アバタ-ルチュ-ナ-(2)クォンタムデビルサ-ガ 五代ゆう 저 |
* 2권입니다. 초벌이라서 오타수정이라던가 문장교정이 없습니다.
* 것보다 우리 참모는 귀엽귀…………
* 스크롤 주의
여기서 나는 그저 죄가 한가지 측면에서 적극성을 띈단 것을 해명했을 뿐이었다…. 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신의 관념에 의해 무한히 그 횟수가 심화된 시점의 자기이며, 즉 행동으로서의 죄에 대한 최대한의 의식이다.
즉, 죄가 신.의 앞.에.서 일어난단 사실이, 죄가 지닌 적극성인 것이다.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1
「<교회>의 등록 데이터에 의하면 그 남자는 확실히 신생자(newbie)다.」
전술용 테이블에 앉은 게일의 무기질한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생출(生出)은 약 20주기(20 days) 전. 아트마가 발생한 후 우리들이 <아사인멘츠>를 타도하고 나서 약 10일이 경과한 날짜다.」
공중에 떠오른 3D 영상은 <하운즈>에서 도망쳐 나온, 색바랜 붉은 머리칼의 남자의 상반신을 비춘 삼면도를 비추고 있었다. 간단한 능력치와 아트마 명도 기록되어 있다. 당사자는 기분나쁜 얼굴로 어깨를 움츠린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기이한 긴장감이 <엠브리온>의 브리핑 룸을 지배하고 있었다. 지하에서 돌연 나타나 <하운즈>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도망자들은 우선 본거지 내 포로 수용소에 집어넣어뒀다. 도망칠 만한 기력도 없을 정도로 지쳐있는데다 공포에 떨고 있는건 명백했지만 주의를 기울여 손해볼건 없다.
『루파』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남자가 임시적으로 리더를 맡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우선 대표자로서 참모인 게일과 리더인 서프가 직접 심문하기로 했다. 거길 가타부타 말도 없이 히트도 끼어들어와 있다.
『루파』는 자신이 잠정적으로 포로 상태란걸 인식하고 있는듯, 등을 굽히고 의자 양 옆에 손을 얹고 있다. 짙은 눈썹밑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눈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려하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매서운 시선앞에 놓여 있어도 그에겐 그걸 되물리칠만한 강렬한 존재감과 압도적인 힘의 기척이 있었다. 불합리한 위해가 가해지려한다면 주저없이 반격하겠지. 그가 얌전히 있는 것은 그저 자신이 인솔해온 <하운즈>의 동료들을 위해서인건지도 모른다. 서프는 다시금『그』의, 과거의 리더였던『루파』를 떠올리며 그럴리 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러야했다.
「소유 아트마는 <케르베로스>, 들은적이 없군.」
「검색해봤지만 달리 같은 아트마를 지닌자는 없다.」
게일은 말했다.
「능력치를 봐도 <케르베로스>는 우리나 다른 트라이브 간부 클래스가 소유한 것과 마찬가지로 상위 아트마의 일종일 가능성이 높다. 그와 함께 찾아온 신생자들은 전원 하위 아트마만 지니고 있었다. 그의 높은 능력은 뉴비로서는 이상하다.」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건가? 우리들도?」
「미안하지만,」
루파는 서프의 물음에 작게 어깨를 으쓱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문을 나와 정크 야드에 내던져진 순간부터다. 그때 이미 아트마는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윽고 <하운즈>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구속되어 그대로 동료들과 함께 <하운즈>에 가입했다. 그것도 얼마안가 이렇게 도망쳐 나오는 골이 되긴했지만.」
말을 끊고, 망설이듯 서프를 바라본다.
「그것보다, 기억나지 않는다니, 무슨 뜻이지? 당신과 난 예전에 만난 적이 있나? 나는 아무래도 짚이는데가 없는데.」
벽에 기대어 있던 히트가 낮게 혀를 찼다. 서프는 너무 안타깝고 초조한 나머지 소리를 지를뻔하는것을 꽉 참았다.
「당신은, 루파.」
낮은 목소리로 진중하게 서프는 말했다.
「이전, 나와 히트, 당신을 포함해 오짓 셋 밖에 없는 트라이브의 구성원이었다.」
게일이 순간 이쪽으로 시선을 준다. 걱정과 의문이 담긴 시선을 무시하고, 서프는 애써 말을 이었다.
「당신은 우리들의 리더였다. 뉴비인 나와 히트에게 싸움법과 전술의 기본을 가르쳐준 최초의 리더였어.」
「뭐라고?」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놀란건 루파였다. 구원을 청하듯 좌우를 둘러보다, 벽가에 기대어 지켜보고 있던 히트의 타는듯한 눈동자와 서프의 필사적인 빛이 담긴 은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고개를 젓고서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무래도 모르겠군. 내가 기억하고 있는건 교회의 문을 나온 다음 일 뿐이야. 트라이브 리더가 된 적은 한번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 구성원을 겨느린 기억도 없고. 당신들이 얘기하는『루파』는 지금 어찌 됐지?」
「죽었어.」
히트가 간결하게 말했다. 서프는 남몰래 어금니를 악물었다.
「죽임당했다. 전장에서. 적의 저격병에게 당해서. 우리들은 <교회>가 정전 명령을 내리기전에 전장에 있던 적 트라이브 리더를 발견해 죽였다. 그리고 정전 명령이 나온뒤 당신이 죽음으로서 해체된 <엠브리온>을 리더와 구성원이 각각 하나뿐인 트라이브로 재결성해 존속시켰다. 상당히 옛날 이야기다. 물론 그 무렵엔 아트마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예전『꿈』에서 본 광경이 선명히 뇌리에 되살아 났다. 맹렬히 진격해오는 전차. 수류탄을 던져넣는 자신. 뿜어져나오는 피. 엄호에서 튀어나와있는 라이플의 총신. 이쪽을 향해 전달되는 수신호. 호를 나서려하는 넓은 등. 얻어 맞은것처럼 흔들리는『그』의 뒷모습. 목이 찢어져라 내질렀던 자기 자신의 비명.
「먼 옛날에 죽었다면 왜 내가『루파』지? 난 그렇게나 그『루파』와 닮았나?」
「닮았다고 할 수준이 아니야.」
히트가 토해내듯 말했다. 서프도 끄덕였다.
「얼굴 생김도, 외견도, 목소리도, 행동거지까지 완벽하게 그대로야. 아마 전투력이나 신체능력도 거의 일치하겠지. 상위 아트마를 지니고 있는걸 보면 금방이라도 트라이브 리더나, 최소한 간부 클래스의 힘을 지니고 있는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는 뉴비<신생자>다. 생출된 기일만 보자면.」
냉정히 게일이 지적한다.
「정크 야드에서 사망한 자는 하늘로 올라가 상공의 구름에 흡수된다. 거기서 다시 비가 되어 내려와 <교회>의 손에 의해 업(業)이 씻겨져 나간뒤 신생자로서 다시 태어난다. 그 경우 전생의 용모나 능력을 그대로 계승했단 사례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다. 참모타입을 제외하면 뉴비의 초기 능력치는 거의 일률적이다. 남은건 개인의 판단력과 사소한 능력차를 어찌 키워나가는지에 달려있다. 허나 이미 사망한 자의 이름과 용모를 계승한데다, 초기치부터 이미 리더급의 능력을 지닌 뉴비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보고된 바가 없다.」
게일이 키를 두드렸다.
스크롤 되던 화면이 멈추고, 사망자 파일의 한 행이 화면에 펼쳐졌다. 루파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서프는 그저 굳어 있었다. 히트가 가까이서 숨을 죽이고 있는게 느껴진다. 루파와 완전히 똑같은, 붉은 머리의 남자. 허나 뺨의 트라이브 컬러와 영상 밑에 덧붙여진 데이터만이 달랐다. 데이터에 있는 남자의 얼굴엔 하얀 페인트는 없고, 능력치와 전적에 관련된 수치 아래에 <LOST>란 문자가 붉게 표기되어 있었다. 사망, 이미 5대주기(5 years) 전의 일이다.
「<교회>의 사망자 어카이브를 검색해봤다.」
손을 멈추고, 게일은 모니터를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동일인물인 모양이다. 능력치의 차도 거의 없다. 현재 데이터와의 조합도 실행해봤지만 복장이나 페인트를 제외하면 완전히 일치한다. 뉴비가 과거의 사망자의 외견이나 능력을 완전한 형태로 계승했단 사례는 이제까지 한번도 보고된 바가 없다.」
「뭐지, 대체.」
가장 곤란해하는건 루파였던것같다.
「그럼『이』나는 한번 죽은 건가? 일단 죽고나서 신체도 능력도 그대로 지닌채 뉴비가 되어 되살아났단건가? 그런 일이 말이 되나?」
「지금까진 있을 수 없었다. 허나 아트마가 발현한 이래, 있을 수 없는 사태는 속속들이 발생하고 있다. 어쩌면 <교회>의 신생자 생출 시스템에 뭔가의 변경, 혹은 문제가 발생한걸지도 모른다. 이 건에 관해 <교회>에 직접 질문해 봤지만 그 신생자, 즉 지금의 당신에 관한 이상은 없다는 답만이 돌아왔다. 그들이 아직 뭔갈 숨기고 있는건지, 아니면 <교회> 자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단 것도 있을법 하다.」
「이것또한 <교회>의 변화중의 하나란 말인가?」
게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다. 뉴비는 기본적으로 트라이브의 병력 보충을 위해 생출된다. 그런 뉴비들 중 자기 학습에 의해 능력을 키운 자만이 살아남고, 이어 트라이브로 결집되어 상위를 목표로 하는게 정크 야드의 기본적인 룰이다. 뉴비때부터 이미 트라이브 리더급의 능력을 지닌 개체가 있으면 경쟁 원리의 밸런스가 무너진다. 최소한 <교회>가 의도적으로 이런 짓을 했을거라고 생각할 순 없다. 그 엔젤이란 자가 조작한 결과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엔젤이라해도 정크 야드의 기본적인 룰까지 바꾸려 들려하는건 아니라고 생각해. 아트마가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유를 <교회>가 명백하게 밝히지 않아도 근본적인 부분은 이제까지와 달라진바 없을텐데.」
서프는 이의를 제기했다. 싸우고, 죽이고, 강한자가 이긴다. 그리고 <먹는>것을 통해 보다 더 강한 힘을 손에 넣는다. 자신을 엔젤이라 칭한 그 수수께끼의 목소리가 되살아난다.
― 악마는 너희들의 본질(아트만) 그 자체다. 싸워 이긴 자가 패자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 그 힘은 점점 더 커진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선별된다. 그를 통해 정크 야드의 인간 그 자체의 평균적인 전투력을 높인다. 아트마는 그 원리를 보다 명확하게 한 것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 그 안에 처음부터 높은 능력을 지닌 뉴비를 투입하는건, 내 견해상으로 <교회>의 목적에 반하는 걸로 추정된다. 그들이 바라는건 우리들이 싸우고, 그를 통해 총합적인 능력을 향상시켜 나가는 거다. 태어난 직후부터 강한 능력을 지닌 뉴비를 만들 수 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하면 돼. 녀석들이 원하는건 어디까지나 경쟁 원리에 의해 병사의 평균치를 연마하는 것이며, 처음부터 강력한 누구하나가 타인을 쉽사리 물리치고 정상에 오르는건 아닐거야.」
「그럼 역시 이『루파』는 <교회>의 의도없이 생출됐단건가.」
「생출(生出)이란 말은 그만 둬.」
서프는 울컥해 한마디 끼어든 뒤, 이내 후회했다. 게일은 의아한듯 리더를 본다.
「왜『생출』이란 표현를 써선 안되지. 신생자는 모두 <교회>가 생출해내는 것이다.」
「그런게 아냐. 이젠 됐어. 잊어줘.」
서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부진 남자의 넓은 등을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그날의『그』가 살아돌아왔단 생각만이 든다. 그 이후 상당히 시간이 지났을텐데도, 보면 볼수록 기억은 선명해질 뿐이였다.
『생출』이란 표현이 거슬리는건 그게 벤더에서 공급되는 비품, 혹은 약품이나 무기등의 장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왜 그렇게 게일의 발언에 신경을 곤두 세우는지 설명할 수 없다. 허나「루파가 살아돌아왔다」고 느끼는 서프의 기분과 그 말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히트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방 구석에 몸을 파묻고 그림자로 표정을 가린채, 게일과 서프, 루파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서프는 얘길 되돌렸다.
「<교회> 자체에 뭔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걸지도 몰라. 루파가 나온 그 자재창고에 느닷없이 나타난 구멍. 그건 대체 뭐지?」
「몇사람을 정찰조로 파견해봤다.」
게일이 답했다.
「안은 지하수로, 혹은 그와 비슷한 종류의 것으로 추정된다. 흐르는 물은 비와 같은 걸로 보인다. 비슈다에서 거길 지나 무라다라로 빠져나왔다는건 다른 에어리어와도 이어져있을 수 있다. 아마 정크 야드 전역에 내리는 <죽은 자의 비>를 모아, 정화와 재생이 행해지는 <교회> 지하로 일괄 이송하기 위한 경로로 추정된다.」
「상당히 대규모였을텐데 왜 지금까지 누구하나 그걸 깨닫지 못했지?」
「우리들, 즉 정크 야드의 인간들 전원에게 감각 마스킹이 가해졌기 때문이라 사료된다.」
「감각 마스킹?」
「<교회>가 감추고 싶은 시설이나, 정보는 눈에 들어오지않고, 설령 눈에 들어온대도 인식할 수 없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게일의 조작하자, 정찰 부대가 찍어온 수로 내부의 화상이나 흐르는 물의 분석 결과가 차례차례 표시된다.
화상으로 보자니 수로는 상상보다 월등히 넓고 컸다. 매끄럽고 높은 천장 밑에 폭넓은 수로가 펼쳐져 있고, 수로 양측엔 좁은 보도가 정비되어 있다. 등불은 거의 없고, 푸르스름한 어둠에 점점이 라이트켜 불안한 불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였다. 통로가 있단건 누군가가 다닌단거겠지만, 그건 분명 <교회>관계자나, 새하얀 승병들 뿐일 것이다. 각 지배 트라이브나 그 외의 정크 야드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각 에어리어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할 목적으로 쓰였던게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도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둘 이유가 없다.
「내가 참모로서 받은 조정 중에서도 일종의 마스킹은 들어 있다. 자기 트라이브의 존속을 최우선적으로 하며, 그 이외의 요소는 사고에서 절삭되도록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는것 자체가 그 마스킹이 벗겨졌단 증명이라 생각한다. 본래는 그러한 사고제어, 감각제어는 제어된 본인이 인식하지 못해야만 의미가 있으니까.」
「그것 또한 아트마의 영향인가?」
「틀림없이.」
긍정한뒤, 게일은 다시 한번 패널을 두드렸다.
「일단 이녀석들에 관해선 이제 됐어.」
침묵하고 있던 히트가 입을 열고, 오연히 루파와 그 주위를 턱짓했다.
「그것보다 문제는 <하운즈>와 비슈다 에어리어가 묘한 녀석한테 뭉개졌단 얘기쪽이야. 그쪽 이야길 해주시지.」
「그렇지.」
서프도 동의했다. 지금 루파―라고 임시로 부르기로 치고―의 정체에 대해 이러니저렇니 떠들어봤자 아무런 득도 없다. 우선 그가 이야기해온 이상 사태를 파악하는게 우선이다.
「지상뿐만이 아니라 지하를 통해 침공할 수 있는 경로가 발견된 지금, 지상만 감시해선 의미가 없지. 지금 <엠브리온>은 그것 말고도 대처해야할 문제를 산더미처럼 품고 있어. 이야기해줘, 루파, 그 비슈다를 무너트린 녀석을.」
「보이지 않아?」
서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대체 무슨 뜻이지? 보이지 않는다니」
「그말 그대로다.」
지친듯 루파는 이마를 쓸어올리며 턱을 괴었다.
「눈으로 인지할 수 없는 누군가가 이쪽이 대응할 틈도 없이 본거지로 침입해 눈깜짝할 사이에 대부분의 구성원을 학살했다. 물론 모습이 보이지않는다곤 해도 실체는 있겠지. 피가 튀었을때 순간 윤곽이 보였지만, 1초도 지나지않아 투명으로 돌아갔다. 더욱이 무서울 정도로 빨라. 페인트탄으로 마킹을 시험해봤지만 상대가 너무 빨라서 표적을 조준하는게 불가능했다. 총을 겨눌 틈도 안주고 저격수는 죽임당했다.」
「새로운 아트마 능력을 지닌 상댄가?」
「그런 능력을 지닌 아트마는 보고 된 사례가 없다.」
게일이 한마디 했다.
「만약 그런 능력을 지닌 아트마가 발생했다면 서로를 먹는 것에 의해 독자적으로 진화했거나, 뭔가 다른 요인을 통해 지니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요인이라면?」
「지금 상황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게 없다.」
「그럼 그 <엔젤>이란 녀석같은거겠군.」
히트가 혀를 찼다.
「난 아무래도 녀석이 맘에 안들어. 아트마를 우리에게 밀어붙인것처럼, 전투를 보다 격화시킬 셈으로 랜덤으로 묘한 능력을 뿌리고 다닌다해도 안 놀랄 거다.」
「『에어리어 전체가 집어 삼켜졌다』라고 말했지.」
서프는 이야길 재촉했다.
「그 모습이 보이지않는 아트마를 지닌자도 신경쓰이지만『집어 삼켜졌다』란건 단순히『제압되었다』는 것관 다르게 들려. 그건 어떻지?」
「우리들은 남은 구성원들끼리 리더를 호위하며 본거지 안쪽으로 퇴각했다.」
루파는 말을 이었다.
「리더만 살아남으면 트라이브는 계속 존속된다. 본거지 지하에 긴급 탈출용 차량을 확보해뒀었는데, 거기 도달하기 직전에 통로 벽이 폭발한것처럼 무너져 내리더니 그 너머에서 새카맣게 꿈틀대는 진흙같은데 대량으로 흘러 들어왔다.」
서프는 재빨리 히트와 시선을 나누었다.
새카맣게 꿈틀대는 진흙. 그건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아트마를 처음 얻었을때, 혼란스러워하며 향했던 <아사인멘츠>의 본거지. 파괴된 실내. 이상하게 변형되어 진흙화한 구성원들을 흡수하며 광기에 찬 웃음을 터트리던 하리 Q의 얼굴.
