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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제이드 바르포아 편
「루크.」
노을로 젖어드는 하늘 아래에, 티아 그란츠의 비통한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뒤돌아 선 루크 폰 파브레의 얼굴은 의연했고, 그 목소리는 어딘지 여유조차 느껴졌다.
「로렐라이와의 약속이야. 이것은 내가 해야할 일이니까.」
「……」
티아가 입을 다물었다.
레플리카 대륙은 몹시 흔들리고 있었지만, 루크의 말은 동료들에게 곧바로 전해졌다.
제이드 카티스는 가슴을 찌르는 아픔을 깨닫지 못한채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루크는, 본디 어린시절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레플리카라고 하는 생물.
「루크, 당신은 정말로 변했군요.」
「……」
제이드가 내민 손에 레플리카는 순간 당혹한 듯 했지만 이내 손을 마주 뻗었다. 따뜻한 손가락이 닿아왔다.
「……하지만. 얼마만큼 변했다한들, 분하지만 당신이 해온 일 전부가 용서 되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와 주세요. 아니…그렇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제이드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되찾기 위해, 그와 악수하고나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빠른 타이밍으로 그 손을 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무리인 소리 하지마.」
루크가 웃자, 가이 세실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말야. 냉큼 돌아와. 이대로 사라진다면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눈치채고 있었던거야?!」
「나도 알고 있었어.」
아니스 타토린이 루크를 꼭하고 끌어 안자 그가 허둥된다.
「나, 이온님 대신에 교단을 재정비 하고 싶어. 그걸 위해서는 후원이 필요하잖아♪ 꼭 돌아와!」
「루크 살아 남아 주세요.」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었던 나탈리아 루츠 키무라스카 ․란바르디아가 입술을 옴짝였다.
「당신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이대로 사라지다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고마워…… 모두.」
루크는 깊은 감사를 담은 눈빛으로, 동료들을 하나 하나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제이드를 넘어 티아에게 닿았을 때, 그녀가 말했다.
「반드시… 돌아와. 꼭, 꼭이야.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계속, 계속 기다릴테니까……!!」
입술을 비집고 흘러 넘치는 ‘말’.
「응…, 알겠어. 반드시 돌아올께… 약속해.」
「루크…….」
글썽이던 티아가 황급히 뒤돌아섰다.
로렐라이의 열쇠를 손에 쥔 루크에게 남겨진 시간은 많지 않다.
제이드도 동료들을 눈짓으로 재촉하고서, 루크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것이 최후인가――)
노엘이 기다리는 아르비올로 돌아가면서, 제이드는 자신의 말을 부정하듯 작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는…)
반 그란츠가 만들어낸 대지― 엘드랜드를 내딛으며, 제이드는 틀림없이 이 후로도 레프리카라는 존재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게 될 거란 생각을했다.
루크가 열쇠를 끼어 넣은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
그날 아침, 정원엔 새로이 눈이 쌓여 있었다.
어린 네프리 ․ 바르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바로 발판위에 올라서서, 두꺼운 커튼을 젖힌다. 허리보다 높은 곳에 있는 창문은 다섯 살의 소녀에겐 조금 지나치게 높았다. 그래도 어떻게 흐린 창을 눌러 젖히자, 냉기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온다. 냉기는 아직 모포의 온기가 남아있던 네프리의 뺨을 찌를듯 했다.
「역시……. 가득 쌓였네.」
은세계라고 불려지는 케테르베르크에서 태어난 네프리가 다소 눈이 쌓인 것 정도에 놀랄리는 없다. 그녀는 오히려 만족한듯 새하얀 숨을 토했다. 하지만, 바로 그 눈은 불안한 듯 인적 없는 뜰로 향한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 사이로 비쳐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신설(新雪)은 푹신하고 매끄럽게 빛나고 있다. 어디에도 발자취는 없다. 아이의 방은 뒷 뜰에 접해 있다. 이런 시간에 누군가가 뒤뜰을 어슬렁거린다던가 할리없다.
(그래도 어젯밤,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아…)
기나긴 밤 사이, 네프리는 몇 번인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나서는 무슨 소리라도 나는걸까하고, 침대 속에서 귀를 기울였다.
몇번째인지 모를 소리에 일어나보니 난로의 불은 어느새 꺼져 있고, 그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 놓여진 음소등―램프의 빛만이, 그녀의 깔끔한 방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책상위의 인형도 평소처럼 확실히 제자리에 앉아있고, 아버지가 그랑코크마에서 사다온 어린이용의 붉은 소파에는, 읽다만 그림책이 확실히 놓여져 있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뜬 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멍한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자신을 깨웠다는 감각만은 남아있다.
「추워…….」
네프리는 부들하고 몸을 떨며 다시 모포로 기어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깜짝 놀라 다시 한번 귀를 귀울였다. 무슨 소리가 들린건 아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조용했었다.
눈이 내리고 있는거야…하고, 네프리는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모친이 이전에 눈은 모든 소리를 빨아 들여 버린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이상하네. 이렇게 조용한데 잠에서 깨어나다니.」
네프리는, 자신을 품어 안은 압도적인 정숙이 무서워졌다.
창 너머, 유리창 한 장을 사이에 둔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 든다.
뚜렷한 기억은 아니지만, 이런 기묘한 일이 전에도 있었던것 같은데……, 그녀는 그것을 떠올려내지 않으려고 황급히 모포를 뒤집어 쓰고, 꾸욱 눈을 감았다. 네프리는 대강 뒤뜰을 바라보고나자 옷을 갈아입기 위해 창문을 닫았다. 옆 방 창문이 힐끔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은 빈틈없이 닫혀져 있다.
(오빠는 아직 자고 있구나)
오빠 제이드는 어젯밤도 늦게까지 책을 읽고 있었던 걸꺼다. 그녀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옷매무새를 바로했다.
**
뒤뜰로 나갈 맘이 든 것은, 거의 즉흥적인 것이었다.
엄마는 네프리의 머리칼을 다듬어주고나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기 때문에 부엌에서 나올 수 없었다. 살짝 집을 빠져나오자, 쌓인 눈은 침실에서 봤을 때보다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부츠로 꾹 하고 누를 때마다, 사박사박하고 기분좋은 소리를 냈다.
뒷 뜰엔 담벼락을 따라 심은 상록수와 몇 개의 작은 나무만이 있을 뿐이다.
어느 것이고 할것 없이 눈을 뒤집어 써 봉긋하니 눈이 쌓인 모양새가 예쁘다. 네프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상록수 가지에서 눈 덩어리가 떨어져 철퍽하는 소리가 났다. 네프리는 놀라서 무심코 자기 방 창문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아앗?!」
그 순간, 눈의 감촉과는 다른 감촉이 부츠 밑에서 전해져왔다.
「뭐…야?」
발치를 보니, 눈 밑에 무언가 새카만 것이 얼풋 보였다.
「뭐야, 이거.」
부츠 끝으로 눈을 치우자, 풀색이나 회색의 얼굴이 보였다. 솟아나 있거나 둥그렇게 찢겨져 있는 그것들은 모두, 무언가 액체가 스며 있는것 같았다. 네프리는 색이 스며든 눈을 바라본 순간, 이물(異物)의 정체를 이해했다.
「아앗…!?」
새된 비명이 목에서 흘러나온다.
(마, 마, 마물…!!)
그녀는 오빠의 방 창문가로 달려가, 첫 눈― 그것은 새하앴다―을 퍼올려 내던졌다.
「오빠…!! 오빠!!」
눈뭉치가 몇개 정도 창문에 적중하자, 이윽고 커튼을 걷고 제이드 바르포아가 얼굴을 보였다.
소년은 여동생의 모습을 확인하고, 마침내 창문을 열었다.
「뭐야, 눈 같은걸 던지다니.」
「……」
졸린듯 눈을 문지르고 있던 제이드의 손이 멈췄다.
「왜 울고 있어.」
그는 여동생의 얼굴과 후벼파인 눈을 번갈아 바라본뒤, 깔끔하게 납득했다.
「뭐야, 일부러 끌어 낸거야?」
「마물!! 또 죽였지?! 엄마도 그만두라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제이드는 막 일어나서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일부러 밤중에 실험하잖아. 네비림 선생님에게 오늘 꼭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 말야.」
「눈이 내렸는데?!」
네프리는 어젯밤의 정숙을 떠올렸다. 지극히 조용한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은 오빠였다.
「무서워…….」
무심코 중얼거리자,제이드는 방긋 웃어보였다.
「무섭기는. 걔들은 전부 새끼 마물인데, 포니움(音素) 진동수 정보는 굉장히 단순했어. 그치만 유기물은 조금,」
복제가―하고 말하며 제이드는 창문을 닫아버린다.
「오빠….」
네프리는 확연히 차가워진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마물 토막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마물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네프리도 다니고 있는 겔다 네비림의 사설 학교의 남자 아이들은 나름 막 되먹은데다 난폭했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표적으로 삼은 과일에 나이프를 던지거나, 때로는 벌레를 짓밟아 죽이기도 한다. 그래도 오빠의 행동은 그런 것들과는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다르다, 어린 네프리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 때 역시…)
현관 쪽으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떠올리고 있었다.
**
그 날은 아침부터 부모님이 외출을 나간 날이었다.
제이드는 네프리의 방에 있는 난로 앞에 진을 치고 책을 탐독하고 있었다.
제법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않는다. 뒤에 있는 여동생 같은건 신경 쓰이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빠, 놀자.」
「……」
조금 전부터 혼자서 인형놀이를 하고 있던 네프리는 확실히 심심했었다. 인형은 네프리와 같은 금발의 여자아이― 얼굴과 손목 끝만이 하얀 비스크로 되어있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드레스는 비단으로 만들었다―로, 나이 어린 소녀가 긴 시간 동안 일인이역을 해가면서 떠들 수 있을리 없다.
「저기, 오빠 방에 가도 돼?」
「안돼.」
그때까지는 답도 안했던 주제에, 제이드는 무서운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귀중한 책이나 자료가 잔뜩 있으니까. 절대로 들어가지마!」
엄마가 동생을 돌봐주라는 말만 안했다면, 이런 곳엔 안 있어―하고 제이드는 말을 이었다.
「그럼, 밖으로 나가자. 스파가 있는 곳.」
「스파? 부자들의 별장지 수증기 같은건 보고 싶지도 않아.」
제이드는 약 2년정도 전부터 때때로 쓰게 된 안경 너머로 동생을 한번 흘긋 바라보았다.
「정마아알!! 재미없어!」
네프리는 뺨을 부풀리면서,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오빠에게 내던지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기세가 넘쳐 쥐고 있던 인형의 몸이 손에서 쑤욱하고 빠졌다.
「앗!!」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허공을 날았던 인형은 테이블의 다리에 부딪혀 챙그랑하는 소리를 내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아―.」
제이드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인형을 주워 들고서, 목 없는 인형을 여동생의 코끝 앞에 쑥 내밀었다.
「즉사.」
비스크로 만들어진 얼굴은 귀 언저리부터 무참하게 깨어져 어여쁜 비단 드레스와 작별, 바이바이.
「어쩌지…」
네프리는 새파래져서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부모가 돌아오면 분명히 꾸중을 듣게 된다.
제이드는 방 구석까지 굴러간 인형의 얼굴을 주워 온 뒤,
「괜찮아.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물러나 있으라는듯 손짓했다.
「우선은 이 녀석의 음소(포니움) 진동수다……」
그는 여동생에게서 등을 돌리고, 중얼중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뭘 하고 있는거야……)
네프리는 영문을 모른채, 빤히 오빠의 등을 바라본다. 무얼하는진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인형을 조사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정도 숨을 죽이고 있었던걸까. 빛이 갑자기 마치 제이드의 몸을 감싸 안는 것처럼 보였다.
(읏?!)
