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륜 집어 삼켜질 때
마왕, 불꽃과 함께 태어나고
일륜 집어 삼켜질 때
용사 빛과 함께 떠나리라'
왕력(王暦) 2679년~ 공국력 202년 ~ 9월 17일
오늘밤에도 하늘에 달이 떠있었다.
하지만 어둠진 숲 사이로 보이는 그것은 우리들이 항상 보아온 달이 아니었다.
"월식…."
마법사들에 의하면 달이 땅의 그림자에 들어가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때, 마(魔)에 속하는 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진다고. 마법사들은 마(魔)에 속하는 자들이 아닌가? 싶은 의문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겨를이 아니었다.
"안 그러면 이런 고블린 따위에게…!"
내 바스타드 소드가 고블린 한 마리의 목을 찔렀다.
순간, 고블린의 머리에서 문장 같은 무언가가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망가지고 기름때가 껴서 날카로움을 잃은 지 오래된 검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망설일 겨를조차 없는 상황이니까.
그러니까 찌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몇 마리나 되는 걸까?
"각자 옆에 있는 사람에게 몸을 기대요! 고립되면 안 됩니다!'
대답은 없다.
아니, 검소리나 체인 메일의 사슬이 부닥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블린한테서 검을 뽑아 들며 주위를 살폈다.
"………."
시선 끝에 있는 고블린 무리를 제외하고, 움직이는 것은 이미 없었다.
쓰러져 있던 것은 전부 내가 지휘하던 북방 초계대 병사들이었다.
"12명 모두가…."
젊은 신병만으로 편성된 숙련도 낮은 부대.
굳이 월식 날, 그런 부대를 마법사 하나 없이 원정 보내는 임무를 왜 받아들였는가.
그건… 내가 공국의 기사이기 때문에.
이의를 주창하지 않았는가?
했으나 통할 리 없다.
어째서 거부하지 않았나고?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답이 나오지 않는 질답으로 현실을 도피했던 나는 갑자기, 자신의 몸도 상처투성이란 걸 깨달았다.
묶은 머리카락은 풀리고, 스커트는 찢어지고, 플레이트 메일은 우그러들고, 깎이고, 망토는 그저 넝마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칼집은 이미 형태조차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깨닫고 보니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안 돼. 깨달아선 안 된다.
기사의 플레이트 메일은 신병들이 입는 체인 메일보다 방어력이 우수했다. 그러니까 아직 싸울 수 있다.
"적어도 대원들과 같은 숫자만큼은 길동무로 삼겠습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고블린이 인간의 말을 알 리 없다.
그래도 좋아. 말을 할 수 있는 동안엔 살아 있는 거니까.
문득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며칠일까?
16일?
아니, 월식은 17일에 일어난다고 했었지.
아아…, 달이 전부 그림자로…….
화악!
아무런 전조조차 없이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빛…?
불꽃…?
나와 고블린들 사이의 지면에 마법진 같은 문양이 그려지더니, 빛나는 기둥이 나타났다.
기둥에서 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하나 튀어나와서, 시선을 빼앗겼다.
설마 새로운 적이 소환된 건가…?!
하지만 남자는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정신을 잃은 건지 서있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나타난 기세 그대로, 빛나는 기둥이 소멸하기도 전에 바닥에 쓰러졌다.
고블린들은 이런 이상사태를 의아하게 여기지도 없고, 그저 사냥감이 늘어난 것을 기뻐하며, 두려움조차 없이 사내에게 다가갔다.
"당신들 상대는 접니다!"
나는 망설임없이 고블린 무리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무리 정체 모를 등장이라 하나, 남자를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남자는 상처입은 인간이며, 내가 기사이기 때문에. 공국 유일의 여기사란 칭호는 가볍지 않다.
쓸모 없어진 검은 그저 얄팍한 둔기일 뿐, 고블린을 즉사시킬만한 상처를 주진 못한다. 무게가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짓뭉개는 것에 무게를 둔 투핸디드 소드였다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때 한 번뿐이었다.
어떻게든 눈앞의 고블린을 물리친 나는, 호흡을 고르고자 검 끝을 땅에 찔러 넣고서 크게 어깨를 젖혔다.
그것을 빈틈이라 한다면 빈틈이라 할 수 있겠지. 허나, 숨도 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인간은 내가 아는 한 없다. 누구든 그 때는 다소 무방비해지겠지.
나는 그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구엑!!"
귀에 거슬리는 외침과 함께 내 등뒤로 불꽃이 피어 오르더니, 강렬한 열기와 함께 살 타는 냄새가 떠돌았다. 구역질 나는 고블린의 피부가 불타는 냄새와 섞여 훨씬 더 역해졌다.
튕기듯 뒤돌아보자, 나를 향해 곤봉을 휘두르려던 고블린이 보라색 불꽃에 휘감겨 있었다.
지면에는 한줄기, 일직선으로 뻗어져 나온 불탄 자국.
발버둥칠 틈조차 없이 절명해, 숯검뎅이 된 고블린이 지면에 쓰러졌다.
화염 마법…?
하지만 대체 누가…?
마법사는 데려오지 않았는데…?
대답은 금방 나왔다.
빛나는 기둥에서 나타난 남자의 손바닥에서 보랏빛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을 닮은 불꽃이.
"설마…."
나는 일단 내 눈을 의심했다. 왜냐면 주문 영창도 없이 불꽃을…, 마법을 다루는 자가 존재할 리 없기 때문에. 하물며 보라색 불꽃이라니….
제정신을 차린 것은 고블린의 비명소리가 다시 들렸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두려움 모르던 고블린들이 머뭇머뭇 도망간다.
본능적으로 안 거겠지. 저 불꽃의 위력과, 영창 없이 발휘되는 도를 넘은 저 힘의 위화감을.
솔직히 말해, 이때의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앞두고 소름이 돋은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의 그 잔인한 눈빛에 꿰뚫려 꼼짝조차 할 수 없었다.
불꽃에 비쳐진 붉은 눈동자가, 보다 흉흉하게 빛났다.
허나 주박과도 같은 그 시선에서 해방된 것은 곧이었다.
희미한 기력만으로 일어선 것일까. 아니면 전투에 대한 조건 반사였을까. 남자는 다시 쓰러진 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후 내가 망설임조차 없이 검을 팽개치고 달려간 것은 비난 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허나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눈 앞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지나치는 것은 기사로서, 인간으로서 못할 짓이라고. 설령 정체가 뭐라하더라도, 이 남자가 내 생명의 은인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모든 것이 끝난 정적 속에서 올려다본 달은, 평소와 같았다.
"월식이… 끝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