? 무슨 잘난 척이람….) 

 

자신의 오만한 사고 방식에 반성했다. 엄마가 아닌 것은 그의 죄가 아니니까, 실망할 것도 없다.

 

 


(아니 애초에 비교할 수 없지.)

 

 


두 사람은 제각기 내게 소중한 사람.
쥴은 사랑과 가슴 두근거림을, 엄마는 안심과 포용을. 그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준다. 어느 한쪽이 없어져도 마찬가지로 한탄하겠지.
만약 쥴이 없어진다면 이번엔 엄마가 쥴이 아닌 것에 실망하게 될려나?
엄마에게 쥴과 같은 것을 바라봤자 무슨 의미람. 내가 그에게 갈구하고 있는 것은, 엄마한테서 보충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
쥴이 주는 것으로는 엄마가 없어진 상실감을 메꿀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책망하는 건 부당한 일이다. 

 

 

「접시 놓는 것 좀 도와줄래?」
「응」

 


쥴과 함께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테이블은 이어 음식으로 가득 찼다. 엄마가 여행을 떠나겠다고 말했던 그날 아침과 마찬가지로.

 


(우…, 역시 쓸쓸해.)

 


의자에 앉아 엄마의 부재를 쓸쓸하게 여긴다.

 


「마음껏 먹어」
「응, 잘 먹겠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마음 한 구석이 부족했다. 집중하려 해도, 바로 잡념이 섞인다.

 


「…쥴, 요리가 능숙해졌네」
「응, 연습했어. 어떠한 때라도 지고 싶지 않은 상대가 있거든」
「그거 혹시…」

 

 


전에 주점에서 그가 말한 적이 있었다. 내 사부한테 지고 싶지 않다고.

(나를 주점 테이블 위에 눕혔을 때였지….) 

 

생각해보니 직장에서 잘도 그런 터무니 없는 짓을 저질렀구나. 그 배덕적인 느낌에 훨씬 더 불타올랐으니, 그렇게 된 것을 쥴 탓만 할 순 없다.
일을 할 때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고자 했으나, 불연듯 떠올리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부끄러워졌다. 그럴 때마다 일을 중단하고 달리기로 머리를 식히곤 했다.

 


(안 돼, 안 돼. 지금도 그런 생각은 하면 안 돼.)

 


조금 떠올리기만 했는데, 얼굴이 화끈해졌다.

 

 

 


「브레멘이야. 그 녀석은 요리도 잘한다고 들었어. …싸워서 지지 않을 자신은 있으나, 그렇다고 이길 자신이 있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요리만이라도 이기고 싶어」

「…경쟁할 거까진 없잖아.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나한테 그렇게까지 사랑받을 가치가 있나? 일에 몰두해서 연인을 방치했다. 엄마라고 생각했던 인기척의 정체가 사실 그였다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 그는 날 기다리면서 요리까지 해줬는데. 게다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쥴의 행동에  형식적인 감사밖에 하지 않았다.

 


정말 최악.
연인으로서 랭크를 매긴다면 나는 근처에 널린, 낮은 현상금의 쓰레기 연인이겠지. 그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줄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나?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하지만 풀죽는 날 향해 그가 반론했다. 

 

「의미 같은 건 필요 없어. 내가 그러고 싶은 것뿐이야」
「쥴……」

 

그의 그런 말에, 내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은 듯한 착각을 느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전신이 충만해진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불안이 어딘가로 가버린다. 

 

「그보다 이제 먹지 않을래? 예전에 너희 어머니한테서 네가 뭘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거기에 맞춰 만들었어」
「……먹을게. 고마워, 쥴」 

 

 

그날 저녁 식사는 요 근래 했던 식사 중에서 제일로 즐겁고 맛있었다. 

 

 

*************************** 

 

그날 저녁 식사 후 3일. 잠시 시간을 비워, 쥴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주점을 일찍 닫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지난 번에는 그가 요리를 대접해줬으니까, 이번엔 내가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지난 번 식사 시간 때,  연인에 대한 내 태도를 심히 반성했다. 앞으로는 마음을 고쳐 먹고, 그를 기쁘게 할 만한 일을 해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다지 잘 떠오르진 않지만.)

 

 쥴은 탐내는 게 전혀 없었다. 특출나게 좋아하는 것도 없겠지. 하지만 유일하게 그가 기뻐할 일이라면 짚이는 건 하나 있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내 착각도, 바람도 아니다. 그가 실제로 했던 말이었다.

 


『네 곁에서… 일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너를 독점하고 싶어』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된단 걸 알았어』 

 

그의 생각이 그렇다면 이루어주자. 날 위해서라도, 그와 함께 하는 것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둘이 함께 보내면, 어머니를 잃은 상처도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언제나처럼 마을 중심에 있는 우물을 지나, 그의 집으로 향했다.
문앞에 서서 똑똑 노크했다.

 



「……」



대답은 없었다.

(혹시 또 쓰러졌나…?) 포기하지 않고 똑똑 노크했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는 혼자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쓰러져 있으면 큰일이다 싶어 창문으로 안을 살폈다. 하지만 집안은 텅비어 있었다. 바닥에 널부러진 인간도, 서 있는 인간도 보이지 않았다. 쥴은 집을 비운 모양이었다.

(유감이네…….)

 


모처럼 의욕을 담아 왔는데, 실망했다.
쥴의 집을 나와 걸음을 옮겼다.
나는 뭔가 하고자 하면 돌진하는 타입이다. 그만큼 목표를 잃으면 괜히 헛돈 느낌이라 기분이 안 좋았다. 이 짜증은 어딘가에 풀지 않으면 가시지 않겠지.
집으로 가다가, 심기일전하여 주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팍팍 일해주지.)

 


이 감정을 어딘가에 풀지 않으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주점으로 돌아오자, 건물 근처에 있던 마을 주민들이 의아한 듯 말을 걸어왔다.


「리자? 오늘은 주점일 끝낸 줄 알았는데? 뭐 깜빡하고 갔어?」
「아니, 일하러 왔어. 상담할 거 있으면 언제든지 들려줘」
「어머머. 일만 하다간 병 걸린다. 젊으니까 좀 더 즐겨야지」

그렇게 말한 것은 어머니와 친했던 아주머니였다. 내 건강까지 걱정해주는 친절한 사람이지만, 기분이 나쁠 때 이런 식의 배려를 받으면 좀 성가신다.
게다가 그 말은 우연하게도 내 상처를 후볐다. 나도 마침 인생을 즐기려 했는데. 마침 연인이 집을 비워서 예정이 뒤틀렸다.