네프리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한번 제이드를 바라 보았을때엔 눈부신 빛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됐다.」
놀랍게도, 제이드는 두 개의 인형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한쪽이 망가진 것만 빼면 완전히 똑같은 모양.
「뭐야…… 이거, 어떻게…?」
「이런 물건의 물질 구성자체는 단순하니까 말이야. 음소(포니움) 진동수를 파악하고나면 간단해.」
제이드는 천연덕스럽게 말하고나서, 지금 만든 것을 평상시처럼 테이블 위에 놓고서, 망가진 인형을 가지고 방을 나갔다. 혼자가 되고나서 네프리는 우물쭈물 새로운 인형을 살펴 보았다.
인형은 원래부터 하나 더 있었던게 아닐까?
「똑같아…….」
귀에도 목에도, 수리한 흔적은 없었다. 무게도 크기도 끌어 안을 때의 기분, 게다가 오래전부터 쭈욱 입고 있었던 드레스의 색이나, 오른쪽 금발 쪽이 왼쪽보다 조금 짧은 점까지 같다. 네프리가 가위로 장난을 친 것 결과였으니까, 잘못 볼리가 없다.
(오빠가, 만들었어?)
소름이 돋았다. 어린 마음에도 자신의 오빠가 보통 남자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포였다. 그 이후 네프리는 망가진 인형을 볼 수 없었다. 분명 제이드가 남몰래 처분해 버린거겠지. 그것을 알게 되었을때 복제된 인형은 확실하게 ‘원래의 인형’이 자리 잡고 앉았던 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네프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테이블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인형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제 공포는 느껴지지 않는다. 익숙해져 버렸으니까.
(정말로 무서운 것은…)
어젯밤의 정숙. 마물의 고깃조각. 눈썹하나 까닥 않는 오빠의 얼굴.
그녀는 싸늘히 식은 손을 마주 비비며, 생각했다.
소리도 내지 않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깨닫고 보니 이미 만들어져 곁에 있는 ‘가짜’
막연한 이미지가 작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된다.
그 때, 아침밥이 되었음을 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후유하고 한숨을 쉬고서 문을 열고 식당으로 달려갔다. 따뜻한 우유가 컵 바닥에 한 모금 정도 남았을때, 언제나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드!! 제이드으!!」
제이드는 눈썹을 찌푸리고서 거의 반사적으로 일어나 현관에 준비해 둔 몇 권의 책을 옆구리에 낀다.
「잠깐, 오빠!! 나도 같이!!!」
네프리가 외쳤지만, 제이드는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제이드.」
만면에 미소를 띄운 서필 ․ 와이욘 ․ 네이스가 번개처럼 문사이로 몸을 끼워넣듯이 들어온다.
「아아」
제이드는 서필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밖으로 밀어냈다.
「제이드! 오늘도 눈이 한가득 내린것 같아서 좋은 날씨야!」
「너 말이야, 좀 지나치게 빠르잖아. 점점 더 빨라지고 있어. 도대체 몇시에 집을 나오는 거야.」
겔다 네비림의 집은 제이드와 서필 두 사람의 집 거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정확하게는 서필의 집이 조금 더 가까운 정도. 그런데도 서필은 일단 선생의 집을 지나쳐서, 일부러 제이드를 찾아 오는 것이다.
「그런거 아무래도 좋잖아. 주에 딱 세번이고. 아, 그렇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입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봐.」
하얀 숨이 새어나온다.
「에?」
「자랐어.」
제이드는 한껏 벌려진 친구의 입 안에, 조그맣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뾰족한 앞니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게 자라면 앞니는 이제 완벽한 어른이 되는거야.」
「흐응.」
제이드는 눈썹위에서 말쑥히 일자로 잘린 서필의 앞머리를 보며, 흥없이 답했다.
「후후후.」
서필은 기쁜듯, 잠자다 엉크러진 머리를 긁으며 웃는다.
「그래도 제이드는 굉장해. 제이드의 이빨은 벌써 전부 어른인걸.」
「어금니는 아직이야.」
그때 허둥지둥하는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네프리가 뛰쳐나왔다. 그녀에게는 너무나 큰 가방을 양손으로 끌어안고 있다.
「아아, 잘됐다. 오빠, 기다려줬구나. 그럼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제이드, 네프리를 부탁할께.」
「네.」
배웅하러 나온 어머니에게 그렇게 답하고, 그들은 걷기 시작한다.
「오빠, 잠깐. 가방을 못 매겠어. 」
「뭐야…. 별 수 없지.」
제이드가 여동생 쪽으로 뒤돌아 가려 한 순간 서필이 두사람 사이를 끼어 든다.
「저기저기, 제이드. 숙제 했어? 오늘 마치면 어딘가 안 갈래?」
「비켜.」
친구의 눈에 떠오른 명백한 질투에 진저리치며, 제이드는 너무 마른 친구의 어깨를 밀쳐낸다. 같은 나이라고해도, 서필은 자신보다도 훨씬 더 키가 작다. 보고 싶다곤 생각하진 않지만, 맘만 먹으면 머리에 또아리를 튼 가마도 들여다 볼 수 있을것 같다.
(이녀석, 어째서 내게 달라 붙는걸까.)
네프리의 손을 가방 끈 안으로 밀어 넣어, 가방을 짊어지게 해주며 제이드는 생각했다.
원래부터 아버지대끼리 아는 아이여서, 어린시절엔 몇번인가 놀았던 기억은 있다. 하지만 서필이 이렇게 자신에게 집착하게 된 것은 작년부터 열린 네비림 선생의 사립학교에 다니게 되고 나서부터의 일이였다.
「서필.」
제이드는 말을 걸었다.
「뭐야, 제이드.」
「…….」
「뭐야, 뭐야?」
서필은 기뻐서 어쩔줄 모르겠다는 듯 삐쩍 곯은 얼굴로, 제이드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너, 이제 우리 집에 안 와도 돼.」
「에?!」
순간 웃는 얼굴이 사라진다.
「부탁한 적도 없는데다가, 왠지 아침부터 피곤해서 말이야.」
「그런….」
서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너, 너무해, 너무해, 제이드! 일부러 빨리 일어나서 길을 돌아오고 있는데.」
「아무도 그런거 부탁 안 해..」
「윽…, 크끅.」
경련하는 입술에서 오열인지 웃음지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알겠어!! 오늘부터 제이드가 나를 마중 나와 주는거구나. 기뻐.」
「그럴리 없잖아.」
「큭!!」
서필은, 탓하고 달려나가서는 휙하고 돌아본 뒤, 가지런하지 않은 이를 드려내 보인다.
「네비림 선생님에게 일러 줄꺼야! 바보, 바보, 제이드, 바보!! 흐응!! 나중에 울며불며 사과해도 이제 같이 안 놀아 줄 꺼야!」
「필요 없어.」
쌀쌀맞은 답에 서필은「으아앙」하고 우는 소리를 내면서 달려가 버렸다.
「오빠……, 저거, 가버린거야?」
「그러게. 이상한 녀석이야.」
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여동생의 얼굴을 보고서 방긋 웃어 보였다.
「뭐어 저런 녀석이라도 분명 앞으로 써먹을 수 있겠지, 가자.」
그는 자신들의 앞에 불규칙적으로 이어져 있는 발자국을 바라본다.
발뒤꿈치부터 걸음을 내딛는 이상한 주행법때문에― 천천히 달려 간걸 보아 불러 세워주길 바랬던거겠지―, 첫눈이 패여 여기저기에 튀어있다.
(서필은 저래도 제법 음소―포니움 학에는 밝으니까)
제이드는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
겔다 네비림은 언제나 그렇듯 교실로 사용되는 방을 따뜻히 뎁히면서 아이들의 책상을 걸레로 닦고 있었다.
작은 책상은 전부 8개.
남자아이가 다섯, 여자아이가 셋.
다섯살에서 열두살 또래의 그 아이들은 그녀의 첫 제자들이었다.
케테르베르크의 학사 가문에 태어나 자란 그녀는 일단 향사로서 오라클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작년 마르쿠트로 귀국했다. 이유는 가족에게도 고하지 않았다.
당초엔 그랑코크마에서 사립학교를 열 예정이었지만, 수도엔 이미 상당한 수의 교육기관이 있기때문에 그녀처럼 경험이 적은 교사에게 자녀를 맡길 부모가 없을 거란걸로 고민했다. 고향 케테르부르크에서 가정교사를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마침 그때.
어느 귀족의 별장에 열 한살짜리 남자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별장에서 교육을 받는다기에 뭔가 사정 있는 아이― 본가에서는 살 수 없다던가, 심신에 문제가 있다던가―인거겠지하고 생각했다.
조건도 파격적이고해서 케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보니, 의외로 마을엔 학교다운 학교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처음에 이야기가 있었던 남자아이― 몽드 아놀드를 포함해 아이 스물 정도를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사립학교를 열기로 했던 것이다.
「케리, 마틸다, 네프리…. 에라이아스에 빔로스……, 제이드, 서필, 어라?」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책상을 닦고 있던 네비림은 서필의 책상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위화감을 느끼고 걸레를 치웠다.
「어머, 서필도 참.」
나이프 같은 걸로 새긴 듯한 흔적을 확인하자, 네비림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고개를 가까이해 무엇을 새긴 건지 보고나서 무심코 웃어 버리고 말았다. 포니크 문자로 ‘jad'가 새겨져 있었다.
「e가 빠져 있잖아.」
그가 뭘 새기려 했는지는 생각할 것까지도 없다.
(서필은 정말이지 제이드를 좋아한다니깐.)
두 사람은 이 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 특히 제이드 바르포아의 우수함에는 혀를 찰 정도다.
몽드나 다른 아이들이 읽고 쓰기를 배우고 있는 곳에서 혼자 보술이나 포니움 학에 관한 책을 탐독하고 있다.
진홍의 눈은 뭘 생각하는 건지 읽을 수 없는 일이 잦다. 힐끔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등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상하리만한 지식욕에 반해, 제이드는 매일의 생활에 집착이 없다. 간신히 여동생 네프리에게만은 상냥함을 보인다. 서필이 그만큼이나 달라 붙는데도 담담하다. 남자아이들이 싸움― 발단 대개는 쌍둥이 에라이아스와 빔로스다―을 하고 소란스럽게 해도, 전혀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였다.
좋든 나쁘든, 제이드는 평범한 아이는 아니다, 그런 것을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책상을 다 닦고 고개를 들었을때, 흐릿한 창 너머에 인영이 보였다.
(누굴까…)
네비림이 창문을 연 순간, 인영은 굉장한 기세로 창틀에 달라붙었다.
「선생님!! 선생님!!」
「무슨 일이야? 넘어졌니?」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서필이었다.
「제이드가 심술궂게 굴어요… 학교에 같이 오고 싶지 않데요. 」
「그래…?」
(반대방향이니까, 따로 오는 쪽이 빠르다고 생각한거겠지만서도…)
네비림은 언제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밖으론 내지 않는다.
「어쨌든 빨리 안으로 들어와.」
「웅. 제이드가 오면 엄히 꾸짖어줘. 제이드는 선생님이 하는 말이라면 확실히 들으니까.」
「아아…」
서필은 한숨 놓은것처럼 창가에서 멀어져 갔다.
이윽고 도중에서 만난 듯 마틸다와 네프리가 서로 수다를 떨며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어, 제이드가 모습을 보이자, 네비림은 자신의 자리에서 초조해 하고 있던 서필과 그를 손짓해 불렀다.
교실와 안쪽―그녀의 방―을 잇는 복도에 설치된 큰 전신거울 앞에 두사람을 세우고, 네비림은 물었다.
「그랬습니까.」
서필과 나란히 선 제이드는, 그거 마치 처음 듣는 소리라고 하듯, 태연히 답한다.
「시치미 떼지마! 제이드가 심술 궂게 굴었잖아! 」

「뭐어…. 자아, 이렇게 둘이 나란히 서니 좋은 친구라는 느낌이잖아?」
네비림은 소년들을 양손 하나씩 끌어 안아 가까이 하고서 거울을 들여다본다.