「그 녀석 뭔가 말하지 않았나? 얼굴이 있었다던가?」
「아니, 아무것도 없었다.」
루파는 미간을 찌푸리며 침이라도 내뱉을듯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그저 그건 눈깜짝할사이에 통로로 흘러넘쳐 리더와 태반의 구성원들을 집어 삼켰다. 난 어떻게 리더의 손을 잡고, 끄집어 내려했지만 늦었다. 꾸물거리고 있다간 남은 자들까지 녀석에게 말려 들게 눈에 뻔해서 생존자들을 모아 밖으로 뛰쳐나와 셔터를 내렸다. 하지만 차량에 타기직전 셔터가 부숴지고 진흙덩이가 물밀듯이 흘러 들어왔다. 차량 타이어가 먹히고, 몇사람 정도 도망가는게 늦었다. 그때 지금까지 주의를 기울여 본적도 없었던 장소에 해치같은 입구가 있단걸 알았다.」
「그게 지하 수로 입구였던건가.」
「그런 모양이다.」
지친듯 루파는 다시 얼굴을 비볐다.
「어쨌든, 뭔갈 생각하고 있을 여유따윈 없었다. 가까이 있는 몇몇을 끄집어 당기며 뚜껑을 걷어차 연뒤, 안으로 들어갔다. 열자마자 진흙같은 그게 또 나오는게 아닐까 주의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녀석에게 지성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때는 차량에 틀어넣은 먹이를 소화하기에 바빴던 모양이다.」
그때의 기억에 다시 혐오감이 치밀어 오르는건지 루파는 잠시 말을 끊고,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집어삼켜져가는 녀석들의 비명이 들렸다. 구멍속은 끈적했고, 그 검은 녀석이 돌아다닌 흔적으로 추정되는 번들거리는 지방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었다. 우리들은 각자 아트마 형태로 주위를 불태워가며 무작정 출구를 찾아 헤맸다. 도중에 또 탈락자가 몇 나왔다. 충격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게 된 녀석이.」
그들은 어찌했는가, 루파는 말하지 않았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그래서, 간신히 발견한 출구로 올라와보니, <엠브리온>의 영역이였단건가.」
「그런것도 있다. 하지만,」
손을 내리고, 루파는 서프를 올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여기를 목표로 했기도 했었단 생각이 지금에야 든다. 지하 수로는 미궁 그 자체라서 처음엔 어딜 어떻게 걸어야하는지 몰랐지만, 그런데도 기이하게『이쪽으로 가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명은 부탁하지 말아줘. 나도 이유는 몰라. 허나 <엠브리온>에 가면 어떻게든 될거란 느낌이 계속 들었단건 사실이다.」
서프는 루파의 적동색의 딱딱한 얼굴을 바라봤다.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하운즈>의 구성원으로서 <엠브리온>과 <메리벨>이 손을 잡고 <솔리드>를 굴복시켰단 이야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운즈>는 현 서열 1위인 <블루티쉬>와 적대하고 있다. 적대 트라이브로 달아나봤자 제대로된 처사를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그보단 달느 트라이브와 협정을 맺는데 성공한 <엠브리온>에게 구조를 요청하는게 좋다는게 이치에도 맞는 이야기다.
허나, 어쩌면 루파는 기억하고 있는걸지도 모른다. <엠브리온>이 서프와 히트가 있는 장소이며, 과거 자신이 리더로서 이끌었던 자들이 겨느리고 있는 트라이브라는걸. 그가 의식 깊은 곳에서 알고 있었던거라면.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루파 자신이 서프와 히트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고, 기록상으로도 그는 뉴비다. 정크야드의 살벌한 삶은 업<Karma>이고, 이들 죄업을 헤어려 그를 씻어 흘려보내는게 <교회>가 주창하는 윤회<삼사라>의 목적이니까, 루파가 기억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건 그 윤회의 섭리와도 상반된다.
그래도 이전과 전혀 다를바없는 그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있자니 상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단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생애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고, 고독한 싸움을 헤쳐나갔던 과거의『그』를 생각하다면 더더욱.
「그래서.」
게일이 담담히 뒤를 재촉했다.
「너희들은 우리 <엠브리온>에게 뭘 원하지? <하운즈>의 리더는 아직 사망 처리 되지 않았다. 아직 <하운즈>는 살아있단 뜻이다. 그런데도 <엠브리온>의 구성원으로서 가입하고 싶단건가?」
「무리인 부탁인건 알고 있지만, 하나 부탁할게 있다.」
루파는 몸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온 구성원들은 여기 남기고, <엠브리온>의 병력을 몇 빌려다오.」
눈이, 너무나도 진지한 색을 띄고 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비슈다로 돌아가서, 지금, 그곳이 어찌되어있는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게 해다오.」
「알겠다. 내가 가지.」
서프는 바로 대답했다.
거의 동시에 히트가 벽에서 몸을 때고, 팔짱을 풀고 걸어 나왔다.
「나도다.」
「리더.」
비난의 색을 띈 게일이 소리내며 일어섰다.
「당신은 <엠브리온>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는건가. 게다가, 그는,」
「알고 있어.」
손을 저으며, 서프는 게일을 저지했다.
「그는 조금전 우리들 앞에 나타난데다, 비슈다에 대해선 그에게 들은 정보 뿐이지. 그런 이야길 받아들여 리더인 내가 직접 나설 필욘 없다. 위험하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겠지?」
「이해하고 있다면 왜 그렇게 행동하려 들지 않지?」
「이건 논리를 따질 문제가 아냐, 게일.」
게일이 반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서프 자신조차 자신이 얼마나 도리에 맞지 않는 결정을 한건지 자각하고 있다. 설령 루파의 말대로 누군가를 비슈다에 보내야한다해도, 그게 서프일 필요성은 전혀 없다. 게다가 이것이 최근 급성장한 <엠브리온>에 대한 비슈다의 덫이 아닐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허나 그렇다면 왜 루파는 그『루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걸까.
「어이, 잠깐만. 난 리더 본인에게 와달란 말은 한마디도 안했어.」
오히려 루파가 동요하고 있었다. 서프와 히트를 번갈아 바라본다.
「둘다 어딜 보나 <엠브리온>의 No.1, No.2잖아. 그런 대단한 상대가 와준다면 나로선 역시 마음 든든하지만, 당치도 않아. 그쪽 참모가 말리는건 당연하지. 물론 내가 부탁한 이상, 목숨을 걸고서라도 동행자는 지키겠지만.」
「날, 지킨다고?」
히트가 바보같다는듯 코웃음쳤다.
「시답잖은 소린 관둬. 난 당신이 진짜 루파인지 아닌진 전혀 신경안써. 하지만 날 방해할것같은 놈, 내 적이 될것같은 놈이 있다고 하면 가서 싸운다. 그것 뿐이야.」
그리고 척하고 검지로 루파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안엔 당신도 포함되어 있단걸 잊지마. 당신이 루파든 아니든, 만약 우리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용서치 않을테니까.」
「지키느니 마느니, 그런건 신경쓸 필요없어, 루파. 우리들은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킬 수 있어.」
당신이 가르쳐준대로, 서프는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히트가 지금 그를 믿지않는건 별수없다. 원래부터 히트는 루파밑에 있을때부터 단독적으로 선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리더로서의 루파의 능력은 솔직히 따랐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적으로 인정하는건 지금으로봐선 무리가 있다.
「게다가 지금 이야긴 우리들로서도 신경쓰이는 점이 너무 많아. 가능하다면 타인의 입을 빌리지않고,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두고싶어. 너도 그건 인정하지, 게일?」
「위험이 너무 크다.」
게일은 말했다.
「그럼 리더를 대신해 내가 가는 쪽이 효율적이다. 나라면 그 자리에서 정보수집 및 간단한 분석을 행할 수 있다. 나라면…」
「넌 지금에 와선 중요한 참모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서프는 강한 어조로 게일의 반론을 봉했다.
「덤으로 참모도 결코 전선에 나서는 타입이 아니란걸 상기해. 게일 네겐 달리 지휘를 맡아야할 사항에 대해 말해뒀을텐데.」
게일은 침묵했다. 세라의 이송장소 선정 및 실행은 <솔리드> 습격의 피해가 일단 가라앉은 뒤, 게일과 알지라 둘에게 위임해둔 상태였다. 이미 후보지 몇 개는 추려져 있고, 결정후 2,3일중이라도 출발하는 단계에 있다. 인원 선정이나 후보지 사전 정찰, 정보 정리등, 해야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당신의 행동은 완전히 의미불명이다. 이해할 수 없다.」
게일의 녹색 눈에 책망의 색이 떠오른것처럼 보인건 착각일까.
「이해할 수 없다라…. 그렇겠지.」
자신도 이치에 맞지않는 짓을 하려하는건 잘 알고 있다.
「이건 완전히 내 고집이다, 게일.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이번만이야. 이번만 봐줘.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지. 약속할게.」
「약속이란건 모른다.」
게일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허나 전투시의 생사는 당신 본인의 의지만으로 좌우할 수 있는게 아니란건 이해하고 있다, 리더.」
의자를 돌려, 게일은 루파를 찌를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루파. 우리들의 리더를 동행시켜도 좋을만한 보증거리가 네게 있는지 들려주실까. 네가 데리고온 구성원들은 아무런 보증도 될 수 없다. 그들은 전원, 단순한 뉴비다. 게다가 피폐해있다.」
「게일.」
서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막아세웠지만, 게일은 무시했다. 얼음바늘같은 시선이 곧장 루파를 꿰뚫고 있다.
「만약 네가 무사히 리더를 데리고 돌아오지 못할 경우, 너와 그들이 죽임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허나 그 이외에 우리들에게 뭔가를 보증으로 제공할 수 있단걸 보이지 않는다면 <엠브리온>은 이 요청에 동의할수 없다.」
「잘 알고 있어. 보증은 이거다.」
루파는 허리에 찬 파우치를 더듬더니 둔한 은색의 링을 탁자위에 놓았다.
「조사해줘. <하운즈>의 리더, 카니스 볼크의 태그링이다.」
게일은 손을 뻗어 그것을 손에 쥔뒤, 말없이 단말 패널위에 놓았다. 인식 시스템이 개인 ID를 읽어들이고, 주인의 정보와 전투 기록을 모니터에 표시한다.
「틀림없이 진짜인것같군. 어디서 손에 넣었지.」
「리더가 진흙에 먹혀들려할 때 끄집어 내려고 손을 잡았다. 그때 빠진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쥐고 있었다.」
태그링은 복제가 불가능하다. <교회>가 엄격히 제작을 관리하고 있는데다, 무리해서 분해하려 들면 바로 자기파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것을 여기 두고 가지. 만약 당신들의 리더를 내가 함정에 빠트렸다고 생각할만한 사태가 일어나면 그걸 <교회>에 제출해서 <하운즈>가 <엠브리온>의 지배하에 들었다고 말해줘. 물론 나 혼자 돌아오거나, 혹은 도망치는 사태가 있다면 발견하는대로 처형해도 상관없다.」
「당연하다.」
게일은, 그치고는 드물게 내리치는 동작으로 모니터를 끄고, 링을 집어든뒤 탁자위의 박스에 던져넣었다.
「그럼 결정이군.」
그 이외의 반론을 차단하기위해 서프는 말했다.
「나와 히트는 내일 루파와 함께 비슈다 에어리어 탐색에 나선다. 그동안 게일, 넌 예의 건을 추진. 끝나면 위치를 보고해줘. <엠브리온> 본거지 자체도 아마 그쪽으로 옮기게 될거다. 눈에 보이지않는 능력을 지닌 아트마의 존재도 신경쓰여. 주의를 기울여 나쁠껀 없다.」
게일은 할말을 찾는듯했지만, 헛수고란걸 깨달은듯, 눈을 내리깔고「알겠다, 리더」하고 중얼거렸다. 얇은 입술이 보이지않을 정도로 굳게 입이 다물려져 있었다.
2
「왜 이런 곳에 온거지. 비슈다는 좀 더 가야해.」
루파는 다소 당황한 모양이였다.
<아사인멘츠>의 지배 에어리어인 스와디스타나는 지금은 완전히 <엠브리온>의 지배하에 놓여져 있다. 서프 일행은 그 파괴된 <아사인멘츠>의 본거지 폐허에 다시 한번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조금 확인해두고 싶은게 있어.」
경비로 배치해둔 <엠브리온>의 구성원들이 보내오는 경례에 가볍게 답례하며, 서프는 말했다.
「히트. 하리Q의 시체 옆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건 너였지.」
녀석의 살을 먹은 것도, 하는 말은 입밖에 내지않고 가슴속에만 담아뒀다.
「그래.」
아무일도 아닌것처럼 히트는 답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서프는 아직도 약간 메슥거림을 느끼지만, 히트에겐 그것도 이미 과거의 일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것 같았다.
「반 정도 먹고 나서 그닥 맛있는 고기가 아니라서 남은건 재가 될 때까지 완전히 태워뒀다. 그런데도 아직 살아있다면 이해의 영역을 넘었지. 하리Q가 살아남아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고 생각하는건가, 서프.」
「가능성은 있어.」
루파가 얘기했던 검은 진흙같은 부정형의 생물은 처음 서프가 아트마에 각성했을때 싸웠던, 괴물화한 하리Q와 유사했다. 그 당시엔 아직 서프 일행도 자신의 능력을 파악하지 못했던지라, 싸움법도 조잡했다. 어쩌면 완전히 죽이지 못하고 놓쳤단것도 생각해 볼만하다.
「불가능해.」
히트는 일축했다.
「내 불꽃을 얕보지마. 먹고 남은건 완전히 뿌리까지 재로 만들어서 가루를 내줬어. 그 끈질긴 생명력은 너도 알고 있겠지. 철저하게 해둬서 손해볼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알지만,」
「아무래도 무슨 얘긴지 모르겠군.」
파괴된 본거지 내부를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며 루파가 끼어들었다.
「얘기할 수 있는데까지라도 상관없으니, 여기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지않겠나.」
딱히 숨길일은 아니다. 서프는 <아사인멘츠>와 항쟁중에 출현한 수수께끼의 검은 물체, 거기서 방출된 빛. 아트마의 각성 이야기에 이어, <아사인멘츠>와 리더, 하리Q의 최후의 모습을 들려 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
복부에 새겨진 검은 아트마 심볼을 쓰다듬으며 루파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들이 <교회>의 문을 나왔을땐 이미 아트마가 있었으니까. 그 하리Q란 녀석의 모습은 확실히 내가 본 진흙같은것과 많이 닮았군. 하지만 크기와 지성, 혹은 의지를 느낄 수 없는 부분은 조금 달라. 그것이 발산하고 있었던건 터무니없는 굶주림, 그뿐이었다.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사체를 파괴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부활했다면, 그건 그것 나름 위험한 아트마 소유자가 또 는게 되겠지만…」
「그 <검은 것>이 아트마에 의해 변신한건지 아닌지도 문제군.」
서프는 말했다.
「인격이라고 말할 순 없어도, 어느 정도 지능, 혹은 행동패턴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적이라면, 그쪽을 앞질러 섬멸전을 행하는것도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좋아.」
히트가 바보같단듯 코웃음쳤다.
「습격해온다면 몇 번이라도 불태워 주지. 간단한 이야기야. 푸념해댈 정도는 아냐.」
그정도로 간단히 끝나면 좋겠지만. 서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폐허를 넘어 30분 정도 나아가자, 간신히 <아사인멘츠> 가장 안쪽방 하나에 도달했다. 하리Q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다. 달리 데려온 구성원 몇몇이 실내를 탐색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서프의 기억보다도 실내는 한층 더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벽이니 바닥할것없이 히트가 내쏜 초고열 때문에 녹은 콘크리트가 흘러내려 있었다. 그을음투성이인 실내는 검은 도료로 칠해져 있는것만 같다. 아직도 탄내와 부패한 냄새가 짙게 뒤섞인 강렬한 냄새가 들어차있어서 코를 찌른다. 걸을때마다 재와 그을음의 분진이 피어올라서, 숨쉬는것도 고역이였다.
「히트, 그때와 달라진 부분은?」
「딱히 변한건 없어.」
히트는 공기의 냄새를 맡듯이, 고개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 쭈그러앉아, 바닥에 눌러붙은 그을음을 손가락으로 찍어올리더니 코를 찡그린다.
「하리Q의 흔적은 남아있나?」
「아니. 그건 없는것같아. 하지만 그게 어디론가 도망친 탓인지, 아니면 정크 야드의 섭리에 따라 비가 되어 <교회>지하로 돌아갔는진 불명이군.」
손을 털며, 히트는 일어났다.
「여길 뭉갠뒤 <엠브리온>도 상당히 혼란스러웠어. 감시를 둘만한 상황이 아니었지. 만약 도망쳤다해도 발견은 무리다.」
「하지만 만약 녀석이 살아 도망쳤다면 <교회>가 <아사인멘츠>타도를 인정하진 않았을텐데.」
루파가 두사람에게 그걸 상기시켰다.
「실질 괴멸 상태인 <솔리드>도 리더가 생사 불명인 <하운즈>도 아직 트라이브로서 존손하고 있는 상태다. <교회>가 정식으로 <엠브리온>에 의한 <아사인멘츠>타도를 인정했다는건 하리Q의 사망은 일단 확정 사항으로 봐도 된단거 아닌가?」
일리있다. 서프는 턱에 손을 얹고, 잠시 생각했다. 그럼 그 <하운즈>를 습격한 <검은 것>이 새삼 신경쓰인다. 모습이 보이지않는 아트마는 더 말할것도 없다만. 하리Q의 사망이 확정적이라고 한다면, 그 <검은 것>은 대체 뭘까.
「리더 서프.」
녹아내린 문 너머에서 구성원 하나가 숨이 찬 모습으로 나타났다.
「있습니다. 본거지 뒤쪽입니다. 모두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한건지 놀라고 있습니다. 안은 석조 수로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역시나. 안내를 부탁하지.」
구성원을 앞세우고, 서프는 히트와 루파를 재촉해 방을 나섰다.
「뭘 찾게 한거냐.」
「<엠브리온>에 있었던것과 같은, 지하수로 입구다. <교회>가 비밀 통로로 쓰고 있었다면 각 에어리어에 같은게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감각 마스킹이 벗겨진 지금이라면 여기서도 발견가능하다고 생각했어.」
「지상을 통해선 못가나?」
스와디스타나는 <하운즈>의 비슈다 에어리어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그저 그 쪽에 가는것 뿐이라면 일부러 지하로 내려갈 필요는 없다.
「그 검은 물체는 아무래도 지하 수로에 숨어 활동하고 있는 모양이니까.」
밖으로 나가며, 서프는 비쳐 들어온 바깥의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그 녀석이 하리Q가 아니라, 뭔가 별개의 것이라면 녀석에 대한 정보 수집을 행하기위해선 녀석의 활동범위에 들어가보는게 제일이잖아. 싸우게 될지도 모르지만.」
「바라던 바다.」
히트가 할짝 입술을 핥았다. 사나운 웃음아래로 날카로운 이빨이 엿보인다. 뒤쪽의 루파를 돌아본 히트가 말했다.