(화풀이란 건 알아. 하지만….)

「괜찮아」

평소라면 가볍게 잡담을 나눌 상대였으나, 짤막하게 답한 후 주점으로 들어갔다.
바로 책상에 앉았다. 그대로 줄창 일을 계속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심한 두통을 느끼자, 순간 작업 페이스가 쑥 떨어졌다. 

 


(머리가 깨지는 거 같아….. 괴로워….)

 


테이블에 엎어졌다. 조금 차가워서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 감촉도 피부의 열이 스며서 바로 미지근해졌다.
슬글슬금 차가운 장소로 몸을 옮겼다.

 


『리자, 이 서류 말인데……』
『도적 척후 건은 어떻게 됐어?』
『나, 이웃 마을에서 수배범을 봤는데……』

 

 


오늘 처리한 안건에 관한 정보가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대부분은 잘 풀렸다. 하지만 잘 안 풀린 일도 있었다. 

 


(아… 벌써 밤이구나.)

 

힐끗 창밖을 보자 밖이 새카맸다.

(조금만 더 일하고 갈까…? 어쩌지…. 시간이 많이 늦은 거 같은데….)

 


엄마가 집에 있으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주점에서 일하진 않았다. 불규칙적인 생활은 동거인한테도 폐를 끼치니까. 애초에 규칙적으로 생활해야 일을 잘할 수 있다가 엄마의 신조였기 때문에, 너무 늦게 귀가하면 혼나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지금 집에 없었다.

 


순간 유혹에 시달렸다.
조금만 더 일을 하면서 잘 안 풀렸던 일도 내일은 좋게 굴러갈지도 모른다. 머리를 식힌 게 도움이 된 건지, 두통도 어느새 다 사그라 들었다.

(어쩌지….)

「후우…」

나는 결국 돌아가기로 했다.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 밤늦게까지 일을 하다니, 조금 한심한 거 같아서. 마치 관리자가 없으면, 제대로 된 생활을 보내지 못하는 인간 같잖아. 하지만 그건 아니다.
오늘은 일찍 귀가하고, 내일 아침 일찍 일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응?)

 



문득 쥴의 집 쪽을 보자, 불이 켜져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직도 안 돌아왔나……? 아니면 우리 집에 있다든가…?)


그런 거라면 좋겠다.
뭔가에 등을 떠밀리듯, 귀갓길을 서둘렀다.

(만약 쥴이 있으면 이번에야말로 환영하자.)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집앞에 섰다. 하지만…….

(없네….)


집은 새카만 어둠속에 잠겨 있었다.
가끔 엉뚱한 짓을 하는 쥴이지만 불도 켜지 않고 날 기다리고 그러진 않겠지.
실망했다.
걸을 땐 그닥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집에 쥴이 있길 기대했는지 이해했다.

(자의식 과잉.)


그도 한가하진 않았다. 더위에 대책하겠다고 했다. 날 신경 쓰고 있을 순 없겠지.
쓸쓸한 기분으로 집문을 열었다.

(역시 없네.)


전직 암살자 스킬을 살려 어둠 속에서 기다려주고 있었기를 마음 한구석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중으로 울적해졌다.
그날, 그 뒤의 기억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충격을 받아 멍한 상태로 가사를 끝내고,
씻고 잠든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에서 눈을 떴다.

 


머리가 욱씬욱씬했다.
최근 일에 몰두하느라, 피로가 쌓인 걸지도 모른다. 엄마가 여행을 떠난 후로, 의식적으로 일에 몰두했다. 그 다음엔 쥴을 만나기 위해 일을 몰아서 했다. 그리고 그를 만나지 못해 빈 시간을 일에다 썼다.

(오늘은 있으려나, 쥴.)


슬슬 충분히 필요했다. 그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항상 입던 옷을 입으려다가, 퍼뜩 멈췄다.

(좀 더 멋을 부릴까?)


항상 같은 옷만 입었다. 가끔은 새로운 차림새로 만나러 가는 것도 괜찮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옷장을 뒤졌다.
그러다 엄마가 젊은 시절 입었던 원피스를 발견했다. 내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더는 안 입는 거라면서 물러받은 거였으나 당시엔 너무 커서 입을 수 없었다.

(지금은 어떨려나……. 좋아, 사이즈가 딱 맞네.)

 그 시절과 비교해 조금 키가 컸을지도 모른다. 원피스는 내게 딱 맞는 크기가 되어 있었다. 핑크색 원단에 라즈베리색 리본으로 가슴께를 조인 원피스였다. 그 외의 꾸밈은 없으나, 색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입을 수 있게 되어서 기뻤다. 모처럼이니까 헤어 스타일도 조금 바꾸어 보기로 했다. 땋은 머리를 머리에 감고, 핀으로 고정한다. 그러자 조금 어른스러운 업 스타일이 되었다.

(좋아, 좋아. 잘 어울려. 쥴이 놀랄까?)


신나는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우물 옆을 지나, 그의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렸다. 옷을 어루만지며, 대답을 기다렸다.

「……」

두드린 문 안쪽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쥴은 오늘도 집을 비운 모양이었다.
철푸덕 문앞 돌층계 위에 주저 앉았다.

(아…, 스커트 더러워지려나. 하지만 뭐… 어때….)

 아무것도 할 기력이 없었다.
잠시 거기 멍하니 있었다.

「……」

오늘은 비교적 서늘했다. 바람이 살랑살랑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원의 잎사귀들이 사락사락 흔들리는 게 들리는 것 말고는 조용한 아침이었다.

(이 풀들도 쥴의 신약 때문에 자라난 거였지….)

 그렇게 생각하니, 왈칵 충격이 밀려들었다. 
(쥴… 오늘도 없다니.)

 혹시 어제 낮부터 줄곧 집을 비운 거 아닌가? 항상 집을 찾아가면 만날 수 있었으니까, 놀랐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이 마을로 온 뒤로, 4일이나 못 만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좁은 마을이니까, 집에서 주점으로 가는 도중 혹은 우물 옆에서 종종 얼굴을 맞대곤 했다. 운이 나빠서 만나지 못한 적은 있다. 그럴 땐 주점에서 만났다. 
(그랬지…. 쥴이 날 만나러 와줬어.)