「아아, 진짜! 나와 제이드와 네비림 선생님♪」
서필은 황홀한 듯 웃었다.
「선생님….」
어색한 얼굴로 제이드가 거울속의 네비림을 본다.
「화해하면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에.」
「예를 들면 제가――」
네비림은 제이드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자 핫하고 숨을 삼켰다.
「제 7음소를 쓸수 있게 된다, 던가.」
「!」
그의 어깨를 안고 있던 손이 미끌어 떨어질 뻔 했다. 그러자,
「농담이에요. 선천적으로 소질이 없는 제가 아무리 애써봤자, 선생님처럼은 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제이드는 거울 속에서 부드럽게 미소했다.
(이 아이……, 제이드의 눈……!)
「어,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친하게 지내줘. 어린아이들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네, 선생님.」
서필만이 기분 좋게 답했다.
네비림은 몸을 내밀고, 교실 쪽을 향해 말했다.
「모두 다 온 걸까? 그럼, 수업을 시작하자.」
**
(눈치채지 못했어……, 어째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걸까)
남자아이들에게 간단한 계산 문제를 내준뒤, 네프리를 포함한 여자아이들에겐 받아쓰기를 시키면서 네비림은 몇 번이고 같은 것을 거듭 생각하고 있었다.
(오라클 기사단에 있었을 때 소문으로 들은 적은 있었지만, 설마――)
제이드에게 시선을 보낸다. 이미 과제를 끝낸 그는 턱을 괴고서 지참해온 책을 보고 있었다. 이런 광경은 작년부터 익숙해졌는데.
수업은 점심 식사 전에 끝난다. 네비림이 슬슬 아이들의 노트를 모으려고 생각 했을때, 손님이 있었다.
「선생님, 우리 도련님께서 언제나 신세를 끼치고 계십니다.」
문에서 훌쩍 얼굴을 드려낸 것은, 아놀드 가의 시종이였다.
「오늘 아침에 좋은 것을 잡은지라, 부디 받아주십시오.」
커다란 통을 무겁게 내려놓은 중년 남자는 고기잡이였다. 겸업으로 별장을 책임지고 있다고 한다. 별장에 살고 있는 몽드를 가엽게 여기는 부친의 말에 따라 이따금 위문품을 갖고 온다.
「어머, 싱싱한 고기로군요.」
네비림은 암갈색 고기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괜찮겠습니까?」
「에, 아, 네에. 마침 수업을 마치려 한 참이었어요.」
그녀는 몽드를 손짓해 불러, 노트― 반도 채 풀지 않은―를 건네받았다. 시종인 남자는 소년에게 두꺼운 코트를 입히고 귀중품을 품에 안듯 교실을 나갔다.
「몽드는 좋겠다. 언제나 마중 나와서.」
「저 아이, 벙하니 있으니까 걱정되잖아.」
케리와 마틸다가 쿡쿡하고 서로 마주 웃는다.
「귀족이잖아. 귀족이라는건 자라면 수도에서 사는거지?」
네프리도 잘 모르지만 나름 대화에 참가한다.
「그러고보니 말이죠, 선생님.」
빔로스가 생각난듯 말했다.
「서쪽 변두리의 큰 저택에 왕자님이 있다는거 진짜야?」
「왕자님? 글쎄, 어떨까나.」
네비림은 애매하게 답한다. 왕위 계승 다툼에서 패배한 왕자가 이 마을에 감금당해 있다는 이야기는 학교를 처음 열었을 때에 들었다.
「어쩌면 몽드가 그 왕자님 이라거나?」
「에에, 그럴리 없잖아?!」
아이들은 그럴듯한 화제로 소란스러워졌다. 서필도 흥분해서, 뒷자리에 앉은 제이드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제이드?!」
「흥미 없어.」
「아……, 그래.」
서필은 낙담해 노트를 덮고 나서, 제이드의 노트와 자신의 노트를 딱 맞게 포갠뒤 네비림에게 건넸다.
**
「미안, 시간을 끌어서.」
「아뇨.」
정숙을 되찾은 교실에, 네비림이 돌아왔다.
「괜찮다면 여기서 점심이라도 먹지 않을래?」
자신의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던 제이드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지만, 큰 거울이 있는 복도를 빠져나와 네비림의 사실로 들어간 순간 낮게 신음했다.
「우와…!!」
이 방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결코 넓지 않은 방이지만, 벽 한쪽면이 완전히 서가가 되어 있다. 창틀의 작업대에는 책에서 밖에 본 적 없는 간단한 실험도구가 깔끔히 늘어세워져 있었다. 커튼 쳐진 너머에는 침대가 놓여져 있는것 같았다.
중앙에 놓여진 큰 책상에는 간단한 샌드위치와 마실 것이 차려져 있다.
「앉아, 제이드.」
네비림은 의자를 권했지만, 소년은 파고 들어갈 것처럼 책의 뒷표지를 보고 있다.
「나중에 좋아하는 건 빌려줄께.」
「정말인가요?」
제이드는 드물게 뺨에 홍조를 띄고, 네비림 바로 앞에 앉는다. 샌드위치를 바라보았지만, 빵 밖으로 소금에 절인 고기가 비져 나온 것을 보자 손을 대는 것을 멈췄다.
「무언가 할 이야기라도 계십니까?」
「아아… 조금 묻고 싶은 일이 있어서.」
네비림은 우유를 따르며, 제자의 안경에 힐끔 시선을 준다.
「어째서 여기에 다니고 있는걸까하고. 스스로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읽고 쓰기밖에 배울 수 없을 것 같은 이 학교에서 네가 배울만한 건 아무것도…」
「선생님이 제 7음보술사(音譜術士)― 세븐스 포니마―이기 때문입니다.」
막힘없는 어조였다.
「선생님은 다아트에 있었지요? 무슨 연구라도 하셨습니까?」
「아니…, 나는 단순한 힐러야.」
「도사 에베노스를 만난 적은?」
「그건, 다아트에 있으면 얼굴 정도는 보게 되지.」
에베노스의 곁에서 혹성 보술 연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색조차 않고, 그녀는 미소했다.
「에베노스님에게 흥미가 있어?」
「아뇨. 특수한 보술에는 관심이 있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하고, 제이드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께서 하신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않나요?」
「그렇지 않아. 저기, 너의 그, 눈 말인데.」
「네.」
「다아트에 있을때, 들은 적이 있어. 보안(譜眼). 내 착각이 아니라면 너의 눈에는 보진(譜陳)이 그려져 있어.」
「에에, 그게 무슨?」
제이드의 표정엔 한점 변화가 없었다.
「보안(譜眼)을 제안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벌써 2년이나 옛날 이야기야. 너는 아직… 」
8살입니다―하고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생각하고 혼자서 해냈습니다. 음소를 가장 강하게 품고 있는 것은 눈이지요? 그러니까 거기에 보진(譜陳)을 새겨 넣으면 됩니다. 이렇게…」
그는 안경을 벗고, 손끝을 안구위에서 움직이는 흉내를 내 보인다.
「지닐 수 있는 힘이 몇 배가 됩니다.」
「그런…, 위험하다곤 생각하지 않았어? 실패하면 실명했을 텐데.」
제이드는 눈을 치켜뜨고 네비림을 보았다.
「선생님은 모르시겠지요. 태어나서부터 세븐스 포니움의 소질을 가진 사람은.」
「……」
「확실히, 지금 생각보니 어렸네요. 지금이라면 좀 더 능숙하게 고통을 억누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색소의 변화 역시.」
보안(譜眼)을 시술하기 전은 이렇게 붉지 않았어요, 하고 제이드는 차분히 말했다.
「제어… 제어는 확실히 할수있겠지?」
「문제 없습니다. 라고 해도, 저는 아직 성장기라서 여러가지로 불안정하니까, 조정을 필요로 하지요.」
제이드는 안경을 가리키며, 오늘 아침 서필과 했던 열 두살의 유치이야기를 생각내고서 살짝 웃었다.
「그래……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여기의 책은 자유롭게 읽어도 상관없어. 이 방에 있는 것도 필요하다면 써도 좋아.」
네비림은 살풍경한 방을 둘러보고서 제이드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정말입니까?!」
제이드의 얼굴이 파앗하고 빛난다.
「그래. 집에는 음소학 자료도 많이 있어. 거의 두고 와 버렸지만.」
네비림은 샌드위치 그릇을 제이드 쪽으로 밀어주었다.
「죄송합니다. 저, 고기보다는…」
제이드는 사죄의 말을 하고서, 방구석에 놓여진 양동이를 곁눈질했다. 물고기는 아직 그대로 있다.
「선생님. 저 해수(海水)에서 불순물과 소금을 추출 할 수 있나요?」
「으응….」
제이드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걸까 하면서도, 네비림은 새 컵에 다소의 바닷물을 부어 넣고 나서 테이블 위에 놓고 손을 들었다. 이윽고, 바닷물은 거무스름한 결정과 투명한 물로 나뉘었다.
제이드는 기쁜듯 미소한다.
「왜 그래?」
그는 답하지 않고 스푼으로 투명한 액체를 떠내서 네비림이 따라준 두유에 떨어트렸다.
「알겠어. 그런거구나.」
「네, 절반으로 하죠.」
네비림은 쿡쿡하고 웃기 시작했다. 제이드가 유리컵을 바라보자, 컵 안에서 증기가 피어오른다.
이것이 어린애답긴 해도, 제이드 유파의 의식인 거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제이드는 그녀를 받아 들여 주는 모양이다.
「자아.」
제이드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완성된 두부의 반을 네비림에게 나눠준다.
「고마워. 제이드, 당신은 어떤 어른이 될까나.」
「현재로선, 부검의(部檢醫) 같은게 되고 싶다고 생각해요.」
「부검의?」
뜨거운 두부를 입안에서 녹이며, 네비림은 되물었다.
「네. 원인과 결과… 어떻게 죽이면, 어떤 손상을 입은 사체가 되는걸까. 어떤 보술을 쓰면 어떤 사체가 되는걸까.」
「사체…」
「그렇습니다. 자연사의 경우도 그 양상은 크게 나뉩니다. 생명활동정지 이후의 유기체는 정말로 웅장해서, 질릴리는 없겠죠.」
「그래…. 그러고 보니 네프리가 이전에 당신이 어린 마물을 잡아서 절개하거나 죽이고 있다고는 말했지만…」
「인간을 쓸 수는 없으니까요.」
제이드는 매우 진지하게 말했지만, 그 어조는 명백한 유감이었다.
「선생님. 빌려갈 책을 골라도 되겠습니까?」
「그러렴.」
제이드는 스푼을 바르게 놓고 일어섰다.
(앞으로 수년, 아니… 좀 더 빠를지도 몰라…. 이 아이는 내 손으론 감당할 수 없어 질 것 같아.)
열심히 서가를 마주하는 소년의 등을 보며, 네비림은 은밀히 생각했다.
(마땅히 받아줄만한 곳을 생각해줘야 될텐데. 아니…, 그건 내 일일까나.)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운명은 이 아이를 중앙으로 잡아당긴다. 결과적으로, 진리에 닿는지 아닐지는 모두 유리아님의 뜻.
「그렇게 되어야한다면 자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겠지. 기대할만해.」
네비림은 중얼거린뒤, 창밖에서 흩날리기 시작한 눈발에 시선을 주었다.
**
「저긴가.」
마을의 광장에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 존재하는 지사 저(邸)가 있고, 그 안쪽에 거대한 저택이 지어져 있다.
「왕자가 틀여 박혀 있다는 곳은.」
제이드는 대 여섯보걸음 뒤쳐진 서필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이드…… 역시 무리야. 봐, 감시하는 군인들이 잔뜩 있어….」
서필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경비하고 있는 마르쿠트 병사들의 모습은 멀리서봐도 확연하다.