「당신이 죽고 난뒤 우리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실컷 보여주지. 뭐, 당신이 진짜 루파라면 말야.」
「그런 말을 들어도 난 예전일은 전혀 기억 나지 않는데.」
루파는 쓴웃음을 지었다.
「좋지. 기대하고 있으마.」
지하수로로 내려가기전 한차례 다툼이 있었다. 게일이 사전에 스와디스타나의 구성원들에게 손을 써서 몇여명 정도되는 소대를 서프에게 딸려 보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참모 명령입니다. 반드시 리더를 호위하라고.」
「그러니까 필요없다고 하는거다. 우리들은 자기 몸은 스스로 지켜.」
서프는 짜증을 냈다. 원래부터 융통성이 없는 참모형인 게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완고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엠브리온>을 나설땐 말없이 보내놓고서, 여기까지 와서 호위를 밀어붙이려드는데 고식적이다.
「어쨌든, 호위는 필요없어. 너희들은 이대로 스와디스타나 경비에 전념해라. 통신기는 갖고 있나?」
「네, 넷.」
구성원이 당황하며 내민 인컴을 들고, 서프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게일. 어찌된 일이지. 이번일은 나와 히트, 루파 셋이서 간다고 말했을텐데.」
『참모로서 역시 그러한 단독행동은 허용할 수 없다, 리더.』
잡음섞인 목소리가 무뚝뚝하게 돌아왔다.
『그 루파가, 새로운 의태 능력을 지닌 아트마일 가능성도 있다. 보이지 않는 아트마의 존재도 확인된 지금, 그가 어떤 의도로 <엠브리온>에 나타났는가는 그가 주장하는 이유만으론 확정할 수 없다. 참모인 나는 리더의 몸을 지키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한다. 당신이야말로 조금만 더 리더로서 자각을 지녀줬으면 하는 바다, 리더 서프.』
듣고 있던 히트가 히죽이고 있었다. 서프는 히트를 한번 노려본뒤, 거친 말투로 말했다.
「거기에 관해선 돌아가고 나서 얼마든 이야길 들어주지. 어쨌든 호위는 됐어. 알겠나. 리더 명령이든 뭐든, 알아서 해석해. 아무리그래도 아직 존속하고 있는 트라이브 에어리어로 들어가는거다. 열명이상을 줄줄 끌고 들어갔을 경우, 만약 생존자가 있다면 쓸데없는 분쟁의 씨앗이 될거란 생각이 안드나?」
『그게 정크야드란 세계다.』
돌아온 답변에 서프는 끽소리도 못했다.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
서프는 이를 으득이며 말했다.
「설교는 나중에 얼마든지 듣지. 구성원들은 리더 권한으로 임무를 해제하고, 통상대로 경비 업무로 돌린다. 통신은 이상. 끊는다.」
『리더』
게일은 아직 뭔가 더 얘기하려했지만, 서프는 일방적으로 스위치를 끄고 인컴을 구성원에게 내던지듯 건냈다.
「미안하군, 루파. 게일은 저런 녀석이니 너무 신경쓰지마.」
「아니, 그의 말은 타당해. 오히려 당신들쪽이 날 더 놀래키는군.」
루파는 웃고 있었다. 게일과 나눈 대화가 들리지 않았을린 없었을텐데 스파이 취급을 당한건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모양이다.
「느닷없이 에어리어 안으로 기어들어온 뉴비 하나를 이렇게까지 신용해주다니. 나한텐 당신들이 말했던 기억같은게 없으니까. 믿어줘서 기쁜게 반, 놀라운게 반이야. 뭐, 그 참모씨한텐 혼나지 않도록 힘내지.」
「그리 말해주니 고맙지만. 뭐야, 아직 뭔가 있는건가?」
구성원들이 쭈뻣쭈뻣한 얼굴로 인컴을 내밀고 있는걸 보며, 서프는 심히 질색했다.
「아뇨, 통신이 아니라.」
말을 꺼내기 힘든듯, 구성원은 입을 열었다.
「참모께선『아마 리더는 동행을 거절할테니, 그 경우엔 이 통신기를 들려보내도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치 확인이 가능한 발신기와 쌍방향에서 긴급 호출이 가능한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의 건 때문에 이쪽에서 연락할 일도 있다. 그 정도는 리더로서의 의무를 다해주었으면 한다』고…. 아, 그리고『이번엔 지난번처럼 스스로 파괴하는 행동을 엄금한다』던가…….」
서프는 말을 잃었다. 그제까지 웃음을 억누르고 있던 루파가 호쾌한 소릴 내며 웃기 시작했다. 히트가 무뚝뚝한 얼굴로「그 마네킹놈」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아무래도 당신의 패배인것 같군, 리더 서프.」
웃음을 흘리며, 루파가 직접 인컴을 받아 서프에게 건냈다.
「실로 좋은 참모인것같군. 당신네 참모는. 감사한 일이야. 참모는 최근 어딜 가도 찾을 수 없는 모양이니까.」
서프는 뚱한 얼굴로 통신기를 건네받아 성난 동작으로 귀에 끼워넣다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
스와디스타나 쪽 수로는 겉보기엔 무라다라쪽 수로와 다를바 없어 보였다. 마찬가지로 높고 돌로 만들어진 천장아래로 어두운 녹색물이 소리도 없이 흐르고 있다. 군데군데 켜진 불빛이 수면위로 흔들리고 있었다. 입구에서 사다리를 내린뒤 바닥에 발을 딛자, 구두소리가 길게 울러퍼졌다.
「여기를 지나간 기억은 있나, 루파. <엠브리온>의 무라다라로 나오기위해서 이 일대를 통과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잠깐만, 기다려줘. 보자.」
루파는 빠른 걸음으로 경사로를 내려간뒤 근처 모퉁이를 하나씩 조사하기 시작했다.
「있군.」
두 사람을 손짓해 부른다. 다가가보자, 벽 일부에 트라이브 컬러에 쓰이는 하얀 페인트 도료가 문대져있었다.
「모퉁이를 돌때마다 칠해뒀다. 돌아올수 있을진 몰랐지만, 도표를 남겨 손해볼일은 없다고 생각해서.」
「용의주도하군, 나쁘지않아.」
히트가 히죽 웃었다.
「동감이야. 그러고보니 당신도 자주 말했지, 루파.」
서프도 무심코 웃음을 띄웠다.
「『언제나 최악과 최선을 기해 행동해라. 최악을 생각하면 주의깊게 행동할 수 있다. 최선을 생각하면 대담해질수 있다.』」
「그런 소릴 했었나. 예전의『나』는. 제법 멋지군.」
무릎을 털며 일어선 루파는 기뻐해야할지 낯간지러워해야할지 모르겠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기억나지않는건가, 루파. 우리들이.」
서프는 물었다. 어딜 어떻게봐도 과거 자신들의 리더였던 남자가 자신들에 대한 기억이 없단걸 아직도 마음속 어디선가 믿지 못하고 있었다.
「전혀 기억에 없어.」
루파도 다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지니고 있는 기억은 <엠브리온>에서도 말했지만 뉴비로서 <교회>의 문을 빠져나왔을때부터야. 허나 괜찮다면 나중에라도 좋으니 당신들이 알고 있는 <나>에 대해 몇가지 좀 가르쳐줘. 조금 흥미가 이는군. 당신들 둘을 겨느리고 있었다니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였던 모양이야. 옛날의 나는.」
서프는 말없이 고갤 끄덕이고, 눈앞에 펼쳐진 검은 통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느긋이 옛날 얘기나 하고 있을때가 아니다.
허나 그런데도 기억은 되살아났다. 아트마를 얻기전, 아직 리더도 아니고, <엠브리온>이란 트라이브조차 아니였던 단순히 한 사람의 뉴비로서 <교회>의 문을 빠져 나왔을 무렵의 머나먼 기억. 남일처럼 생각되는 아트마 각성 전의 시대 중에서 당시 그 일만이 이상할 정도로 분명하게 느껴지는건 묘한 일이다. 어쩌면 눈 앞에 당시의 리더와 똑닮은 사람이 있어서, 기억이 자극을 받는걸지도 모른다.
『꿈』이 자극한 것은 『루파』가 죽는 장면, 어떤 의미로 가장 충격적인 기억이였다. 지금 『그』자체인 새로운 루파를 눈앞에 두자 관련된 기억이 슬라이드처럼 의식 심층부에서 떠올라온다.
<교회>에서 생출된 신생자들은 몇 주기(Days)를 사하스라라에서 보내며, 신병 징집을 위해 찾아온 각 트라이브에 의해 선출되 나가거나, 달리 패기가 있는 자는 몇사람 정도 부대를 짜서 새로운 트라이브를 설립, 전장에 나가 경쟁에 참가하는 등, 각자의 길을 고른다.
히트는 어느쪽을 선택할 셈이였을까. 분명 루파가 그때 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기 혼자 정크 야드로 나가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자력으로 뛰어오르는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트마 각성후의 그는 점점 더 타인의 간섭을 싫어하게 됐고, 동등하다고 인정하는 서프 이외의 지시는 코웃음치게 됐다. 틀림없이 신생 당시부터 그런 경향은 있었지만, 아트마 각성후에 단숨에 분출된거겠지.
그런 히트조차 단번에 따르게한 강력한 힘이 과거의『루파』에겐 있었다. 막 <교회>를 나선 뉴비는 에어리어 경계를 넘어 전장을 헤집고 나가기전까진 몇주기를 <둥지(Nest)>라고 불리는 사하스라라의 돔 시설에서 보낸다. 여기서 각자 기본적인 장비와 슈트, 고작 며칠이면 동나버릴 약간의 식량과 물, 핸드건과 나이프 등을 보급받는다. 각 트라이브 리더나, 그 대리가 자질이 있어 보이는 신평을 품평하러 오는것도 이 시설이다.
텅빈 운동장같은 돔 내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뉴비들이 멍하니 서있거나, 딱히 할거없이 몇몇 뭉쳐있거나 지급받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휴식을 취하는 둥 제각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모의 전투는 신체에 익숙해질만한 범위내에서만 지정된 시간에 한해 허가되지만, 지정 시간 외 미허가 상태로 대인전을 치루러 들어 승병들에게 처분당하는 자도 가끔 있었다. 혹은 다른 녀석들보다 조금 머리회전이 좋게 태어난 자가 조금 둔한 녀석들의 장비를 빼앗거나, 자고 있는 동안 목을 썰어가는 일도 있다.
사하스라라에서는 원칙적으로 전투 행위가 금지되어 있으니까 그런 행위는 전적에 카운트되진 않지만 남보다 많은 장비를 손에 넣으면 이후의 전투에서 다소 유리해진다. 게다가 뉴비때부터 그같은 사고 경향을 지닌 자는 그 뒤 정크 야드로 나설때 다소나마 우위에 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진다. 즉, 설령 사하스라라 내부에 있다해도 뉴비들에게 <둥지>란 정크야드란 연옥의 입구이며, 이미 경쟁은 시작되어 있단 뜻이다.
자고 있는 동안 목이 잘려져나간데다 지닌 장비를 송두리째 도둑맞아 죽은 사체가 실려나가는 걸 바라보고 있을때 돔안으로 들어온게 루파였다. 피를 흘리며 실려가는 목없이 헐벗은 시체를 그는 무표정하게 바라본뒤, 주위에 무리지은 신병들을 휙 둘러보고서 거기 빨간 머리에 은발. 따라와라.」하고 한마디만 고한다음 등을 돌렸다.
지명받은 이상 따르는게 뉴비의 습성이니까 서프와 히트가 그걸 따른건 별반 기이한 일이 아니다. 그저 지금 돌이켜보니 왜 루파가 자신들 둘을 골랐는지 의문이였다.
히트는 겉보기에도 전투능력이 높을것같은 외견이였지만, 서프는 체구도 작고 가늘어서 별반 강해보이지 않는 외모였다. 뉴비였던 당시라면 더더욱 그랬겠지. 왜 히트와 자신, 이였을까.
아트마가 각성하기전엔 그런 의문을 품는일조차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결국 그가 죽을때까지 묻는 일은 없었다. 허나, 지금 길 안내역으로 앞서 나아가고 있는 새로운 루파의, 당시와 다를바없는 넓은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묻고 싶어진다.
― 저기, 왜, 우리들이였지.
― 왜 당신은 그렇게 터무니없는 싸움을 했었지.
― 왜 당신은 우리들을 기를 맘이 든거지.
그 시절 루파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느끼고 있었을까. 당시의 자신들에게『느낀다』라는 능력이 있었다고 할때의 얘기지만. 2 대주기(2 years)에 약간 모자라는 최후의 그 시간을 루파는 서프와 히트와 함께 보낸뒤 죽었다. 마치 자신들이 루파없이도 싸워 나갈 수 있게 되는것을 기다리고 있었던것같은 죽음이였다.
― 왜 우리들이였지, 루파.
「멈춰.」
루파의 목소리가 생각을 잘라냈다.
단숨에 긴장을 되찾은 서프는 재빨리 루파가 가리키는 벽이 패여들어간곳에 몸을 숨겼다. 임시 엄폐물속에서 눈만을 내밀고 루파가 전방을 노려보았다.
「누군가가 온다. 숫자는―… 하난가.」
「하얀 페인트군.」
히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슴프레한 수로의 어둠 너머에서 한 사람의 남자가 불안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튜 슈트와 오른쪽 어깨 아래로 하얀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탈락한 <하운즈>의 하나겠지. 구조를 요청하고 있는게 아닌가?」
「아냐, 잘봐.」
냉험해진 루파의 목소리에 놀라 남자의 얼굴을 응시한다.
거기엔 표정이 일절 결락되어 있었다. 의지의 존재도 엿볼 수 없었다.
추욱 입을 벌린채, 보이지않는 끈으로 조종당하는것처럼 어색한 걸음을 옮기며 뒤집혀진 눈으로 있을 수 없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부는 창백하고 거의 비쳐보일 정도로 차가운 색을 띄고 있었다. 마치 수로에 괴인 물처럼 좌우 다른 방향으로 향한 안구가 희번뜩 이쪽을 향했다.
「나온다.」
루파의 세찬 꾸짖음이 귀를 때렸다. 옆에서 다부진 몸이 뛰쳐나가자, 조금 늦게 서프도 뒤를 이었다. 기묘한 감각이였다. 히트가 자신의 옆에서 전신을 긴장시키고 있다. 눈이 맞았다. 서로 쌍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읽었다. 히트는 분한듯 얼굴을 찌푸리고 뭔가를 떨쳐내듯 난폭하게 시선을 돌렸다.
히트도 느낀거다.
서프는 생각했다.
『옛날같다』고.
뺨의 심볼이 욱씬거리며 뇌리에 변신 커맨드가 내달린다.
「Go」
신호를 보낸건 루파였다. 단숨에 <바르나>의 모습이 푸른 빛속에서 나타난다. 전투 형태를 취한 서프는 마찬가지로 <아그니>로 변신한 히트와 함께 나란히 선행해 뛰쳐나간 루파를 뒤쫓았다. 남자는 돌진해오는 세사람을 발견하자, 기우뚱하고 머리를 움직였다. 축 열려있던 입이 찢어질듯 더더욱 크게 벌어졌다. 안구가 내부에서 밀려나와 공기가 새는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튀어나왔다.
동굴같은 입에서 검은 부정형의 물체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뻥뚫린 안구의 구멍에서, 콧구멍에서도, 귀에서도.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 전부에서 살아있는 검은 오물이 끝없이 뿜어져나왔다. 흘러떨어지는 진창이 금새 산을 이루고, 남자의 모습은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루파가 울부짖었다. 순수한 분노와 애도의 외침이였다. 그 부르짖음이 아직 메아리치는동안 그의 몸이 푸른 변신의 빛으로 둘러쌓였다. 화염이 소용돌이치며 접근하는 적에게 촉수를 뻗으려하는 오물의의 일부를 불태운다. 오물은 떨면서 후퇴했다.
루파였던 자는 늠름한 사지를 단단히 내딛어 서서, 창처럼 뾰족한 마리를 한번 내저어 맹렬히 으르렁거렸다.
체구는 꼬리를 포함해 5,6m에 이를 정도. 검은 강철 비늘을 심은듯 곧추선 체모, 건메탈의 광택이 등에서 옆구리까지 파도치며 흐르고 있다. 억누르지 못한 불꽃이 이빨사이로 새어나오고 있다. 꼿꼿이 선 긴 꼬리는 칼뭉치처럼 번뜩였고, 그 머리는 전부 3개였다. 중앙의 가장 큰 머리가 다시 한번 기나긴 포효를 내질렀다.
『저게, <케르베로스>.』
『하, 뭐. 괜찮군, 나쁘지않아.』
무심코 흘린 서프의 말에 히트가 응했다. 의식적으로 가볍게 내뱉은 말에 은밀한 두려움이 섞여있는걸 서프는 놓치지않았다.
현기증이 날듯한 기분이였다. 모든 것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변하지않은것이 여기에 있다. 이미 잃어버린 것이라 생각한것이. 히트를 뒤따라 적에게 돌진하면서 서프는 싸움의 고양감과는 별개로 피가 끓는것을 느꼈다.
부정형의 <그것>은 전신을 꿈틀대며 겉보기완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계속해서 촉수를 뻗어온다. <바르나>는 오른쪽손의 블레이드를 펼쳐, 뻗어오는 촉수를 썰어냈지만 기묘한 촉감에 무심코 움직임을 멈췄다. 점액질의 육체가 흐늘흐늘 변형하더니 칼을 막아, 자기 체내로 끌어드리려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불꽃이 흔들리더니, 강철색의 머리 세 개가 밀치듯이 서프를 뒤로 물렸다.
『서프, 녀석에게 물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루파의 <케르베로스>가 불길을 토해내며 끼어들어왔다.
『우리들도 이 수로를 지날 때 몇 번 정도 습격을 받았다. 격퇴하려면 불이나 다른 무언가로 녀석을 단번에 처리할 수 밖에 없어.』
『즉 쓰레기는 태워내버리는게 제일이란뜻인가.』
<아그니>의 모습을 취한 히트가 두손에 거대한 불덩어리를 띄우며 앞으로 나선다.
『꺼져.』
굉음을 울리며 두 개의 불덩어리가 동시에 <그것>을 향해 날아갔다. 기름이 튀는 소리와 비명이 뇌리를 직격했다. 대부분 비명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금속이 삐걱이는 소리다. 거품을 일으키며 타들어가는 체표면이 재와 그을음으로 화해 벗겨 떨어진다. 허나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케르베로스>와 <아그니>가 체적의 절반가까이를 태워냈는데도 <그것>은 질질 바닥을 기어 수로 안으로 도망치려하는 양상을 보였다.