생활 리듬이 다르다는 이유로 1주일 이상 만나지 못하는 마을 사람도 있다. 약속도 없이 그와 내가 자주 만났던 것은 그쪽에서 만나러 와줬기 때문. 그런 상황을 어느샌가 당연한 것으로 감수하고 있었다. 뜻대로 만날 수 없게 되고 나서야, 그가 해주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그와 동시에 불안해졌다.

(이젠 내가 싫어진 걸까.)


나와의 교제. 마을에서의 생활.
내쪽은 스스로 반성했다시피, 그의 연인 실격이었다. 도시에서 살아온 인간한테 마을 생활은 불편하고 밋밋했겠지.
그럼에도 이 마을에 뿌리 박고자 노력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마음이 바뀌어 버린 걸까? 내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소중한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고 생각하니 배 속 깊숙한 곳이 기분 나쁘게 꽈악 조여들었다.

(아냐, 아냐. 지나친 생각이겠지. 분명 내가 스쳐 지나갔을 때, 자고 있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불이 켜져 있지 않았던 거야.)

 치솟는 불안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하지만 자신을 타이르려 하면 할 수록 불안이 치솟았다.

(진실은 어떨까…….)


그대로 돌층계에 앉아,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에잇, 관두자. 관둬. 괜히 고민해 봤자 별수 없지.)

 아무리 고민해도 이 마을이, 살기 재밌고 자극적인 도시가 될 순 없다.
 내 태도를 반성하고 바꿀 생각이었다.
돌계층에 앉아 있어도, 지금 상태가 좋아지는 건 아니다. 몸을 일으켜, 스커트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

기껏 멋을 부리고서 만나러 왔는데, 지금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건 유감이었다. 하지만 없으니 별수 없지. 억지로 자신을 타이른 후, 돌아가기로 했다. 일단 전부 잊고 자자. 일 때문에 피로해진 머리로 생각해봤자, 좋은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차림으로 일하러 하는 건 좀 그렇지….)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다.

 

 


***************************

 


다음 날에도 쥴의 집에 들렸다.
예상은 했으나, 역시 집에 사람은 없었다. 

 


(설마, 집을 떠난 건가? 아니겠지…….)

 그가 정말로 집에 있는지 없는지까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집을 떠난 거라면 스스로 상처를 헤집는 일이니까. 실제론 아니더라도, 의심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대한테 들키고 만다.
둘 다 싫었다.
그러니까 주점으로 향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일을 했다.

(작물 도난… 이건 파수꾼을 모집해서…….)


의식적으로 일에 집중했다.
어제 쉬었던 탓도 있어서, 일이 엄청 쌓였다.

(도적 문제는 역시 이웃 마을에 도움을 청하는 게 좋을 거 같으니까 편지를 써야겠다.)


집중해서 주위의 기척, 소음, 말소리를 전부 차단했다.
평소라면 바로 질색을 낼 서류 작업도 오늘은 척척 진도가 나갔다.

(마지막으로 중재자 도장을 찍고…….)



「리자」

인감을 찾았다. 책상 위에 놔뒀던 거 같은데,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별수 없지. 아직 정식 서류도 아니고, 사인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자.)



「리자」

편지 끝에 서명한다. 봉투에 풀을 붙이고, 이웃 마을에 부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자, 귀가 먹었어?」


「……응?」

그제서야 겨우 내 이름을 계속 부르고 있던 청년의 존재를 깨달았다.

「왔구나, 쥴」

목소리가 들떴다.
겨우 기분을 전환했는데, 여기서 다시 감정이 흔들리는 건 바람직하지 못했다.
하지만 보고 싶었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난 게 기뻐서, 머릿속은 완전히 쥴로 가득차고 말았다.
 
「응. 오래간만에 보러 왔어. 잘 지내는 거 같네」
 
「응. 그렇지, 뭐. 귀는 안 먹었어. 서류에 집중하느라 그래」

사실은 그의 부재를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하자. 이렇게 만나지, 만나지 못했던 시간 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이 바로 사그라 들었다. 입에 담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궁금했다. 적당히 물어보았다.

「줄곧 못 봤는데, 어디 갔어?」
 
「 응? 아니…. 그보다 그건 편지야?」


(응……? 내 질문에 대답 안 해? 이야기를 돌린 거야?)

 쥴은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집에 없었던 것에 대해 설명하기는커녕, 화제를 바꾼다…. 
(나한테는 말 못 할 이야기야? 아니면 굳이 할 이야기가 아니란 소리?)


다시 마음에 의심이 깃든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마음에 걸려서 따끔따끔 고통을 호소한다.

「응……. 중재자 일 때문에 필요해져서」
 우체통에 썼던 편지를 넣었다. 일상적인 동작일 텐데 손이 떨렸다. 
(혹시 내가 알면 안 되는 장소에 갔나? …아니면, 바람이라도 피우는 걸까…?)


한번 의심하니 끝이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쥴이 바람을 피울 리 없다는 믿음이 흔들린다. 그가 나한테 열광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 불안해진다.

(그는 나쁘지 않아. 내 태도가 안 좋았어.)

 그런 생각까지 나온다. 아직 그의 입으로 확답도 받기 전인데, 자신의 의심을 긍정해버리고 만다.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하지.)

 믿었다가 배신당하는 건 괴롭다. 그러니까 이 이상 상처받는 것을 피하고 싶어한다. 이미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면, 상황이 악화되진 않겠지. 차라리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하라고. 내 나약한마음이 속삭였다.

(이럼 안 돼.)


필사적으로 자신의 감정에 브레이크를 벌었다.
대놓고 의심했다가, 만약 그가 결백하다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해서 나온 이 자기 방어적인 사고 방식을 보고 쥴이 나를 징그럽게 여기기라도 하면? 그러면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입는다. 본말전도다.

「왜 그래, 리자? 안색이 안 좋아」
 쥴이 이마에 손을 댔다. 깃털처럼 부드럽게.

(이 손가락이 다른 여자를 만졌을까?)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이 손가락은 내 거다. 다른 누구도 건드리지 않길 바랐다. 이런 상냥한 손길, 나만의 것이면 좋겠어.
눈물뿐만이 아니라 말도 흘러넘칠 것 같았다. 하지만 우는 소릴 하는 건 분하니까, 꾹 참았다.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책상에 부딪쳤다. 
(이 책상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것도, 벌써 잊었어?)