「뭐야, 너도 오고 싶어 했던 주제에.」
「그래도… 저렇게 심한걸….」
확실히― 하고 제이드는 생각한다.
학교에서 비극의 왕지 피오니 ․ 우파라 ․ 마르쿠트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엔, 솔직히 말해서 그리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조금 상태를 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엄중한 경비를 눈 앞에 두니, 타고난 호기심이 뭉게뭉게 머리위로 치밀어 온다.
(도대체 어떤 녀석일까―)
「제이드, 이대로 되돌아가자.」
거듭 소매를 잡아당기는 서필의 손을, 제이드는 뿌리친다.
「죽여 버리면, 나중에 귀찮아지겠고…」
「에엣.」
서필은 제이드가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고나서 새파래졌다.
「돌아가자, 제이드. 나 이제 황제의 아들 같은거 아무래도…」
「내가 만나보고 싶어!」
「!!」
강한 어조에 서필이 입을 다문다.
「대략 저 정도의 경비라면 조금 시선을 흐트러트리는 걸로 어떻게든 되겠지.」
「제이드…!!」
친구를 바라보는 서필의 눈이 빛난다.
「괴, 굉장해! 제이드에겐 책략이 있구나!」
「가자, 서필.」
제이드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서필을 재촉했다.
「응!」
서필은 제이드가 띈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이드가 자신에게 웃어주고 있다. 그 이상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덤으로 제이드는 이제부터 분명, 두근두근한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아아, 제이드와 함께 오길 잘했어…)
서필의 마음은 행복감으로 꽉 차있었다.
경비병들의 눈에는, 두 사람의 소년이 사이좋게 웃으면서 걷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거겠지. 실제로, 저택에 가까이가도 누구하나 꾸짖는 자가 없었다.
이윽고 정면의 문을 관찰할 수 있는 거리까지 이르자, 제이드는 중후한 자물쇠에 힐끔 시선을 던졌다.
「에, 왜그래, 제이드?」
「저기… 저 창에서 이쪽을 엿보고 있는… 저게 피오니 아냐?」
「어느거? 어디?」
서필은 제이드가 가리키는 곳을 필사적으로 봤지만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다.
「모르겠어.」
그리고는 몸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너는 키가 작으니까. 좀 더 가까이 가서, 발돋움 해봐.」
「응. 그래도, 군인아저씨들은… 어쩌지?」
「이렇게… 하는거야!」
파앙하고 자물쇠가 벌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와아아아?!」
동시에 밀쳐진 서필은 기세 좋게 앞문에 부딪혔다. 자물쇠가 풀린 문이 작게나마 열리기만하면, 가냘픈 소년의 몸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다.
「무슨 일이냐?!」
병사가 눈치챘다.
「꼬마다!! 꼬마가 침입했다!!」
「잡아!!」
병사들이 정문으로 일제히 달려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제이드는 조금 전부터 점찍어 두고 있던 자그마한 출입문을 목적으로 달려 나갔다.
예상대로 거기에는 사람의 기척도 없고 열쇠도 걸려있지 않다.
울려퍼지는 서필의 비명과 울음소리를 들으며 제이드는 쉽게 저택 부지내로 숨어 들었다.
저택은 보기에도 감옥같은 구조였다. 건물을 빙 에워싼 형태로 펼쳐진 정원에는 구석구석 손질이 잘 된 나무밖에 없다.
(조망이 너무 좋아… 서필이 떠들어대면 이쪽에도 사람이 올지도 몰라.)
지금은 쥐죽은듯 조용한 눈이 쌓인 풍경을 바라보며 제이드는 생각했다.
침입한 것은 좋지만, 왕자인지 하는 녀석의 방은 어디인걸까.
(뭐, 발견당하면 친구들을 걱정해서 찾으러 왔다고 하지.)
어쨌든 한번 둘러보기로 정하고, 동쪽으로 향한다. 몇개의 창문을 스쳐지나갔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북쪽으로 돈다.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때였다.
「악당.」
「!?」
핫하고 고개를 들자, 열린 창문에서 한사람의 소년이 얼굴을 내보이고 있었다.
「불법침입이야.」
소년은 히죽거리며, 제이드에게 손을 뻗었다.
어깨즈음까지 밖엔 보이지 않지만, 다부진 체격인 것 같다. 왜인지 머리가 심하게 엉클어져 있다.
(이것이 왕자……? 아니겠지.)
「피……」
「뭐야?」
「피오니 ․ 우파라 ․ 마르쿠트가 여기에 있다고 들어서.」
「피오니님이라면 안이야, 자아.」
소년은 뻗은 손을 팔랑팔랑 흔든다. 여기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 같다. 제이드가 우물쭈물 손을 겹치자,
「읏챠.」
소년은 큰 고생도 없는 모양새로, 그를 방안으로 끌어 당겼다.
재빨리 문이 닫힌다. 방안을 한번 돌아본 제이드는, 무심코 소리를 내 버렸다.
「우와…….」
(뭐야, 이건―― !!)
방은 상당히 넓었지만, 전부 어질러져 있었다. 책이 흩어져 있고, 사진이 쏟아져 있고, 섬처럼 점점이 떨어져 있는 쿠션 주위에는 여지없이 음식물의 잔해가 굴러다니고 있다. 소파와 침대에는 벗어던진 옷이 작은 산을 쌓고 있었다.
「바깥이 소란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어린애라니.」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의아한듯 말했다.
그는 이렇게 추운데도 반바지를 입고 있다.
「잘도 위병에게 잡히지 않고 여기까지 왔네.」
「잡혔어, 친구들이.」
「에에, 친구들을 구실 삼은 건가.」
「구실이 아니라, 미끼.」
그것을 듣자 소년은「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해!」
「피오니는 어디에…?」
제이드자 묻자 소년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된다.
「나야.」
「에.」
「방안에 있다―라고 했잖아. 내가 비극의 왕자, 피오니 우파라 마르쿠트다.」
「……!!」
아연해 하는 제이드에게 피오니는 헐벗은 발을 벅벅 긁으며 물었다.
「저기, 올해 몇년이야?」
「ND 1991.」
「그래?」
「거짓말이야. 실은 1992년.」
「흐응.」
소파위에 있는 거추장스러운 것을 떨쳐내면서 갑작스러운 방문자가 앉을 자리를 만들고 있는 소년의 옆얼굴을 보며, 제이드는 남몰래 생각했다.
(상당히 의외이긴지만,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군)
「감금같은거 당하고 있으면 감각이 이상해져서― 앉아.」
「응…….」
제이드가― 쓰레기더미에 찔리기라도 하지 않을까 하며 주의깊게 살피고 나서― 소파에 앉자,
「너, 이름은?」
피오니가 흥미진진하게 묻는다.
「제이드. 제이드 바르포아.」
순간 위험하다는 생각이 가슴을 스쳤지만, 제이드는 이름을 밝혔다. 근거는 없었지만, 이 소년은 괜찮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나는 피오니. 뭔가 질문은 없어?」
아무렇게나 걸려있는 샌들을 벗으며 비극의 왕자는 털썩 바닥에 주저 앉는다.
「아…… 그렇지. 메이드라던가 없는건가?」
「메이드?」
「시중들어 주는 사람말야.」
제이드가 방을 돌아보는 것을 보자, 피오니는「아아, 그런 의민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야, 있지. 그래도 뭐 보시는 바대로, 방치되고 있으니 편해.」
「이전엔 그랑코크마에 있었겠지?」
「응, 그렇지만 굉장히 어렸을 때라고 알고 있으니까, 여기에 온 건. 예언―스코어 때문에 말이야.」
「예언―스코어―인가……」
제이드는 자신도 매년 생일날에 스코어를 읽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솔직히 무슨 소릴 들어도 마음이 동한적은 없다.
(황족이라는 것도 큰일이군)
「너, 알고 있을라나. 내게는 형이 둘, 누나가 하나 있지만. 어머니가 달라서 말이야, 자주 하는 일이야.」
「몽드같아….」
「에?」
「아니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도 그런 녀석이 있어.」
「그래도 그 녀석은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아.」
피오니는 매우 부러운듯 말하고 갑자기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침대 위의 모포와 시트를 움켜쥐고 느닷없이 그것을 제이드에게 뒤집어씌운다.
「우왓?! 무슨 짓……」
「쉿!! 순찰이다.」
「!!」
제이드가 숨을 죽이고 있자, 이윽고 창밖으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인 것 같다.
「너, 발자국 남기지 않았겠지.」
「몰라….」
우물거리는 소리로 제이드는 답했다. 말소리가 멀어진다.
「이제 괜찮아. 녀석들, 저택을 휙하니 한바퀴 도는 것뿐이니까. 잠시 동안 오지 않아.」
피오니는 시트를 벗겨 주면서, 느긋하게 웃었다.
「하나는 이쪽을 보고 있었지만― 너, 방과 융합되어 실로 위화감이 없었어. 굉장해!!」
「이만큼 어지럽혀 놓으면, 당연하지.」
제이드가 질려서 말하자 피오니는「아하핫핫」 하고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래도 이제 돌아가는 쪽이 좋아. 모두 미끼에 대한 걸로 예민해졌겠지.」
「아아.」
「또 와라, 라고는 말 안해.」
피오니는 창쪽으로 다가가는 제이드의 팔을 쥐고 홱하고 잡아 당긴다. 그리고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
제이드의 눈이 둥그래진다.
「거부하면 큰 소리를 내 주지. 수용소 생활은 가혹한 것 같더군.」
「책사로군요, 왕자님.」
담담히 말하자, 피오니는 그것은 기쁜 듯, 빙그레 미소했다.
**
겔다 네비림이 바르포아 가를 방문한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미안해, 이렇게 이른 시간에.」
모친이 깨워서 침대에서 일어난 제이드가 거실로 나가자, 네비림은 자리에서 일어나고서 미안한 듯 말했다.
「선생님.」
「저쪽으로 가 있어.」
엿보러 온 네프리를 문 밖으로 내보내고, 제이드는,
「왜 그러십니까,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인데.」하고 의아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에에, 그게… 서필에 관한 일인데.」
「서필?」
의외인듯 되물은 순간, 네비림은 한숨을 쉬어 보였다.
「그래… 그랬구나. 네가 알리가 없지.」
「무슨 일인가요?」
「어제, 수업이 끝나고 나서 너, 서필과 함께 있었지?」
「네.」
제이드는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중까지 함께 돌아갔지만…」
「그렇겠지. 실은 그 아이, 피오니 왕자의 저택에 들어가서 잡혔어. 있잖아, 요사이 학교, 그런 화제였잖니.」
「그러고 보니…….」
「그래서 흥미가 들끓은 거겠지, 분명. 여러가지 일이 있어서 내가 불려져갔는데, 서필은 네가 밀쳐서 저택 안으로 들어 갔다고만 말하고있어.」
「………」
네비림은 제이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우등생인 네가 그런 짓을 할리 없다고 생각해.」
「…」
「아무리 어린애라지만, 해도 될 일과 안 되는 일이 있어. 알겠니, 제이드?」
간파당한건가, 하고 제이드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서필은 지금 어찌하고 있습니까.」
네비림은 완전히 식어버린 홍차를 한모금 마셨다.
「내게 연락이 왔을 당시엔 군의 기지로 연행되었지만, 아이에게는 무서운 곳이었겠지.『수용소로 보낸다』라는 협박을 당하고 난 뒤에는 계속 울기만해서, 지금은 지사(知事)가 떠맡고 있어. 곧 풀려날꺼야.」
「잘도 거기서 끝났군요.」
제이드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게, 뭐어… 살짝 연.줄.이 있었으니까.」
애매하게 말을 흐리고 네비림은 허둥지둥 일어선다.