『퇴로를 끊어, 서프.』
루파의 지시보다 먼저, 서프는 빙결 능력을 발동하고 있었다. 전신에 넘쳐흐르는 힘을 금방이라도 수면위로 내려가려하는 <그것>을 향해 단번에 집중시킨다. 새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며 서리가 일대를 뒤덮었다. <그것>은 다시 전신을 떨며 신음했다. 수면을 향해 위족을 뻗지만, 물에 닿은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바르나>가 내쏜 극저온이 일대의 물을 빙결시킴과 동시에 <그것>의 체적 대부분을 동결 시켰다.
<바르나>가 자세를 품과 동시에 <아그니>와 <케르베로스>의 화염이 작렬한다. 이제는 방향성조차 잃고 벽에 들러붙어 도망치려하고 있는 <그것>의 잔재가 다시 금속같은 비명을 질렀다.
미약하게 꿈틀거리기만하는 상대에게 <바르나>의 참격이 내리 꽂힌다. 동결된채 절단된 <그것>을 <아그니>와 <케르베로스>의 맹렬한 화염 소용돌이가 단숨에 불태운다. 금이 간 탄화물 덩어리가 우수수 무너져내린다. 고열로 녹은 수면에 그슬린 파편과 재가 팔랑이며 가라앉는다.
「이거 원.」
루파가 변신을 풀었다. 불을 몸에 두른 세 개의 머리를 지닌 맹수가 모습을 감춘다. 적동색 피부를 한 남자는 과거의 동료가 가라앉은 수로 옆에 서서 회한 담긴 눈으로 그 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녀석은 본거지에서 가장 먼저 그 묘한 녀석에게 먹힌 녀석이였을거다. 몇 번 이야길 나눈게 전부긴했지만, 이런 모습을 보니 기분은 안 좋군.」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루파?」
서프도 변신을 풀고 물었다.
「탈락한 동료들로 의태해, 습격해오는 일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모양이던 루파는 놀란듯 아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 처음이다. 뭐라 불러야할진 모르겠지만 <녀석>도 조금은 학습하기 시작했단 거겠지. 우리들을 습격할땐 대게 부정형의 질척한 모습 그대로였다. 사체로 의태한 적은 한번도 없었어. 기본적으로 수로를 통해 여기저기 왕래하고 있는 모양이다만.」
「아트마와는 뭔가가 다른 느낌이 들어.」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던 서프도 생각에 잠겼다.
「하리 Q때는 아직 녀석 자신이였던 부분이 있었다. 폭주 끝에 인격을 잃어버린것과도 뭔가 달라. 잘 설명할순 없지만,」
「아무래도 좋아, 그런건. 습격해오면 물리친다. 그 뿐이야.」
마찬가지로 변신을 푼 히트가 간단히 정리했다.
「너는 그리 말하지만, 히트. 내가 저녀석처럼 저 진흙에게 조종당하는 사체라면 어쩔거지.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냐.」
짐짓 얄꿎게 루파가 곁눈질했다.
「그런일은 없어.」
어깨를 으쓱이며 히트는 응했다.
「그정도로 잘 싸우는 녀석이 저런 진흙과 동류라니 있을수 없지. 그리고 당신이 정말 루파인지 아닌지와는 완전 별개의 이야기지만, 최소한 우리들과 나란히 싸워도 손색없는 녀석이란건 인정해주지.」
「그런것치곤 루파의 지시에 별다른 반발도 없이 움직이고 있던것같은데.」
서프는 그걸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트는 순간 울컥하는 얼굴을 하고서 입을 열려했지만 달리 할말을 찾지 못한듯 뚱하니 옆으로 몸을 돌리며 팔짱을 꼈다. 서프는 입가에 손을 얹고 웃음을 참았다.
「그래, 그랬지.」
갑자기 당황한듯 루파는 서프를 돌아봤다.
「그러고보니 조금전엔 미안. 리더를 두고 마치 지휘관인양 굴었어. 사죄하지. 왠진 모르겠지만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신경쓰지 말아줘.」
서프는 웃음을 참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즐거웠어. 멋대로 명령을 따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확실히 당신은 변하지 않았어. 몸은 뉴비라도 속은 우리가 알고 있는 루파야.」
「그런가.」
아직도 그닥 납득이 안가는 모양이지만, 루파는 약간 겸연쩍은듯한 웃음을 보였다.
「솔직히 자백하자면 나도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처럼 너희들과 함께 이런식으로 싸웠던 기분이 들어. 딱히 이유가 있는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 들어서 말야.」
「서두를 필요 없어.」
기묘하고 따스한 기분으로 서프는 말했다.
「생각해내지 못해도 상관없어. 당신은 살아서 여기에 있어. 그걸로 충분해. 갈까, 루파. 히트. 조금만 더 가면 비슈다의 지하 부근이야.」
3
루파가 남긴 마카를 따라가자, 비슈다 에어리어는 바로 코앞이였다. 어긋난 맨홀 뚜껑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사다리는 뒤틀려, 그 주위로 그 <검은 것>이 남기고 간걸로 추정되는 악취나는 찌꺼기가 들러붙어있다. 서프는 무심코 얼굴을 찌푸렸다.
「여기를 나갈때와 달라진 점은, 루파.」
「글쎄. 여하간 대혼란이였으니까. 하지만 기억하기론 이렇다할 변화는 없는것같아. 다만, 나갈땐 주의해. 모습이 보이지않는 아트마 소유자에 대해서도 잊지마.」
서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사다리를 올랐다. 발밑에서 부식된 금속이 기분나쁜 소리를 내며 삐걱인다. 뚜껑을 밀어올려 내던지자, 주위의 참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내려선다. 발목이 소리를 내며 진창에 잠겼다. 들어올리자, 끈적한 검은 오물과 피가 섞인, 토악질나는 진창이 들어붙었다. 썩은 내와 신 내가 충만해서 숨쉬는것도 괴롭다. 서프는 무의식중에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히트마저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사체는 먹힌건지, 아니면 이미 분해된건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저항의 흔적이 있었던 스와디 스타나 본거지와 달리 펼쳐져있는건 그저 일방적인 학살의 흔적이였다.
벽이나 지면에 탄흔과 허물어진 흔적은 몇 개 남아있지만, 떨어져있는 총은 대부분 발포한적이 없었다. 거무죽죽해진 지면엔 어지럽게 남은 발자국만이 보인다. 아트마를 해방할 틈조차 없이, 발포조차 못한채 순식간에 죽임당해 간걸로 보이는 흔적이 군데군데 엿보였다.
「스와디스타나때 이상이군.」
망토자락으로 코를 가린 히트가 뚜렷하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항도 못했으니까.」
마지막으로 올라온 루파가 침통한 얼굴로 덧붙였다.
「정신차리고보니 수십명이 찢겨나가 조각났다. 무턱대고 발포해봤자, 벽에 맞거나 동료를 쏠 뿐이였어. 그런 와중 <보이지않는 아트마>는 우리들을 비웃듯이 계속 이동해가며 죄다 죽였다. 리더를 데리고 나오는게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우리도 녀석의 먹이가 됐겠지.」
「리더를 데리고 나온뒤 그 <보이지 않는 아트마>는 쫓아오지 않았나?」
「물론 경계는 했지만……, 그러고보니 묘하군,」
루파는 생각에 잠겼다.
「그만큼 짧은 시간동안 구성원들의 대부분을 죽였어. 남은건 우리들 30명정도 뿐. 추적해서 죽이면 완전히 <하운즈>는 끝날 참이였는데, 녀석은 굳이 쫓아오지않았어. 탈출 직전엔 그 <검은 녀석>이 습격해와서 그걸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고.」
「<보이지 않는 아트마>와 <검은 녀석>엔 아무런 관계도 없어보이는데.」
「이건 내 추측이지만,」
루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 아트마>는 활동시간에 한계가 있다거나 뭔가 사정이 있어서 어쨌든 빨리, 대량으로 죽이는것만이 목적이였을지도 몰라. 생각해보면 녀석이 구성원들을 죽이고 간건 불과 15분이나 20분 정도에 지나지않았어. 아트마 활동 한계치곤 다소 짧단 생각이 안드나.」
서프와 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통상 아트마 보유자는 짧게 대여섯시간, 길게는 반나절 이상 아트마 형태로 활동가능하다는게 게일이 통계를 통해 명백하게 추론해낸 사실이였다. 활동이나 받는 데미지에 따라 변신이 강제해제되는 경우는 있지만 데미지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그 한계가 15~20분이란건 너무나도 짧다.
「게다가 보이지않는 녀석에겐 나름 인격같은게 느껴졌지만, <검은 녀석>에겐 대화를 나눈다거나 교섭을 행한다거나하는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지성이 있어 보이지 않았어. 어쩌면 <검은 녀석>도 다른 자가 조종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둘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존재로 생각해야한다고 본다.」
「<교회>일까.」
「글쎄.」
히트가 난폭하게 말했다.
「그『엔젤』인가 뭔가하는 녀석이 잘난척 나선 이후로 <교회>도 영 신통찮아졌어. 어쩌면 <교회>는 녀석의 지배하에 들어가있는걸지도 모르지. 그쪽은 거의 소식이 끊겼기도하고.」
그랬다. 아트마 현상이 일어나기 이전엔 정크 야드의 통솔자이며 조정자로서 확고한 존재였던 <카르마 교회>가 근래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는것을 서프도 느끼고 있었다. 이전엔 30주기(1 month)에 2번 이상 정기보고와 집화를 요청해, 트라이브간의 조정이나 정전 명령에도 민첩하게 반응해온 <교회>는 아트마 발현과 그 대성당에서 있었던 기이한 회견이래, 직접 행동을 취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이쪽에서 시스템에 액세스할 수 있고, 사하스라라의 <교회> 본부는 변함없이 승병들이 엄중히 경계하고 있다. 허나 <규정>의 쇠퇴와 때를 함께해 정크 야드의 주민들 사이에서도 <교회>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및 숭배는 사라져가고 있다. <엠브리온>과 <메리벨>의 동맹 등, 이전이라면 당장 <교회>가 정전명령을 내려왔을 사건에도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다.
변해간다.
서프는 그리 생각했다. 그게 어딜 향해가는지는 모른다는 불안이 순간 강하게 가슴을 찔렀다.그때, 마치 마음속을 읽힌것처럼 루파가 커다란 손을 서프의 어깨에 얹었다.
「뭐, 너무 걱정하지마.」
루파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들은 살아있어. 살아서, 여기에 있어. 우선은 그게 가장 중요하지. 살아있지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잖아.」
「그렇군…」
겁먹었던 마음이 절로 힘을 되찾는것을 느끼며 ,서프는 감사를 담아 루파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운즈>의 리더가 살아있다면 찾자. 아직 <교회>의 사망인정이 내려오지않았어. 구출할 수 있다면 구하고 싶어.」
허나 기대는 어긋났다.
어딜 둘러봐도 거무틱틱한 피와 악취를 풍기는 검은 찌꺼기가 들러붙은 <하운즈>의 본거지를 걷던 도중, 그것을 발견한것은 루파였다.
「무슨 일이지, 루파.」
재빠르게 아트마를 해방하려드는 히트를 날카로운 손으로 저지하고, 입구의 무너져내린 오두막안으로 신중이 들어갔다. 콘크리트 건물은 녹아 변형되어, 검은 찌꺼기가 곰팡이처럼 빼곡히 눌러붙어있다. 손으로 걷어내자, 후드득 흘러떨어지는 찌꺼기에 얼굴을 찌뿌리며 서프와 히트가 루파의 뒤를 따랐다. 루파는 폐허가 된 방안 깊숙한곳 한구석에 쭈그려앉아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파, 뭐지? 뭔가 있나?」
루파는 어깨를 움직여 자신이 보고 있는걸 말없이 두사람에게 손가락질해보였다. 히트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고, 서프는 무심코 입을 막았다.
묻혀 있는건 마치 녹은것처럼 길게 번형된 밀랍 모형같은 인간의 얼굴이였다.
남자인 모양이지만, 알수있는건 거기까지다. 살아있는것처럼 입을 뻐끔뻐끔 여닫고 있으나, 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흑백을 잃은 눈은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가고 있으나 이미 뭔가를 보고 있는것 같진 않았다. 주위엔 그 검은 찌꺼기가 두텁게 굳어있지만 도저히 인간 하나의 몸이 파묻힐 용적은 아니다. 그저 얼굴뿐.
「<하운즈>의 리던가.」
「그래. 카니스 볼크.」
침통한 목소리였다. 짧은 기간이라하나 한번은 리더로서 받들었던 남자의 무참한 모습을 눈에 담는건 괴롭기도 하겠지.
「아무래도 그 <검은 녀석>은 집어삼킨 인간을 녹여 자기 안으로 흡수해버리는 모양이군. 남아있는게 기적같은 일이야. 살아있던 것도. 전부 녹아 버리는것 중에 어느게 더 나을진 도무지 말못하겠지만.」
변형된 남자의 얼굴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뒤틀린 입술에서 침이 흘러 떨어지며 길게 늘어진다. 서프는 몸을 굽혀 귀를 기울였다.
― 죽여, 줘
잔뜩 쉰 목소리는 그렇게 들려왔다.
― 죽여, 줘. 죽게, 해줘.
― 끝내, 줘.
서프는 일어나서, 움직이지않는 루파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의 바램을 들어주고싶어. 당신이 하겠나. 아니면, 내가?」
「그래.」
한번 놀라 몸을 떤 그는, 이전의 리더에게서 눈을 때지 않고서 천천히 일어섰다.
「네게 맡기마, 서프.」
낮은 목소리였다.
「적어도 내겐 리더였던 상대다. 게다가 다른 트라이브 리더에게 죽는 쪽을 더 바랄거야. 그 역시 정크야드의 인간이니까.」
서프는 고개를 끄덕위고서, 말없이 오른쪽팔의 아트마를 해방했다. 팔꿈치 아래로 새파란 빛이 흔들리더니 새하얗고 장대한 칼날이 소리를 내며 뻗어 나왔다. 루파와 히트는 한발짝 물러나 지켜보고 있었다. 서프는 팔을 들어올린뒤, 단숨에 카니스 볼크였던 자의 안면에 칼을 찔러 넣었다.
마지막으로 새어나온 한숨은 안도의 숨결이였는지도 모른다. <하운즈>의 리더, 카니스 볼크는 천천히 눈을 감고, 서프의 칼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맥없이 먼지가 되어 무너져내리며 바닥에 뒤엉켰다.
「개같군.」
히트가 혀를 차며 한마디 내뱉었다.
「이런건 싸움이 아냐. 이렇게 죽는것도. 싸우다 죽는거라면 괜찮아. 하지만 진흙에 얼굴만 파묻혀 남아 남한테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되다니, 생각만으로도 열불나는군. 누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거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말없이 서프는 오른팔의 변신을 풀고, 칼을 거두었다. 루파는 먼지가 된 과거의 리더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을 깨부수듯, 콜이 울렸다. 서프는 손을 귀에 얹었다.
「게일인가. 무슨 일이지?」
『현재 마니프라와 무라다라의 경계지에서 적과 교전중, 리더.』
희미하게 긴장한 게일의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적은 믹 더 닉. 그리고 <블루티쉬>의 구성원. 도주 후, 배트와 닉은 <블루티쉬>에 투항해 원호를 요청한 모양이다. 어디서 샌건진 불명이지만 그들은 세라에 대해 알고 있다. 지금 즉시 귀환을 요청한다.』
「뭐라고?」
좀 더 사정을 들으려했지만, 강한 노이즈에 의해 통신은 그걸로 끊겼다. 창백한 얼굴로 인컴을 끊은 서프를 향해 루파와 히트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지?」
「세라의 정보가 적에게 샜어.」
「뭐라고?」
안색을 확바꾸는 히트의 모습에 세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루파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라? 그건 뭐지? 상당히 중요한것 같은데.」
「이러고 있을때가 아냐, 루파.」
서프는 이미 출구를 향하고 있었다.
「탐색은 일시중지다. 분명 게일은 이쪽에 전령을 파견했겠지만, 그래도 서두르는게 좋아. 세라를 빼앗긴 뒤엔 모든게 늦어.」
「뭔진 모르겠지만.」
루파가 뒤를 쫓아와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나도 도우게 해줘. 리더의 생사를 안것만으로도 이젠 충분해. 장소는 어디지? 무라다라와 마니프라 경계지역이라고 들었는데.」
「그래. 통신이 회복되면 좀 더 자세한 좌표를 전해줄텐데….」
「그럼 가자. 여기선 사하스라라를 가로질러가는게 제일 빨라.」
루파의 모습이 푸르게 불타더니, 세 개의 머리를 지닌 마수의 거체가 모습을 드려냈다. 강철색의 갈기를 곧추세워 몸을 떨며 길게 포효한다.
『내 <케르베로스>라면 인간형인 너희보다 빠르다.』
중앙의 가장 큰 머리가 불꽃섞인 숨결을 토해내며 말했다.
『타라. 이번엔 내가 너희의 도움이 될 차례다.』
4
<케르베로스>는 빨랐다. 자피아의 <스핑크스>와 동등하거나 혹은 근소하게 그를 웃돌지도 모른다. <케르베로스>의 체격이 <스핑크스>의 2배 이상이란걸 생각해보면 놀랄 정도다. 게다가 지금은 서프와 히트, 두사람의 남성을 등에 태우고 있다. 숨하나 허덕이는일없이 비슈다를 내달려 사하스라라를 가로질러, 마니프라에 도달한것은 불과 30분 정도였다. 경계선을 넘었을때 노이즈가 울리더니 통신이 회복됐다.
「게일인가. 상황은 어떻지?」
『아직 버티고 있다. 허나 한시라도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
게일의 목소리에 긴장의 색이 다소 짙어져 있었다.
『좌표는 NNP-a-632. <메리벨> 본거지에서 남동 2km 장소다. 처음 마니프라로 그녀를 이송하려했을때 습격당했다. 현재 지나나와 알지라가 선두에서 적들을 막고 있다. 자피아를 그쪽으로 보냈다. 지금 어디에 있지?.』
「이미 마니프라에 들어와있다. 이쪽 좌표를 전달하지. 자피아에게 그쪽으로 오도록 말해줘.」
통신을 끊음과 동시에 높이 솟은 콘크리트 언덕 위에서 힐끔 황금색의 갈기가 움직였다.
『리더 서프! 무사하십니까!!』
「왔나, 자피아. 빠르군.」
『마니프라에 들어오셨을때부터 냄새가 났습니다. 그걸 쫓아.』
튀듯이 다가온 그녀의 황금색 사지에서 짙은 피냄새가 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상당한 수의 적을 죽여온 모양이다. 입가는 피로 얼룩져있고, 손톱사이로 그녀의 것인지 모를 피가 흘러떨어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금색 털로 뒤덮인 여자의 얼굴이 경계심 섞인 표정을 지으며 본적없는 아트마를 바라보았다.