 둘이 보냈던 밤을 떠올렸다. 결국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


이런 식으로 울고 매달리며, 그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할 셈이야?
싫어.
그렇게 비참한 여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리자?」

쥴이 내 눈에서 흐른 눈물을 보고 당황했다. 
「그렇게 아팠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울다니.
쥴이 말하기 전에 가로 막았다. 울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 마」


「……」


「그보다 쥴, 저녁 먹었어? 아직 안 먹었으면……」
 
「아무것도 아닐 리 없잖아. 얼버무리지 마」
 
「엇…」

쥴은 내 턱에 손가락을 얹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말해줘」


「뭘…?」


「쓸쓸던 거 아니야?」


「!」

내 추한 감정을 꿰뚫어본 걸까. 부끄럽다.

(난 진짜 부끄러운 녀석 같아. 멋대로 질투하고, 판단하고, 그 끝에 울음을 터트리다니.)

 마음이 너무 약했다.
이런 자신을 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쥴의 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바로 쥴이 내 고개를 들어올렸다.

「 무리도 아니야. 너와 너희 어머니는 사이가 좋았으니까. 내가 대신할 순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널 위로할 수 있다면 좋겠어」


「!」

이번엔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극히 짧은 키스였으나, 나를 달래기엔 충분했다.

(쥴은 내가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구나….)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어느 샌가 어머니 대신 눈앞의 청년이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대신할 순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머릿속은 그게 가능했던 모양이다.

(사람도 참 매정하지.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다시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슬픈 건 아니고 그저 눈에 고여 있던 게 흘러내린 것뿐.

「더는 울지 마. 내가 있으니까…」


「……웅」

깊어지는 키스도, 욕망을 돋구는 일 없이 그저 상냥했다.
내가 이것을 갈구하며 슬퍼했음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어머니와 헤어진 것에 쓸쓸함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며, 나를 달래려 든다. 그렇기에 나도 무심코 거기에 편승하고 말았다. 
「응…. 쥴이 있어주면 쓸쓸하지 않을 거 같아…」


(속여서 미안…….)


나를 끌어안는 온기가 사랑스러워졌다.

「나는 쭉 네 곁에 있을 거야. 리자, 네 곁에…. 그러니까 울지 마」

책상 위에 앉은 자세로 입술을 맞댔다.
조금 눈물의 맛이 났다.
***************************
그날 이후로 쥴은 매일 나를 만나러 오게 되었다. 아침에 날 깨우러 오고, 밤엔 주점이나 집을 찾아온다. 하지만 한동안 집을 비웠던 이유나, 행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수께끼. 몇번을 물어도 확실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숨기는 느낌이었다.
은근히 질문하는 것을 의식하다보니, 이쪽 질문이 너무 애매해져서 그런가?
그후로도 그는 가끔 외출하고 있는 모양이였으나, 행선지는 절대 밝히지 않았다.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쥴의 집에 들렸으나, 역시 집은 비어 있었다.
문을 두드리던 손을 떨구었다. 방문해도 상대가 부재중이란 상황에 점점 염증이 났다.
이러면 상대가 만나러 와주니까 만날 수 있는 것뿐, 내쪽에서 만나러 갈 수 없는 상황은 똑같다. 답답함이 쌓였다.
문을 뒷꿈치로 걷어찼다.

(바람 피우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못 만나는 동안엔 불안을 느꼈으나, 쥴은 여전히 날 소중히 여겼다.
행선지를 가르쳐주지 않는 이유는 일단 바람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쌓인 답답함은 다른 목표에 대한 원동력으로 치환된다.

(알고 싶어…….)


숨겨져 있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
호기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연인이라는 입장에는 자신이 없으나, 헌터로서는 자신이 있었다. 한때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대상을 쫓아다니며 먹고 살았다. 비록 신출내기였으나, 행선지를 파악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입술을 핥았다.

(쫓아가보자.)


쥴의 행선지를 알아내기로 한 후로, 여러모로 바빠졌다.
뒤를 쫓기 위한 시간을 짜내야했다. 그를 위해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조금 힘은 부쳤으나, 마구 일했다.

보다 못한 쥴이 말렸다.

「리자, 그렇게 무리하다간 몸 망쳐. 좀 쉬어…」

밤의 주점에서 단 둘이.
일도 다 했고, 이젠 내일 밑준비만 조금하면 끝이었다.
잠시 쉬면서, 연인에게 응석을 부려도 되겠지.
뒤에서 내 몸을 끌어안는 쥴에게 몸을 기댔다.

「음……. 하지만 이것도 잠깐만이야. 피크가 지나면 한가해지겠지」

여기서 말하는 피크란 쥴의 행선지를 알아냈을 때를 말했다. 당사자는 그런 사정도 모른 채 나를 걱정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는 중재자니까, 몸 상하게 하지 않는 것도 일이야」

그렇게 말하며 달래주듯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싼다. 그리고 뭉친 어깨를 적절히 주물렀다. 닿는 감촉에 한숨이 휴 하고 새어나왔다.

「알아. 난 괜찮아……」

나는 남들 배로 튼튼하니까, 잠깐 스스로를 혹사해도 병에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쥴은 이런 건 상관없이, 진심으로 날 염려하고 보살폈다.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쳤다.

(미안.)


그를 속이는 것에 다소 죄책감을 느끼고, 마음 속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그를 쫓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애초에 그가 숨기니까 알고 싶은 거다. 둘 사이에 비밀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쥴에게도 숨기고 싶은 비밀도 있겠지. 그걸 파헤쳐가면서까지 호기심을 채울 생각은 없었다. 비밀을 만들 거라면 좀 더 철저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어설프게 비밀을 만드니까, 알고 싶어지는 거다. 완전히 숨기고 싶은 사실이라면, 비밀 자체를 들켜선 안 된다. 뭔가를 숨기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 시점에서 그것은 비밀이 아니라, 단순한 심술이 된다. 숨길 거라면 철두철미하게 속여줬으면.
그러니까 사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속이는 것에 대한 것뿐. 
(하지만 이것도 결국 쥴이 뭔가를 숨기고 있단 사실로 상쇄되지 않나?)


결국 죄책감은 별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더위 대책은 어떻게 됐어?」
 그는 더워서 잠들 수 없다고 했다. 지금도 제대로 못 자나? 
「더위 대책은 아직. 일단은 열기를 막아보려고. 그건 어찌어찌 전망이 보여. 완성하면 너한테도 보고할게」
 
「……기대하고 있을게」
 아무리 토박이라도 여름의 더위는 싫었다. 수분이 급격히 빠져나가고 일사병,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에 대처해야 한다.
그의 대책이 모두에게 효과적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부담이 줄지도.