「그럼,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돌아갈께.」
그녀는 거실에서 나가다 말다, 돌아보았다.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 있을지도 몰라. 내일 소란스러워지지 않으면 좋겠는데.」
「괜찮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나중에 서필에게 가보겠습니다.」
제이드는 미소하고서,
「모두의 일도 맡겨 주세요.」
――하고 덧붙였다.
「고마워, 과연 우등생이네. 믿음직해.」
혼자가 되고 나서 제이드는 턱을 괴고서 난로의 불을 바라본다.
(믿음직하다, 인가. 위안도 안 되는군.)
제이드는 무심코 테이블 너머― 지금까지 네비림이 앉아 있던 소파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우등생 같은게 아니라도 좋아. 제 7음보술사(音譜術士) ―세븐스 포니마 쪽이 좋아―――)
희미하게 누군가가 앉아 있던 흔적을 건드리진 못하고, 제이드는 뻗은 손을 다시 당겼다. 만약 자신에게 선천적인 소양이 있었다면, 피차 제 7음소를 다룰 수 있는 자로서 대등하게 마주 설 수 있었을 텐데.
(우수하다던가, 우등생이라던가, 그런 말로 평가 받고 싶지 않아. 아이 취급 당하고 싶지 않아―)
그 때, 작게 불씨가 튀었다.
제이드는 난로를 바라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녀석… 피오니의 방에 난로가 있었지?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녀석 성격 상으론 언제 불이 나도 이상하지 않아.)
「음, 어떻게든 될 것 같군.」
어제부터 고민하던 사건이 일시에 정리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마을의 지도를 펼쳤다. 이전에 어딘가에서 받은 여행자용 관광지도라서 대강의 거리정도 외엔 알 수 없다.
「좀 더 정확한 위치를 확인해야 될텐데.」
피오니의 저택이 위치한 부근을 검지로 누르자, 마침내 서필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
「서필 와이욘 네이스?」
접수처에 있던 여직원은 그렇게 거듭 한뒤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어제 소란을 일으킨 그 아이말이네.」
「네. 저는, 서필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오가 지났을 무렵의 지사 저(邸)는 쥐죽은듯 고요했고, 달리 방문자는 없는것 같았다.
「그래? 그 아이, 부모님이 와도『선생님한테만 얘기할꺼야』라고 주장해서 큰일이었어. 그래서 불려온 사람이 너희 학교 선생님이니? 굉장히 예쁘신 분말야.」
직원은 무료했던건지, 어제 있었던 일을 제이드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저, 그래서 서필은 어떻게 됬나요? 저, 선생님한테 이야기를 듣고 그앨 마중 나온건데…」
「그래? 미안해.」
직원은 일단 입을 다물고서,
「그 아이라면 오늘 아침 군기지로부터 정식으로 통지가 와서 집으로 돌아갔어.」
그렇게 가여운듯이 이야기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집으로 가볼까나. 좀 더 빨리 올 걸.」
제이드는 자못 유감스러운듯 말하다가, 막 생각난듯 직원을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참, 그랬지. 저기, 실은 우리 학교에서 지금 이 마을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어요. 마을 내력이라던가, 오래된 지도라던가, 여기에 그런건 없나요?」
「지도…말이야? 현재의 관광지도라면 얼마든지 있긴한데.」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더니,
「작년에 수도에서 통지가 와서 케테르부르크의 역사적 자료는 모두 폰 디스크[音普盤]에 기록했어. 내 임의로 해석기로 돌려서는 안되고…, 잠깐 기다려보렴. 보고 올게.」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나온 그녀의 손에는 한 장의 도면이 들려져 있었다. 상당한 시간을 탄 듯 변색되어있다.
「이래선 안되겠네. 칼 3세의 시대에 카지노나 스파 등의 환락가를 만들었을 때의 하수도망…. 이런거 밖에 없었어.」
「보여 주세요.」
제이드는 접수 카운터위에 도면을 펼치고 그것을 빠르게 훝어보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우응…, 모처럼 감사합니다만, 우리들이 하는 공부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네요.」
「그렇지? 도움이 못되서 미안해. 친구에게 안부 전해줘.」
미인 선생님에게도하고 그녀는 덧붙였다.
**
서필이 일으킨 소동 때문에 아이들이 불안해하는게 아닐까하는 네비림의 우려가 기우로 끝난 것은 그로부터 5일뒤의 일이었다. 군의 구속에서 풀려나 잠시 자택근신 하고 있던 서필이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마을에 낯선 소년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서필, 오래간만이네.」
네비림은 괜찮니?하고 질문하기보다 미소 지어 보인뒤,
「오늘 아침은 모두에게 새로운 친구를 소개하겠어요. 프란츠… 어라? 잠깐, 잠깐만.」
네비림은 모두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서는 사실로 돌아갔다.
순간 교실안이 소란스러워진다. 케리도 에라이아스도, 그런 이름을 한 아이가 케테르부르크에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너무해에, 제이드.」
뒤돌아본 서필의 말에, 고개를 든다.
「무슨 소리야.」
「맞이하러 갔는데, 먼저 집을 나서 버린거.」
「아아, 그거 말야? 네가 오늘부터 학교에 나온다는걸 몰랐었어.」
「아, 그런가.」
맞다, 그것도 그렇네, 하고 서필은 깔끔하게 승복하더니, 핫하고 새로이 화를 낸다.
「그것뿐만이 아냐!! 제이드, 우리집 뒤 뜰 쓰레기 장에…」
「응?」
서필은 주변을 둘러고보고서 목소리를 낮춘다.
「마…, 마물. 죽인 마물을 버렸잖아! 그런 짓 하는건 제이드 밖에 없어!」
「하지만, 우리집에 버리면 네프리가 무서워하니까.」
「그게 뭐야!! 우리집이면 괜찮아?! 도대체 요저번의 일 역시…」
태연하게 답하는 제이드를 잡아 먹을듯 달려들려하는 순간, 서필은 교실의 공기가 확하니 바뀌는 것을 느꼈다.
「모두들, 프란츠야.」
네비림의 옆에 서있는 소년을 보고, 아이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렇게나 자라서 어깨까지 닿은 금발. 짙게 빛나는 눈동자, 꽉 잡힌 몸매. 그러나 그런것보다도 아이들의 눈을 끈 것은 그 복장이었다. 창밖에는 오늘도 눈이 쌓이고 있는데, 무릎 위까지만 오는 바지에, 눈길에서 잘 미끄러질 것 같은 샌달을 신고 있다. 덤으로―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저기가 진흙으로 더럽혀져 있다.
「……케세도니아에서 왔어. 잘 부탁해.」
소년은 제이드를 힐끔 본다.
「프란츠의 부친은 상인으로, 잠시동안 케세도이나와 여기를 왕래하실거라네. 그럼 일단, 제이드 옆에 앉아 줄래?」
「어째서 그렇게 되는데요, 네비림 선생님!!」
서필이 거의 반사적으로 항의했다.
「네가 제이드 옆에 앉아봤자 배울 만한건 아무것도 없잖아?」
「…………」
네비림의 말에 서필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제이드 옆에 앉고 싶은데…)
질투로 뒤돌아보자, 막 자리에 앉은 신입과 눈이 마주쳤다.
「너, 정말 딱하니 미끼라는 얼굴 하고 있군.」
「에?」
이유를 몰라 되묻자, 제이드가 신입의 몸에 팔꿈치를 먹였다.
「아아, 미안미안.」
신입이 웃는다. 이어 제이드의 입술 끝이 부드러워진 것을 본 서필의 머리 꼭대기로 열이 치솟았다.
(이 녀석… 나의 제이드를!!)
수업이 시작되었다. 서필은 어쩔수 없이 앞을 바라보았지만, 뒤가 신경쓰여서 견딜 수 없었다. 가슴이 따끔따끔 쑤신다. 노트 마지막 페이지에「프란츠 바보, 왕바보」라고 마구 휘갈기고서나서야 마침내 조금 가슴이 후련해진 기분이 들었다.
**
「같이 가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필은 튀어올랐다.
「누, 누가 너같은거랑… 나는 제이드랑!!」
서필이 돌아보자마자 신입을 노려본다. 수업이 끝난 교실에는 세사람 외엔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함께인데?」
제이드의 말에 서필이 당황해서「자, 잠깐만!!」하고 밖으로 나간다.
「뭐야, 저녀석.」
「화장실. 긴장한거야.」
제이드는 웃고난 다음에 질문했다.
「피오니. 물어볼거라고 생각하곤 있었겠지만, 프란츠라는거 어디에서 나왔어?」
「아아, 내 형님 이름. 정비 소생이야.」
「그럴꺼라고 생각했어.」
제이드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네비림이 교실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어라, 아직 있었네.」
「서필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 녀석 한번 화장실에 가면 오래걸리니까.」
그래? 하고 네비림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러고보니, 프란츠.」
신입 소년에게로 돌아선다.
「너, 어디에 살고 있니?」
「여관이나 지인집에서요.」
피오니는 미리 맞춰놓은데로 답했다.
「제대로 된 주소는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아버지의 편지에 쓰여있었는데 무언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 정말로 정중한 편지를 받아서 말이야…, 그럼 됐어.」
네비림은 소년의 아버지로가 보내온 편지를 떠올리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업차로 이 마을을 찾는다고 하지만 케세도니아 상인이 어째서 이런 작은 학교를 알고 있는지가 의아스럽긴했지만, 소년에게 물어봤자 소년이 알리 없겠지.
「아아, 그렇지. 수업료라는게 필요하지.」
피오니는 바지 주머니를 부스럭부스럭 뒤지더니 금실로 수놓여진 돈주머니를 꺼내고서 책상위에 놓았다.
「이것은? 어머나!」
주머니 내용을 들여다본 네비림이 놀라움을 표했다..
「이만큼이나 있으면 집을 살 수 있을 정도야. 어떻게 이런 큰 돈을…」
「어떻게라고해도…, 나는 용돈 같은거 받아도 쓰지 않으니까, 돈이 쌓여요.」
쓸 장소가 없으니까, 하고 제이드는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이런 거금, 갖고 오면 안돼. 수업료는 양친과 만나고나서 이야기할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때 서필이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렴. 서필은 집으로 가다가 다른 곳에 들리지 마.」
「저기,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서필은 제이드를 올려다보았다.
「프란츠의 집에 대한 이야기야.」
「후으응. 나랑 같이 돌아간다고 해도, 방향이 다르지 않아?」
「그게 딱하니 같은 방향이야.」
피오니는 히죽하고 웃어 보였다.
「에? 딱하니라니, 무슨 뜻…」
「글세. 그것보다도 너, 피오니 황자의 저택에 침입했다고 했지? 지금쯤 화내고 있겠구나~, 황자님.」
「………」
「흐, 흥. 피오니같은거 어차피 일생 감금 당한채 사육당하는 개, 그런 황자잖아. 나한테 무슨 짓 하려려고해도, 무리야!」
말을 돌린데다가 민감한 화제까지 밀고 들어오자 서필은 허세를 부려보였다.
「사육당하는 개인가,」
피오니는 바닥을 다지듯 걸으며 밖으로 나갔다. 눈 앞에는 낮게 깔린 하늘이 펄쳐져 있다.
저택의 창으로 볼 수 있는 도려내어진 작은 하늘과는 다르다. 가로막는 것 하나 없는, 진짜 하늘이었다.
「슬슬 돌아가야 돼.」
제이드가 말했다.
「황자는, 낮에 깨어나 있지?」
「아, 그랬지.」
피오니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서필, 내가 버린 마물은 그대로지?」
「당연하지. 쓰레기를 버리는게 나라서 다행이야, 제이드. 눈으로 덮어서 숨겨놨지만, 그런거 엄마에게 들키면 졸도하실껄. 그런데, 왜?」
서필은 제이드의 물음에 답한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뚜껑이라서 말이야.」
제이드는 답했다.
**
「피…, 피오니 우파라 마르쿠트? 거, 거짓말….」
서필은 눈 앞의 프란츠를 가리키며 신음했다. 네이즈가의 정원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헛간이 있고, 그것은 편리하게도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은 곳에 있다.