『이, 자는…』
「그렇지.」
서프는 깨달았다.
「그는 루파다. 원래는 <하운즈>의 구성원으로, 아트마는 <케르베로스>. 비슈다에서 여기까지 우릴 태워다줬어.」
『이야기하고 있을 틈이 없다 ,서프.』
불꽃과 함께 숨을 토해내는 거대한 짐승의 모습에 <스핑크스>는 놀란듯 뒤로 물러섰다.
『일각을 다투는 사태지? 너는 그녀를 타고 스피드를 올려라. 나도 히트 하나라면 좀 더 빨리 달릴 수 있어.』
「알겠어. 부탁할 수 있겠나, 자피아?」
『알겠습니다.』
일단은 본적없는 아트마가 적이 아닌것같아 만족한 모양이다. 자피아는 냉큼 엎드려 서프가 등에 타기 쉽도록 자세를 만들었다. 짐이 가벼워진 루파는 히트를 태운테 몸을 부르르 떨며 등을 젖혔다.
『안내 부탁하지. 피라미는 나와 히트가 맡겠다. 한시라도 빨리 리더 서프를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는것에 전념해라.』
『알겠습니다.』
어느샌가 자피아의 말투가 리더에 대한 것으로 바뀐것을 깨닫고, 이럴 겨를이 아니란걸 알면서도 서프는 은밀히 즐거워했다. 그『루파』가 지니고 있던 리더쉽, 아무런 말이 없어도 남을 끌어들이는 존재감은 역시나 건재한것같다.
두 마리의 짐승은 맹렬한 스피드로 달리기 시작했다. 자피아의 속도는 이미 경험한 것이였지만, 짐을 덜은 루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다. 자피아가 놀라는게 전해져왔다. 그녀의 길안내를 받기 위해 속도를 킵하고 있지만, 등에 실은것도 없이 전력으로 질주하면 자피아의 <스핑크스>는 눈깜짝할 사이에 뒤로 쳐지고 말것이다. 가뿐히 뒤따라오는 <케르베로스>의 모습에 서프는 자긍심을 느끼며, 자피아에게 조금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월감 섞인 기쁨을 품었다.
전장까지 1km남은 곳에서 적과 조우했다. 자피아가 순간 멈춰 코를 찌푸리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일대는 폐빌딩이 많은 지역으로 복병을 두기엔 절호의 포인트였다. <스핑크스>가 불러일으키는 바람이 건물의 파편을 감아올려, 샛노란 모래먼지가 LT의 마젠타색 빛을 흐린 색으로 부옇게 물들였다. 입을 벌린 콘크리트 폐허더미에서 밧줄을 타고 수십명의 적병들이 강하해오고 있었다.
마킹은 인디고. <블루티쉬>
질주하는 두 마리의 짐승을 보자마자 제각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엠브리온>의 리더 및 부관을 발견. 그 외 2명의 상위 아트마 동행.」
「지금부터 전투에 돌입한다. 각자 아트마 기동.」
『신경쓰지말고 달려, 자피아. 녀석들은 우리가 해치운다.』
<케르베로스>가 포효했다. <스핑크스>는 고개를 끄덕인뒤 돌아보지도 않고 서프를 태운채 힘껏 도약했다.
그 순간 불꽃의 파도가 지면을 뒤덮었다. 변신을 채 마치지 못한 <블루티쉬>의 구성원들이 불타오르는 불꽃인형이 되어 두, 서넛 비틀거리며 무너진다.
서프와 <스핑크스>는 약간 높은 빌딩 잔해위에 내려서서 등뒤를 돌아보았다. 둘 모두 불꽃과 소용돌이 치는 불덩이를 휘감고 당당히 전장에 서있다.
『가라, 금방 쫓아가마.』
기죽은듯 서있던 <스핑크스>는 단박에 뛰어내려 서프를 태운채 잔해의 경사면을 질주했다.
***
『리더.』
도착한 서프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알지라였다. <프리티비>의 모습을 취한 그녀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적을 쓰러트린건지 채찍같은 양팔을 피웅덩이에 적신것처럼 새빨갰다.
『늦지 않아어. 어서, 세라가―….』
「수고 많았어, 자피아. 세라의 수색과 보호를 부탁하지.」
그 말만을 남기고 서프는 짐승의 등을 걷어찼다. <스핑크스>가 몸을 낮추고 뜀박질해 적속으로 파고든다. 뇌리로 변신 커맨드가 소용돌이치고 순식간에 푸르스름한 <바르나>가 강림한다. 아트마 화(化)한 <블루티쉬>의 구성원들이 지닌 각양각색의 인지 기관들이 일제히 착지한 서프를 향했다.
『<엠브리온>의 리더 발견.』
『검은 머리 소녀와 함께 포획해라. 죽이지마라. 알겠나. <대령>의 명령이다.』
<대령>?
순간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런걸 신경쓰고 있을만한 상황이 아니였다. 두손에 쌍검을 쳐든 검붉은 괴인이 괴성을 내지르며 덥쳐들었다. 드려내놓은 피부에는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치켜뜬 눈은 동공없는 금밀색이다. 조건반사적으로 두 팔의 블레이드를 움직여 일격으로 상대의 검과 함께 그 육체를 두동강냈다.
두명째, 세명째가 동시에 덤벼든다. 블레이드를 휘둘러내리며 물흐르듯 위쪽으로 빛의 궤적을 그렸다. 십자로 찢겨져나간 여덟 개의 고깃덩어리가 피를 흩뿌리며 튀었다. 혀가 쑤신다. 손안에 떨어진 살코기를 물어뜯어 집어삼켰다. 달콤한 피와 살. 그 안에 감춰진 에너지가 순식간에 전신으로 스며든다.
『포위하라! 동시에 공격해!』
멀리서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호통치고 있다. <바르나>가 환희의 노래를 부른다. 먹은 적의찌꺼기를 내던지고 빙결의 선풍을 일으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밀집 대형을 취하려하고 있던 마신들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다. 몸을 떨며 얼음을 털어냈을때엔 이미 눈 앞으로 죽음의 칼날이 육박해 있었다. 바람에 춤추듯이 머리가 튀었다. 분출된 피는 그대로 진홍색 기둥이 되어 그 자리에 얼어붙고, <바르나>의 착지와 동시에 빛나는 진홍의 얼음 파편이 되어 지면으로 무너져내렸다.
필사적으로 외치는 지휘관의 목소리는 아직 들리지만 <바르나>의 노래소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힘에 충만해있었다. 두개골속에서 울러퍼지는 전투의 개가(凱歌)에 이끌리듯 <바르나>는 죽음의 스탭을 밟았다. 한번 내딛을때마다 손발이 튀고, 몸이 잘려나가고, 얼음 덩어리가 된 몸이 맥없이 으깨졌다. 환희에 젖어 죽음의 윤무를 밟아내는 <바르나>의 의식 저변에서 서프는 세라의 존재를 찾고 있었다. 어디에 있지? 가까이서 느껴진다. 괜찮다. 아직 의식은 있다. 무서워하곤 있지만 부상을 당하진 않았다. 지금은, 아직.
시야가 열렸다. 피와 규환이 뒤엉킨 전장 속에서 단 하나 정숙과 빛으로 뒤덮인 장소가 있었다. 그 중심에서 찬란히 빛나는 피부를 지닌 여성향 아트마의 품에 안겨 그 가슴에 고개를 파묻은 작은 체구의 소녀의 모습이 있다. 주변엔 빛을 반사하는 불가침 영역이 존재하는듯, 침입하려드는 적 아트마의 무수한 시체가 그 주위일대에 구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접근하려하는 자는 잇달아 보이지 않는 침에 급소를 꿰뚫려 절명해간다.
『지나나, 나야. 서프다.』
「서프?」
고개를 파묻고 있던 세라가 희색을 띄며 고개를 들려했다.
「서프, 서프야? 와줬구나.」
『쉿. 안돼. 아직 밖을 봐선.』
상냥한 손짓으로 소녀를 살짝 저지한 자는 지나나의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달리해 단호한 동작으로 이쪽을 향한건 <메리벨>의 리더, 지나나의 상위 아트마 <우샤스>의 빛을 발하는 얼굴이였다.
『보다시피, 리더 서프.』
작은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엔 괴로움이 담겨 있었다.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건진 모르겠지만 그들은 세라를 알고 있다. 그녀의 피에 대해서도. 게다가 그들은 그녀뿐만 아니라 너까지 노리고 있다. 그것도 죽이는게 아니라 산채로 사로잡기 위해서.』
『나를?』
서프는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하운즈>가 무너진 지금 <엠브리온>을 중심으로 한 연합과 대치하는건 <블루티쉬> 오직 하나 뿐이다. 언젠가 패권을 다투게 될지 모르는 적 트라이브를 두려워한 상대가 미연에 서프를 처리하려드는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허나 산채로 사로잡으라니. 대체 무슨 의민지 모르겠다.
『맞아, 애송아.』
천박하고 메마른 목소리가 느닷없이 등뒤에서 들려오더니 격한 충격에 서프는 튕겨날아갔다. 지면에 부닥치기 직전에 휙하고 몸을 뒤집어 자세를 다시 갖춘다. 시야에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들어오는게 보였다.
『잘도 우릴 속였겠다, 앙? 그 상자는 단순한 잡동사니만 채워넣었다던데. 덕분에 이쪽은 완전 체면 구겼지.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 진짜 피를 지닌 <흑발의 계집>과 네놈을 산채로 <블루티쉬>로 갖고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목이 날아가게 생겼어.』
『세라는 그렇다쳐도 나까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모르지!』
<라후>가 울퉁불퉁 각진 양팔을 치켜들었다. 가위형태의 팔 사이로 선풍이 일고 칼날같은 용권이 서프를 향해 쇄도해왔다. <바르나>가 으르렁거리며 가벼운 걸음으로 옆으로 피했다. 용권은 옆쪽 지면에 직격해 큰 구멍을 뚫었다. 동시에 세라를 보호하고 있던 지나나가 <우샤스>의 머리칼 일부를 창처럼 뻗었다. 두 번째 공격을 쏘려하던 <라후>의 어깨에 창이 직격해 조준이 어긋났다. 빗겨나간 용권에 직격당한 차량의 잔해가 호쾌하게 짜부라졌다. <라후>는 별달리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창에 찔린 어깨를 쓰레기라도 치워내듯 털었다.
『왠진 모르겠지만 바론 오메가는 완전히 맛이 갔어. 갑자기 자기는 바론이 아니라 <대령>이라고 부르라는 소릴 지껄이기 시작했다구. 엄청 거친 모양새로 구성원들에게 역성을 내는 덕에 이쪽은 실로 민폐야.』
『그런건 내 알 바 아냐. 세라는 못넘겨. 이 비겁자.』
미끌어져 들어온 알지라가 거구의 <라후>의 발치를 향해 혼신의 힘을 닿나 중력제어를 시도했다. <라후>의 거구가 기울린다. 『오오오오…』하는 신음 소리를 내며 두 팔을 휘적이고 버둥거리는 <라후>의 허리 아래쪽이 서서히 지면으로 가라앉아간다. 휘말려든 주위의 폐허가 일그러지고 함몰되어, 일대를 끌어들이며 뒤틀려간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적을 향해 <우샤스>의 머리칼, <프리티비>의 채찍같은 두 팔, <바르나>의 참격이 집중된다.
<라후>의 웃음이 한층 더 커진듯이 보였다.
『지금이다, 가라, 배트!』
뭐?하고 생각했을땐 이미 늦었다. 세라의 비명이 울러퍼졌다. 믹을 공격하기 위해 구멍이 뚫린 <우샤스>의 절대 영역으로 검은 그림자가 눈에 보이지 않을 스피드로 침입해 <우샤스>를 차서 넘어트린뒤 그 가슴팍에서 소녀를 빼앗았다.
『배트!』
바로 일어선 <우샤스>가 하늘을 나는 그림자를 향해 격앙의 외침을 내질렀다. 초승달모양의 빛의 칼날을 연이어 내쏜다. 이어 머리를 한번 휘두른뒤 펼친 머리칼을 한다발로 묶어 만들어낸 필살의 창으로 과거 부하였던 남자를 찌르려들었다. <카마손>의 찢어진 입에서 의기양양한 외침이 울러퍼졌다.
『전원 움직이지마. 움직이면 이 여자의 얼굴을 찢어놓겠다.』
모두의 움직임이 얼어붙은듯 멈췄다. <카마손>은 두 다리로 세라의 양팔을 움켜쥐고 그녀를 허공에 매달았다. 세라는 입술을 깨물고 필사적인 얼굴로 발버둥치고 있지만, 아득한 공중 높은곳에서 불안정한 자세로 매달린 상태로 아트마 보유자의 힘을 뿌리칠 수 있을리 없었다.
믹은 숨을 내쉬고, 읏샤하는 구령을 신호삼아 느릿느릿 지면의 구멍에서 기어나왔다.
『늦잖아, 배트. 잘못되는줄 알고 조마조마했다구.』
『나한테 지시하지마. 언제가 좋을진 내가 정한다.』
쌀쌀맞게 대답한 배트, 검은 날개의 아트마 <카마손>은 얼어붙은 일동을 둘러보며 낙담한듯 혀를 찼다.
『그 빨간것은 이번에 없나. 시시하군. 보면 바로 갈기갈기 찢어놓으려 했는데.』
『세라를 돌려줘, 배신자.』
참지 못하고 알지라가 외쳤다.
『말하면 순순히 돌려줄것 같았나, 멍청하군.』
배트는 냉소했다.
『덤으로 너희들 리더도 받아가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산채로 데려오란 주문이야. 자기 손으로 고깃조각이 될 때까지 갈기갈기 찢어내 집어삼키고 싶은 모양이더군.』
『난 바론 오메가를 만난적이 없어.』
분노를 억누르며 서프는 말했다. 대성당에서 쉐이드 너머로 희미한 그림자를 본 기억은 있지만 그건『만난』것엔 들지 않겠지.
『그렇겠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더라면 한숨 한번 정돈 쉬었을 것이다. 배트는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목을 으쓱이는듯한 행동을 취했다.
『나참, 뜬금없다니깐. 그 묘한 교회놈이 오고 난뒤 녀석은 완전히 변한것 같으니까. 자기는 죽임당했다던가, 이 세계는 지옥이라던가, 너희들은 모두 죽은 인간이라던가하는, 헛소리만 지껄이고.』
『교회, 녀석이라고?』
문득 감이 번뜩였다. 서프는 무심코 입밖으로 말을 꺼냈다.
『설마, 그 교회의 인간이 세라에 대해 가르쳐준건가?』
『어이쿠, 너무 떠들었군.』
짐짓 꾸민듯한 동작으로 입을 가리며 <라후>의 모습을 한 믹은 <카마손>에게 손을 흔들어 살아있는 <블루티쉬>구성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모인 인원을 보고 코웃음친다. 상처입지 않은 자는 거의 없다.
『뭐야, 겨우 요거밖에 안남았나. 몇 안되는 상대로 무슨 꼬라지야. <블루티쉬>의 이름이 울겠군.』
생존자들 사이에서 이가는 소리가 들렸다. 적어도 정크야드 제 1위 트라이브의 구성원이나 되는 존재가 원래는 트라이브의 일원도 아니고, 자기 트라이브에서조차 쫓겨난 이런 쓰레기한테 턱짓으로 부림당한다는건 상당히 굴욕적이겠지.
『자, 아트마를 거두고. 이쪽으로 와주실까. <엠브리온>의 서프. 안 그럼 어찌될지 알고 있겠지?』
「안돼! 오면 안돼, 서프!」
공중에서 세라가 있는 힘껏 저지한다.
「오면 안돼, 오지마, 서프. 서프!」
서프는 말없이 변신을 풀었다. <바르나>가 사라지고 은발의 청년이 모습을 드려냈다.
『리더!』
『리더 서프. 진심인가?』
알지라와 지나나가 각기 말했다.
「지금은 이러는것 말곤 방법이 없어.」
서프는 이를 깨물며 답했다.
「지금 여기서 죽임당하는게 아냐. 세라와 함께 어떻게든 탈출의 기회를 노리겠어.」
『똑똑하군.』
<라후>는 만족스러운듯 가위같은 손을 비비적거렸다.
『그에 대한 상으로 하나, 네놈의 트라이브가 괴멸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여줄까나. 슬슬 배도 고프던 참인데. 거기 여자둘은 제법 맛나보이고 말야. 지나나는 옛날부터 한번 먹어보고 싶었어. 좋은 여자지.』
<우샤스>의 머리칼이 혐오와 굴욕으로 꿈틀댔다.
『이런』
그걸 본 <라후>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뭐, 보고 있으래두. 이 믹님께서 <라후>의 능력을 잔뜩 맛보여준뒤에 죽여줄테니까. 재미없진 않을꺼야. 뭣보다 자기 육체가 먹히는 모습을 그 눈으로 관찰하며 죽을 수 있는거니까, 오.』
서프가 몸에 지닌 인컴에 시선을 멈춘다.
『그건 통신긴가. 마침 잘됐군. 지금부터 그걸로 본거지에 남아있는 녀석들도 불러. 예의 보통이 아닌 참모만이라도 상관없어. 녀석한텐 한탕 당했으니까, 자기네 리더 눈 앞에서 그걸 똑똑히 깨닫게 해주는것도 나쁘지 않지.』
서프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쓰레기.』
알지라가 분노에 몸을 떨며 토해냈다.
<라후>는 거구를 흔들며 역겨운 웃음소릴 냈다.
「서프! 모두들!」
세라가 발버둥치며 필사적으로 외친다.
「부탁이야, 그만둬!」
『시끄러, 계집.』
배트가 으름장을 놓았다. <카마손>의 손톱이 그녀의 눈앞으로 다가선다.
『상처없이 데려오란 소린 없었어. 정말로 얼굴이 찢겨나가고 싶나? 눈알 하나라도 파내줄까?』
협박하며 꿈틀대는 검은 발톱을 세라는 똑똑히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눈물은 고여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이거, 놔……」
『앙?』
거대한 귀를 꿈틀대며 <카마손>의 얼굴이 소녀를 들여다본다.
『지금 뭐라고 했지? 그런 소릴 지껄일만한 입장인 줄……』
『날, 놔.』
칠흑의 눈동자가 순간 기이한 빛을 띄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누군가가 가는 손가락을 쑤셔넣은것만 같았다. 서프는 비틀거리며 눈앞의 풍경이 기묘하게 일그러지 다시 되돌아오는것을 보았다. 일그러진 노이즈가 모래폭풍처럼 시야를 스친다. <카마손>이 걷어차인것처럼 비틀댔다. 세라를 쥐고 있던 다리가 느슨해졌다. <카마손>에서 벗어난 세라의 몸이 낙하한다. 기묘하게 원만한 움직임이였다. 마치 기름속으로 가라앉는것처럼. 작은 몸이 지면을 향해 떨어진다.