「응, 맡겨둬」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기분 좋았다. 나도 그의 머리에 제 머리를 갖다 댔다.
남들 눈에는 화목한 연인 사이로 보이겠지. 하지만 내 마음은 사념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뭘 숨기고 있는지 가르쳐주면 좋을 텐데.)

 가르쳐줄 마음이 없다면 폭로하면 그만이다. 
(각오해. 쥴 로즈몬드.)

 그렇게 마침내 결행의 날이 왔다. 
(좋아, 오늘은 반드시 알아내겠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오늘은 주점에 가지 않아도 됐다. 급한 안건이 들어올 가능성은 있으나, 일단 대리인을 섭외해 뒀으니 대리인이 처리해주겠지.
그러니까 오늘은 마음 놓고 쥴의 뒤를 캘 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그의 집으로 향했다. 침실에 인기척이 있음을 확인, 집앞에서 잠복을 시작했다.

(졸려……. 앉으면 절대 잘 거 같아.)


그늘에 선 채, 그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이윽고,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벌써 일어났네…. 일찍 일어나는구나.)

 내가 평소 깨는 시간보다 훨씬 더 빨랐다. 사람들과 섞여 일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찍 일어나는 건 역시 더워서 제대로 못 자기 때문인가? 아니, 지금 시간이 자기 딱 좋은 시간대였다. 적당히 바람이 풀어서 시원했다. 분명 무슨 볼일이 있어서 일어난 거겠지.

예상대로 그가 바로 집을 나왔다.
졸린 표정을 비적비적 마을 외곽으로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며 은밀히 미소 지었다.

(아직 잠에 취해 있네…. 그만큼 안 들키겠다.)


추적을 개시했다.
쥴은 마을 외곽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마치 아마추어가 만든 것처럼 조잡한 나무집이었다. 무너질 것 같은 인상을 느낀 것은 좌우가 불균형하기 때문이겠지. 원래는 서 있는 것도 신기할 정도인데, 무너지지 않고 용케 거기 있었다.
만지면 기우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어보니 의외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쥴이 안에 있는 동안에 무너질 일은 없을 거 같았다.

「리자」

갑작스럽게 들려온 부름에 문자 그대로 펄쩍 뛰었다.
쭈뼛쭈뼛 돌아본다.
단정한 얼굴리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죄책감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쳐보니 의외로 거북했다.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얼굴로 간신히 말을 쥐어짜냈다.

「……좋은 아침」


「……」

쥴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여기 있는 이유를 물어보면 어떻게 해야 하지? 솔직하게 
「당신 뒤를 밟았다」
라고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까? 불안해졌다.
판결을 앞에 둔 피고인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엄숙히 기다렸다.

「아침부터 만날 줄이야, 오늘도 운이 좋네. 안으로 들어올래?」


「뭐…?」

그가 한 말은 뜻밨에도 환영의 말이었다. 여기 있는 이유도 물어보지 않고, 그저 팔을 벌려 맞이해준다. 
「공교롭게도 아무것도 없지만…… 재밌는 것을 보여줄 순 있을 거야. 볼래?」


「……응」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쥴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그가 가르쳐 준다면 거절할 이유도 없다. 맥은 빠지나, 여기엔 권유를 받아들이자.

「실례합니다」

역시나 비스듬히 달려있는 문을 통해 실내로 들어선다.

(아, 풀 냄새가 나…….)


안은 풀잎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닥에는 흘러넘친 느낌으로 어질러져 있고, 안쪽에는 커다란 풀산이 쌓여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쥴은 이 풀로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의문스러워서 물어보았다.

「여긴 대체 뭘 하는 장소야?」

쥴은 쉿 하고 검지를 들었다. 그리고 풀을 긁어 모으기 위한 삼지창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산 앞에 서더니, 느릿한 손놀림으로 산 천정에서 수풀을 긁어 내렸다.
잎파리가 삭 흘러 떨어졌다. 산 위쪽에 새하얀 것이 보였다.

(뭐지? 눈…은 아니겠지?)


생각을 바로 털어냈다.
고온에 건조한 이 땅에 눈이 내릴 리가 없다. 하물며 이제 곧 여름을 앞둔 시점에서. 어디서 갖고 와도 바로 녹고 만다. 잎새 아래에 있던 것이 눈일 리 없다. 그때 새하얀 것이 일어섯다. 파사삭 잎새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 우와아……」

눈앞에 모습을 보인 것은 새하얀 말이었다. 풀 사이에 잠들어 있어서 풀로 밖에 안 보였던 거다. 어떻게 안 보였던 걸까? 성인 남성이 탈 만한 크기였다.
말은 히잉 울면서 앞발을 들어 휘둘렀다. 걷어 차이지 않게 다급히 피했다.
그 순간 말 등에 있을 수 없는 것이 보여서, 순간 더 놀랐다.

「쥴… 이 말, 날개가 있어!!」
 눈처럼 새하얀 등에 순백의 날개가 한 쌍 돋아 있었다. 천마다.

「응. 편리해」

쥴은 콧등을 쓰다듬으며 흥분한 말을 달랬다.

「편리하다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굉장해…. 천마를 직접 볼 수 있다니」

날개는 본체와 상관 없이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붙이는 장난감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날개였다.
줄곧 책이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생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가까이서 숨 쉬고 있었다. 직접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아서, 그저 멍청해졌다. 
「보고만 있지 말고 만져보는 건 어때?」
 
「뭐?! 안 돼……」

천마는 나의 동경 그 자체.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에, 만지려 해도 인간인 몸으로선 이룰 수 없다.
건드리면 사라진다.
마치 황야에서 볼 수 있는 눈의 환상처럼.
쥴은 머뭇거리는 내 손을 쥐더니 천마쪽으로 이끌었다.

「안 돼지 않아. 이 녀석도 기뻐할 테니까 만져 봐」
 
「……읏」

그것은 건드려도 사라지지 않았다.
본체에는 부드럽고 짧은 털이 자라나 있었다. 손에 살짝 눌리던 털은 손길이 지나자 마자  이내 탄력을 되찾는다. 
(따뜻해…. 살아 있어….)