「왜냐면, 황자는 감금 당해있고… 그러니가, 그렇게 경비하는 군인아저씨들도 있어서, 나는……」
「거짓말이 아냐. 나한테 비밀 통로― 이 터널을 만들도록 시켰지.」
제이드는 그렇게 말하고서 쓰레기장 끝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작은 둔덕을 만든 마물을 발로 걷어 치운다.
「만들도록 시켰다니, 남 듣기 나쁘게.」
「협박했잖아.」
제이드는 피오니에게 말하고서 지면에 뻥하니 뚤린 구멍을 서필에게 보여주었다.
「우와아, 진짜!! 도대체 어느새…. 이거 어기로 이어진거야?」
「내 방 난로.」
「그래도, 어떻게? 왜냐면 여기서 저택까지 상당히 멀잖아?」
서필은 검은 구멍을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목소리가 울리는걸로 봐서, 구멍은 그렇게 깊지 않은 지점에서 옆으로 꺾인 있는 모양이다. 출입구는 좁지만, 안은 상당히 넓은 것 같다.
간단해, 하고 제이드가 답한다.
「요소요소에 보업(普業) 장치를 설치하고서, 순서대로 기폭시킨거야. 전부 다 그렇게 하는건 큰일이니까, 도중에는 기존에 있는 하수도와 연결했어.」
「굉장해!! 제이드!! 나, 전혀 소리라던가 눈치채지 못했어!」
「그건 네가 바보니까 그렇지.」
제이드가 화를 참듯이 말한다.
「다만, 어젯밤 이쪽에서 가보고 눈치챈건데, 빠져나가기 힘든 곳이 몇갠가 있어.」
그는 터널 안에 숨겨 둔 꾸러미를 꺼내고서 서필에게 건넸다.
「뭐야, 이거? 휴대용 음소등(音素燈)이랑…… 지도?」
「아아. 뒤를 부탁하지, 서필.」
피오니가 서필의 어깨를 두드린다.
「조금만 더 남은 흙을 퍼내면 옷을 더럽히지 않고 다닐 수 있어. 곱게 사육당하는 개가 진흙이 묻어 있으면 이상하잖아? 」
「…미, 미안해. 사육당한다거나 말해서. 그래도, 내가… 파내는… 거야?」
「물론. 왜냐면 여기, 너희 집이잖아.」
「그래도…….」
서필은 음소등을 꽉하니 쥐고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싫다면 괜찮다는거지? 일가 나란히 수용소로 보내도.」
「자택의 뜰에서 굴을 파고 있었다, 변명의 여지도 없겠지.」
제이드는 방긋방긋하고 있는 피오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뭐야, 둘이서. 삽 한자루로 파면 얼마나 걸릴지 몰라.」
서필은 쓰레기 위에 무릎을 꿇고, 다시 검은 구덩이을 들여다본다.
「하수도까지만 나가면 마을 안 좋아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구. 배가 고프면 다른 별장 주방으로 나가는 것도 좋고, 카지노의 초호화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도 좋고.」
「우, 웃기지마!!」
고개를 든 서필은,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 피오니를 쏘아보았다.
「소, 손으로 파는거 싫어! 삽을 어떻게해서 자동회전굴착기를 만들어 주겠어! 그리고, 어두워도 쬣금도 무섭지 않게 비접촉형 체온감지 음소등을 조립해서, 잔뜩 설치해주지! 손에 들고 가지 않아도 편해! 그리고 다음엔 출입구에 패스워드식의 자물쇠를 달아서 만일의 때라도 우리들 외엔 지나갈 수 없도록 해주지! 후으응, 바보!! 바보!!! 」
어느새 열의를 띈 서필의 눈에 피오니가 속삭인다.
「어이, 어젯밤 네가 난로 안에서 나타난 것에도 깜짝 놀랬지만, 이녀석도 굉장한걸. 바보였던게 아니었어?」
제이드는 고개를 가로젓고서는 입을 열었다.
「바보야.」
**
터널을 통해 빈번히 마을로 나올 수 있게 된 피오니는, 제이드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네비림은 프란츠의 양친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조바심을 태우는 모양새였지만, 그 편지가 사실 제이드가 필적을 달리해 쓴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것 같았다. 이윽고 피오니는 적은 시간이긴하나 제이드의 집까지 직접 찾아오게끔 되었다.
「자, 이거 줄께. 하수도에서 잡았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피오니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쥐를 제이드에게 던진다.
「서필한테 들은거긴 한데, 동물을 모은다며?」
「고마워.」
「그런데, 너 말야, 정말로…….」
「뭐?」
제이드는 필사적으로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치는 쥐의 머리를 나무망치으로 정확히 내려쳐 쥐를 기절시켰다.
「죽이는거냐? 복제를 만드는거야?」
「양쪽다.」
그것을 듣자 피오니는 바닥에 퍼질러 앉고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녀석, 내가 터널을 지날때마다 마물 시체랑 떡하니 마주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도 안하는군)
「나, 매일 그 저택에서 혼자였을 무렵, 또 하나의 자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내가 밖으로 나가서 놀고 있을때, 녀석은 저택안에 있는거지. 나는 자유.」
「그거, 좋겠네.」
제이드는 축늘어진 쥐를 자루에서 꺼내고, 책상위에 뉘였다.
하수도에서 활동하고 있어서인지 잔뜩 영양을 섭취한걸까, 재색의 모피는 매끄럽고 아름다웠다.
「그래도 그거는 공상이잖아? 정말로 그런게 되면 곤란하지.」
「………」
제이드는 피오니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쥐의 심장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두근두근하고 고동소리가 전해진다.
「이론 상으론 같은 포니움 진동수를 가진 복제를 만들 수 있어. 피험체에서 정보를 뽑아내고, 그걸로……. 그래도 잘 안돼, 아직――.」
갑자기, 쥐가 괴로운듯 신음을 올렸다. 제이드를 보고 있던 피오니는 그 눈이 피처럼 붉게 보인것 같아서, 황급히 눈을 피했다.
「내가 제 7음소술사(세븐스 포니마)였다면, 분명 잘 됬을텐데―」
무거운 소리가 들렸다.
피오니가 벌떡 몸을 일으키니, 쥐 바로 옆여 재색 모피로 둘러쌓인 둥근 고깃덩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쥐와 닮아 있지만, 다른 것이다.
(뭐야…!? 이게 복제?!)
격하게 경련하던 그것은 이윽고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쥐는…? 어떻게 된거야?」
「벌써 죽었을거라고 생각해. 정보를 뽑아내면 언제나 그렇게 되지.」
피오니는 치밀어오르는 토악질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제이드의 어깨를 흔들었다.
「제이드. 너, 어째서 이런 짓 하는거야?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이런걸 보면 나…」
「아. 피험체―오리지널, 죽었네.」
「네비림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싶은거야? 선생님을 좋아하니까? 연상 취향?」
그러자 제이드는 웃기 시작했다.
「나는―――」
「뭔데.」
제이드는 피오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제 7음소술사라고 해도 그리 간단해 해낼 수 없는 것을 하고싶은거야.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제이드…….」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해도 경계가 그렇게나 엄중한 저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침입하거나 하거나,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걸까.
(나같은 평범한 사람은 모른다라는 건가)
「뭐, 됐어. 어쨌든 이제부터는 네가 아니라 네프리에게 선물을 갖고 올꺼야. 그 얘, 진짜 귀엽더라. 천사같아.」
「그건 상관없는데, 저택에 들키지 않도록 해. 밖으로 나오는데 막 익숙해졌을때가 위험해.」
제이드는 피험체와 고깃덩이를 아무렇겐 자루에 쑤셔 넣고서, 피오니에게 건넸다.
「덤으로 서필 집에 가서 버리고 와줄래?」
「형님은 악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피오니는 스스로가 제이드에게 강하게 이끌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동시에 막연한 불안을 느낀다. 서필이나 에라이아스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볼때, 제이드는 기분 나쁠 정도로 감정의 흔들림이 없다.
어린시절부터 감금당하며 살아온 피오니는 냉정함이란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이해하고는 있지만 제이드의 경우는 어떨까. 매일 계속되는 실험.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것을 상상하면 몸이 떨릴것 같다.
이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면 좋을텐데.
**
세사람만의 비밀이었던 비밀 통소가 겔다 네비림에게 발견된 것은 몇 개월후의 일이었다. 발단은 몽드 아놀드가 갑자기 그랑코크마로 이사를 가게 된 것. 본처가 병사하자 몽드의 부친은 친정으로 돌아가 있던 몽드의 모친을 불러들이기로 한 것이다.
네비림은 원래부터 아놀드가의 의뢰를 받아 케테르부르크로 돌아온것이기 때문에, 그때까지 수도의 교육기관에서 내려오는 연구를 받아 들이지 않고 있었지만 이것을 기회삼아 정식으로 사립 학교 등록을 신청했다. 그렇게하면 수업에 필요한 서적이나 교자재 구입이 훨씬 편해진다.
국가의 입장으로 보면 마르쿠트 전역에서 우수한 아이를 각 기관에 보내는데 큰 도움이 되는 제도였다.
「모두, 다음 수업엔 그랑코크마에서 수업을 시찰하러 사람이 오는데 말이야.」
「시찰이라는거 뭐야? 국가 관리가 오는거야?」
네비림의 말에 마틸다가 물었다.
「맞아. 그래도 너희들은 평상시처럼 공부하고 있으면 돼.」
「무섭지 않아?」
「무서워 할 거 없어, 네프리. 그저 시시한걸 물어보거나 할지도 모르겠지만.」
교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네비림은 아이들― 몽드가 빠져서 다시 여덟명이 된―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 말을 꺼내려던 순간,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서필과 브란츠가 새파래져있다. 제이드를 보니, 딱딱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오늘은 이걸로 끝. 조심해서 돌아가렴.」
네비림을 그것을 모른채하며 웃어보인뒤, 바로 사실로 돌아가는척 했다. 지나온 복도를 돌아가. 교실의 상태를 엿본다.
예상대로, 제이드나 서필, 프란츠만이 남아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분명 들킬꺼야.」
서필이 울음 섞인 소리를 냈다.
「확실히 얼굴을 보여주는건 곤란해. 나를 알고 있는 녀석이 있을거라곤 생각하진 않지만.」
프란츠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네비림은 귀를 기울였다.
「걱정하지마.」
제이드가 낮게 말한다.
「잠시동안 여기에 안 오면 되잖아.」
「음, 그건 그렇군.」
「저기, 저기저기. 만일을 위해 패스워드를 바꾸자. 피오니의 쪽의 문 패스워드, 바꾸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혼자 할 수 있지?」
(피오니? 피오니…… 저택이라는 건 설마…)
네비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세사람이 밖으로 나간다. 그녀는 살그머니 뒤를 쫓기 시작했다.
「너희들!!」
네비림이 말을 걸자, 아이들은 일시에 팟하고 얼굴을 드렀다. 마침 터널의 문을 열던 참이었다.
「네, 네비림 선생님……!」
서필의 목소리가 돌아온다.
「놀랐어…라기보다는, 질렸는데. 프란츠, 이것은 어디로 향해있지? 네 부모님이 계시다는 케세도니아? 그렇지 않으면 피오니 우파라 마르쿠트가 유폐되어있는 저택일까나?」
「!!」
서필과 제이드의 몸이 굳었다.
「뭐야….」
피오니는 어색하게 웃었다.
「벌써 들켰잖아. 뭐, 그래도 선생님. 내가 이녀석들을 협박해 시킨일이야. 그러니까 군에는…」
「군에는 아무 말도 안해, 프란츠.」
피오니 황자에게는 확실히 형만으로도 둘이 있다. 네비림은 그것을 떠올려내고 있었다.