『너, 이녀석, 배트. 무슨 짓이냐.』
『아? 아, 아…… 나, 는………』
배트 자신조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였다. 세라가 떨어지는것과 동시에 서프는 움직이고 있었다. 단숨에 <바르나>로 모습을 바꿔 전신의 힘을 다해 지면을 박찬다. 세라가 떨어지는 지점을 향해 <바르나>가 돌진한다.
『그렇겐 못해.』
제정신을 되찾은 배트가 맹추격한다. 세라는 정신을 잃은건지 비명조차 지르지않았다. 근소하게나마 공중의 <카마손>쪽이 빨랐다. 조금만 더 있으면 검은 날개와 소녀가 교차한다.
『세라한테 무슨 짓이야, 너!』
하늘 저편에서 보랏빛의 뇌광이 번뜩이더니 배트를 일직선으로 꿰뚫었다. <카마손>은 절규한뒤 옆으로 미끌어지더니 어찌어찌 태세를 재정비했다. 간신히 추락은 면했지만 날개에 구멍이 뚫렸으며 뇌광에 꿰뚫린 옆구리 주위가 연기를 내며 타고 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지?』
낙하하는 소녀를 향해 서프는 손을 뻗었지만, 찰나의 차이로 시간이 늦었다. 바닥과 충돌한다. 그리 생각한 순간, 흑철색의 모피가 물흐르듯 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털썩하는 소리와 나더니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세라의 것이다.
『어찌어찌 늦지 않았군.』
강철색의 마수, <케르베로스>가 옆쪽 작은 머리를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작게 불길을 토한뒤, 웃는듯 살짝 이를 드려내보인다.
『아무래도 아슬아슬했던것같은데, 모두 무사한가.』
『루파!』
그를 뒤쫓듯이 굉염의 소용돌이가 전장으로 뛰쳐들어왔다. 모여있던 <블루티쉬>의 구성원 몇몇이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채 불꽃에 휘말린다.
시끄럽단듯 머리를 한번 저어 유유히 일어선건 넓은 어깨에 불꽃을 두르고 전신에 전의를 표출하고 있는 진홍의 <아그니>였다. <아그니>의 머리 두 개가 용맹한 웃음을 흘렸다.
『즐길만한 장소는 여긴가. 아직 먹을게 남아있는것같군』
『네 이놈, 그 빨강머리!』
상처입은 <카마손>이 짖는다.
『아아, 누군가했더니 본적 있는 찌꺼기가 있군.』
줄지어선 <아그니>의 아빨이 한층 더 크게 모습을 보였다.
『잘됐어, 이번에야말로 뼈한조각 안남기고 먹어치워주지.』
답은 분노로 날뛰는 포효가 되어 돌아왔다. 크게 벌어진 <카마손>의 입에서 보이지않는 음파가 연달아 쏘아져 나온다. 허나 그들 전부 <아그니>가 던진 소용돌이에 삼켜졌다.
재차 공격하기위해 입을 벌리려하던 참에 새로운 불덩어리가 닥친다. 구강에 제대로 작렬했다. 공격은 부정확한 신음으로 변했다. 찢겨진 날개를 퍼득여 상공으로 도망치려하지만 고도가 부족하다. 뒤를 쫓아온 불꽃을 날개로 어찌 튕겨냈지만 찢어진 날개로 완전히 방어하는건 무리였던것같았다. 불에 데일때마다 훌쩍 고도가 낮아졌지만 버둥이는 움직임으로 필사적으로 상공으로 기어오른다.
『놓칠까보냐』
<아그니>의 두터운 다리가 가라앉더니 크게 튀어올랐다. 거구에 어울리지않는 도약력이다. 생각지도 못한 급습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했던 <카마손>의 날개를 <아그니>의 갈고리 4개가 단단히 움켜쥐었다. 동시에 격한 불꽃의 소용돌이서 두 팔에서 분출됐다. 살타는 악취가 떠돌고 흑연이 뿜어져나왔다. <카마손>은 신음하면서도 직접 날개를 절반이상 찢어난다음 간신히 <아그니>한테서 벗어났다.
『젠장, 너……』
비틀비틀 공중에서 날곤 있지만 더 이상 스스로 자세를 제어하는것조차 어려운 모양이다. 날개를 펄럭여 바람을 일으키려해도 구멍투성이의 너덜너덜한 날개를 퍼득여도 그저 하늘을 휘저을 뿐이였다. 더 이상 방어하는것도 불가능하겠지.
『이런, 이거 안되겠군.』
<라후>가 낮게 중얼거렸다.
『상위 아트마나 이만큼 모여있으면 우리들 둘갖곤 도무지 감당이 안돼. 빌려온 병사들은 쓸모가없고. 여기선 일단 도망치는게 상책이라 봐야하나.』
푸른빛이 한번 흔들리더니 <라후>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 나타난것은 검은 피부의 거한, 믹 더 닉이였다. 거구라곤해도 <라후>의 거대함에 비교한다면 특출하진않다. 전투 때문에 생긴 폐허 안쪽에서 은밀히 몸을 숨기고 주위를 둘려보며 도주 경로를 찾는다. 아무래도 남을 죽여도 자신만을 살 궁리를 하는 버릇은 전혀 변하지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냅둘까봐, 이 돼지.』
알지라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우왓하는 소리를 내며 믹이 머리를 감쌈과 동시에 숨어있던 폐자재더미가 단숨에 무너진다. <프리티비>와 <우샤스>의 형태를 취한 알지라와 지나나가 나란히 적을 쏘아보고 있었다.
『자기만 도망치려 들다니, 그건 안돼지. 지나나를 괴롭힌 죄. 세라를 겁먹인 죄. 그 외 다수. 당신에게 갚아주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않아.』
『설령 지금 <라후>를 쓴데도 우리들 둘의 합동 공격은 견딜 수 없다.』
마찬가지로 차갑게 <우샤스>가 단언했다.
『포기하고 우리들의 손에 죽어라, 믹 더 닉. 교회의 카르마스의 심연 저변에서 너 때문에 죽은 자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거다.』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보래두.」
인간의 모습으로 믹 더 닉은 살갑게 웃으며 한발짝한발짝 뒷걸음질쳤다. <프리티비>의 오므린 손바닥 사이로 중력의 어둠이 생겨나 급속도로 팽창해간다. 동시에 <우샤스>의 전신이 빛나기 시작했다. 다리에서, 허리, 가슴, 목으로 올라가는 그 빛은 이윽고 머리위의 황금빛 머리칼에 모여 직시할수 없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것으로 변했다.
당황해 지면을 기어 도망치려드는 등을 향해 부풀어오른 암흑의 중력구와 찬란히 빛나는 빛의 창이 동시에 내리 꽂히려하던 바로 그 순간.
『악당 퇴치!!』
그 목전에 두터운 전격이 내리 떨어져 믹은 저멀리 튕겨져 날아갔다. 동시에 공격을 쏘기 직전이였던 <프리티비>와 <우샤스>의 자세도 무너졌다. 모든 힘을 다한 혼식의 공격이 타이밍을 놓쳐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튄다. 멀리서 화려한 폭발이 일고, 간신히 남아있던 빌딩의 잔해가 큰 소리와 함께 모래가 되어 무너졌다.
『대, 대체 뭐지.』
알지라도 지나나도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믹 측의 엄호인가. <블루티쉬>의 증원인가. 허나 좀전에 들린 귀에 익은 목소리…….
「버, 번개? 뭐야. 대체 어디서…」
조각조각난 돌이나 모래를 털며 기어나온 믹은 아직 기름이 튀는 소리를 내는 주위를 돌아보며 숨을 삼켰다.
『아직도 있어? 에잇!』
일어설 틈조차 주지않고 다시 한번 번개가 내리 꽂혔다. 이번엔 직격으로 번개를 먹은 믹은 머리를 움켜쥐며 한심하게 비명을 내지르며 지면을 굴렀다. 잘게 땋은 머리칼이 연기를 내고, 트라이브 슈트가 녹아 구멍이 났다.
「뭐,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너희들 잘도 세라를 괴롭혔겠다! 용서못해! 한 발 더!!』
다시 뇌전의 비가 내렸다. 이어지는 데미지에 믹은 체면이고 수치고 할거없이 머릴 감싸며 손발을 짚어 땅을 기었다.
『잠깐만, 뭐야 이건.』
뇌전의 비는 격해지기만했다. <프리티비>도 <우샤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채 방어 태세로 꼼짝달싹할 수 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무차별적으로 퍼붓는 전격에 맞게 되는 것이다.
『알지라, 믹이 없다.』
뇌전을 피해 믹을 살핀 <우샤스>가 날카롭게 말했다.
갈색의 거한이 바닥을 기던 장소엔 아무도 없었다. <프리티비>는 분노의 소리를 내며 사방팔방으로 중력구를 날렸지만 헛되이 폐허만 무너트릴뿐 믹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우샤스>의 빛나는 머리칼이 촉수가 되어 주위로 퍼졌지만 역시 붙잡을 상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그니>에게 쫓겨 상공으로 도망쳐다니던 <카마손>이 뒤엉킨 뇌전의 그물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그 목소리, 참나. 그 얘 본거지에 있는거 아니였어?』
알지라의 목소리가 분연히 전장에 울러퍼졌다. 이번엔 <블루티쉬>의 생존자 전원이 달아나고 있었다. 쉴틈없이 내리퍼붓는 전격 때문에 누구하나 손쓸길 없었다.
어두운 마젠타의 하늘에 유달리 선명한 푸른 날개의 아트마 하나가 큰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아트마가 뭔가를 외칠때마다 그 일대를 뒤덮는 푸르스름한 방전이 일어 지상의 생존자들에게 곧장 내리 꽂힌다.
『뭘 하는거야……, 저녀석은.』
서프는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세라를 노리고 다가왔던 적들이 단숨에 멀리 튕겨 날아갔다. 분명히 본부에서 절대 안정을 취하고 있으란 명령을 내려뒀을텐데. 그러고보니 조금전 <카마손>을 세라에게서 때놓는 계기가 됐던 보랏빛의 뇌광의 번득임에 확실히 익히 알고 있던 목소리가 겹쳐졌었던것같은데…….
「저기…, 나, 아」
천둥소리에 의식을 되찾은 세라가 처음 보는 <케르베로스>의 위용에 놀란듯 입가를 가린다.
『놀라게 했군.』
루파가 쓴 웃음을 지었다.
『뭐 일단은 적이 아니란걸 알아다오. 소개는 나중에 서프가 해줄거다. 서프, 그녀를 부탁할 수 있겠나.』
『그래.』
세라를 <케르베로스>의 등에서 내리며, 서프는 질문했다.
『어떻게 여긴줄 알았지. 조금전 적과 조우했던곳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는데.』
『그건, 지금 저 위에서 분투하고 있는 저 작은것에게 질문해줘.』
<케르베로스>가 콧등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저녀석이 하늘에서 우릴 발견해 여기까지 길안내 해줬다. 저건 <엠브리온>의 구성원인가?』
『뭐…, 일단은 그렇다만.』
『세라, 어디있어! 나, 구하러 왔다구!!』
희희낙락하며 지상의 적을 뒤쫓는 시에로는 <디아우스>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즐거워보였다.
***
「시에로!」
싸움이 끝나고 의기양양히 내려온 시에로를 향해 가장 먼저 달려간건 세라였다. 변신을 품과 동시에 부딪히듯 끌어안는다. 시에로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착실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런. 헤헤. 이거 혹시 상인가?」
「고마워, 구해줘서.」
고개를 든 세라의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이제 다친된 괜찮아? 아프진 않고? 무리한건 아니지?」
「아, 괜찮데두. 봐, 완전 쌩쌩해.」
두 손을 빙빙 돌리며 기운을 어필했다.
「말했잖아. 세라의 얼굴을 봤더니 상처같은거 바로 나았다고. 너무 심심했었는데 즐거웠어. 아아~ 개운하다, 아얏.」
느닷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아 시에로는 입술을 비죽이며 돌아보았다.
「무슨 짓이야, 알지라. 나, 제대로 도움이 됐잖아. 이번 싸움의 공로자잖아. 무슨 짓이야, 이거. 게다가 주먹으로 때리다니.」
「입다물어. 뭐가 공로자야, 이 바보.」
사정없이 퍽퍽 주먹을 휘두르며 알지라는 말했다.
「조용히 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이런곳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걸까나. 네 머리엔 뇌 대신 콘크리트라도 차있어? 아, 콘크리트라면 그냥 딱딱한것 뿐이니까 너보닷 낫지.」
「저기, 알지라. 너무 화내지 마. 시에로는 구해줬잖아.」
「알아, 세라. 하지만 그거랑 이건 별개의 얘기야.」
시에로의 머리를 내리친 주먹을 다시 들며 알지라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당초 네가 생각없이 여기저기 번개를 쏴댄탓에 배트랑 믹을 놓쳤잖아. 구성원 몇몇 잡아봐야 그녀석들을 놓치면 완전 헛수고라구, 정말. 기가 살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니깐.」
「원래부터 머리가 가벼우니까.」
옆에서 히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잔뜩 싸운뒤라 포식한 육식동물처럼 만족스러워보였다.
「한번에 하나밖에 생각을 못하는거겠지. 그 찌꺼기 녀석을 마저 못 해치운건 좀 분통터지는군. 」
얻어맞은 머리를 안고 눈꼬리에 눈물이 맺힌 시에로는 아무말도 할수 없는 모양이였다.
「게다가 정식으로 대기 명령이 내려져 있었을텐데.」
알지라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부상이 완치될때까지 절대 안정하란 명령이 내려졌잖아. 리더가 직접 내린 명령. 그건 어찌된걸까, 응?」
「에, 그건……」
시에로는 아무래도 찔리는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돌려 뭔가 입속으로 우물우물말한다음, 얼버무리듯 큰 웃음을 지었다.
「뭐냐, 그 부분은 거기 잠깐~ 제쳐주는걸로. 안돼?」
「당연히 안돼. 뭘하는 거야, 참나.」
남은 구성원들과 게일에게 지시를 마친 서프가 돌아왔다. 게일은 이상을 깨닫자 바로 원호부대를 본거지에서 파견시켰지만 부대가 도착하기전에 서프나 히트 일행의 손에 의해 사태는 종료되어 있었다. 아군의 부상자 구호 및 <블루티쉬>의 생존자를 포로로 수용하는 작업은 게일을 통해 지니나와 루파에게 맡겼다. 지나나는 첫대면인 루파를 다소 수상하게 여기는 모양이였지만 그 싸움법이나 시원시원한 지휘에 호의를 지닌듯, 서로 협력해 척척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싸우고 있는곳을 알았지? 알지라, 시에로에게 행선지를 가르쳐주진 않았겠지?」
「그럴리 없잖아. 그런걸 가르쳐주면 이 경박한 꼬마가 자기도 따라갈꺼라며 소란피울게 뻔한걸. 출발한다는것조차 안가르쳐줬을 정도야.」
「우와, 넘하다. 그게 뭐야.」
「자, 넌 입 다물어.」
다시 한발 얻어맞자 시에로는 머릴 어루만지며 입술을 뾰족였다.
「그치만, 고양이가 있었는걸.」
「고양이라고?」
「응. 고양이. 맞다, 세라. 나도 봤어. 고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세라를 향해 시에로는 눈을 빛냈다.
「귀엽더라, 그거. 손이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매끈매끈하고.」
「잠깐만, 시에로.」
이야기가 혼란스러워졌다.
「그 <고양이>와 우리들이 있는곳까지 올수 있었던건 무슨 상관이 있지?」
「그러니까 말야. 나 방에서 자고 있었거든. 명령 받은것도 있고, 나갈수도 없고 하니까. 혼자서.」
답답한 모양새로 시에로는 말했다.
「아, 심심하다~하고 있었는데 침대 밑에서 고양이가 나왔어.」
「고양이.」
「고양이. 검고 꼬리가 길고, 귀가 삼각형이고 크고 긴 수염이 난.」
머리위로 손을 움직여 시에로는 그 고양이의 모습을 그려보인다.
「그래서 잠시 같이 놀았더니 그 녀석이 말야. 갑자기 냐옹 거리면서 벽을 벅벅 긁더라구. 그래서 나가고 싶어서 그런가보다 싶어 문을 열어줬더니 뭔가 허둥지둥 달려가는 소리가 들리잖아. 뭔가 싶었더니 세라를 이송하던 부대가 습격당했단 소리가 들렸어.」
서프와 알지라는 시선을 맞췄다.
「그래서 너도 밖으로 나왔던거군.」
당연하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치만 어딜가야하는진 몰랐어. 다른 녀석들한테 들키면 당장 방으로 끌려갈테니까 어찌해야하나 했더니 그 고양이가 내 발치로 와서 뭔가 할말있어 보이는 얼굴로 날 빤히 바라보는거야.」
「고양이가…?」
「응.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주위의 미심쩍어하는 시선을 한몸에 받은 시에로가 폭발했다.
「뭐야 그 얼굴! 그치만 진짜 사실이니까 별수 없잖아. 고양이가『이쪽으로 와』란 얼굴로 날 봤다고! 진짜래도. 진짜야, 형님!」
서프로 목표를 바꿔 시에로는 애원하는듯한 시선을 보냈다.
「형님은 내 말 믿어줄거지? 진짜진짜진짜래도. 고양이가이쪽으로 오란듯한 얼굴로 달려나갔다구.」
진짜라며 반복해서 말하는 시에로는 서프의 팔을 흔들었다.
「그래서 그 뒤를 따라갔더니 아무한테도 안들키고 밖으로 잘 빠져나왔는데 마니프라 쪽 하늘이 새빨갛잖아. 다급히 변신해서 그쪽으로 날아갔더니 히트랑 루파가―…」
「그래…, 알겠어.」
서프는 말했다.
「믿어, 시에로.」
「진짜?! 얏호!!」
「잠깐만 리더.」
알지라가 서프를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이런 얘길 믿는거야? <고양이>란 생물에 대해선 나도 세라한테 들어 알곤 있지만, 도무지 시에로가 말한 일을 할거란 생각은 안들어.」
「믿을 수 밖에. 나도 몇 번인가 그 <고양이>를 본적이 있어.」
「정말이야?」
알지라의 미간의 주름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 정말이야. 게다가 시에로 정도로 확실하진않지만 몇 번인가 위험했을때 구해줬던것 같아. <고양이>의 정체나 목적도 불명이지만, 최소한 아트마 출현 후에 생긴 기이한 일들 와중 몇 안되는 우리편으로 생각돼.」
「아, 그렇지. 그러고보니 생각났다.」
시에로가 탁하고 손을 쳤다.