어딘지 멍해서, 당연한 일인데도 새로운 발견을 한 것처럼 감격스러웠다.
보드러운 촉감, 만져도 가만히 있는 말의 태도에 힘 입어 살며시 목을 쓰다듬었다.
푸르릉 콧소리를 내는 것에 순간 움찔했다. 손을 떼려고 했으나, 쥴이 그걸 가로 막았다. 
「괜찮아. 기뻐하는 거야」


「그래…?」


「응, 알고 지낸 건 오래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알아」

쥴은 내 손을 써서 말의 등을 어루만졌다. 다시 한 번 푸르릉 콧소리가 나왔다. 확실히 부정적인 소리는 아니었다.
말은 안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쥴의 손에 이끌려 말의 콧등을 만졌을 땐 절로 움찔했다.
나는 남보다 힘이 세고 튼튼했지만 아픈 건 아팠다. 말한테 물리는 걸 상상하니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었다.
쥴이 좀 더 나를 위협했다.

「긴장하지 마. 말한테 긴장이 전염돼서 물릴 수도 있어」


「역시 물어?!」

그 말에 공연히 더 겁을 집어 먹어서 긴장했다.

「말에 따라선 깨무는 녀석도 있다고 해. 이 녀석은 상냥하니까 깨물진 않아. 그래도 너무 긴장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으윽」

깜짝 놀랐다.
콧등을 만졌지만 말은 그래도 얌전했다. 이쪽의 긴장도 풀렸다.

(귀여워.)


먼 거리에 사는 사부가 당나귀를 키웠고, 마차에 타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직접 말을 만져본 적은 없었다.
닿은 곳에서 전해지는 체온이나 숨결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천마가 진짜로 있구나」

쥴을 향해 웃었다.

「글쎄 그건 모르지」


「? 무슨 소리야? 여기 실제로 한 마리 있잖아」


「이건 트루데한테 받은 거야. 그러니까 이제 실존하는 생물인지 아닌지 그녀한테 물어봐야 해」
 
「뭐?!」

반가운 이름이 나왔다. 숲에 사는 요염한 마녀. 쥴과는 범상치 않은 인연이 있는 듯 했으나, 아직도 교류가 있었을 줄이야.

「혹시 최근 집에 없었던 것도 그녀한테 가서 그랬던 거야?」


「……응. 좀 더 비밀로 해둘 생각이었는데……」


「왜 비밀로 해. 나도 트루데랑은 아는 사이인데.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트루데는 변함없었어. 비밀로 했던 것은 이 녀석이 알에서 잘 부화할 수 있을지 확신히 없었기 때문이었어」


「……알??」

흘러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말은 포유류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다. 알에서 부화하지 않는다.

「이 녀석을 받아왔을 땐 알이었어. 저기에 알껍질이 있어」
 보니, 확실히 오두막 구석에 풀로 만들어진  작은 산이 있었다. 그 틈새로 껍질로 보이는 덩어리가 보여서, 파헤쳐 봤다.
그러자 역시 알껍질이 나왔다. 인간 아기 정도의 크기였다.

「엄청난 색이네…」

핑크색 바탕에 보라색 물방울 무늬. 왜 여기서 순백의 천마가 태어나는지 의문일 정도다. 
「분명 트루데의 취미겠지. 이 녀석은 내가 주문해서 조달받은 거니까, 그녀의 마법으로 만들어낸 게 아닐가?」


「뭐?! 쥴도 천마 좋아해?!」

의외의 공통점이다.
내가 아직 현상금 사냥꾼이었을 때, 비의 섬으로 향하는 배안에서 동물을 기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의 대화에서는 좋아하는 동물이 없는 인상이었는데, 대체 언제 천마가 좋아진 걸까.

「아니, 내가 아니라… 네가 좋아하잖아? 얼마전에 너희 집에서 들었어. 빌린 책에도 적혀 있었고」


「물론 좋아하긴 하는데…」

그러고 보니 엄마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쥴이 몰래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전혀 돌아가려 들지 않는 쥴을 쫓아내기 위해 적당히 책을 하나 떠넘긴 거 같았다. 
「그 책에 하얀 천마에 대한 게 적혀 있길래, 트루데한테 조달할 수 없는지 물어 봤어」
 
「……대체 뭘 위해서? 엄청난 대가가 필요했을 텐데……」

설마 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는 건 아니겟지.
확실히 기쁘긴 하지만, 너무 비용 대비 효과가 너무 차이가 심했다.
아무리 쥴이 헌신적인 연인이래도 좀 더 가벼운 데부터 손을 대지 않을까? 마녀와의 거래는 비싸게 치인다. 천마 같은 걸 조달한다고 친다면, 막대한 것을 필요로 하겠지.

「더위 대책으로」


「....」

굉장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와서 순간 할말을 잃었다. 천마는 굉장히 따뜻해서, 붙어있어도 전혀 시원한 느낌은 아니었다. 이런 동물로 어떻게 더위를 삭힌다는 거지?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니, 그 틈에 쥴이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이런 지방이라도 하늘 위는 시원하겠지. 그러니까 더위를 대비할 방법을 생각했을 때부터, 날 수 있는 것을 조달할 생각이었어. 천마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건 너한테서 빌린 책이 계기였지만」

쥴의 말은 일단 일리 있었다. 하지만 터무니 없었다.
아무리 트루데가 마녀라도 천마를 조달하다니, 상상도 가지 않았다. 쥴 본인도 확실히 있어서 부탁한 게 아니겠지. 적당히 아는 사람 중에서 가능할 것 같은 사람한테 적당히 던져봤다는 느낌?
그의 이 터무니 없는 요구를 들은 마녀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백마를 손에 넣느라 고생했을까? 아니면 마법으로 만들어낸 걸까?
그리운 지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쥴은 말을 이었다.

「대가는 확실히 싸지 않았어. 내가 만든 약과 이 근처에서 발견한 식물을 최대한 짊어지고 갔으나, 깡그리 다 빼앗겼지. 일단 이 마을 근처에 자생하는 식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더군. 습기에 엄청 약해서, 수분이 적은 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래」


「그렇구나…」

그녀가 비싸게 쳐준 것은 약이었던 걸까, 식물이었던 걸까.
일단 트루데는 꽤 많이 깎아준 거 같다.
먼 곳에 있는 그녀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트루데.)


쥴은 더워서 뻗을 거 같으면 천마를 타고 하늘에 오른다고 했다.
나로선 괜한 고생 같은 느낌이지만.
하지만 더위에 뻗는 사람으로선 일단 지금 쾌적해지는 게 더 중요한 거겠지.
그때마다 날아야 하는 천마는 힘들겠지만, 좋은 먹이를 줘서 달래주면 될 거다.

(이걸로 쥴의 더위 대책도 만전이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쥴은 내 생각을 읽은 듯 완전히 다른 소리를 툭 던졌다.