왕위계승은 절망적이다. 자칫 섯부른 짓을 하면 일생동안, 자유를 빼앗긴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아이는 도대체 어떤 심경으로 이런 큰 위험을 무릅 쓰면서까지 밖으로 나오는 걸까…)
가당찮은 짓을 하려하는 자신이 무서웠지만,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잠시 동안… 학교에는 오면 안돼.」
조용한 어조에, 피오니의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제이드.」
「네.」
네비림은 제이드를 바라보았다.
「아마, 가까운 시일내에 시험이 있을꺼야.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국가가 교육기관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 전원에게 장려하고 있는거야. 힘내렴.」
「알겠습니다….」
그녀는 제이드도 역시, 여기서 좀 더 넓은 바깥으로 나가야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나는 돌아갈께. 내일 학교에서 봐.」
네비림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사하고서 서필의 집을 힐끔 보았다. 창가에 사람의 그림자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발걸음을 빨리해 뜰을 나서 밖으로 나갔다.
「아아, 깜짝 놀랐네.」
피오니는 안도한듯 가슴을 쓸어내린다.
「어째서 우리들을 꾸짖지 않은거지?」
「네비림 선생님도 우리들과 놀고 싶은거야. 머랄까, 그런 얼굴 하고 있지 않았어? 분명 그럴꺼야!」
서필은 흥분한듯 눈덩어리를 뭉치며 말했다.
「굉장해! 어른도 지나갈수 있게, 구멍을 좀 더 넓힐까?」
「그만둬.」
제이드가 쌀쌀맞은 태도로 서필을 가로 막았다.
「우리들은 굉장한 책임을 져버린거라구.」
「그렇군….」
「뭐, 이걸로 선생님에게 숨기는 일은 없어졌잖아. 솔직히 기분은 좋네.」
피오니는 동의를 표했지만 이내, 바로 평상시의 기세로 돌아오고선, 서필이 뭉치고 있던 눈덩어리를 들어 올리며 웃는다.
「피, 피오니. 돌려줘.」
「그래? 그럼 돌려주지.」
「우와아, 푸훗.」
뭉친 눈덩어리를 서필의 머리 위에서 깨트린 뒤 피오니는 돌아갔다.
「무슨 짓이야!」
제이드도 작별 인사를 하고, 귀로에 들었다.
(선생님은 어째서 그렇게 쉽게 용서해 준거지…)
생각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흥미는 용서받은 이유보다도, 네비림 자체로 옮겨졌다. 스스로도 기묘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녀는 어딘가 피오니와 닮아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한번은 포기하고, 손놓을 수 밖에 없었던 자만이 가진 도량이 그녀에게도 있다.
제이드가 알고 있는 거라곤 네비림 선생이 과거 다아트에 있었던 힐러라는 것 정도 뿐.
(선생님은 도대체 어떤 인생을 보내온걸까―)
정신차리고 보니 이미 집 앞에 서있었다.
**
그 이후 약 2년간이 제이드 바르포아에게 있어서 가장 아이다운 생활을 보낸 시절이었을 지도 모른다. 겔다 네비림의 이해를 얻었기 때문에 피오니는 다시 학교로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 서필은 피오니 때문에 자신과 제이드가 이야기하는 기회가 줄어드는 것에 대해선 분해하고 있었지만, 황자가 있으면 제일제일 좋아하는 제이드 때때로 웃는 얼굴을 보여준다. 불만이나 미움은 언제나 그렇듯 노트에 휘갈기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다.
그가 결정적으로 피오니를 싫어하게 된 것은 썰매타기를 했던 때였다.
극히 드물고 겨우 두 세번에 지나지 않지만 소년 셋이서만 놀러 나간 적이 있다.
설산에 갔던 것은 서필과 제이드가 11세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케테르부르크의 북서쪽을 통해 오를 수 있는 산은 로닐 산맥 계열이긴 했지만, 고도는 낮고 쌓인 눈의 양도 그저 그랬다.
「과연. 여기가 제이드의 사냥터인가.」
썰매를 짊어지고 있던 피오니는 몹시 감탄한양 고개를 끄덕여댔다. 눈앞에는 눈이 내린뒤에 흔히 볼 수 있는 새하얀 색 일색인 세계가 펼쳐져있다.
「마물이 알을 낳는 시기에 가끔 올 뿐이야.」
「그래? 눈 같은건 옛적에 익숙해 질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름답군.」
완만한 능선을 바라보며, 피오니는 미소했다.
「그렇다쳐도…, 눈산이라는거 추운걸.」
「그런 얇은 옷을 입고 오니까 당연하지.」
서필이 질린 얼굴로 말한다. 드려내어진 피오니의 발은 새빨갛게 변해있었다.
「썰매에 타는 게 좋아. 저택에서 사는데 동상에 걸리다니, 변명도 못하겠지.」
「과연. 여기서는 단숨에 밑까지 내려가자!!」
피오니는 썰매를 바닥에 놓고, 휙하니 올라탄다. 그리고 서필을 손짓했다.
「에에에에?? 나보고 밀라는거야?」
「너, 피해망상이 지나치군. 뒤에 타.」
「뭐야, 그런거였구나….」
서필은 피오니의 뒤에 탄다.
쓴 웃음을 지으며 피오니와 눈을 마주한 제이드는 맨 뒤에 앉았다. 썰매는 경쾌하게 경사진 면을 내달리기 시작한다.
「어라?!」
피오니가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무, 무슨 일이야, 피오니?!」
서필이 깜짝놀라 앞을 보려 했지만. 앉은키의 차이가 지나치다.
「아니, 뭔가 큰 그림자가 이쪽으로… 그래도 사라졌어.」
「마물일까나.」
머리를 나부끼며, 제이드가 불안한듯 입을 열었다.
「분명 눈에 몸을 감추고, 지금쯤 이 썰매밑에…, 이에티일까… 그렇지 않으면 아이스 리자든.」
흔들하고 달리던 썰매가 흔들렸다.
「우와아아아!!.」
서필이 비명을 올린다.
「저어기, 마, 마물, 어디야?! 어쩌지, 제이드?!」
「그러니까 이 밑이래두. 봐, 썰매를 부수고 서필의 잡을 움켜잡으려고 하고 있어.」
제이드는 두 손으로 썰매를 흔들흔들 흔들며, 뒤에서 슬며시 부츠로 서필의 발을 눌렀다.
「히야아아야아아아!!」
치밀어 오른 공포에 서필은, 썰매에서 뛰어내린다.
그는 의외다 싶을 정도로 높이 뛰더니, 바위 그림자에 불어 쌓인 눈덩어리에 머리부터 쳐박혔다.
「어이, 서필!!」
놀란 피오니가 황급히 썰매를 옆으로 기울여 세웠다.
「제이드, 너 얘를 넘 겁준거 아냐?」
「피오니의 말에 맞춰 준 거 잖아.」
「에.」
피오니는 바람에 날려 쌓인 눈덩어리 쪽의 경사진 면을 올라가며, 중얼거렸다.
「나, 정말로 봤는데….」
제이드도 눈을 밟아가며 서필이 쳐박힌 눈을 향했다. 반쯤 파묻힌 친구는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이 녀석, 상냥히 일으켜 세워 달라고 전신으로 호소하고 있어.」
피오니가 속삭인다. 두사람은 얼굴을 맞추고서, 히죽하고 웃는다.
「어이, 서필. 어디야? 전혀 못 찾겠어!! 계속 숨어있지 말고 나와!!」
「이거 곤란한데. 못찾겠어~!」
제이드와 피오니는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말을 맞췄다.
「어쩔 수 없으니까, 돌아갈까, 피오니?」
「그럴까?」
그러자, 눈에 파묻혀 있던 서필이 굉장한 기세로 일어선다.
「나, 숨어 있던거 아냐!! 조금전부터 여기에 있잖아! 정말이지, 빨리 안 도와주니까 죽는 줄 알았… 에, 에취!!」
성대하게 재채기를 한 순간, 콧물이 흘렀다.
「너무해, 두사람 다…. 우, 우우으… 우에에…」
눈 투성이로 울기 시작하는 서필의 콧물은 점점 더 길게 늘어진다.
「그러고보니 제이드. 너 요전의 시험에서도 수도 애들을 누르고 일등이라고 했지?」
피오니가 문득 물었다.
「갑자기, 뭐야.」
「너를 나의 마르쿠트가 자랑하는 수재라고 인정하고 묻는다. 인간을 구성하는 성분은, 사람마다 다른건가?」
「아니, 그렇진 않아.」
제이드는 답했다.
「후으응. 그렇지만 이 녀석은 분명히, 콧물로 되어있다구. 계속 계속 훌쩍, 훌쩍, 훌쩍!」
피오니는 서필을 손가락질하고서 큰소리로 웃었다. 서필은 명백히 상처입은 표정으로 제이드를 향해 손을 내민다.
「코, 코 닦는 휴지 좀.」
「안 갖고 있어.」
「손수건….」
「네 옷으로 닦아, 코찔찔이.」
피오니의 단호한 말에 서필은 으앙하고 울음 소리를 올렸다.
「피오니 같은거 미워!! 저주할꺼야!!」
「할 수 있음, 해봐. 랄까, 저택에 감금된 내가 이 썰매를 준비하는데 얼마나 힘들지 생각도 못해? 즐거운 놀이가 완전 엉망이잖아!」
서필이 피오니를 와락 끌어 안았다.
「우엣!! 콧물 닦지마!!」
제이드는 눈투성이가 되어 뒤엉켜 있는 두사람의 친구를 멍청히 바라보고있다, 이윽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튼 이쪽이고 저쪽이고.」
도대체 어느새 얼굴을 드려낸걸까, 태양이 피오니와 서필의 주위로 흩날리는 눈을 비추고 있다.
흡사 거기만이 빛에 둘러 쌓인 모양새다.
제이드는 홀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려난 붉은 보석(譜石)을 통해 보이는 태양은 약하게 일그러져, 다시 바로 구름뒤로 숨어 버린다. 피오니와 서필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자, 눈은 조금전 같은 광채를 발하지 않았다.
몸 속에 비축해둔 힘이 급속히 사라지는 것 같은 기이한 감각이 끓어 오른다. 이런 시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진 않겠지―하고 제이드는 생각했다.
균형이 깨졌다고 하면 피오니 역시 마찬가지다.
12세가 된 제이드는 생각하고 있었다.
비밀 통로인 터널의 존재, 거듭되는 왕자의 부재, 이러한 것들이 아직도 발각되지 않는 것은 행운이라던가 우연이라기보다 기적에 가깝다. 그리고 앞으로 단 한번 실패해버린다면, 평온한 날들을 영원히 잃게 되는 것이다.
제이드는 제 7 음소에 관한 논문을 정리해, 막 초진동이나 포미크리 연구의 최초의 문에 손을 댄 참이었다. 서필은 음기관이나 보업(譜業) 분야에 본격적으로 흥미를 보이고서, 네비림의 지도하에, 매일 무언가의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제이드 바르포아와 서필 와이욘 네이스의 이름은 차츰 케테르부르크의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이러한 두사람의 수재를 낳은 겔다 네비림에게 입학 희망자가 여러차례 찾아오고 있었다.
**
종말은 갑작스럽게, 그리고 의외의 형태로 찾아왔다.
그 날, 피오니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제이드와 서필은 수업이 끝나고 네비림의 방으로 가서 서재에서 골라낸 책을 읽고 있었다. 서필은 이윽고 방 구석에 설치된 작업대 앞에 서서 작은 음기관을 만드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등지고 독서에 열중하고 있던 네비림은 문득 제이드의 낮은 목소리를 들었다.
(진기한 일이네, 제이드가 소리를 내서 책을 읽다니)
책을 읽을 있겠지하고 네비림은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잠시 뒤 그녀의 손에서 펜이 굴러 떨어졌다.
「!!」
돌아본 순간, 그녀는 외치고 있었다.