「왜 나 그 고양일 따라가려했는지 지금 생각났어. 형님이랑 같은 색 눈을 하고 있었어. 그 고양이.」
「눈 색이라고?」
히트가 눈썹을 치켜든다.
「응. 맞아. 은색의, 엄청나게 예쁜 눈. 형님이랑 똑같은 색, 완전히 똑같아.」
시에로는 서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뒤 “역시 맞아”하고 중얼거렸다.
「똑같아. 지금 보고 비교해봐도 역시 똑같았던것같아. 그러니까 따라 갔어. 왠지 형님같아서, 진짜.」
「정말일까. 이 얘 뿌리부터 단순하니까….」
알지라는 아직도 뭔갈 투덜거리고 있다. 또 영문모를 일이 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아트마에 정체불명의 <검은 것>, 그리고 이번엔 <고양이>. 적은 아닌것만이 구원이지만, 그것도 일시적인것뿐일지 모른다. 지금의 정크야드는 그야말로 무슨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그리고, 난폭해졌다는 <블루티쉬>의 리더도 신경쓰인다. 확실히 현재 <엠브리온>는 착실히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블루티쉬>가 자군의 세력을 두렵게 여기고 표적으로 노린데도 이상하지 않다. 허나, 서프를 산채로 데려오란 지시는 왜일까. <엠브리온>의 괴멸을 위해선 그 무엇보다 리더 서프의 말살이 필요불가결할텐데.
<블루티쉬>의 리더, 바론 오메가. 그가 자신을 <대령>이라 부르도록 시켰단건 무슨 의밀까. 게다가 믹이 입에 담았던 <교회>가 파견한 수수께끼의 인물은 대체.
어쨌든, 지금 <블루티쉬>에 관한건 포로를 심문해서 뭔가 정보를 입수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일단 작업을 일단락짓고, 이쪽으로 다가온 게일과 지나나, 루파에게 손을 흔들며 서프는 그리 생각했다.
「수고 많았어 게일, 지나나. 루파도. 도우게 해서 미안.」
「신경쓸 필요없다. 공동전선을 펼치는 와중이다. 그녀를 지키는 임무는 <메리벨>의 일이기도하다. 배신자건 역시.」
그 말을 입에 담을 때, 지나나의 눈은 냉엄했다. 문득 옆을 보고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아직 그가 누군지 지나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만.」
「아, 이거 실례했군. 나는 <하운즈>의,」
「그는 <하운즈>의 리더, 루파다.」
마지막까지 말할 틈을 주지않고, 서프는 재빨리 답했다. 루파는 눈을 크게 떴다. 지나나는 한쪽 미간을 치켜들었고, 알지라는 뭔가 끼어들려다 말고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움직이지않은건 히트 뿐으로 그는 평상시처럼 팔짱을 낀 자세로 희미하게 입술 끝을 올리고 있었다.
「잠깐, 서프. 나는,」
「<하운즈>의 전 리더가 사망해서 그가 지휘권을 인계했다.」
루파가 정정하려하는걸 손으로 가로막고, 서프는 딱잘라 말했다.
「<교회>의 시스템상으론 어찌 취급되는지 모르겠지만, 전 리더 카니스 볼크는 사망했다. 현재 살아남은 <하운즈>의 구성원들은 실질적으로 그가 통솔하고 있다. 루파를 리더로 보는데 아무 문제 없어.」
「과연, 이해했다.」
지나나는 별다른 추궁도 않고 납득했다.
「확실히 지나나는 작금의 <교회>의 인정은 거의 의미를 잃었다고 본다. 높은 능력을 지니고 그걸 구사해 구성원들을 통솔할 수 있다면 그자야말로 리더다. 무례한 언동이 있었다면 사과하지. 리더, 루파.」
루파는 새삼 부정하지도 못한채 서프와 지나나를 바라보며 어찌 말해야할지 모르겠단 표정을 짓고 있다. 게일은 드물게 억센 목소리로,
「리더. 당신이 대체 무얼 생각하는지, 난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면 안해도 좋아. 일단 루파는 <하운즈>의 리더고, 이후 우리들과 동등한 입장에 선단것만을 알아줘. 아, 그리고.」
서프는 귀에서 인컴을 뽑아, 게일에게 던졌다.
「시에로의 탈주에 관해선 나중에 해명을 듣도록하지, 참.모. 이건 구성원에 대한 감시부족이다. 알고 있겠지?」
이번에도 역시 드물게 게일은 말을 잃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서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각은 LT에서 ST로 바뀌어져가고 있었다. 자잔히 내리는 은색의 빗방울 너머로 녹색의 광점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5
사건의 뒤처리에 2주기(2 Days) 정도 걸렸다.
당초 세라를 <마니프라>의 메리벨 본거지 근처로 이송할 예정이였지만 적들이 눈치챈 이상 거길 더 이상 사용할순 없었다. 협의 끝에 현시점에서 가장 파손 정도가 적은 아나하타, 기존 <솔리드>의 본거지가 다음 후보지로 선택되었다.
무라다라의 <엠브리온> 본거지는 원래부터, <메리벨>의 본거지도 슬슬 내구한계에 달해있었다. 하지만 가장 견고한 방어를 자랑하는 만큼 두 트라이브의 총공격을 받은 다음에도 <솔리드>의 본거지는 아직도 충분하리만큼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3 트라이브 연합의 본거지도 이 장소에 놓이게 되었다.
새로이 유입된 <하운즈>의 구성원이 십수명정도에 지나지않았기 때문에 전체 구성원수는 그닥 늘지 않았지만, 5명의 상위 아트마를 보유한 <엠브리온>에 이어 2명의 상위 아트마 보유자가 더해져 전력적으론 상당히 증강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라는 <성채(시타델)>라고 불리웠던 본거지 가장 안쪽 장소에 숨겨졌다. 바로 옆방에서 알지라가 대기하고, 다른 트라이브 간부나 일동도 그 주위로 진을 치듯이 방을 잡았다. 어쨌든 그녀를 빼앗기면 모든게 끝인 것이다.
설치되어있던 갖가지 트랩이나 숨겨진 통로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난뒤 엄중히 봉쇄하거나 감시를 세워뒀다.
아나하타는 유일하게 남은 적대 트라이브 <블루티쉬>의 아쥬나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점만은 단점이지만, 그만큼 상대의 움직임에 주목하기 쉽다는게 게일의 의견이였다.
알지라와 지나나가 세라의 피를 마시는것을 그만둔 탓에, 세라에게서 채혈할 필요성은 줄었다. 폭주대책용으로 피를 넣은 캡슐은 상비하고 있지만 그것도 사용횟수는 거의 없다. 자신을 둘러싼 전투가 격화되는데다, 피를 주입한 프로토타입 탄환도 적에게 효과가 없었다는게 판명되자 세라는 조금 풀죽은 모양새를 보였다. 허나 세라가 여기에 건강하게 있어주는게 그 무엇보다도 모두를 지켜주는거라고 설득하자 겨우 기운을 되찾고 마음을 굳게 먹기로 결의한 모양이였다.
자신의 방으로 안내를 받은 세라는 여기저기 빤히 들여다보며 침대를 가볍게 친 다음 눈을 반짝이며 서프를 돌아보았다.
「그럼 오늘부터 여기가 우리들의 새로운『집』인거구나.」
「『집』?」
또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 세라는 “아, 미안”하고 중얼거린뒤 조금 새빨개진 얼굴로『집』이란건 말야…하고 말을 이었다.
「<가족>이 함께 살면서 모두 즐겁게 얘길 나누거나, 쉬거나, 외출한다던가, 다시 또 돌아올 수 있는 장소야. 그 어디보다 안심되고, 그립고, 맘이 편안해지는 장소. 모두의 의지가 되는 장소야. 여기는 그런 장소지, 서프?」
「부대가 작전에 나가고, 귀환하거나 휴식을 취하며, 보급의 거점이 된다는게 그런 의미라면 확실히 그렇다만.」
<가족>이란것도 잘 모를 개념이다. 그 점을 질문해봤지만 세라도 그건 애매한 것처럼 곤란한듯 말을 흐렸다.
「어쨌든…, 누구보다도 가깝고 언제나 의지가 되고, 설령 떨어져 있더래도 강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을 말해. 전에 얘기했던『동료』같은것. 그치만 조금은 달라.」
「잘 모르겠지만,」
침대에 걸터앉아 미안한 표정을 하는 세라의 머리를, 기운을 북돋아 주듯이 한번 어루만져주며 서프는 말했다.
「듣고 있자니 그리 나쁜건 아닌 것 같아. 그『집』이란거. 그리고 <가족>도. 세라가 우리들이 있는 장소를 그렇게 여겨주는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겠지만 반드시 신체의 안전은 지켜줄게. <블루티쉬>한테도, <교회>한테도 건네지 않을테니 안심하며 지내줘.」
「괜찮아. 난 모두의『집』에 있는걸.」
웃음이 새어나왔다. 빛이 흘러 떨어진것처럼 밝은 웃음이었다. 서프는 기이하게도 따스한 기분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세라의 방을 나와 방벽 재구축 작업 지휘를 향해 내려갔다.
**
며칠뒤, 연합한 세 트라이브의 이동이 완료됐다.
이걸로 명실공히 <엠브리온>, <메리벨>, 그리고 잠정 리더인 루파를 받드는 <하운즈>의 연합이 완성된다. 이동 작업이 완료된 날 밤(ST), 서프는 한숨 돌리는 의미도 있고해서 근신중인 시에로의 상태를 보러갔다. 믹과 배트를 놓쳤다곤하지만 결과적으론 그 덕분에 세라의 구출에 성공했다. 허나 리더의 명령을 위반하고 출격한것에 대해선 처벌할 필요가 있다는 게일의 판단이였다.
서프로선 다소 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펴본뒤 충분히 반성하고 있는것같으면 해방해주잔 마음이 있었지만 도착해보니 방은 텅 비었고, 순찰하러 와있는걸로 보이는 구성원 하나가 문 앞에서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시에로는 어디야? 또 탈준가?」
「아뇨, 그게.」
구성원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듯한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지라가 와서,『이 얘 빌려갈께』하고 말한다음 끌고 가버렸습니다.」
그것 또, 신기한 일도 다 있다.
알지라는 최근 경호 의미도 겸해 대부분의 시간을 세라와 함께 보내고 있다. 세라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카마손>의 습격을 받아 피투성이의 전장에서 허공에 매달려 자칫 죽을 뻔했다. 서프 앞에선 기운찬 얼굴을 보이고 있지만 상당히 쇼크를 받았을거란 추측은 쉬웠다. 하지만 시에로? 세라는 시에로와 사이가 좋은것 같으니 같이 얘기할 상대에 끼워넣으려했던건가.
의아해하며 세라의 방이 있는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방에 다가갈때마다 왁자지껄한 여자 둘의 웃음 소리, 세라의 목소리, 반쯤 울음이 섞인 시에로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누군가 도망다니는듯 물건이나 세간이 부딪히고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시에로, 알지라. 대체 뭘―……」
「형님!! 살려줘!!!」
문을 연 순간 총알같은 기세로 시에로가 가슴팍으로 뛰쳐들어왔다. 서프는 당황했다.
「뭐지. 무슨 소동이야. 지나나까지 있나. 대체 뭘하고 있어.」
「어라, 리더.」
알지라는 태연한 얼굴이였다. 지나나도.
「저기, 서프……」
안쪽 침대에 앉아 세라는 큰 눈을 한층 더 크게 뜬채 입을 막고 있다.
네사람이 애워 싸고 있던 테이블엔 용도 불명의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있디. 아니, 용도는 알지만 왜 여기에 이만큼 대량으로 쌓아놓았는지 모를 비품이다.
트라이브 컬러를 페인트하는데 쓰이는 페이스컬러 포트나, 솔, 붓, 마킹용 펜, <엠브리온>의 오렌지는 물론이고 <메리벨>의 빨강이나 <하운즈>의 하양을 비롯해 녹색, 파랑, 그 외 검정이나 갈색, 노랑, 차량 도색에 쓰이는 도료까지 각종 물건들이 모여있다. 실내엔 달리 도색해야할만한 물건은 보이지않는다.
「세라가『화장』이란걸 가르쳐줬어.」
득의양양히 알지라가 설명했다.
「여성이 남들 눈에 예브게 보이도록 얼굴에 뭔갈 칠하거나 그리는 기술이라고 한다. 모처럼이니 둘이서 세라에게 해줘볼 생각이였지만 무턱대고 했다가 실패하면 가여우니 그쪽의 작은 것으로 실험해 보기로 했다.」
지나나가 옆에서 보충한뒤, 손을 뻗어 시에로를 손짓해 불렀다.
「자, 이쪽으로. 아직 눈썹을 그리는게 끝나지 않았다. 네가 도무지 가만있질 않으니…… 그 정도로 호들갑 떨 일인가?」
「애당초 시에로 넌 명령위반으로 징벌중인 몸이잖아. 이걸하면 좀 봐줄테니 얌전히 내 말 들어, 어서.」
「이런건 징벌이 아니라 괴롭힘이라구.」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든 시에로를 보자 서프는 무심코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 전체에 새하얀 가루를 뿌려놓은데다 양쪽 뺨에 오렌지색 페이스 페인트를 가득 칠해놓고 눈 위엔 왠지 모를 녹색선이 몇 개 그어져있다. 입술은 새빨간 페인트를 칠한것같지만 윤곽이 너무 삐져나와 입이 턱까지 닿은것처럼 보인다. 눈가는 온통 새카만 펜으로 칠해놓고, 문제의 눈썹은 왼손으로 글자를 쓴것처럼 구불구불 구불져있다. 최소한 머리칼과 같은 푸른색을 선택한것만이 구원이다.
「세라. 어찌된 일이지……」
「저기…, 미안…….」
세라는 완전히 움츠려들었다.
「나 말리려곤했는데. 알지라와 지나나가 너무 기뻐해서…」
「당연하지. 해보면 상당히 즐겁다, 리더 서프.」
「진짜야. 지금까지 해본적 없는게 기이할 정도로.」
다음에 시험해볼 모양인 황색 페인트 캔과 가는 붓을 각각 만지작거리며 지나나와 알지라는 나란히 히죽 웃었다.
「싫어싫어싫어!! 애당초 왜 난데!」
시에로가 눈물을 흘리며 손가락을 쳐들고 항의했다.
「세라는 그렇다쳐도 여자가 둘 확실히 있잖아! 왜 상대 얼굴 갖고 연습 안하는건데?!」
실로 합당한 지적을 받자 알지라와 지나나는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윽고 이쪽을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치만, 실패하면 싫잖아.」
「진짜 싫다면 싫어!」
서프에게 달라붙어 시에로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저기, 알지라.」
한숨을 쉬며 서프는 설득에 도전해봤다.
「확실히 시에로는 징벌중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본인도 상당히 반성하고 있는것 같으니까, 슬슬 사면해줘도―…」
「흠. 그렇다면 네가 대신 실험대가 되어주겠나, 리더 서프.」
지나나가 빙글 붓을 놀리며 위험한 느낌으로 눈을 반짝였다.
「그 얼굴이라면 제법 시험해보기 좋을 것 같아. 탐구심이 돋는다. 이번엔 좀 더 잘 할 수 있다. 연습하면 할수록 실력이 는다. 사격과 같군.」
「그, 건……」
「형니이임―……」
침묵하는 서프를 향해 시에로가 불안한듯 매달린다.
「알지라.」
「응, 리더.」
「뒷일 부탁하지.」
「오케이, 리더.」
「우와아아아악!! 형님 바보!! 배신자!! 악마!!」
웃음소리와 함께 4개의 팔에 붙들린 시에로는 저항조차 헛되이 다시 방으로 질질 끌려들어갔다.
― 나중에 구출하기위해 게일을 보내주기로 하자.
엉엉 우는 시에로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크나큰 안도와 얼마안되는 죄악감을 담아 한숨을 쉰다. 알지라 하나라면 리더 명령으로 말릴 수 있지만 지나나까지 같이 있으면 이쪽에서 손쓸수 없다.
고개를 저으며 새로운 본거지가 된 건물 위로 올라갔다. 아직도 각지에선 보수공사나 인접한 <블루티쉬>에 대한 감시소 정비등으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구성원들이 다수 있다. 지나가는 서프를 발견하자 다급히 경례하는 그들에게 답례하며, 이전, 적지인 여기으로 가장 먼저 침입했을때 올라갔던 포대가 있던 넓은 방에 도착했다. 여기는 그닥 파괴되지 않았다. 거대했던 포대는 철거되어 그 대신 비행능력이 있는 아트마 소유자들이 비상하기 쉽도록 발판을 만들기위한 자재가 쌓여있다.
철골위에 걸터앉아 서프는 다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어.」
팡하고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들자 갈색의 위엄있는 얼굴이 웃고 있었다.
「리더가 직접 순찰중인가. 열심히군. 마침 잘됐어. 찾고 있었어. 옆자리에 앉아도 괜찮겠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루파는 서프가 앉은 철골 옆에 허리를 걸친뒤 가볍게 기지개를 켠다. 어딘지 <케르베로스>의 몸짓을 연상시키는데가 있었다. 목을 몇 번인게 두둑인다음 문득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좀전에 들린 소란은 뭐였지? 지나나의 목소리까지 들리던데.」
엄지로 세라가 있는 방을 가리키자, 서프는 무심코 말이 막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자 루파는 몸을 젖히며 호쾌하게 웃었다.
「그래서 적을 앞에 두고 도망중인가. 리더로선 한심한 이야기군. 그 조그마한것도 애썼는데 재난이야.」
「당신은 그 상황을 못봤으니 그런 소릴 할 수 있는거야.」
서프는 샐죽하니 말했다.
「알지라와 지나나 둘이 입술을 핥으며 붓을 들고 쫓아온다고 생각해봐. 아트마로 싸울때가 훨씬 낫지.」
「뭐,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서프,」
순식간에 웃음기를 거두고, 루파는 서프의 얼굴을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너, 나를 <하운즈>의 리더라고 소개했지. 그건 진심인가.」
「진심이야.」
언젠가 말하리라 생각한 화제였다. 눈 하나 깜빡이지않고 이쪽을 바라보는 루파의 눈을, 서프는 배에 힘을 넣으며 마주봤다.
「그래. 좋은 기회니까 이거 돌려두지. 받아둬.」
허리춤의 파우치에서 작은 것을 꺼내 루파에게 던진다. 그것을 받아든 루파는 기나긴 시간동안 침묵한뒤 손바닥에 굴러들어온것을 바라보았다.
둔한 빛을 발하는 은색의 태그링.
「게일한테 되찾아뒀어. 지금에 와선 얼마만큼 의미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하운즈>의 리더의 증표야. 받아줘.」
루파는 다시끔 기나길게 침묵했다. 작업중인 구성원들이 내는 소리가 둔하게 울러퍼진다.