「이걸로 네 어머니를 찾으러 갈 수 있겠다」


「……뭐?」

무심코 입을 쩍 벌리고 쥴을 보았다.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없어져서 쓸쓸했지? 이 천마를 타고 만나러 가자」


「말은 간단히 하지만,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잖아. 무리야」


「너희 엄마가 썼던 물건으로 냄새를 맡게하면, 이 녀석이 그 냄새를 따라갈 거야」


「말은 개랑 달리 냄새를 쫓아가지 않아」


「그래…? 몰랐어」

쥴은 놀랐다.
동물에 흥미를 갖게 된 게 최근이니까, 몰라도 무리는 아니다.
말도 인간보다 후각은 뛰어나지만, 개와 비교하면 모자란다. 명령해도 냄새를 쫓을 순 없겠지. 계획은 여기서 좌절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딱이네. 이 천마는 말과 새, 개를 합친 거야. 개는 가능하지? 그럼 이 녀석도  냄새를 쫓을 수 있겠지」


「뭐?!」


「새하얀 천마가 좋다고 했더니, 트루데가 새하얀 개가 섞인 알을 준비해줬어」


(저… 정말인가…?)


말만 들으면, 그녀가 천마의 알을 만든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동물은 확실한 감촉이 있는 진짜였다. 숨쉬고, 표정을 짓고, 따뜻했다. 도저히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트루데가 알을 조달하면서 농담처럼 던진 말을 쥴이 믿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아귀가 맞을 정도였다.
내 의심 어린 표정을 본 쥴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거짓말 같으면 시험해 봐. 네 어머니가 썼던 물건과 지도를 준비한 후, 날아보자. 트루데는 부화 후 이틀만 지나면 날 수 있다고 했으니, 이제 괜찮을 거야」
 
(의외로 지기 싫어하네….)


고생해서 얻어온 천마를 의심의 눈으로 봐서, 기분이 상한 걸까. 쥴은 조금 욱한 거 같았다. 

 

 


(날 위한 행동이기도 했는데, 또 나쁜 짓을 했네.)


얼마전 내 태도를 맹반성하며, 그가 해주는 일에 조금 더 감사를 전하기로 해놓고선. 또 같은 실수를 거듭할 뻔했다,.
솔직히 말해서, 갑작기 그렇게 말해도 「아, 그렇군요」하고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도 좀 아닌 거 같았다. 하지만 모처럼 쥴의 권유를 거절하는 것도 좀 그랬다. 

 

 


「알겠어……. 가볼까?」


「뭐? 가게?」

찬성하자 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는 내가 거절할 줄 안 모양이다.

「자기가 먼저 제안해 놓고선, 뭐야. 나야 뭐 관둬도  상관없지만」


「아냐, 꼭 가보자……. 일단 날아보고 싶어」
 그리하여 천마를 타고, 엄마를 찾기로 했다.

 

 


*************************** 

 

 

같은 날 오후, 지도와 엄마가 썼던 스카프를 챙겨 마을 외곽으로 향했다. 말을 탈 예정이었으니, 평상복이 아니라 승마복을 대신해 바지를 골랐다. 쥴은 물과 음식을 준비하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 다 됐으면 가자」


「응. 어머니의 냄새가 묻은 거라면 이 스카프 어때? 여행 가기 전에 쓰시던 거야」
 갖고 온 스카프를 쥴에게 건넸다. 쥴은 그걸 천마의 코에 갖다댔다.

「맡아 봐」

처음엔 싫은 듯 스카프의 냄새를 맡았으나, 이윽고 코를 들어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코를 꿈틀 거렸다.
그 모습이 어딘지 개를 연상시켰다.

(이 아이, 정말로 개가 섞어있는 걸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정말로 엄마의 행선지를 알아낼 수 있을까? 여행을 떠난 지 어언 1개월은 지났다. 여자 혼자 여행한다 해도, 이미 꽤 먼 거리겠지. 평범한 개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먼곳일 거다.
게다가 냄새를 맡아봤자, 천마에게 냄새를 따라가보라는 명령이 통할까? 불안해 하며 지켜보고 있자니, 갑자기 천마가 훼를 쳤다. 
「뭐…, 뭐야?」


「냄새를 느낀 걸지도 몰라. 타자」

둘이서 다급히 올라타자, 천마가 가볍게 날아올랐다.
갑작스럽게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
서서히 올라갈 줄 알았는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놀랐다.

「귀울음이……」

뒤에 탄 쥴이 신음하는 게 들렸다. 상당히 아팠나보다.
둘이 나란히 앞을 보고 앉았으니, 그의 상태를  살피는 건 불가능했다.

(잘못 탔나 봐…. 내가 옆으로 탔어야 했어.)


귀부인이 스커트 차림으로 말을 탈 때 그렇게 탄다고 들었다. 그랬더라면 쥴을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상태가 걱정 됐다.
나는 별 문제 없었다. 옛날에 고속 비행선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했던 것처럼, 급격한 기압 변화에도 별다른 충격을 느끼지 못했다.

「괜찮아, 쥴?」


「괜찮아…… 읏…」

허세를 부리지만, 정말로 그런가? 억지로 자세를 바꾸려하자, 휘청 앞으로 흔들려 균형을 잃었다..

「윽……」

천마가 전방을 향해 날았다.
엄청난 스피드였다. 마차도 이런 속도는 아니겠지.
하늘엔 장애물이 하나도 없으니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황야는 눈깜짝 할 사이에 초원으로 바뀌었다. 

 


(여긴 어디지…? 이 아이,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나?)


내가 불안을 느낄 정도로 천마는 망설임 없이 날았다.
만약 멋대로 자기 날고 싶은 곳을 나는 거라면? 이번 비행은 완전히 무의미해지겠지. 

 


(……무의미해지며 어때.)


중재인 일이 바빠서 최근엔 뛰지도 못했다. 이렇게 바람을 가르는 감각을 피부로 느끼는 것은 정말 얼마나 오래간 만일까.
시원하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완전히 스트레스에서 풀려난 세계였다. 기분 좋은 바람이 몸과 마음을 가볍게 했다.
이 앞에서 엄마를 만날 수 있으면 기쁘겠지만, 못 만나 더라도 하늘을 나는 경험은 귀중했다.

(기뻐.)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시야가 휙 돌았다.