「안돼!! 그것은 제 7음소의!!」
소년은 보(譜)― 주술을 영창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보안(譜眼)을 갖고 있고, 훈련을 쌓았다고 해도, 천성적으로 소질이 없는 사람은 제 7음소를 제어할 수 없다.
「제이드, 그만둬!!」
다시 절규하는 네비림의 눈에, 서필의 놀란 얼굴이 일순 비쳐졌다.
그녀가 달려가는 것보다 빠르게, 제이드를 둘러 싼 공간이 변화했다.
그것은 격하게 굽이치며 굉장한 힘으로 네비림을 압도한다.
「제, 제이드!!」
제이드와 시선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보술(譜術)은 발동했다.
크게 뜨여진 눈은 붉게 타오르고, 한계에 이르러있던 안경은 산산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꺄아아악!!」
제이드는 포효하듯 일렁이는 불꽃이 네비림을 집어 삼키고, 뒤 이어 방 안을 뒤덮는 것을 망연히 보고 있었다.
「선생님!! 네비림 선생님!!」
서필이 외친다.
「제이드! 빨리 누군가를 불러야돼!! 저기, 제이드!!!」
서필이 격하게 어깨를 흔들며 부르짖었지만. 제이드는 그 자리에서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나는――)
**
「제이드!! 제이드!!」
궁지에 몰린 목소리에 핫하고 정신을 되찾고보니 서필의 얼굴이 보였다.
탄내가 코를 찌른다.
「!」
제이드는 기억에 없는 정경에 이끌린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헛간이야. 학교에 올 때 언제나 앞을 지나가야 되는 집의. 제이드는 선생님의 방에서 쓰러져서… 불을 끄러 온 근처 사람들과 군인아저씨들이 날라다 줬어.」
서필의 그을린 뺨에는, 몇줄기의 눈물자국이 보였다.
(네비림 선생님?!)
화염에 둘러싸인 순간의, 그 비명이 뇌리에서 되살아난다.
「…」
서필은 말없이 헛간 구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기에는 인간의 형상과 같은 천꾸러미가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다. 희미하게 더럽혀진 천에서는 타버린 금발같은게 엿보였다.
「마침 힐러가 있어서… 도와준다고는 말해줬지만… 이 이상은 무리래…. 불…, 불을 끄는게 먼저니까… 불길이 번지면 큰일이라고…, 그래서….」
「죽었어?!」
제이드는 서필의 머리를 잡고, 얼굴을 끌어 당겼다.
「모, 몰라!! 조금전엔 움직이고 있었어.」
서필은 입술을 떨면서, 비난조로 외친다.
「어, 어째서! 어째서 그런 보술을 쓴거야!! 평범한 사람이 제 7음소같은거 다룰 수 있을리 없잖아!」
「아냐!」
제이드는 무심코 반발했다.
「나는, 평.범.한 사.람. 같은게 아냐. 음소학 책을 읽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조금 전엔. 할 수 없을리 없지…, 실험해 보고 싶었어!」
「무슨 말을 하는거야, 제이드! 이제 어쩌지…」
「울지마!!」
서필을 뿌리치고서 제이드는 네비림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서, 선생님….」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 끝을 걷어 올린 순간, 제이드는 어째서 이런 꼴로 그녀가 눕혀져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이, 그 매끄럽던 피부가, 타 문드러져 있다.
(네비림… 선생님.)
그러자 제이드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그녀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
「선생님! 지금 뭐라고…!!」
되물어 보았지만 입술은 아무리 바라봐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이드는 고개를 들고, 헛간의 벽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서필, 선생님은 아직 숨을 쉬고 계셔. 누군가가 돌아오지 않는 새에, 아직까지라면….」
「제이드――?」
무슨 말을 꺼내는걸까하고, 서필은 의아한듯 친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복제를 만드는거야. 원래의 예쁘고 우아한 선생님의…, 그렇게 하면 모든게 어제까지와 똑같아.」
「제이드?! 그럼, 안돼!」
「그럼, 어쩌면 좋지? 이대로도 괜찮은거야?」
「싫…긴 하지만, 그래도, 그거 포미크리…잖아? 제이드, 논문에 써있었잖아. 제 7음소 없이 살아있는 생물의 복제―레플리카를 만들기는 어렵다, 라고.」
서필은 고개를 가로젓고서, 말을 지었다.
「보술로 어떻게든 한다. 나라면 할 수 있어. 너는 밖에서 망을 봐.」
그리고 제이드는 그 이상 서필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요. 마지막 찬스라고 생각할테니까…, 인정해 주시는거죠?)
옅은 호흡을 반복하는 빈사의 몸을 내려다보고, 정보를 뽑아낸다. 피험자― 오리지널은 그때 잠시 경련을 한번 일으켰을 뿐이었다.
**
― 이윽고, 제이드와 서필은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새로운 육체를 보았다. 어슴푸레한 헛간 안에 스며들듯한 새하얀 빛을 발하는 그것은, 천천히 고개를 들

었다.
(해냈다, 해냈어! 선생님이야……!)
염려가 있었다고 한다면 안경없이 힘을 제어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뿐. 전례가 없었던 것 뿐, 해보니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제, 제이드!」
「시끄러워.」
달라붙는 서필을 뿌리치고서, 제이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선생님…?」
은발이 찰랑찰랑 흘러 내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소년들은 심장이 멈출 듯한 충격을 받았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엿보이는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가 이쪽을 쏘아보고 있다. 흘러떨어지는 핏빛의 입술 사이로 귀에 거슬리는 숨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
윤곽은 확실히 겔다 네비림과 똑같았지만, 그녀가 아니었다. 옅은 피부 너머로 조직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인간조차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갑자기― 헛간이 흔들릴 정도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낸다고 생각했더니― 헛간을 뛰쳐 나갔다. 순간적인 일이라 제이드와 서필은 잠시동안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얼마 정도 그러고 있었을까. 반쯤 열린 헛간의 문에서, 누군가가 뛰쳐 들어왔다.
「오빠!!」
그것은 화재에 대해서 듣고 뛰쳐온 네프리였다.
「자, 잘됐다! 무사했구나…, 나, 지금…!」
「네프리, 무슨 일이야?」
제이드는 다시 한번 서필을 때내고서, 창백해진 여동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저기서 네비림 선생님이랑 엇갈려 지나쳤어……. 그치만 그거 선생님이 아니지?」
그녀는 이를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런 괴물…, 그것은…, 저기, 오빠. 선생님은 어떻게 됬어?」
「네 옆에 있어.」
「히이익!!」
제이드가 가리킨 천꾸러미를 보고, 소녀는 목 안쪽 깊은 곳에서 소리를 쥐어짜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 그제까지 침묵하고 있던 서필이 제이드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제이드. 한번 뽑아낸 정보는 확실히 몇 번이라도 쓸수있지…? 그러면…,」
「……」
「그럼, 나랑 같이 다시 한번….」
「시끄러.」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마침내 제이드의 귀에도 닿았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이 화재를 진화한 것에 대한 안도인지, 괴물을 목격해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건지 판단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실패하다니…, 그런 수가…)
헛간의 주인이 상태를 보러 올때까지, 제이드는 이를 깨물고 꾸욱 고개를 숙인채로였다―.
**
「이거이거.」
난잡한 방안에서, 피오니 우파라 마르쿠트는 일어섰다. 그 기세로 산처럼 쌓여있던 사과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제이드…, 지금은 카티스였지?」
「네.」
군복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며,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아직도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도중에 끼여서 돌아설 각오까지 하고 들어온 것입니다만,」
「난로에 불을 피우지 않고 기다리고 있어줬다고.」
「그거 감사하군요.」
제이드는 발치까지 굴러온 사과를 하나 주워올리며 미소했다.
「여러가지 소식은 귀에 들어오지만, 양자로 가서, 잘나신 군인씨가 되다지?」
「네프리한테 들은거겠죠? 그러니까 터널도 확장되었고.」
「이야아~」
네프리의 이름을 들을 순간, 피오니는 쑥스러워했다.
「스무살이 지났는데도 빰을 붉히십니까, 남의 여동생에게 손대는것도 모자라 징그럽기까지하네요.」
「시끄러. 뭐야, 그 서먹한 말투는. 확연히 멋져져 갖고선.」
「그쪽은 전혀! 변하지 않았군요, 전하.」
제이드는 피오니의 맨발을 보고 방긋히 웃는다.
「됐고, 앉아. 도대체 몇 번이나 불러야 오는거야.」
투덜거리면서도 피오니는 소파 위를 치워준다.
「군대는 휴가도 변변찮게 취할 수 없다고 말은 했지만….」
「호드 일로 한창 북새통…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지금을 놓치면 당분간은 올 수 없다고 생각해서,」
과연하고 피오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나 평화로웠는데….」
「네, 그래도 그것은 나, 우리들이 어렸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것 뿐으로, 실제 어른들은 훨씬 전부터 골치를 썩고 있었겠지요.」
「변함없이 포옹력 있어 뵈는 소리만 지껄여댄다니깐.」
피오니는 울컥했다.
「그러면 어째서 ‘네크로맨서’같은 별칭을 갖게 된걸까나. 나를 만나러 올 순 없어도, 시체 사냥할 짬은 있는것 같은데.」
「서필같이 떼쓰지마.」
제이드는 무심코 옛날의 말투로 말하고서, 지금까지 겪어온 전장에서 갖고 돌아온 병사의 사체로 만든 복제들을 떠올렸다.
「뭐가 잘못된걸까,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날, 거기에 없었던 녀석은 모를거라고 생각해.」
「그렇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떤 네비림 선생님이 생긴건지는 들어 알고 있지.」
「네프리에게?」
「이야아~.」
피오니는 다시 콧소리를 냈지만, 다시 바로 뺨을 끌어 당겨 표정을 바로했다.
「너 혼자서 그걸 다루고, 앞으로도 쭉 그것을 관리할 거라면 좋아. 하지만 남의 손에 넘어간 끝에,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바뀔지도 모르지」
「……」
「그때 후회해도 나는 몰라.」
「돌아가겠습니다….」
피오니는 자리에서 일어선 제이드의 팔을 꽉하니 붙잡았다.
「잠깐. 나는 네 연구를 비난하는게 아냐. 그저, 자신의 실책을 잇는 자를 만드는 짓은 하지 말라는 거다.」
「그런 짓을 제가 할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제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건 시간이 넘쳐 나시는 누군가씨에게 부탁하고 싶네요.」
「네놈. 남의 걱정을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아하하핫하고 피오니는 웃어 보였다.
**
노엘이 손을 흔들며 서둘러 달라고 외치고 있다.
발치의 흔들림은 점점 더 격해지고 있었다.
― 그때 이후, 포미크리를 금기하는데 2년의 시간이 걸렸다.
제이드는 아르비올의 발판을 뛰어오르며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2년 동안, 망설이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허세도 부려 보았다.
(아무래도 알 수 없었지. 그때 선생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려 했는지.)
마지막에 말을 걸었을때, 그녀는 확실히 살아 있었고, 입술을 움직였던 것이다.
나이어린 제자 때문에 불타 죽었다. 물론 미련이 있었겠지.
하지만 과연 그것 뿐일까.
그 뒤, 화재 현장에 남은 책에서 자료에 이르기까지, 깔끔하게 긁어 가버린 것은 군이었다.
어째서 그들이 움직인건지, 제이드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비행정이 발진했다. 거의 동시에 대지가 추락을 시작해서, 둘 사이의 거리는 급격히 멀어져 간다.
겔다 네비림이 말하려 했던 말은, 결국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저주의 말이 아니었다면―― 제이드는 아득한 아래쪽에서 타오르는 저녁 놀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역시나, 다시 포미크리를 연구하게 되겠지.
단 한 사람의 레플리카― 루크에게서 등을 돌린 순간,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치루게 되었던 “휴식의 시대”는 끝을 고한 것이다―
제이드는 그것을 깨달았다.