「그 참모의 말 대로군.」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로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싫은건가.」
서프는 날카롭게 말했다.
「달리 <하운즈>의 리더 자격을 지닌 자는 없어. 실질적으로 당신이 계속 생존자들을 이끌어왔잖아. 지나나도 승인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신경쓸 필요도 없고.」
「난 아무래도 좋아. 네가 괜찮은건지 묻고 있는거다.」
루파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카니스 볼크의 숨통을 끊은건 너다. 리더가 쓰러진 트라이브는 승리한 트라이브에게 흡수된다. 나는 <하운즈>가 <엠브리온>에게 패배한 걸로 카운트될 줄 알았다. 그런데 왜 <하운즈>를 존속시키려들지.」
「정크야드를 제압한 자에게만 낙원의 문이 열린다는 그거 말인가.」
서프는 일어나서 정돈된 포대 곁으로 다가갔다.
「당신답지않은 말이군, 루파. <교회>가 얘기하는 낙원에 당신은 의미를 느낀단 뜻인가.」
「니르바나같은건 개소리다.」
루파는 내뱉듯 말했다.
「새삼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 낙원이니 <교회>니, 트라이브 서열이니. 그런건 나와 상관없는 얘기다. 허나―…」
「자신이 전 리더를 쓰러트린것도 아닌데 <하운즈>의 리더가 되는데에 저항감이 있는건가, 루파?」
서프는 조용히 말했다.
「그것도 분명 있다.」
루파는 한 호흡 침묵한뒤, 말을 이었다.
「마지막까지 트라이브를 방어하지 못하고 탈출할 수 밖에 없었던 내가 이걸 받는건 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아. 게다가 만약 리더 자리를 잇는다해도 정정당당히 싸워 이긴뒤에 얻고 싶어. 동맹 트라이브 리더가 성큼 건네주는 리더의 증거같은건 내게 쓰레기나 마찬가지야.」
「쓰레기나 마찬가지라. 그거 좋군. 당신 다워.」
서프는 웃음이 새어나오는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어쩔 셈이지. 나도 일단 건네준걸 돌려받을 맘 없어. 여기서 한번 <바르나>와 <케르베로스>끼리 싸워볼까. 진 쪽이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인단 조건으로.」
「아니, 그건 관두지.」
루파도 쓰게 웃었다.
「이런 곳에서 아트마를 꺼내 전투같은걸 해대면 그 수완가 참모가 뛰쳐나와 이번에야말로 우리들을 쫓아내겠지. 게다가,」
아직도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오는 세라의 방쪽을 올려본다.
「저 여자애를 쓸데없는 일 갖고 놀래키고 싶지 않군. 안그래도 심한 일을 당했는데. 그녀, 세라라고 했나? 내게 고맙다고 말했어.」
「헤에.」
「『구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놀라서 미안』하고,」
크크큭하고 루파는 웃었다.
「처음엔 무슨 의민지 몰랐는데 지나나가 설명해줬어. 좋은 일이야. 남에게 감사를 받는단건. 전투에서 이기는것과는 또 다른 좋음이였어. 아아, 그러고보니 이런 소리도 했었지. 이전의 나는 너희들의, 서프와 히트에게『아버지』같은 존재에 해당되는 모양이야.」
「『아버지』」
서프는 어리둥절했다. 세라는 자신도 잘 모를 말을 입에 담는 경우가 많아서 대개의 경우는 설명부족이다.
「그녀의 설명으론, 자신보다 약하거나 작은 것을 지키고, 여러 가지 것들을 가르치거나 인도하는 자인 모양이다.『아버지』와『아이』이라고 했었다.」
루파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자식』이라고도 말했다.『아이』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뉴비같은거고,『자식』은『아이』의 일종으로『아버지』와는 특별한『부자』관계로 맺어져 있는 자라고 하더군.」
「여러가지… 구분이 있군.」
서프는 겨우 맞장구쳤다.
「그런 모양이야. 그래서 뉴비같은『아이』는 자라면『어른』이 되지만,『자식』은 자라『어른』이 되어도『아버지』에겐『자식』그대로라,『부자』관계는 변치않는다던가.」
설명하고 있는 루파도 전부 이해하고 있진 않은 모양이였다. 이해할 수 없어하는 서프의 얼굴에 어깨를 으쓱여보인다.
「뭐, 무슨 소린진 몰라도. 예전의 내가 너희들을 뉴비때부터 키웠단건 아무래도 맞는 모양이야. 같이 싸우는 동안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단, 아니 있었단 생각이 들었어. 이와 같은 일이 예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던것같은, 쭉 너희들과 전장을 내달렸단 느낌이 들어.」
「맞아, 루파.」
서프는 진심으로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최고였어. 히트도 말했잖아. 뭐, 녀석은 그런 녀석이라 입밖으론 절대 인정하진않겠지만 당신은 우리들에게 더할나위없는 리더고, 절대적 지표이며 목표였어. 당신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들은 아마 여기 없었을거야.」
「그런 소리까지 들으면 낯간지럽군. 지금의 나한텐 확실한 기억이 없다보니. 하지만,」
턱을 쓸어넘기며, 문득 루파는 히죽 웃었다.
「지금 그 시절의 기억이 없는게 조금 아쉽군. 햇병아리 시절의 너희들을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 제법 웃었을텐데. 유감이야.」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군. 얼굴을 볼때마다 폭소하면 참을 수 없을거야.」
「뭐, 그런 소리말고.『부자』사이잖아.」
진저리치는 서프의 얼굴을 향해 호쾌한 웃음을 내보이던 루파는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서프. <교회>가 대체 우리들에게 뭘 빼앗아갔다고 생각하지?」
「빼앗아…갔다?」
서프는 당황했다. 그런식으로 생각해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교회>는 서프에게 싸움을 명하며, 죽은 자들의 <죄업(Karma)>을 심판해 정화한 뒤 새로이 낳은 신생자들을 다시 지상으로 토해낸다. 아직도 그러한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걸 지적받자, 허를 찔린듯한 기분이였다.
「이건 내가『예전의 나』의 기억없이 방출된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루파도 일어서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서프의 옆자리에 느긋이 기대선다. 시선 끝에는 어둡게 잠긴 아쥬나의 저편, 새하얗게 빛나는 사하스라라, <교회>의 탑이 있다.
「<교회>는 우리들의 죄를 씻어낸다고 하지.」
폐허속에서 오직 하나, 더러움 모르고 하늘을 찌를듯 높이 솟은 탑을 바라보는 루파의 눈은 타는듯이 격렬했다.
「허나 그 <죄>를 범하게 하는건 누구지. 쉴틈도없이 싸움을 명하고, 모처럼 자신들이 정화한 자에게 다시 죄를 범하게 하며, 무자비하게 죽고 죽이게하는건 누구지. 쌓아올린 날들의 기억마저 <죄>라고 칭하며 빼앗아가는건 대체 누구의 짓이냐.」
「그건―…」
「내겐 너희들과 함께 싸웠던 시절의 기억이 없어.」
루파는 손가락을 깨물었다. 낮은 목소리에 답답함과 희미한 후회가 뒤섞여있다.
「하지만 분명히, 난 너희들과 함께 있었다. 그런 느낌이 들어. 그리고 그건 결코 나쁜 나날들이 아니였단것도 왠지 모르게 알아. 그런데 그것들까지 죄라고 불러야하는건가. 서로서로를 돕고 함께 싸웠던것도 죄인가. 모여 얘기를 나누고 웃음을 나누는 것. 그것도 죄인가. 정화해서 없애버려야할 정도로.」
희미하게나마 목소리가 울려오는 세라의 방쪽을 바라본다. 서프는 숨을 죽이고 루파의 매서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리 생각지 않아.」
잠시 침묵한뒤 루파는 말했다.
「<교회>는 뭔가를 숨기고 있어. 그 지하수로 입구를 숨겼던 감각 마스킹처럼 계속 우리들의 눈을 속여 정크야드를 수확처삼아 뭔가를 빼앗아왔다. <낙원>이란 이름은 우리들의 눈을 흐리게 하기 위한 환영에 지나지않아. 실제로 그것이 존재하는지 않는지는 문제가 아니야. 아트마를 얻어 적어도 우리는 <교회>가 심어둔 사고의 틀을 넘을 수 있게 됐다. 그게 중요해. <교회>가 그 소녀를 찾아내 뭘 어쩔셈인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교회에 넘길 맘은 없어. 그 미트볼이나 검은 파닥이한텐 더더욱. 그게 죄인지 아닌진 내 알바가 아니야. 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것만 한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교회>가 내 소중한걸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하겠어.」
― 아아, 이게 루파다.
서프는 생각했다.
그 독립심과 가슴에 품은 반항심. 그런 요소들이 과거의 루파에게 그런 삶을 보내도록 만든거겠지.
트라이브에 들어가 순위 경쟁에 뛰어들어 낙원이란 싸구려 구원에 손을 뻗으려 들지 않고 그저 강하게 존재하는 것. 자신이 인정하는 것 이외엔 그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것.
그가 그러한 삶을 보내며 그리 행동했던 것들의 근간이 바로 그것들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히트나 자신이 과거『루파』를 따르고 있었던건, 자각은 없지만 그 독립심과 반항심,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지않는 진정한 <강함>에 이끌렸기 때문이겠지. 그냥은 타인의 말따윈 들으려도 않는 히트가 반사적이라곤 하지만 지금 이『루파』한테도 리더를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는건 그 당시 자신들이 얼마만큼『루파』를 경애하고 리더로서 신뢰하고 있었는지, 자신들을 이끌어준 지도자로서, 같은 트라이브의 동료로,『아버지』로서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가에 대한 증거다.
세라는 여기를『집』이라고 했다. 자신들을『가족』이라고 말했다.
「그『소중한 것』엔 우리들도 들어가있나?」
문득 생각나 서프는 물었다.
「물론이다. 뭐야, 들어있지 않을거라 생각했었나? 상처입겠군.」
루파는 의외인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히트도, 세라도. <엠브리온>의 다른 구성원들도. <메리벨>도 내게 있어선 소중해. 물론 <하운즈>의 생존자들도 소중한 동료들이야. <교회> 녀석들도 아니고 세라만 지키면된단 생각, 난 단 한번도 해본적 없어. 난 지금 여기있는 모두를 한사람도 빠짐없이 소중히 여기고, 지키고 싶어. 그래, 그래서 생각났는데,」
손에 쥐고 있던 <하운즈>의 리더의 태그링을 들어 보였다.
「그래서 이건 결국 어쩌지? <바르나>와 <케르베로스>끼리 싸우는건 관두는게 좋을것같고. 나도 네, 그렇습니까하면서 받아갈 맘은 없어.」
「그럼 일단 일시적으로 맡아두는걸로 해주지않겠나.」
서프는 양보했다.
「언젠가 루파가 납득하고 받아들일 맘에 되면 좋고. 아무래도 그럴 맘이 안든다면 그때 다시 돌려주면 돼. 어쨌든 그걸 건네주는건 내 개인적인 기분 문제니까 신경쓰지마.」
「기분 문제라니, 무슨 뜻이지?」
「또…………… 웃을지도 모르지만.」
잠시 침묵한뒤 서프는 큰맘먹고 말했다.
「리더가 아닌 당신을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왠지 진정이 안돼.」
루파는 잠시 멍한 얼굴로 삐진듯 고개를 돌린 서프를 보고 있다가, 이윽고 성대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뻗어 서프의 머리를 엉망이 되도록 엉클었다.
「그만둬. 난 더 이상 그 시절의 햇병아리가 아냐. 그만두래두.」
「그래, 그랬었지. 넌 4개 트라이브의 정점에 선 <엠브리온>의 훌륭한 리더, 서프다. 이 햇병아리녀석.」
손을 뿌리치는 서프의 모습에 루파는 아직도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샐죽한 얼굴로 머리칼을 정돈하는 서프를 곁눈질하며 태그링을 전투용 슈트 주머니에 넣는다.
「그럼, 내가 <하운즈>의 리더권을 네게 받아들여도 좋다고 납득했을때 이걸 끼기로 하는거, 괜찮겠나? 언제가 될진 약속할 수 없지만.」
「그걸로 충분해. 그리고, 난 더 이상 햇병아리가 아냐.」
「뭐 그리 화내지마. 히트라면 좀 더 화냈을려나. 다음번에 시험해볼까.」
아직도 웃으며 루파는 일어섰다.
「자아. 슬슬 그 쪼그마한 것을 구해주러가볼까. 불쌍해졌어. 참나, 지나나도 적당히 말리면 좋을것을. 너도 가겠나, 서프.」
「가지. 안가면 시에로가 영원히 원망할거같아.」
서프도 뒤를 따라 본거지로 들어가려하다, 문에 손을 얹고 문득 멈춰섰다.
「저기, 루파.」
「뭐지?」
「한번은 물어보고 싶었는데. 왜 우리들이였지?」
루파는 돌아서서 서프를 바라본다. 붉은 빛을 띈 눈동자가 의아함에 가늘어진다.
「왜, 라니 무슨 의미지?」
「그러니까 과거의 당신이 왜 나와 히트를 골라 키웠는가하는 이야기야.」
서프는 애달은듯 말했다.
「히트는 그렇다쳐도, 난 아무리 봐도 강해보이는 외모가 아니였어. 그런데 당신은 들어오자마자 나와 히트 둘을, 마치 점찍어놓은듯이 갑작스레 지명했어.」
루파는 뒷말을 재촉하듯 작게 고개를 기울이며 듣고 있었다.
「당신은 강했다. 오로지 홀로, 트라이브의 지원없이 정크야드를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당신이 왜 우리같은 뉴비를 길러볼 맘에 든거지?」
마치 매달리는 것 같은 말투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당신에게 우리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을텐데. 당신은 확실히 엄격한 리더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어. 하지만, 어째서 우릴 키워준건지 그걸 잘 모르겠어.」
말하고 있는 사이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뭣보다 루파에겐 과거의 삶의 기억이 전혀 없으니까. 불편함에 서프는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군. 쓸데없는 소릴 물었어. 잊어줘.」
「잠깐.」
황급히 등을 돌리려하는 서프의 어깨에 루파가 가볍게 손을 얹었다.
「난 예전의『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전혀 기억에 없어.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지금의 네 질문엔 답해줄 수 없다. 하지만,」
한박자 운을 땐뒤, 루파는 새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최소한 너희 둘을 보고 있으면 예전의『내』눈은 그리 나쁘지않았다고 생각해. 물론, 만점과는 한참 거리가 있지. 이런 바보같은 질문을 할 정도니까말야. 이 햇병아리녀석.」
「시끄러. 햇병아리가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 손 치워.」
그렇게 대답한 서프의 입술에도 어느샌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문이 닫힌다. 비가 내리고 있다. 은색의 얇은 막 너머로 새하얀 탑은 그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
고통소리가 울러퍼졌다.
암흑속에 가라앉은 아쥬나, 그 지배자인 <블루티쉬> 본거지 가장 안쪽 방에서, 한 사람의 남성이 전신에 신은 땀을 흘리며 괴로움에 바닥을 뒹굴고 있다.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말했다. 신음하는 남자의 고통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 목소리엔 일말의 동정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 꼴사나운 모습과 반응에 대한 잔혹한 호기심이라 불리워야할만한 것이 담겨 있었다.
버둥이는 남자의 손에 실내는 철저히 파괴되어 있었다. 의자는 벽에 내던져졌고, 모니터는 하나도 남김없이 깨졌다. 벽이고 바닥이고 할거없이 깊이 후벼 파낸 흔적이 나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무사한 책상위에 새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검은 고글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지만 얇은 입술엔 뚜렷한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능력을 사용한단건 당신이 여기에 존재하기위한 리소스, 뭐, 생명력이라고 해둘까요, 그것에 막대한 부담을 줍니다. 테크노 샤먼을 잃은 지금, <신의 알(EGG)>의 연산능력은 현저히 저하되어있죠. 그럼에도 통상의 슈퍼컴퓨터보단 아득하리만큼 높은 성능을 유지하곤 있긴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가깝습니다. 빨리 그녀를 회수해서 사태를 수습하지 않으면 뒤틀림은 점점 심해질겁니다.」
「다음번엔 놓치지 않겠다.」
물을 뒤집어 쓴것처럼 간신히 고개를 들어, 남자는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하운즈>의 쓰레기놈을 통해 힘을 쓰는 방법은 알았다. 다음엔 <엠브리온>이다. 나를 죽인 그 남자를, 이번엔 내가 죽여주지. 계집은 멋대로 해. 허나 그 남자는 내 거다. 나와 같은 꼴을 맛보게 해주지. 산채로 내장을 끄집어내 손발을 잡아 뜯은뒤 자근자근 뜯어삼켜주마.」
「바로 그런 마음가짐입니다, <대령>」
작게 박수치며 <교회>의 남자는 휙하고 책상위에서 내려왔다.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의 곁을 스쳐지나가 방을 나간다. 새하얀 망토가 펄럭이며 사라진 다음, 남은건 어둠속에 길게 메아리치는 남자의 괴로운 신음소리였다.
그리고 <교회>의 지하에서도, 어둠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본디 파괴된 유닛을 회수해서 그들이 축적해온 전투기록을 흡수한 다음 다시 랜덤으로 능력치를 설정해 새로운 유닛으로 재구성하기위한 장소였다.
허나 지금, 거기엔 어둠이 있었다.
<그것>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굶주림에. <그것>에게 사고능력이라 할만한 것은 없었다. 허나, 감각은 있었다. 그리고 희미한 기억도.
먹은 것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산채로 잡아먹힌 기억도 있었다.
전신을 불태우던 불꽃의 뜨거움, 전신이 너덜너덜하게 썰려나간 고통, 전신을 내달렸던 전격의 충격, 초중력에 짜부라졌던 괴로움, 먹히는 공포, 그리고 죽음.
무수히, 셀수없을 정도로 많은, 죽음.
비슈다의 지하에서 받았던 공격이 <그것>을 괴롭히고 있었다. 고통은 무수히 쌓아올린 죽음의 안자락에 가장 처음 놓여진 죽음의 기억을 강하게 자극했다. 은발에 은색눈을 한 마르고 작은 체구의 청년. 그 모습을, 사고라고 할 수 없는 사고 속에서 발견했을때, <그것>은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보다 강렬한 굶주림에 몸을 떨었다.
― 먹고 싶다. 좀더, 먹고 싶다.
―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수치화되지않는 감정은 시스템에 인지되지 않는다.
공포나 분노나 슬픔은, 그리고 고통은, 시스템에 흡수되지 않는다.
뽀글, 거품이 다시 하나 떠올랐다.
정화되지 못한 어둠이, 크게 몸을 떨며 소리없는 외침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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