「우왁?! 이게 무슨 일이야?」


「내려가려는 모양이야. 붙잡고 있어」
 쥴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매달려 있다. 아래로 콩알 만한 사이즈의 인간이 하나 보였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며 아무리 나라도 확실하게 죽는다. 천마는 급상승과 급강하를 좋아하는 모야이다. 푸르르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단번에 지면에 내려선다.
 이번 하강 때는 나도 조금 이명을 느꼈다.
아래쪽 인간들도 천마의 등장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무 밑으로 달아나는 게 보였다.

(맹금류인 줄 아나?)


이 스피드로 하강하면 무리도 아니지.
마침내 천마는 지면에 내려섰다. 그러더니 날개를 접었다.

(여긴 어디지…?)


내려선 곳은 가도
(街道)

같았다.
주위론  숲이 울창했다. 고향의 땅과 기후가 다른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분명 국경은 넘었다.
나무 밑으로 달아난 사람한테 장소를 묻고자, 고개를 돌렸다.

「저기, 죄송합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는… 앗, 엄마?!」

눈이 튀어 나올 정도로 놀랐다. 질문의 대상은 엄마였다. 그녀도 당황하고 있었다.

(엄청 먼 곳일 텐데… 엄마를 찾다니…. 그 천마, 정말로 트루데의 마법의 산물이구나.)


이상한 데서 감탄했다.

「리자…. 네가 어떻게 여기 있니…? 그 생물은 뭐야?」
 
「천마야. 쥴이 가져다 줬어….  엄마는 잘 지내는 거 같네」
 엄마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그녀가 여행을 떠나기 전과 지금의 차이.
나와 엄마의 관계는 이전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엄마가 여행을 떠나고 난 후, 잠시동안은 쓸쓸하고 그리웠다. 하지만 그 틈새를 어느새 쥴이 채워주었다. 그 증거로, 엄마와 재회한 지금도 그저 반가움을 느낄 뿐.
쥴과 재회했을 때와 같은, 그 끓어 오르는 감정은 없었다.
순서를 매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저 착각. 자연히 선택했다.

(내게 제일로 소중한 사람은 이제 쥴이구나.)



「난 건강해! 여행도 순조롭고」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는 엄마라기보다 연상의 친구 같았다.

「그럼 딸을 잘 부탁해. 쥴 군」
 엄마와 쥴이 악수를 나누었다.
남들과의 접촉이 거북한 그는 굳은 표정으로 답례했다.

「네…. 부디 여행을 즐겨주세요」


「잘 지내, 엄마.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둘이서 천마에 올라탔다. 나는 옆으로 앉고, 쥴이 그 뒤에 올라탔다.
손을 흔드는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하늘로 오른다.

「……읏」

이번 상승도 갑작스러웠으나, 전에 비하면 나았다. 쥴이 고삐를 당겨서, 조금 브레이크를 건 덕분일지도.

「엄마, 1년 정도 여행을 계속한 뒤 돌아온다고 했어」

그가 신경 써서 자리를 피해준 동안, 엄마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엄마가 했던 말이었다. 쥴의 얼굴에 고개를 기대며, 보고했다. 
「그래? 그 동안 쓸쓸해지겠네」
 
「…… 그렇지만도 않아」

조금은 쓸쓸하지만 쥴을 못 만날 때만큼 쓸쓸하진 않으니까, 그가 있어 준다면 어찌어찌 할 수 있다. 
「내가 대신이 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만도 않다’라고 대답했는데, 쥴은 못 믿는 모양이었다. 단순한 허세라고 생각한 걸까?

(어째서 전달되지 않는 걸까.)


서투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돕고 싶어지는 서투름. 오랫동안 남과의 접촉을 거부해와서 그런지, 본인의 천성인지. 그는 말 아래 감춰진 뜻을 헤집는 게, 어린아이 급으로 서툴었다. 전해지지 않는 것에 애가 타, 괜히 더 전하고 싶어진다.

(확실하게 말로 할 수밖에 없겠네.)


조심히 숨을 들이킨다. 그리고 얼굴을 갖다대고서 속삭였다.

「나는 쥴만 있으면 충분해」

그것을 이번 천마 소동 중에 배웠다. 쥴은 눈을 깜빡이더니 「그래, 고마워」하고 말했다. 

 

 


(아, 또냐…. 안 믿는 구나, 이 사람.)

내 진심이 전해졌다면 그런 한마디로 끝났을 리 없다.
진심으로 말했는데, 너무 평범한 답례라니 맥이 빠진다.


(내 진심은 비싸단 말이야.)


마녀에게 지불한 대가보다 훨씬 더 비싸다.
돈으로 고생해본 적 없는 그로썬 지불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평생 걸려도 다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읏」

쥴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겨, 억지로 고개를 끌어당긴 후 난폭하게 키스했다.
놀란 표정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불안정한 말 위에서 나누는 키스였다. 절로 흔들렸다. 하지만 우리라면 문제없겠지.

「웅……」

천마가 엄청난 속도로 날고 있기에, 절로 몸이 뒤로 밀린다. 그 흔들림을 이용해 보다 깊숙히 입맞췄다.

「……웅, 후음……」

그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서로의 혀가 얽히고, 쥴이 혀를 빨아올린다.
부드럽고 따뜻한 점막이 맞다는 감촉. 그 온기에 눈처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저 정신없이 옭아매듯 그에게 매달렸다.

(떨어지겠네….)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로? 지상으로? 아니면 본능의 바닥으로?

「하아…」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쥴의 가슴팍에 추욱 머리를 기대자, 귓불에 키스를 받았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오싹해졌다.

「나는 너만 있으면 충분해……」


「나도 그렇다고 했잖아」


「정말로…?」


「거짓말 같았어?」


「아니… 그냥 위로의 말인 줄 알았어…. 누군가가 나를 원한다니… 이상해」


「너무하네……」

하지만 그 같은 불안, 그녀에게도 있었다.
쥴이 바람을 피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에게 과연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고민했다.
그가 그 고민을 지워준 지금도, 가슴 안쪽에서는 불안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분명 다들 마찬가지다.
누구나가 확실한 말을 통해 불안을 날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있겠지.

「이상하지 않아. 내겐 당신이 필요해」

눈을 보며 말하자, 쥴의 어깨가 스윽 내려갔다.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던 모양이다.

「……고마워. 날 필요로 해줘서」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불안이 일렁였다.

(서투른 사람.)


그 서투름은 내 거울이다.
같은 실수를 체험한 적이 있기에, 그의 서투름을 어찌해주고 싶었다.
돕고 싶어지는 서투름. 그것이 사랑스럽다. 아마도 영원토록.

 

 


END


Posted by 1112431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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